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철학 2번째 과제1. 지각이라는 것은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과 그것에 대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외부 자극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고요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어떠한 외부자극이 주어지면 동요한다. 마치 악기의 공명통에 자극이 주어지지 않을 때에는 고요하고, 외부자극이 주어지면 소리를 내는 것처럼 말이다. 어떠한 사람이 가슴 아프고 슬픈 사건(예컨대 실연)을 겪었고, 이 때문에 화를 못 이겨 질 나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자. 이 경우에 얼마만큼 비난과 책임을 외부자극이 아닌 그 사람에 가해야할까?동일한 외부자극이여도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다. 어떤 이들은 실연을 계기로 학문에 정진하여 큰 업을 이루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위에 예시를 든 사람처럼 나쁜 의도를 품고 슬픔을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해소한다. 즉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도 사람마다 내면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다른 방법으로 반응하는 것이다.이 때 반응의 성격과 양상을 결정하는 내부적 원인 즉, 인격, 성격, 의지적 노력 등을 더욱 중시할 때에는 삶의 능동성이 강조된다. 그 뿐만 아니라, 동일한 외부적 자극이 주어져도 그 자극에 대한 반응양상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 인정되므로 행동에 대한 책임영역이 더욱 확대된다. 이러한 견해는 성선설의 견해와 길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반면에 외부자극의 존재 자체가 중시될 때에는 삶의 수동성이 강조된다. 이는 선악설과 견해와 길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외부자극의 실존 여부가 중시되므로 외부자극에 대한 인간 내면의 반응과 그에 따른 행동, 그리고 이에 따르는 책임영역이 내부적 원인을 중시하였을 때보다는 중요성이 덜 강조된다.2. 묵가의 겸애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하나는 모든 사람을 그리 특별하지 않게 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따르면 부모님, 친구 등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도 내가 처음 본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면 묵가를 향한 맹자의 “애비없는 놈” 이라는 비판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부모님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할 수 있겠는가.묵가의 겸애를 이해하는 다른 방법은 모든 사람을 특별하게 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따르면 모든 사람을 내가 부모님, 친구 등 나와 특별하고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다.묵자는 인간이 각기 개개인의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익을 추구한다고 본다. 이러한 그의 관점에 부합하는 ‘겸애’의 이해 방법은 2번째 방법에 더욱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소극적인 사랑의 실천보다 더욱 물질적이고 현실적으로 사람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견해를 묵가의 겸애로 이해한다면 그가 절대적인 하늘의 존재를 상정한 이유 또한 알 수 있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하늘을 겸애를 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하지 않은 이에게는 벌을 주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이를 통해서 나는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데,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때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절대적이고 합당한 상과 벌을 내리는 하늘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만으로는 겸애에 대한 정당성, 그리고 항상 이루어질 것이라는 담보를 해주진 않는다. 그래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묵가는 “상동” 등의 사상을 제시하며 겸애가 하나의 제도처럼 정착되기를 꾀하였다.
