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마니아 서평-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와 오독의 역사를 중심으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기원후 55년경?~117년경?)는 로마의 오랜 속주인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의 기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타키투스가 태어난 시기는 대략 네로가 황제로 즉위한 해(기원후 54년)와 맞물렸다. 그는 일찍이 수사학과 문학, 웅변술과 법률을 공부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는 로마의 저명한 웅변가로 이름을 알렸다. 80년대 초에는 재정관(quaestor), 88년에는 법정관(praetor)과 15인 사제단의 일원이 되는 등 공직에 오르기도 했다.네로 황제 시기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폭정을 겪은 타키투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폐위 이후 본격적으로 저작하기 시작했다. 기원후 97년에 브리타니아 총독이었던 자신의 장인 아그리콜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저술한 『아그리콜라(Agricola, '아그리콜라의 생애' De vita Iulii Agricola)』를 시작으로 『게르마니아』, 『역사(Historiae)』와 『연대기(Annales, '신격화된 아우구스투스 황제 사후의 연대기' Annales ab excessu divi Augusti)』, 『웅변가들에 관한 대화(Dialogus de oratoribus)』와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타키투스는 무엇보다도 황제들의 절대 권력이 로마의 정치, 사회, 문화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하며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는 앞선 네로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폭정과 같은 로마 제정의 암흑기를 겪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에 따라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는 인물 묘사, 정치 분석 병든 로마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로마의 옛 영광과 순수함, 열정, 자유 미덕 등을 회상하기 위해 그는 라인강 동쪽에 있던 게르만족을 꺼내와 『게르마니아』를 저술하게 되었다.로마의 옛 영광과 순수함, 열정, 자유, 미덕 등을 회상하기 위해 저술한 타키투스의 저서는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는 다양한 이익집단에 의해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각 이익집단의 목적이나 관점에 따라 텍스트를 오독하고, 변형·조작하면서 독일인의 인종적 우월성, 순혈성의 근거로 이용되었으며, 급기야 인종차별주의, 민족과 민족정신, 게르만 신화 등 나치 이데올로기의 핵심 강령이 만들어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이에 띠라 본 고는 당시 로마 사회를 고발하기 위해 저술한 타키투스의 저서가 이후 어떻게 이용되었는지에 대한 ‘『게르마니아』 오독의 역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기원후 98년 저술된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원제는 게르만족의 기원과 관습에 대해서 De drigine et situ Germanorum)』은 게르만인의 풍속과 관습, 사회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일종의 민족지로 46장에 걸쳐 당시 라인강 동쪽, 도나우강 이북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의 모습을 잘 담고 있다. 1장부터 5장에서는 게르만족의 기원과 거주지에 대해, 6장부터 27장까지는 게르만족의 특성, 각종 제도, 군신 관계와 관습, 제도, 사생활, 혼인과 출산, 육아, 여성의 사회적 지위, 간통이나 기타 죄악에 대한 처벌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여 당시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던 로마인들과 대조되는 자유로운 게르만족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28장부터 46장까지는 게르만족의 개별 부족들의 각 부족별 특징과 인종에 대해 나눠 기술하고 있다.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는 고대 게르만 지역의 역사, 지리, 인종을 상세히 설명하기 보다는 당대 게르만족의 언어, 법률, 문화, 풍습, 군대, 종교 등과 같은 게르만족의 생활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그동안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던 게르만족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자 노력했으며, 그들의 단순함, 용맹함, 충성심, 순전함, 명예욕 등의 장점과 더불어 야만성, 미개함 등 여러 부정적인 면도 함께 서술했다. 그리고 타키투스는 고대 작가의 전형인 학자풍의 문체를 기피했고, 은유와 시적인 표현들을 통해 문장구조를 압축되고 간결하게 표현하여 당시 도덕적으로 타락한 로마의 병든 정치 조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그러나 『게르마니아』에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 종족학자로서 타키투스 또한 로마인들의 문화에 대한 편견은 벗어나지 못했다. 