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학교교양 한국사2023-2학기중간고사 예상 답안중간고사 예상문제1. 역사의 정의와 역사학의 흐름, 사료에 대해 설명하시오.2. 북방계 예맥족이 세운 부여, 고구려, 백제에 대해 설명하시오.3. 신라의 한반도, 만주지역 통일 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 통일 이후 민족 통합정책에 대해 설명하시오.4. 조선시대의 과학에 대해 서술하시오.5. 한반도의 전통 의학에 대해 설명하시오.6. 담배의 한반도 전래과정과 조선사회에 끼친 사회문화적 의미에 대해 설명하시오.1. 역사의 정의와 역사학의 흐름, 사료에 대해 설명하시오.역사에서 사는 활을 쏘는 사람옆에서 적중한 수를 기록한 사람에서 유래하여 조사하여 기록하는 작업을 의미하며 역사란 용어는 명나라 말기부터 사용되었으며 과거에 일어난 그 자체를 의미한다.History의 어원은 조사하여 알아낸 것, 과거에 일어난일 의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히스토리아로 유래되었다. 역사학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가 이 history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고, 페르시아전쟁 관련 서양 최초의 역사책을 편찬했다. 동양에서는 중국 한나라 사마천이란 인물이 기존 편년체 방식에서 인물중심으로 서술하는 기전체 방식으로 서술함으로 동양의 역사서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대시대 헤로도토스와 사마천은 역사를 어떻게 기록을 남길지에 대해 사실적 기록의 역사로 역사를 남겼지만 중세에 넘어가면서 철학적개념과 역사학점 개념이 결합되면서 다양한 역사학적 이론 확립이 이뤄지려하였다.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역사를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에서의 역사로 2가지로 분류하였다. 객관적 의미의 역사는 원래의 사실 그대로의 사실로의 역사이고 주관적의 역사는 역사가가 그걸 어떻게 해석하여 기록으로의 역사를 말한다.이렇게 헤겔의 관점에서 역사학은 전을 바탕으로 재편집한 것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삼국사기가 있지만 아이러니하게 현재로써 너무 고대의 내용이라 1차사료로 고려하고 있다.사료의 특징으로 2차사료보단 1차사료가 신빙성이 높다는 점과 사료는 위조 및 왜곡될수 있다는 점이 있다. 사료의 위조와 왜곡이 가장 조심해야할 점이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파스칼 문서 위조사건과 일본의 구석이 유물 위조사건, 해군사관학교의 총통 발굴 조작사건 등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료를 활용할 때 위작여부와 대소경중의 등급을 매겨 접근해야 하는데 이를 사료비판으로 한다. 사료비판은 기록이 적힌 종이의 질, 잉크, 필체를 검토하여 밝히는 외적 비판과 사료에 사용된 던어 의미와 역사적 사실일치를 밝히는 내적비판으로 나눌 수 있다.그래서 번거롭고 힘든 과정일지라도 역사는 사실만을 근거로 하여 해석되어야 하기에 치밀한 사료비판과정을 통해 얻어져아하고, 이렇게 얻어진 ‘사료’만이 추후 역사가들의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과 현재의 관점이 아닌 당대의 관점으로 시대를 이해하여 하나의 역사로 이뤄 질수 있다.2. 북방계 예맥족이 세운 부여, 고구려, 백제에 대해 설명하시오.예맥족은 예족과 맥족의 종족을 합친 말로 우리민족은 예맥족으로 이뤄져있다. 부여는 3~4세기까지 존재한 동명성왕이 세운 만주일대에 위치한 국가이다. 동부여,북주여,졸본부여 등의 호칭이 있으며 연맹체국가형태로 마가,우가,구가,저가로 이뤄진 사출도로 다스려졌다. 중국역사서에서는 후에 부여를 계승한 두막루란 국가가 있다고 서술되어있고, 주서,위서,삼국사기에도 부여의 계승의식이 나타나며 고구려, 백제(남부여)는 국가는 다르지만 부여를 계승한 같은 종족적 특성을 나타냄을 확인할 수 있다. 