가치 있는 삶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의 깃털보다 가볍다 -사마천 [사기]-목숨은 귀하다. 그리고 목숨은 평등하다. 부자, 빈자, 성별, 인종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단 하나의 목숨만이 주어져 있다. 이 하나뿐인 목숨을 나라를 위해 희생하라고 국가가 명령하면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만할까.국가는 시민에게 전쟁터에 나가서 죽으라고 명령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명령이 정당성을 지니고, 시민 불복종이 인정되지 않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전쟁이 침략전쟁이 아닌 방어전쟁일 때, 그리고 모든 국민이 빠짐없이 전쟁에 참가하고 함께 희생할 것이 보장될 때에만 전쟁터에 나가서 죽으라는 명령의 정당성이 인정된다. 방어전쟁이 아닐 때, 그리고 전쟁이 방어전쟁일지어도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고 숨는 이들이 존재할 때에는 볼복종이 인정된다.정의로운 침략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억울하고 무고한 죽음의 소식이 들려올 때면 우리는 크게 분노하곤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업적을 위대하게 여기며 그의 삶에 대해 탐독하고, 프랑스가 나폴레옹을 국민영웅 (national hero)으로 섬기는 것처럼 무자비하게 적을 섬멸한 이들을 칭송한다. 그들의 탐욕적인 정복 활동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당하고 눈물을 흘렸는지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한 사람을 죽이면 너는 살인자이지만 수백만 명을 죽이면 너는 정복자가 되고, 모두를 죽이면 너는 신이 된다.” 라는 장 로스탕의 발언은 한 명의 무고한 죽음에는 분노하지만 국익을 위해 수백만을 살해하는 사람을 떠받드는 우리의 모순적이고 부끄러운 모습을 들춰내고 있는 듯하다. 침략전쟁은 경제적 이익, 국제 패권 상승 혹은 대화와 설득으로 풀릴 방안이 없어 보이는 외교적인 난제를 한번에 해결하기 위해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침략전쟁으로 얻어질 그 어떠한 이익도 그 과정에서 희생될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느낄 고통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침략전쟁은 그 어떠한 달콤한 말로 포장하려 하여도 그 본질은 나라 지도자들의 탐욕임은 바뀌지 않는다. 침략전쟁에 거부하지 못하고 동원된다면 이는 스스로를 지도자들의 탐욕 충족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으로 허용하는 것과 같다. 국민들은 침략전쟁의 이러한 본질을 파악하여 동원에 거부해야 한다. 베트남 전쟁과 이에 따른 징집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60년대에 자신의 나라가 부정의한 전쟁을 이어가고 있음을 깨달은 미국 대학생들은 미국 역사상 최대의 징집 거부 운동을 일으킨 것처럼 말이다. 국민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탐욕으로 눈이 먼 국가의 행패를 저지해야 한다.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형태의 전쟁에 거부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만약 어떤 국가가 어떠한 전쟁도 거부한다면 결국 그 국가와 국민은 파멸할 것이다. 겸애사상을 내세우며 모든 침략 전쟁에 반대하였던 묵자 또한 방어전쟁은 긍정하였다. 자신의 나라 안에서 사용되지 않은 땅이 많으니 그것을 경작하는 것이 다른 나라를 침략해 새로운 땅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고 묵자는 주장한다. 허나, 내가 남을 공격하지 않지만 남이 나를 공격한다면 가차없이 반격을 해야한다는 것이 묵자 “비공(非攻)” 편에 나와 있다. 만약 다른 나라가 침략전쟁이 지닌 모든 부조리함을 안고서라도 공격을 감행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자유, 정의,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면 불복종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 내에선 편법을 써서 국방의 의무를 기피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김중로 국민의당 의원에 따르면, 고위 공직자 2500여명 중 92명이 ‘아버지와 아들’ 모두 병역을 면제받았다고 한다.1) 실질적으로 징집 실시 여부를 결정하고, 전쟁을 지휘할 이들 중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이러한 식으로 몇몇 국민이 재력, 혹은 권력에 힘입어 방어전쟁에 동원되지 않을 핑계를 만들어낸다면 결국엔 “rich man’s war and poor man’s fight” 가 될 수 있다. 고위공직자들이 의도적으로, 그리고 비양심적으로 병역을 회피하면서 국민을 전쟁터로 떠미는 양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상황이 만약 나타난다면 국민은 방어전쟁일지어도 징집을 거부해야 한다. 고위공직자들에게 싸우지도 않고 다 같이 패망할 것인지, 아니면 병역을 기피했던 자신의 아들 혹은 자기자신을 전쟁에 동원되도록 하여 적군에 대항할 것인지 결정하게 한다면 필연적으로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부자, 빈자, 권력이 많은 자, 없는 자 할 것 없이 국민 모두가 방어전쟁의 짐을 동등하게 나누어 질 것이 보장될 때에만 전쟁터에 나가서 죽으라는 국가의 명령은 권위를 지닌다. 탐욕적인 침략전쟁에 주체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동원되어 전쟁터에서 맞는 죽음은 의미 없는 죽음이지만, 모두가 함께 싸우는 방어전쟁 중에 맞는 죽음은 명예로운 죽음이다.앞서 그 누구도 무고한 사람을 죽일 권리가 없다는 명제에 근거하여 침략전쟁에 반대해야 한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무고하지 않은 사람인 경우는 어떠한가?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죽어 마땅하지 않는가? 이들에게는 하나뿐인 목숨을 빼앗는 벌, 즉 사형을 내리는 것만이 정의로운 것처럼 느껴진다.