당송변혁(唐宋變革)의 중심, 개봉(開封)사학과 2016111071 김경화목 차1. 서론3. 개봉(開封)1) 북송 이전의 개봉2. 북송(北宋)2) 새로운 수도, 개봉4. 결론1. 서론중국의 시대구분을 논함에 있어 중세와 근세의 경계를 정하는 일은 아직 학자들마다 의견을 달리하지만 당송변혁기(唐宋變革期, 750~1250)라 불리는 이른바 당에서 송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다양한 변화상들이 있었다는 점은 대부분 학자가 동의하고 있다. 특히 체제에 있어서 기존의 귀족층을 밀어내고 새로운 서민 사대부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농업의 발달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상업의 발달이 도시의 번영과 서민층의 성장을 이끌어내었다고 본다. 이러한 번영을 이끈 북송((北宋, 960~1127))의 수도는 개봉으로 금(金, 1115~1234)의 공격으로 천도하여 남송(南宋, 1127~1279)이 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수도의 권위를 지켜왔다.수도의 모습을 통해 그 시대의 중앙체제와 사회상, 그리고 외국과의 교역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연구는 많이 진행되어 왔다. 특히나 북송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수도 개봉이 교역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잘 해낸 까닭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송시대의 수도연구는 특히나 더 중요한 위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까지 북송에 대한 연구는 북송이 상업의 발전에서 온 부로 인해 사상과 학문의 발전이 두드러진 시기이기 때문에 학문의 발전의 배경을 밝히고 발전된 학문의 양상을 보고자 하는 것이 많았다. 이와 관련하여 개봉에 대한 연구는 당송변혁기의 경제와 상업 융성에 집중하여 북송의 문화를 대표하는 도시로써 많이 언급되었고 연구 또한 상업의 발달, 교육의 발전, 문화와 학문의 융성에 초점을 맞춰왔다.본 글에서는 앞서 축적된 연구에 기반해 당송변혁의 분기점이 되는 북송의 의의에 대해 재고찰하고 오대까지 주목을 받지 못하던 개봉이 장안과 낙양을 밀어내고 새로운 수도로 부상하게 된 계기와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한 북송의 사회상의 모습에 대해 연구. 이처럼 중앙에서는 황제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지방 또한 황제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지방 통치 제도를 정비하였다. 지방관으로 통판(通判)을 파견하고 경제적인 요충지에는 전운사(轉運使)를 파견한 것이 그것이었다. 통판과 전운사로 감시를 강화하고 경비를 제외한 모든 재정을 상공(上貢)하도록 하여 지방의 재정 또한 황제가 장악하였다.태조가 976년에 승하하고 그 뒤를 이은 것은 송 태종(太宗, 939~997)으로 979년에 위대한 업적이었던 통일을 완수하기에 이르지만 여전히 연운 16주(燕雲十六州) 회복에는 실패하여 한계를 드러낸다. 이때 처리하지 못한 연운 16주 문제는 이후 요가 성장하며 1004년 전연의 맹(?淵之盟, 1004)을 통해 해결되는데, 이때 규정한 세폐의 내용인 은 10만 냥, 비단 20만 필은 송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기는 하지만 워낙 송의 경제력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요의 침략에서 온 피해에 비하면 괜찮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태종 또한 관리의 비행을 탐지하는 황성사(皇城事)를 설치하고 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주마승수(走馬乘受)를 설치하여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자 한다.송은 대외관계에 있어 연운 16주를 두고 요(遼, 916~1125)와 충돌하고 1038년에는 대하(大夏, 1038~1227)가 건국되면서 대하와의 외교도 신경써야만 했다. 대하는 송의 관제를 모방하여 빠르게 한 나라로서 자리잡고 비단길 요지를 점령하고 있었기에 동서무역의 차익을 이용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송이 대하와 평화를 거래하게 된 것은 송 인종 경력 4년에 경력의 화의(慶曆의 和義, 1044)로 일단락된다. 대하가 먼저 송과의 국교단절을 선언하고 일방적인 침략을 일삼자 범중엄(范仲淹, 989~1052)과 한기(韓琦, 1008~1075) 등을 파견하여 변방을 방어하고자 한다. 하지만 당시까지는 세력이 비슷하여 쉽게 결과가 나지 않아 이러한 애매한 전쟁상태가 7년동안 유지된다. 결국 장기적, 그리고 소모적으로 이루어진 교착상태 송이 대하의 신하元)대도(大都)북경(北京)명(明)남경(南京)→북경(北京)북경(北京)청(淸)북경(北京)민국(民國)북경(北京)북경(北京)장안형 도시는 장안뿐만 아니라 장안을 포함한 관중지역을 포괄적으로 중시하는 식이었고 관중은 진(秦)이 통일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지정학적 위치가 탁월했다. 관중은 이른바 천혜의 요충지로 불리고 국가방어라는 측면에서 수도로써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알았는지 진을 이어 한(漢)에서 수(隨), 당(唐)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중을 기반으로 나라의 명맥을 유지했다. 이에 반해 국가방어측면에서 개봉은 어떠한가? 개봉은 화북평원에 위치하여 육로와 수로가 발달한 곳에 있는데 이러한 지리적 위치가 장점이자 단점이 되었다. 장점은 여러 물자가 모이는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점이고, 단점은 사방의 적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방어기지 마련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점이자 단점인 개봉의 지정학적 위치는 국가방어보다 조운이 더욱 중시되었다는 국가전략의 변화를 보여주는데 아래에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1) 북송 이전의 개봉중국의 역사에서 많이 언급되는 도시들은 기본적으로 정치 혹은 군사적 중심지였다. 