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차. 한국사상의 중층성’에 대해 300자 이상(공백 제외)한국사는 사상과 종교적 측면에서 첫번째로 4~6세기에 걸쳐 불교가 들어오면서 샤머니즘, 토테미즘, 애니미즘 등 기존의 원시신앙이 퇴조했고, 본래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과 가족의 행복만을 기원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지만 불교가 도입된 4세기 이후, 민중에 뿌리내린 7세기후에는 악업을 짓지않고 좋은일을 받들어 행하라는 가치관과 인과응보사상으로 바뀌었습니다. 두번째 변화로써 14세기 후반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이전까지의 불교적 문화가 퇴조하고 정치, 사회의 모든 측면을 유교이념이 지배하며 제사중시, 경로사상, 서열위주 가치관과 가족 위주 사고방식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세번째 변화는 19세기 후반기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서구 크리스트교 문명이 주도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또한 개인주의, 물신주의, 합리주의 ,민주주의적인 요소로써 서구문화도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이와 같이 고대로부터 여러요소들이 결합되어 현재의 한국인의 사상과 가치관을 형성하였고 이를 한국사상의 중층성이라고 합니다.10주차. 전통문화란 무엇인가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고, 선조들의 역사와 삶의 흔적, 생활양식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 땅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현성한것이고, 한 개인의 독자적인 행동이나 사고유형이 아닌 당시 사회를 이루고 있었던 구성원들이 공유한 사고와 행동양식입니다. 또한 빈부의 격차와 신분마다 다르며 고정불변의 것이 아닌 항상 변화합니다. 또한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반이 되고,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해줍니다. 특히 전통문화는 전통의 의미와 문화의 의미를 융합한것으로서 의미를 합쳐보면 한마디로 간단하게, 역사 속에서 우리 조상들이 형성하며 지속된 한 개인의 독자적인 행동과 사고유형이 아니라 당시 전체 집단, 즉 사회를 이루고 있었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공감했던 사고와 생활양식으로 계층, 지방, 신분마다 다를수가 있고 고정 불변이 아닌 항상 변화하는 것으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외래문화를 수용해 토착화 시킬수 있고, 다른 문화를 창출해 새로운 전통문화가 형성되기도 합니다.11주차. 중국의 개혁 개방.1976년 9월의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문화대혁명을 종식시킨후, 1978년 12월 실용주의자인 덩샤오핑 체제가 확립이 되었고, 중국의 국가정책 목표는 경제 개혁과 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의 4대 현대화를 통한 새로운 경제개발의 추진이었습니다. 미국, 일본을 비롯하여 한국과 타이완에 대해서도 경제 협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 이후 중국은 평화적 국제 환경을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어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통한 남북한관계 현상유지를 희망하고, 경제발전의 성공사례로 한국의 발전모델에 기초를 두어 적용시켰습니다. 1992년 8월 24일 한중 양국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수교 직후 한국의 대중국 수출품은 공산품이 주류였지만 중국을 대한국 수출품은 1차산품이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1998년 협력동반자관계, 2003년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 , 국제분업과 상호협력을 강화시킨후 2004년 이후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약국이 되었으며, 폭넓은 인적교류를 동반하였고, 학술, 문화, 예술 방면에서도 상호 긴밀한 교류가 진행되었습니다.12주차11과 일본의 조선침략과 멸망.조선이란 국가가 이성계에 의해 수립되고 국내 정치 안정에 주력하던 때에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남북조내란을 종식시켰습니다. 일본의 정치적 안정에도 불구하고 무로마치기 왜구의 조선 침탈이 계속되어 태조와 태종은 대마도를 정벌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무로마치기 왜구 침탈을 근절시키기 위한 군사적인 징벌이었고 일본이 거주하던 모든 포구를 폐쇄하는 강경책을 세웠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간청으로 3포 개항하고 일본인 거주를 허락하는 회유책도 썼습니다. 16세기 후반까지 일본의 지방호족에게 조선을 상국으로 받드는 조공형식의 기미교린을 유지하며 이원적 통교정책으로서 다원주의적 외교를 추진했지만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으로 단절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에도막부와 기유약조를 체결해 국교를 재개하고, 통신사, 회답겸쇄환사같은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초에 통신사로 이루어지돈 국교가 단절되었습니다. 