사법기관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기 위해 존재한다. 범죄자에게 내려지는 벌은 국가의 이름으로 선고되기에 정당성과 영향력을 지닌다. 그러나 실제로 어떠한 벌이 주어질지 결정하는 주체는 판사, 즉 인간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우리는 항상 실수를 범한다. 범인인 줄 알고 체포하여 사형당한 사람이 실상은 범죄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사형은 침략전쟁처럼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기에 거부해야 한다. 국가는 시민을 사형에 처하게 할 권리가 없다.사형이 실행되면 그 누구도 이를 되돌릴 수 없다. 특정 죄에 대한 벌로 실행되는 사형이 정당성을 지니기 위해선 판사의 결정이, 그 결정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근거가 수집되는 과정이 한 치의 오차와 실수없이 완벽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에서 1970년대 이후 내려진 사형 선고 중 4.1% 이상은 무고한 사람에게 선고되었다는 연구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다.2) 범죄 수사 과정이 아무리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어도 실수는 발생한다. 범죄와 연관이 전혀 없는 사람이 체포되었다고 해보자. 억울한 옥살이를 한 이에게는 국가가 금전적 형태로 보상을 해줄 수 있지만, 억울한 사형을 당한 이에게 국가는 그 어떠한 보상도 해줄 수 없다. 실제 범죄자는 죗값을 치르게 하고, 억울하게 체포되고 선고를 받은 이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가능성을 남기기 위해선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사형을 대신하는 것이 옳다.국가의 이름으로 내려지는 명령들, 국가의 이름으로 내려지는 선고들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지니지 않는다. 우리는 명령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고, 실제론 개개인이 국가의 이름으로 선고와 결정을 내리고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 국가라는 추상적 존재의 명령과 선고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여 맞이하게 되는 죽음은 깃털보다 가벼운 죽음이다. 반면, 자신의 이성과 양심에 따라 판단 후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 혹은 결과로 맞는 죽음은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다. 주체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는 하나뿐인 목숨에 무게를 지어준다. 우리는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필히 명심해야 한다.참고문헌1) 김태규, , , 2016.09.19., < Hyperlink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bar/761637.html" l "csidxdc7cd33663c0f878f2797531e60215a "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bar/761637.html#csidxdc7cd33663c0f878f2797531e60215a >, 2020.05.202) Pilkington, E., , , 2014.04.28., < Hyperlink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4/apr/28/death-penalty-study-4-percent-defendants-innocent"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4/apr/28/death-penalty-study-4-percent-defendants-innocent>, 2020.05.20
인간은 자유를 원하는가? 아니면 구속을 원하는가?우리 인간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여타 도구들과 달리, 특정한 목적 달성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인간 개개인에게는 미리 배정된, 달성해야만 할 목적 따위는 없다. 이러한 본성의 부재를 우리는 ‘자유’라고 부른다. 이는 사르트르가 주장했듯이 우리의 실존이 본질에 앞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인간의 역사는 자유 쟁취의 역사이다. 우리는 신체적, 정신적 구속에 저항해 왔다. 끝없는 투쟁을 통해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노예제도를 없애며 특정 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신체적 자유를 획득해 나갔다. 신체의 자유가 보장된 이후엔 정신적 자유를 추구해 나갔다. 이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다양한 의견들의 존재를 인정해주었고, 하나의 획일화된 사상으로 타인을 조종하려는 이들을 배척했다. 인류애를 발휘하며 타국의 억압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할 ‘자유’라는 가치를 수호하고, 이와 동시에 자유의 개념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운 채 수동적으로 타인의 의견에 동조하기도 한다. 대심문관은 인간을 기꺼이 자유를 팔아 빵을 얻어내려는 나약한 존재라고 보았다. 