송 이전까지는 장안 혹은 낙양이 여러 차례 번갈아가며 수도로 지정되었는데 오대 십국(五代 十國, 907~960)로 들어서면서 기존의 장안이 밀리고 낙양 혹은 개봉이 번갈아 수도가 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주요도시의 변화에 대해서 장안, 낙양, 개봉으로 이동하는 것이 중국 전체로 볼 때 서쪽에서 동쪽으로 중국의 정치와 경제적 중심이 이동하는 모습이라 보기도 한다.개봉은 북송대 와서 처음 등장한 도시가 아니었다. 그 역사를 본격적으로 살피기 위해서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770~221)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춘추시대(BC 770~BC 403) 개봉은 정(鄭)의 변경지역에 속하며 ‘치평’으로 불렸다. 하지만 워낙 전쟁의 양상이 다양하고 국토의 변화가 심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한 국가에 속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주를 통해야만 했기 때문에 주전충이 이 지역을 장악한 이후 사실상 당(唐)도 주전충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주전충은 소종(昭帝)을 시해하고 아들 애제(哀帝, 892~908)를 옹립한 뒤 바로 왕위를 찬탈하여 후량을 세운다. 뒤이어 후진(後晉, 936~947)-후한(後漢, 947~950)-후주(後周, 951~960)가 차례대로 개봉을 도읍으로 삼는다. 비록 후당은 중간에 낙양으로 천도하여 완벽히 개봉이 도읍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5대를 이끈 왕조들이 모두 개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은 확실했다.2) 새로운 수도, 개봉개봉은 중국 허난성 북동부 황허강 이남의 평원에 위치해 있기에 있다. 평지라 함은 주위에 큰 산지가 없기에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좋은 위치로 볼 수 없다. 특히 당말(唐末)의 혼란스러운 시대에 전쟁을 대비할 수 없는 수도는 국가의 존망에 있어서 매우 치명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봉이 선택된 이유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송을 거치며 남쪽이 경제적 중심지가 되어 변하는 조운을 담당하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운송에서 큰 수익을 얻었다. 송부터는 개봉을 국방의 관점에서 보기 보다는 조운의 편리함에 더 무게를 실어 보았는데 조운을 단지 경제적인 의미만으로 중시한 것은 아니었다. 조운은 배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것을 말하는데 물론 경제적 교역이 주가 되긴 했을테지만 전쟁 수행 측면에 있어서 북방 군대에 양식과 물품을 공급하여 보급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했다. 이처럼 조운을 경제적 의미와 군사적 의미로 해석하고 개봉의 위치가 가지는 의의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점을 잘 이용했기 때문에 북송의 군사력은 비록 문치주의로 그 자체가 약화되었을 수 있으나 전쟁수행, 군수물품의 수송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없었다.개봉은 천혜의 요새라 불리는 관중과는 지리적 요건이 이질적이다. 개봉은 장안이 70만 인구를 가진 것에 비해 100만이라는 인구가 살고 있어 당시로써는 세계적으로 인구면에 있어서 손에 꼽히는 도시였다. 이처분할하는 통치방식으로 기본적으로 중앙의 소수 관리로 지방의 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장안의 주민은 중앙에서 통제하는 시간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데 낮동안 열린 ‘방’의 문을 통해 성문을 오가며 활동이 가능했지만 밤에는 문이 닫히므로 문이 닫히기 전까지 들어와야 했다. 하지만 방제가 무너졌다는 것은 국가가 그 안에 살아가는 백성들을 기존의 고대의 시각에 맞추어 통치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다 현실을 직시하며 일정 부분에서는 자유를 제공하는 모습을 통해 근대로 나아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때 말하는 ‘자유’라는 것은 한 개인에 대한 신체적 자유를 말할 수도 있지만 경제적 자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방장제가 폐지 이후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는데 이러한 당대의 사회상을 당대의 여러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개봉의 상업적 발달은 도시를 번성시켜 수도를 비롯한 성도(成都), 흥원같은 도시를 국내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시키고 해안가에 위치한 광주(廣州)나 천주(泉州), 명주(明州)는 국제적인 무역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무역이 잘 이루어지기 위한 자연적인 조건은 물자가 잘 모일 수 있는 곳에 위치여야 한다는 것이고, 인위적인 조건은 국가가 평화로운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외부의 침입을 받거나 내부적으로 정치가 불안정한 상태라면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교역하는 국가에서 물자확보가 어려워지고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북송이 요와 대하를 대할 때 제대로 싸워보지 않고 평화를 우선적으로 한 것이 어쩌면 국토를 보존하고 국고를 보전하는 것보다 한 수 앞서 바라본 것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말하자면 당장의 국고는 막대한 세폐를 지출하여 줄어드는 듯 보이나 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보면 교역으로 세폐를 지급하고도 남을 정도를 국고를 충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평화가 지속되면 국가의 교역지는 경제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풍부한 부를 바탕으로 한 문화가 번성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이 와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잘 담겨있다. 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