나가사키를 서양과 교류 창구로 열고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에도막부는 미국과 화친 조약을 맺고, 5개국과 수호 통상조약을 체결해 문호를 개방하여 굴욕적 외교와 국부 유출로 인해 무사들이 반기를 들었고 에도막부가 무너지게 되어 메이지 유신이 수립되었습니다. 이 메이지 정부는 조약체결을 요청했으나 조선에서 거부하여 개국시키자는 주장인 정한론이 힘을 얻었고,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전라도 고부에서 포악한 관리와 외세의 수탈에 맞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서 조선정부가 청에 출병을 요청했고, 청일합의에 따라 일본도 군대를 상륙했습니다. 농민군은 해산했지만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해 친일정권을 세우고 청 군대를 기습했습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미국과 비밀협약으로 대한 제국의 식민지화를 본격화했고, 1905년 11월 제2 한일협약과 1910년 8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해 조선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1주차.역사란 과거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 탐구하는 것이며 Edward Hallet Carr에 따르면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즉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서술했듯이 학문으로써 과거를 기억하고 이야기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거나 무시하면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게 됩니다. 즉 역사없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수 없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역사는 모든 경험에 관한 기록으로써 자신이 살고있는 세계를 이해하거나 지혜롭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교육을 통해 의식이 있는 시민으로서 사회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함과 지성있는 리더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준비가 역사를 배운다는 그 과정이라 판단되기 때문입니다.2주차.유전자 분석을 통한 한민족의 형성에 대해 250자 ~ 300자 서술하기.한민족의 기원에 대한건 대체적으로 mtDNA와 Y염색체 DNA 분석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석기시대에 널리 퍼진 선남방계 (북아시아 지역)과 청동기 철기 시대에 팽창한 후남방계가 3대 7로 혼합되어 mtDNA 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높지만 북방계의 mtDNA는 60%를 차지하며 동북부 시베리아 계통은 상당히 낮습니다. 남방 기원으로 해석되는 mtDNA는 전체의 40%를 차지함으로써, 이러한 결과는 한국인 집단이 북-남방 계통의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구성된 다기원적 집단의 Y염색체 DNA연구와도 일치합니다. 한국인은 베트남, 한족과 계통이 다르고, 조선족, 만주족, 일본인과 가장 가깝습니다.32184508 채명준5. ‘북벌론과 북학론’에 대해 300자(공백 제외) 내외로 서술하기북벌론은 소중화 사상에 입각해 오랑캐 청나라에게 당한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등 수치를 씻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복수하자는 지배층들의 인식, 세계의 질서를 중화와 오랑캐로 구분해 인식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인 존주론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특히 효종이 북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북학론은 발달된 청의 문물 및 생활 양식을 받아들여 백성의 삶을 향상해야 한다는 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조의 경우 천문 역법 정비명목으로 서적, 기구를 청에서 구입하였고, 정조는 내각방서록을 작성케 하였습니다.대표적인 북학론자는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로 청의 선진문물과 청국에 이식된 서학을 이용후생에 활용하기 위해 선진문물을 도입해야한다고 강조했고 정조가 서거한 이후 쇠퇴하였습니다.6주차 남북통일을 위해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해 300자(공백 제외)응어리진 상처와 적대감을 씻어내 서로 갈등을 해소하는 일과,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일, 남북의 인적-물적 교류 확대, 민간차원으로 확대논의, 국제사회의 협력요청등 (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6자회담을 개최하는것도 중요합니다. 남북 인적 물적 교류 확대의 경우 서로 적대감을 해소하고 하나의 민족임을 확인하는 기회로써, 인적으로는 이산가족의 상봉과 고향방문, 국제 대회에서의 단일팀 구성, 문화공연등이 있고 물적으로는 개성공단을 포함한 방법등이 있습니다. 이는 서로 이해할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북한의 개방과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에 기여할 것입니다. 민간 차원으로 확대를 논의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부 당국이 독점을 하는것이 아닌 민간에도 자유적으로 적극개방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