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과 명-청 전환기에 있어서관료의 태도 변화Ⅰ. 서론원 이전의 국가 송은 전형적인 한족 국가로서 전형적인 중화 문명을 표방하였다. 이후 이민족 국가인 원이 세워지고 다시 명이 세워졌다. 명은 한족 왕조의 부활을 표방하고 원을 물리쳤다. 명 이후 청이 세워졌으나 청 또한 원과 같은 이민족 국가 체제였다. 정말 명은 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만약 원의 요소를 받아들였다면 명은 또 다른 이민족 국가인 청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던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중국을 이해하고 바라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의문점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진과 한, 수와 당, 송과 원, 명과 청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다. 바로 한민족-이민족이란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명은 처음, 오랑캐(원)을 물리치고 한족 왕조의 부활을 꿈꾸었지만 실제적으로 명 자체는 원의 요소를 아주 충실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원 이전의 송의 문치주의와 유교이념을 받아들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원의 요소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를 어떻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원과 명, 명과 청의 교체기 속, 즉 이민족과의 관계에서 한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한 역사적 맥락을 재대로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원-명과 명-청 전환기에 있어서 관료의 태도 변화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지금부터 원, 명, 청 시대의 정치상을 파악해 보고 관료의 태도 변화를 통해 원-명-청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해 보고, 중국의 역사에 관해 재조명 해보고자 한다.Ⅱ. 본론1) 원의 정치원나라의 최고 주권자는 쿠빌라이칸과 그 적계(嫡系) 자손에 한정되어 그 권한은 초월적인 것이었다. 정치적 권력을 대표하는 중앙의 주요한 정치기구는 당시 성(省)?원(院)?대(臺)로 약칭되었던 3대 관청인 중서성(中書省)?추밀원(樞密院) 및 어사대(御史臺)였다.중서성은 황제의 명령인 법령을 입안(立案)?기초하는 기관으로 그 아래에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행정 6부를 두고 승(中丞) 아래에 많은 감찰어사를 두어 끊임없이 여러 행정기관들을 순찰해서 부정을 적발하고 또한 민간의 풍기 유지, 교육의 진흥을 맡았다.이상의 3대 관청 외에 재무를 맡아보던 제국용사사(制國用使司), 뒤에 승격해서 상서성(尙書省)으로 개칭한 특수관청이 있었는데, 이는 비상시 국가재정의 어려움을 타개하려 임시적으로 두었던 것으로 목적이 이루어지면 폐지되었다.성?원?대의 3관청은 원래 상도(上都)?대도(大都)를 포함한 직례지(直隷地)를 직접 관할하였으며, 그 밖의 지역에는 이를 대행할 출장기관으로 행중서성(行中書省:약칭 行省)?행추밀원(行樞密院:行院)?행어사대(行御史臺:行臺)를 두었는데, 뒤에 점차 정리되어 상설관청이 되었다. 그러나 군정(軍政)은 일원화의 필요성에서 비상시가 아니면 행원(行院)을 두지 않고 모두 중앙의 추밀원이 관할하였다.지방의 행성 및 행대는 비록 중앙의 성(省)?대(臺)에 비해서 지위는 낮았으나, 모두 황제에 직속되는 관청으로서 절대적인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들 대관청의 아래에 소속되는 지방행정 관청으로 선위사(宣慰司)가, 지방재무청으로는 전운사(轉運司), 지방감찰청으로는 숙정염방사(肅政廉訪司)가 있었다. 