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텍스트에 따른 역사적 사실화의 위험성흔히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해 놓은 책을 역사서 또는 사기(史記)라고 말한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H.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서술한다. 이는 인간이 살아온 오랜 경험과 행적을 살펴 축적된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오늘날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사마천의[사기], 서양에서는 헤로도토스의[역사]를 이후로 수많은 역사책이 군주, 정치인, 학자 등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된 이유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역사적 기술은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는 기술자가 쓰는 소설이 아닐뿐더러 기술자의 생각이나 편견, 감정이 들어가면 역사적 왜곡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2가지의 측면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사료적 고증의 불충분성삼국사기는 한국의 고대사연구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역사적 사료이다.하지만 [삼국사기]에서 이용한 원전(原典)자료는 거의 현존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기본 원전은 삼국시대에 편찬된 역사서가 아닌 고려 초에 편찬된 [구삼국사]가 원전 자료이고 이 자료 또한 현전하지 않음으로써 검토의 길이 더욱 좁을 수 밖에 없다.[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왕명을 받고 1145년에 찬진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는 일본의 사학자들에 의해 편찬시기가 늦다고 하여 사료적 신빙성이 낮다고 평가되기도 하는가 하면, 근대사학의 창립자 신채호는 사대주의의 사서로서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일제강점기 시대의 문인이자 사학자인 최남선에 의해서는 표현의 문장력이 번지르 하다는 점으로 폄하되기도 하였다. 김철준은 윤색과 날조가 되었다고 평가 받기도 하였다.김부식이 [삼국사기]편찬할 때, 원전자료의 수집처로 왕실 궁내에 보관된 자료와 자기 자신이 수집한 자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고려 왕실에 보관된 자료가 어떤 것인지 목록을 확인 할 수 없고 그가 새롭게 보충한 자료만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왕실에 보관 되어있던 자료인지 개인적으로 수집한 자료인지 엄밀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이는 [삼국사기] 이전의 국내자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삼국사기] 에는 본문에서 인용된 자료는 국외자료이건 국내자료이건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중국 측 자료를 통해 구별이 가능하다. 특히 국외의 자료일 경우 문헌자료라 하더라도 그 신빙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중국사의 경우 열전 자료에 실린 우리측 기록은 연대가 분명하지 않을뿐더러 착오에 의하여 바뀐 서술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또한 [삼국사기]가는 시공간적으로 고대 삼국을 서술 대상으로 공유하는 다른 문헌들과 서술 내용이 종종 상충한다는 것이다. 다른 문헌들이란 편찬 당대의 중화적 세계질서의 구축을 겨냥한 [삼국지]등의 중국사서와, ‘삼국의 유사’(본사에 따지 유사 즉 ‘나머지 일‘)을 자처한 [삼국유사]등이 있다.[삼국사기]는 현재 한국고대사의 원전 자료로 이용되고 있지만 [고려사]에 비교하여 볼 때 원전자료적인 성격이 낮게 평가 되고 있다. 이는 본기의 자료 및 열전 등에서 고대의 자료를 그대로 전하지 않고 자신의 문장으로 서술한 예가 있기도 하지만 몇차례 재정이된 자료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국의 본기에서 중국의 고전 내용을 인용한 대화체가 나오는 점과삼국 왕실의 계보를 모두 빠짐없이 기술하였다는 것은 그 계보를 의심스럽게 하는 경우가 있다.또한 독산성 전투기사를 보면 고구려 본기에는 양원왕 4년 춘정월에 군사 6000명이 동원되었고, 신라본기에 의하면 진흥왕 9년 춘 2월조에 백제의 요청에 따라 3000명의 정예병을 보내 싸운 전투였다. 이는 백제가 국운을 걸고 싸운 전투로 이해된다. 