실로 자유는 항상 달콤하지만은 않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행해지는 행위에는 항상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그것을 행했다고 하여 비난받지 않지만,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하는 사람이 특정 행위를 행한다면 그것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여러 사람들이 기꺼이 대심문관을 따르는 이유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자신의 독자적인 의견과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고 대심문관의 명에 따르는 개인은 자유가 불러올 책임감과 비판으로부터 안전하다. 이처럼 타인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면 ‘나’라는 객체가 특정되어 책임을 지거나 비판을 받을 일이 사라지기에 마음이 편하다.이뿐만이 아니다. 자유를 향유하는 상태에선 끊임없이 옳고 그름에 대해 사색과 고민을 해야 하지만, 타인이 이를 정해주는 구속의 상태 속에선 위와 같은 수고가 필요 없다. 독자들의 눈에는 사이비처럼 보이는 대심문관을 따르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은 이유에는 이 또한 큰 몫을 할 것이다.위의 논증을 정리해보면, 인간은 자유와 구속 중 오직 하나만을 원하기보단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자유의 상태를 원한다고 볼 수 있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다. 물론 이러한 상태는, 적어도 현대사회 속에선, 실현 가능하지 않다. 한 개인의 무제한적인 자유는 타인의 자유에 구속을 유발할 수 있기에, 우리는 ‘법’이라는 수단을 이용하여 이의 적절한 합의점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자유’라는 이상은 인간의 깊은 욕망 속에 항상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크리톤은 뇌물을 이용해 손쉽게 소크라테스의 감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에게 동일한 방법을 이용하여 그를 감옥에서 탈출시켜줄 수 있다고 말하며 함께 빠져나가기를 청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다양한 이유를 들며 거부한다.1. 우리는 국가에 은혜를 입었기에국가는 법 위에 세워진 것이고, 법이 무너지면 국가 또한 당연히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그 법에 따르면, 탈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로 탈옥을 감행하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며, 이는 국가를 배신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를 길러준 국가를, 양육해준 국가를, 그리고 만약에라도 우리가 법을 어겨 추방을 당했을 때 우리의 아이를 보호해줄 국가를, 지켜야만 한다. 소크라테스 또한 이러한 생각에 자신의 아이를 핑계로 도망을 권하는 크리톤의 권유를 거부한다. 개인이 나라에 의해서 내려진 판단을 무시하면 나라의 존립 자체가 위태해지기에, 그리고 국가는 우리에게 수많은 것들을 제공해주기에 국가의 명에 따라야 한다.2. 특정 나라에 머무는 것은 그 나라의 법, 즉 권위를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성인이 된 이후에도 특정 나라에 머물기를 선택한다면, 이는 개인이 해당 나라가 주변 타국과 비교했을 때에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조항도 나라를 떠나는 것을 금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암묵적으로 그 나라의 권위에 복종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3.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도덕원칙은 옳지 않기에정의롭지 못한 법은 개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법을 어기는 행위 역시 정의롭지 못한 행위이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앙갚음으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는 원칙에 위배된다. 정의로운 법은 정의롭기에 따라야하고, 정의롭지 못한 법은 저항할 시 새로운 부정의가 행해짐으로 따르는 것이 옳다.질문: 소크라테스의 논증을 따라가다보면 그가 말하는 “법”은 이상적인 형태로 보여진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의 법은 부조리와 비이성이 가미되어 있을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가?
묵가의 겸애 사상의 지닌 경직성과 전체주의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고찰목차I. 서론1. 탐구의 필요성2. 탐구의 목적3. 탐구 문제II. 이론적 배경1. 겸애(兼愛)2. 의(義)3. 전체주의III. 탐구 결과 및 고찰IV. 결론 및 제언V. 참고문헌I. 서론1. 탐구의 필요성묵자의 겸애 사상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 큰 울림을 유발한다. 남보다 더욱 많이 소유하고 싶어하고, 남들보다 앞서가고 싶어하고, 남들보다 잘나고 싶어하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파편화된 사회상을 생산해내어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한다. 이 때에 묵자가 주장한 무차별적인 사랑, 즉 겸애는 이러한 현대사회에 대한 해독제로 읽힌다. 그러나 실제로 겸애 사상이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사회상의 기반이 되는 사상일까?2. 