게르만족에 대해 객관적인 서술을 하려 노력했으나 여전히 원시적이고, 야만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게르만족의 순수성과 자유로움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미화하고 과장하는 측면이 있으며, 게르만족을 경시하면서도 선망하는 존재로 그리는 등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또한 타키투스는 직접 게르만 지역에 체류하지 않고 여러 자료와 주변 인물들에 증언을 통해 『게르마니아』를 저술하였기 때문에 다소 부정확한 측면이 많다. 물론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를 집필할 당시에는 게르만족이 남하하면서 로마제국이 게르만족과 수차례 전쟁을 치렀고, 게르만족에 대한 기록물도 상당히 많이 존재하여 직접 가지 않고도 『게르마니아』를 저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게르만 사회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성과 학문성을 담은 학술적 저서로는 보기 어렵다. 혹자는 『게르마니아』가 단지 로마 작가의 주관으로 쓴 외래 종족의 모습을 담은 저서라고 비판하기도 한다.그러나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는 당시 게르만 사회를 엿볼 수 있는 민족지의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고대 게르만 사회를 가장 자세히 보여주는 기록임은 틀림없다.도덕적으로 타락한 로마 사회를 개혁하려는 타키투스의 저작은 그대로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묻히는 듯했으나, 15세기 필사본이 발견된 이후로 다양한 정치적 목적이나 관점에 따라 오독되고, 변형·조작하면서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주군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 자신들의 용감한 행위를 주군의 영광으로 돌리는 것, 이것이 충성을 맹세한 시종들의 가장 중요한 책무이다. 주군은 승리를 위해 싸우고, 시종은 주군을 위해 싸운다.…”『게르마니아』의 필사본은 15세기 독일 헤센(Hessen)주 풀다(Fulda)시 근처에 있는 헤르스펠트(Hersfeld) 수도원에서 재발견되었으며, 포지오 브라치올리니, 아스콜리의 에녹, 피콜로미니 등에 의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특히 시에나의 추기경이다가 후일 교황 파우스 2세가 되는 피콜로미니는 당시 유럽을 압박해오던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에 독일의 참전을 독려하기 위해 ‘독일인은 선조로부터의 용맹한 병사의 피가 흐르고 있으므로, 튀르크족과 싸워 기독교적 공동체를 지켜야한다’는 수사학적 맥락에서 『게르마니아』를 인용하였다. 또한 피콜로미니의 조카인 지안난토니오 캄파노 또한 동일한 목적으로 1487년 레겐스부르크연설에서 『게르마니아』를 인용하여 독일인의 용감함과 토착성을 강조하였다.“개인적으로 나는 게르마니아 주민들은 다른 종족과의 혼인으로 피가 섞이지 않았으며, 유례없이 순수한 특별한 종족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조한다.”이렇게 처음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던 『게르마니아』는 독일인의 역사, 언어, 신화, 문화적 영역으로 확장되어 해석되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의 조상인 투이스코를 통하여 유럽의 다른 민족보다 더 오래되고우월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튀빙겐 대학의 수사학 교수인 베벨도 1059년 「독일인은 토착민이다」라는 글에서 게르만족은 토착적이고 순혈적인 민족임을 강조했다. 켈티스는 게르만족의 부정적인 글귀를 바꾸어 『게르마니아』 판본을 출반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게르만족의 부정적인 면은 점점 사라지고, 토착성, 순혈성, 자유, 용맹, 도덕성 등의 긍정적 특성만 부각되기 시작했다.안니우스나 후텐 등의 역사서를 새로 쓰는 일에 몰두했다면, 17세기부터는 독일어를 사용하거나 연구하는 일이 장려되었다. 독일어와 독일인이 다른 유럽의 인종보다 우월한 것으로 포장되기 시작되었고, 몽테스키외의 영향으로 이러한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18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민족 고유의 신화와 문학이 부각 되었고, 게르만족은 켈트족과 같은 민족이라는 주장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의 주도로 북유럽과 민족주의적 요소를 강조했으며, 헤르더, 피히테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에게 열정적으로 수용되어 게르만 숭배의 의식과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 시기 독일학이 형성되기도 하는 등 게르만적 자유정신이 독일의 민족성의 하나로 연결되었다.또한 이 시기에 게르만족 조상을 아리아인, 북유럽 게르만계로 곡해하는 작업이 함께 일어났다. 민족학자인 고비노의 영향을 받은 콜라우시는 「독일사」에서 타키투스의 텍스트를 인용하는 가운데, 인종적 개념을 대입했고 체임벌린과 같은 학자들 또한 게르만족과 아리아 인종이 최고라 주장하며 게르만족이 우생학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시각은 국수주의 운동의 주요 이념적 주제인 인종차별주의, 반유대주의, 범게르만주의와 선을 같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