또한 이들 관청 아래에는 노(路)?부(府)?주(州)?현(懸)?사(司)의 지방행정관청을 두었다. 지방행정관청의 수령은 대개 그 지방의 지식인을 임명하였으나 지방행정을 점검하는 정치감찰관으로 다루가치라는 관직을 두어 반드시 몽골인이나 색목인(色目人)을 임명하였다. 이와 같은 현지 출신 관리에 대한 감시제도는 정복(征服)왕조였던 원나라의 특징이었다.한편 몽골의 군사제도는 처음에 몽골 귀족의 자제로써 조직된 케시쿠타이라 하는 궁정조직이 있어서 황제의 신변주위에서 호위를 하던 친위군(親衛軍)의 역할을 하였으나 원나라에 이르러서는 의장병(儀仗兵)의 존재로 변하여 그 대신 일반몽골인?한인(漢人), 또는 서방 투르크계 유목민의 정예로써 선발 조직된 시위군단(侍衛軍團)이 군의 중핵을 이루어 황제의 신변과 수도 근교의 경비를 담당하였다.경사(京師)의 주원장(朱元璋)은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뒷받침으로 세력을 펴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곡창지대를 점령하여 군웅(群雄)을 정복하고, 1368년 금릉(金陵:南京)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명 , 연호를 홍무(洪武) 라 하였다. 그가 명의 태조(太祖:洪武帝)이며, 처음으로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채택하고 시정(施政)의 기본방침을 한족의 부흥 으로 삼았다.같은 해 가을에는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北京)를 함락하여 원의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71년 쓰촨[四川]을 평정하여 전국토를 정복함으로써 사상(史上)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전국토를 통일한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 또한 외몽골로 쫓겨 북원(北元)을 세운 몽골민족의 재기(再起)에 대비하여, 다시 둥베이[東北]의 요동(遼東)을 경략하여 몽골과 고려의 연결을 단절하고, 81년 윈난[雲南]을 평정하여 몽골과 티베트의 제휴를 막았다.88년 남옥(藍玉)을 파견해 지금의 노몬한 부근에서 몽골군을 대파하였고, 그 뒤에도 거듭 이를 경략하여 북원을 쇠망시켰다. 이와 같은 건국사정으로 그의 행정은 몽골적 요소의 제거와 한족 사회에의 적응을 목표로 하고 권력이 일부 관료에 집중하는 것을 피하여 호유용(胡惟庸)?남옥 이하 노련한 공신(功臣)들을 대거 숙청(胡藍의 獄)하였다.또한 중앙행정관청인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부를 각각 독립시켜 이를 황제직속으로 하였고, 군사는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 감찰은 도찰원(都察院)을 거쳐 황제에 직결되도록 하는 등 3권을 분립시켰다. 지방에 있어서도 행정은 포정사사(布政使司), 군사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감찰은 안찰사사(按察使司)에서 관장하게 하여 3권이 동등한 권한으로 중앙에 직속되었다. 이와 함께 궁중제도도 간소하게 정비하고 특히 환관세력의 팽창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송(宋)나라 이래의 황제 독재권은 더욱 강화되고 율령(律令)?병제(兵制)도 모두 이러한 방향으로 개정되었다.당(唐)나라 때 집대성된 율령을 형식?내용 등에서 면목을 일신하여 《명률(明律)》 《명성하였으나, 북변(北邊)의 왕들에게는 병권(兵權)도 부여하였기 때문에 그 세력이 강대해져서, 특히 베이징[北京]에 있던 넷째 왕자인 연왕(燕王)은 병력을 강화하여 그의 기반을 지방정권화하였다.태조가 죽고 그의 손자 혜제(惠帝)가 16세로 즉위하여 중앙집권 강화책으로 왕들의 세력을 감축하기 시작하자 연왕은 반란(靖難의 變)을 일으켜 4년 뒤 즉위하였는데, 그가 성조(成祖:처음에는 太宗) 영락제(永樂帝)이다. 그는 대(對)몽골 전략상, 또한 전통적 적대세력의 중심지인 난징[南京]을 피해 베이핑[北平]을 베이징[北京]이라 개칭하여 천도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강남지방과의 연결을 위해 대운하(大運河)를 개수하여 대규모 조운법(漕運法)을 확립, 재정적 기반을 굳혔다.