탐구의 목적이 탐구를 통하여 겸애라는 사상이 과연 전체주의의 기초를 닦아주는, 전제가 되는 사상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혹여나 전체주의의 씨앗이 있다면 그 씨앗의 발아를 막기 위하여 어떠한 단계가 필요한지를 살펴볼 것이다.3. 탐구 문제묵자 사상을 살펴보면서 전체주의의에 대한 발전 가능성에 대하여 탐구를 해보고, 만약 겸애 사상이 실제로 전체주의로 나아갈 일말의 가능성이 발견된다면 이것을 제거하고, 발현을 억제할 방법을 고안해 제시할 것이다.II. 이론적 배경1. 겸애(兼愛)겸애는 별애(別愛)와는 대비되는 개념이다. 별애는 누구 하나를 그가 잘났기에 혹은 나와 특별한 관계 (가족, 친구, 연인 등)를 맺고 있기에 위해서 행하는 사랑이다. 이것은 부분을 사랑하고 나머지는 차별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유가에서는 우리 인간이 특히 가족들에게 별애를 행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인간 윤리의 시작점이라고 여긴다.그에 비하여 묵가의 겸애는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을 그리 특별하지 않게 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따르면 부모님, 친구 등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도 내가 처음 대하는 것이다.윤무학 (2017, 224) 은 겸애의 또 다른 큰 특징을 “서로 이롭게 해주는” 공리주의적 사랑이라고 보았다. 즉, 겸애의 궁극적인 목적은 실질적으로 서로 이롭게 해주어 전체의 이익의 증진을 이루어내는 것이다.2. 의(義)Chris Fraser (2008, 9) 를 참고하여 의 (義) 개념을 정의하도록 하겠다.“As the Mohists imagine them in the state of nature, then, people are autonomous agents who are strongly, even obstinately committed to their yì. The first version of the theory describes their attitude by saying that they “shì their yì and on that basis fēi others’ yì, and thus fēi each other” (11/2)—that is, they each deem their yì to be shì (是) (right/this), on those grounds deem others’ fēi (非) (wrong/not), and thus fall into a cycle of reciprocal condemnation (fēi) of each other that eventually leads to social turmoil.”즉, 묵자는 사람들이 모두 각자 개개인의 의를 상정하고 있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고 보았다. 개개인은 또한, 자신들의 의가 올바름(是)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엔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의로움과 올바름을 관철시키고자 하여 사회적인 혼란이 일어난다.3. 전체주의전체주의는 개개인의 특성과 특색을 말살시키고, 하나의 강력한 정치권력이 국민의 문화, 경제, 사회생활을 샅샅이 통제하며 개인의 이익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 실질적이고 전면적인 감시를 행하는 것 또과 자신이 지니고 있는 기준을 맞추는 것이다. 이는 모든 국민이 자신들의 가치관을 윗사람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일치된 가치기준을 가지게 된다. 아랫사람은 통일된 가치체계를 착실히 따르고, 윗사람은 겸애를 하는 것이다.Chris Fraser (2008, 13)는 통일된 가치기준을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의무이자 존재 이유라고 보았다.“Everyone agrees that a unified yì is needed, but there is no means of arriving at one. This is the problem that political authority is invented to resolve.”즉, 모두가 통일된 “의”가 필요한 것은 알지만, 그것에 합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에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권력집단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의로움을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주입을 하고, 가치체계를 하나로 통일을 한다면 이것은 전체주의의 단초가 될 수 있다.그렇다면 실제로 묵자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겸애는 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랑이며 이타주의적인 사상이다. 반면에 상동에는 전제군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개개인의 특색을 소거하고 하나의 공통된 가치체계로 통일시켜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 그렇다면 묵자는 사람들이 서로 모두를 똑같이 가치있게 대하는 사회상을 원해는가 아니면 정치권력을 쥔 사람에 의해서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는 사회상을 원했는가?Chris Fraser (2008, 26)는 묵자 사상이 개개인들을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좇는 존재들이 아닌, 지도자와 자기 자신을 통일하려는 성향, 호혜성을 지키려 하는 성향, 효와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는 존재로 상정하였다고 본다.