이어서 [일본서기] 킨메이기 9년조(548년) 정원 신축(9일)에 ‘고려졸 중원마진’이라는 기사와 일치함으로 독산성 공격은 마진성 전투와 동일한 내용을 다룬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경우 마진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에 잠깐 붙여진 기록인데 [일본서기]에 어떻게 마진성이란 기록이 나올 수 있으며 더구나 백제가 멸망하기도 전에 마진성이라는 칭호를 쓸 수 있는지 문제가 남아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편찬자가 서술해 넣은 부분이라하여 모두 믿을 수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는 지역에 대한 유적지가 조사되고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특정 목적에 의한 기술 및 해석이러한 신화 텍스트로 이루어진 편찬서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여 전하기 위해서가 아닌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편찬이 되었거나 후대에 특정한 목적을 가진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우선 전자를 [삼국사기]에 대해서 보면 김부식은 1145년(인종 23년) 음력 12월 [삼국사기]의 편찬을 마치고 인종에게 올린 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엎드려 헤아려 보건대. 성상 폐하께서는 요임금의 문사를 타고나시고 우임금의 근검을 본받으사.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정사를 돌보시는 사이에도 널리 옛일을 섭렵하시어 신에게 이르셨나이다."오늘날 하사들과 대부들이 오경이나 제자의 서책과 진 · 한 시대 이래 역대 중국 사서에는 간혹 넓게 통달해 자세히 말하는 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일에 이르러서는 깁자기 망연해져서 그 시말을 알지 못하니 매우 한탄할 일이다. 하물며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는 나라의 기업을 열고 솥의 세 발처럼 서서 예로써 중국과 교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범엽의 「한서』와 송기의 「당서」에는 모두 삼국의 열전이 실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중국의 일은 자세히 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삼국의 사실이 다 갖추어 실리지 못하였다. 또한 「고기」는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이 빠지고 없어져서. 군후의 선악과 신하의 충사와 나라의 안위와 인민의 치란을 다 드러내어 권계로 드리우지 못한다. 이제 마땅히 박식하고 뛰어난 재사를 얻어 일가의 역사를 이루어 만세에 전해 해와 별처럼 밝게 할 일이다."즉 과거 군주와 신하 등 지배층의 통치 방식과, 국가?인민의 안위와 치란에 관한 역사를 통하여 지금의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통치 교훈을 제대로 얻을 만한 역사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며 인종의 견해를 빈 삼국사기 편찬의 당위론이기 했다.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은 약관에서 출사한 후 거의 전 생애를 정치 현장에서 보낸 정치가였다. [삼국사기]가 종합하고자 한 영역은 과거 삼국 시대이지만 편찬 당대 사회의 산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사의 12세기는 귀족 중심의 유교주의 통치 이념으로 출발한 고려 전기 사회의 정점을 지나, 쇠락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이다. 숙종-예종-인종의 3대 50년 동안의 고려 사회에서는 번영의 퇴조와 예측하기 어려운 위기의 도래가 감지되고있었다. 고려의 관료들 역시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다만 대안의 차이가 있었다. 주요 대안인 제도 개혁론의 대변자 윤언이와 반대로 개혁보다는 훼절된 제도 본연의 정신을 회복해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 김부식의 대립이 대두되었다. 개혁론의 극단적 표출로 신채호가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일컫는 서경천도운동이 있으며 이를 제압한 김부식은 조정 최고 권력 수반에 올라 윤언이를 서경세력으로 지목해 탄핵시킨다. 