그러나 정난의 변 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따라 환관을 중용하여 밀정정치(密偵政治)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뒤에 화근이 되었다. 그는 내란으로 동요된 외정(外政)을 바로잡기 위해 몽골?만주를 여러 차례 공략하여 헤이룽강[黑龍江]까지 위세를 떨쳤고, 구이저우[貴州]를 내지화(內地化)하였으며, 티베트?윈난을 정복하고 안남(安南:越南)을 병합하였으나, 큰 업적은 남해의 원정이었다.1405~24년 사이 정화(鄭和)?왕경홍(王景弘)에게 선박 60척, 선원 3만을 주어 전후 6회에 걸쳐 인도양안(印度洋岸)에서 아프리카 동안(東岸)까지의 여러 나라에 파견하여 국위(國威) 선양과 무역진흥에 힘써 30개국에서 입공(入貢)하고 한인(漢人)들에게 해외를 보는 눈을 뜨게 하였다.명나라의 기반은 이 2대 사이에 확립되어 15세기 중반 이후는 내정(內政)에 힘을 기울여 왕들의 세력 감축에 성공하였으나 외정에서는 수세(守勢)에 몰렸다. 1449년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부(部)의 남침으로 친정(親征)에 나선 영종(英宗)이 포로가 되고(土木의 變), 수도도 포위되어 명신(名臣) 우겸(于謙)의 책략으로 멸망의 위기는 벗어났으나, 이후 장성(長城)을 수축하고 9변진(邊鎭)을 설치하여 다수의 병력을 배치하는 등 방위에 힘을 기울였다.]의 치수공사를 진행하는 등 치적을 쌓았으나 시정 10년 만에 장거정이 죽자 환관을 중용하여 내정은 다시 문란해졌다. 이와 함께 발배(拜)?양응룡(楊應龍)의 난 및 임진왜란에 따른 조선에의 원병(援兵)으로 국가재정이 악화되어 이를 광산개발에 의한 상세(商稅)의 증수(增收)로 보충하려 했으나 그것은 단지 주구(誅求)의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 당시 일어난 만주족(淸)의 정토비(征討費)로서 요향(遼餉)이라는 부가세를 두었으며 초향(剿餉)?연향(練餉) 등 갖은 명목의 부가세를 징수함으로써 민폐는 극에 달했다.한편 정계에서는 재야의 비판세력인 동림당(東林黨)과 정신(廷臣)과의 당쟁(黨爭)이 태자 책립문제로 첨예화하여 암흑의 권력투쟁 속에 내외정치는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1627년 의종(毅宗:崇禎帝)이 즉위한 후 환관 위충현(魏忠賢) 일파를 제거하여 당쟁을 수습하였으나 기근농민의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특히 산시[陝西]의 이자성(李自成) 등은 명나라의 수도를 함락, 의종이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하였다(1644). 이자성은 급거 귀환한 명장(明將) 오삼계(吳三桂)와 청군에게 토멸되고, 명의 왕들은 청군에 항거하여 화중(華中)?화남(華南)에서 싸웠으나, 61년 영명왕(永明王)이 버마에서 잡힘으로써 잔존세력의 항쟁도 종식되어 전국토는 완전히 청나라의 세력권이 되었다. 이 44~61년 명의 잔존세력을 남명(南明)이라고 한다.3) 청의 정치뒤떨어진 소수민족이었던 만주인이 광대한 중국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민족을 개병(皆兵)으로 만들어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한편, 재래 중국사회의 계급지배 위에 타고 앉아 그것과 기본적으로 유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8기의 병제와 중요한 관직에 있어서의 만한병용(滿漢倂用) 정책을 제외하고는 청나라는 명왕조의 관제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우선 중앙에 최고 정무기관인 내각 대학사(內閣大學士), 그 집행기관인 6부?5시(寺) 및 감찰기관인 도찰원(都察院)을 두어 각각 황제 직속으로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중가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