“But they also recognize a range of other sources of motivation, including motivation on the grounds of sh social order and filiality.”호혜성의 경우는 상동을 행하였을 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겸애를 하고, 아랫사람은 복종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영주 (2020, 811)는 이러한 호혜성으로 인하여 겸애와 상동이 더욱 공고화된다고 보았다.“겸애사상의 실천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교리로 나타나고 공동체 차원에서는 상현과 상동으로 실천되는데, 이는 겸애사상이 형성되고 구현되는 순환관계로 해석된다. 다시 말하면 겸애가 교리와 상현, 상동으로 구현되고 그렇게 구현된 교리, 상현, 상동을 통해 겸애가 더욱 공고화 되는 것이다.”그러면 필연적으로 통일된 “의”는 더욱 견고해질텐데, 이 때 개개인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가? 묵자의 “經說上” 편을 보면 개체란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생각을 비추고 있다.“體, 分於兼也”결국 묵자 사상은 국가의 리더로 추대된 사람의 독단을 막을 제도적 장치의 고안이 부재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개개인의 중요도가 소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 된다면 개개인의 희생은 당연시될 수 있다. 상동을 하면 개개인은 자신의 색을 지워야 한다. 묵자 사상에는 전제추의로 나아갈 위험 요소가 곳곳에 존재함이 이제는 명확하다.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묵자가 원하던 바였을까? 겸애의 가장 큰 특징을 “서로 이롭게 해주는” 공리주의적 사랑으로 파악한 윤무학의 견해를 수용해보자면,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복종은 겸애의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결국에는 상동과 겸애가 서로를 공고히 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피지배자들이 지도자가 통일시켜 공포하려는 가치체계가 옳은지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묵자의 사상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스스로 올바른 삶의 모습과 기준을 설정하고 이를 따라야 한다는 칸트와 롤스의 자유주의적 생각보다는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가치들은 이미 우리에 외재적으로 존재하고 (예를 들어, 정직해야 한다) 이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모범적인 상동과 겸애의 모습에 더욱 가까웠을 것이라 생각된다.또한, 겸애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하고, 겸애는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묵자의 입장에서 고려해보았을 때, 전체주의적인 사회는 묵자가 보았을 때 추구할만한 사회의 모습이라고 보기 힘들어보인다. 그는 물론 사회 전체의 이익 증대를 꿰하긴 하였지만, 그것이 전체주의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원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역사를 통해서 만일 사회 전체의 이익 증대가 목표라면, 전체주의는 절대 그 목표달성에 도움이 되지 못함이 증명되었다. ‘이익’의 정의는 사상가, 철학자마다 다르지만, 본 논의에서는 묵자가 생각했던 실질적 이익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것을, 힘들어하는 이들에게는 휴식을 취할 곳을 제공하는 것)과 더불어 개개인들의 행복까지 고려하겠다. 전체주의 사회의 탄압적인 성격은 개개인들의 행복은 물론, 실질적인 이익을 보장해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IV. 결론 및 제언묵자의 겸애 사상과 상동 사상이 전체주의 사회로의 발전을 야기하는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겸애가 결국엔 궁극적으로 사회와 개인 모두의 이익 증대를 위해 제기되었던 사상임을 고려해보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윗사람들이 자신들의 가치 체계를 아랫사람들과 동일시하는 상동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아랫사람들이 비판적으로 이를 검토하고, 윤리적 혹은 도덕적인 이상함을 느꼈을 때 저항할 수 있을 때, 즉 겸애가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 이것이 무조건적으로 밀어붙여지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들이 교환되고 토론되는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의미있는 겸애가 실천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또한, 상동을 통해 통일된 가치체계가 전체주의 사회처럼 경직적이고 탄압적으로 피지배자의 일상의 모든 영역들에 간섭하는 형태가 아니여야 한다. 칸트와 롤스와 같은 자유주의적 철학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외재적으로 의미와 가치가 이미 주어져 있고 우리는 이를 추구해야 한다는 유연하면서도 형식으로 겸애가 이루어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