그러나 1140년 인종은 김부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언이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윤언이의 복권은 김부식의 퇴조를 예고했고 1142년, 김부식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3년 뒤 삼국사기의 편찬을 마치는데 사실상의 퇴출을 강요당한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는 삼국시대를 설명하는 ‘본사’인 동시에, 12세기 중엽 고려 왕조의 위기에 대해 김부식이 제안한 하나의 ‘대안’이었다[삼국사기]에서 자신의 충의와 정당함을 토로할 공간을 발견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후자의 예로는 일본의 일본서기를 들어보겠다.일본에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국가의 건설을 재촉하던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서기는 편찬되었다. 즉, 이 시기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당과의 전쟁을 치루며 삼국통일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672년 잇시의 변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한 덴무가 계보의 혼란을 정비하고 호족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새로운 역사서를 편찬하고자 하였다. 일본국의 생성과 천황통치의 정당성과 유구성의 유래를 밝힌 일본서기의 편찬이 시작되었다. 일본서기에는 한반도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에 대한 기술이 있다. 그 기록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겨울 10월 3일. 와니노츠를 출발하였다. 때에 풍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은파도를 일으켜 바닷 속의 큰 고기들이 다 떠올라 배를 도왔다. 바람은 순풍이불고, 범선은 파도에 따라갔다. 노를 쓸 필요 없이 곧 바로 신라에 이르렀다.…… 이것으로 천지신명이 모두 도와준 것을 알았다. 신라 국왕이 크게 놀라 두려워하면서 사람들을 불러놓고 ‘신라 건국 이래 아직 바닷물이 나라 안까지 미친 적이 없었다. 이제 천운이 다하여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신라왕이 두려워 싸울 마음을 잃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신국이 있다. 일본이라고 한다. 또한 성왕이 있는데, 천황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내어 방비할 수 있겠는가. ……강바닥의 돌이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춘추의 조공을 빼거나말빗과 말 채찍의 조공을 게을리 하지 아니할 것을 천지신명에 걸고 맹세한다.’라고 하였다. …… 이에 황후가 나라 안에 들어가 중보의 곳간을 봉하고 지도와호적 문서를 압수하였다. 또한 황후가 짚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우고 후세의 표로 하였다. ……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은 신라가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밀정을 보내어 그 군세를 엿보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와서 머리를 땅에 대고 ‘이제부터 영원히 서역이 되어 조공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한-일 중세기 지배계층에 따른 서민문화의 발달일본중세에 있어 생활의 가장 큰 변화 2가지는 생산력 발전에 따른 잉여 이익분의 발생과, 그것을 모아 재산으로 축적하는 자들의 성립과 대두다. 또 하나는 중세후기 상품 유통의 비약적 확대에 있다 상품유통의 비약적 확대-화폐유통의 증대라는 중세후기 사회의 특징은 서민 생활의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일본 역사상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 이후 무로마치 막부가 등장한다. 시대의 주역은 이전 시대까지의 귀족이었던 쿠게(公家)로부터 무사(사무라이)계급인 부케(武家)로 옮겨졌다. 이는 지속되는 전란에도 불구하고 주류세력, 부케(무가)가 쿠케(공가)에 비해 높은 신분이 아니었던 점과 오랜 전란에 인재를 등용할 때 신분을 가릴 수 없게 된 점은 당시 일본의 서민적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또한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36~1598) 평범한 ‘백성’의 아들로 태어나서 나중에 ‘천하인’까지 되었다. 그 같은 ‘출세’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개략적으로 소개되어 있다.당초에 수길이 매우 빈천하여 꼴(芻)을 베어 팔아 생활하였다. 전前 관백關白이 출행할 때 옷을 벗은 채 수레 앞에 누워 있었다. 부하들이 죽이려고 하자 관백이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었다. 수길이 가난해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대답하자, 관백은 그에게 변소지기를 시켰다. 수길이 어찌나 변소를 깨끗이 청소하는지 냄새가 나거나 티 하나가 없었다. 관백은 매우 기뻐하여 그에게 신을 삼게 하였는데 역시 정밀하게 신을 삼아 바쳤다. 하루는 관백이 금술잔을 깊은 우물 속에 빠뜨렸다. 수길은 큰 물동이 수백 개를 구하여 물을 담았다가 한꺼번에 우물에 쏟아 부으니 우물이 뒤집히면서 금술잔이 수면에 떠오르자 재빨리 집어내어 바쳤다. 이 때문에 그는 총애를 받아 승직의 길이 열렸다. 이때 국내에 큰 도둑이 있었으나 관백은 이를 물리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수길이 토벌을 자청하였다. 수길이 우선 많은 군대를 모집해야 하므로 관백에게 붉은 우산을 빌려 줄 것을 청하니, 관백이 허락하면서 ‘싸움터에 도착해서 펼 것이며 도중에서는 절대로 펴지 마라’고 당부하였다. 수길은 대궐문을 나자마자 붉은 우산을 펴고 행군하니 백성들이 이를 바라보고 관백이 직접 행차한다고여겨 엄청난 사람이 모였고 곧바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관백이 시해당하였다는 말을 듣자 수길은 즉시 민간 복장으로 몰래 입성하여 관백을 시해한 자를 죽이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 ‘전 관백’은 오다 노부나가를 가리킨다)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음으로 권력을 잡아 세상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미카와(三河國)의 토호土豪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의 제 8대 당주當主 히로타다(松平?忠, 1526~49)의 아들(嫡男)로 태어났다. 그 역시 2살 때 어머니가 떠나가고, 후에는 아버지가 가신에게 살해 당하는 등 몰락한 가문의 자식이었다.이처럼 일본의 무사계급의 지배계층 형성은 서민문화 발전의 큰 영향을 주었다반대로 비슷한 시기의 조선은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권교체가 일어났는데 이에 따른 지배계층의 교체에 대해서 존B.던컨 교수는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조선의 건국을 신흥 사대부의 출현과 연관 짓지 않는다. 고려 전기 이후 계속 추구해온 중앙 집권적 관료체제의 완성으로 보는 것이다. 고려의 중앙 관료 귀족이 지방 귀족인 향리를 완전히 제압하는 긴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즉 새로운 지배계층의 교체가 아닌 고려가 추구해온 중앙 집권적 관료체제의 완성으로 보는 것이다. 그 결과, 조선왕조의 건국 주체들이 고려의 지배 엘리트들 연장선상에 있었고, 또 이들의 기원이 고려 건국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조선시대의 신분은 자유민인 양신분(良身分)과 비자유민인 천신분(賤身分)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른바 양천제(良賤制)가 그것이다.조선시대의 교육은 양반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의 교육이라면 유교 교육을 의미한다. 도덕적 수양이 되지 않은 사람은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양반가의 자제는 8세가 되면 원칙적으로 향교(鄕校)나 4학(四學) 서당(書堂)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어있는데 농업국가로서의 여건이 좋지 않았던 조선은 늘 국고가 넉넉지 못하기 때문에 국립학교는 부실했다. 그래서 양반가문은 사립학교에 교육을 의존하고자 했다. 이것은 부유한 양반가의 특권이기도 했다. 이처럼 부유하고 전통있는 가문의 자제가 아니면 교육을 받는 것에 있어 불리함으로 작용했다.양반은 개간?매매?사패(賜牌)?기증?투탁(投托)?상속(相續)등의 방법으로 사유지를 넓혀갔다. 벼슬을 할 경우에는 녹봉(祿俸)과 과전(科田)을 받고 국가에 공이 있으면 공신전(功臣田)?별사전(別賜田)을 따로 받았다. 그리하여 산천을 경계로 하는 대지주가 나타나게 되었다.이로인해 15?17세기, 조선 시대 전체 인구의 30?40%가 노비였다. 영남, 호남의 남부 지방은 그 비율이 더 높았다. 노비 규모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 대량으로 발굴되는 호적 자료들 덕분이다. (‘호적’은 군역[軍役]을 부담시키기 위해 국가가 취합한 자료다.)1609년 울산의 호적 자료에 의하면, 47%가 노비였다. 1606년 단성(경남 산청?)은 무려 64%가 노비였다. 노비 규모는 한반도 전역으로 보면 30?40% 규모였고, 남쪽(남한) 지역만 보면 50% 규모였다(123쪽). 현재까지 전하는 상속 문서 중에서 가장 많은 노비를 상속한 사람은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이맹현(1494년)이다. 노비 757명을 자녀에게 상속했다. 퇴계 이황도 다섯 자녀에게 모두 367명의 노비를 상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