부여의 어원은 자연적으로볼 때 뻘의 어원으로 평야지역을 이루었다와 원거주지 녹산에 사슴이 많았기에 만주어 puhu 로 부여임을 말하며 사슴과 대평원의 의미가 부여가 아닌가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위치한 발해는 부여사슴을 귀하게여겼다와 같이 부여계승을 확인할 수 있다.고구려는 주몽 동명신화가사적 의의, 통일 이후 민족 통합정책에 대해 설명하시오.삼국이 정립된 이후, 신라는 선진문물의 입수 창구로 고구려와의 동맹으로 백제,왜,가야에 대항하기위해 군사적인 지원을 받아 성장을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지나친 정치 간섭으로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으로 눈을 돌렸고 백제가 남조의 양에 사신을 파견할 때 같이 보냈을 때 영향을 받아 신라 법흥왕떄 불교를 공인하는 등 백제의 도움과 시책모방을 통해 자체 발전을 나아갔다. 또한 백제만으로는 일정한계가 있다는점을 느껴 진흥왕때 개국이란 연호를 사용하며 새로운 변신과 독자노선의 선언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한강유역을 얻어냄과 백제 성왕을 죽였고 이에 백제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었다.고구려의 수나라와 당나라의 지속적인 전쟁과 백제의 대야성 함락등 증훙 준비로 국내 정세가 불안해지게 되었고, 백제 의자왕이 신라를 대상으로 전면전 수주의 공세로 한강유역까지 위험에 빠지게 되자 신라는 고구려에 김춘수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고초만 격고 아무런 소득이 얻지못하였고 다시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나당연합이 결성하게 되었다.신라는 백제땅을 당은 고구려땅을 차지한다는 구두의 약속을 믿고, 백제·고구려 순으로 멸망시켰지만 당은 신라를 차지하려는 속셈을 보였고 신라도 당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669년 전쟁이 발발하였고 고구려·백제 부흥군과 합세하여 마침내 676년 기벌포, 매소성 전투의 승리를 기점으로 당을 몰아내어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1960년대 이후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발해가 출현하면서 통일신라시대, 남북국 시대란 용어 문제도 있었으며 주민과 영토전부가 남김없이 편입되지 않았다는점, 일제강점기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같은 민족끼리의 싸움에서 외세를 끌어들여 적절치 못했다는 평이 있었다. 하지만 그당시 삼국은 서로 같은 민족으로 인식하였는가 라는 의문이 남으며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평이다르다는 점을 알고있어야한다. 그래서 일통삼한이라는 민족적 개념보발전을 이룩했다태조 때와 달리 백성들의 모습, 농업 형상에 초점을 세워 과학기술을 발전하였고 훈민정음과 특히 천문학,지리학, 의학 분야에서 성과를 보았다.천문학 분야에서의 성과는 역법의 정비와 천문관측기구의 창제를 들 수있다. 우리소유의 달력을 만드는 방법을 기록한 칠정산이 있다. 칠정산 내편은 원의 원의 역법 수시력을 참고하였고 외편은 아라비아 역법을 기준으로 하였다. 우리나라 역법인 일월식 가령은 왕의 전통성을 긍정적인 요소로 백성들의 농사측면으로 기록되어져있다. 이런 우수한 역법을 바탕으로 각가 표준 시보체제도 정리하였다. 정확한 천문관측과 시간을 알려주는 ‘관상수시’는 백성들을 이끄는 왕의 의무이자 권리였기 때문에 장영실이 제작한 이천루, 앙부일구 해시계가 대표적이다. 앙부일구는 우리만의 독특한 해시계일뿐만아니라 대중을 위한 최초의 시계로 백성을 중심으로 두는 세종의 모습을 알 수있다. 또한 강우량을 측정하기위해 측우기와 측우대, 수표와 수표교를 설치하였고 이 역시도 하늘의 명을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제왕의 모범을 보이는 사업으로 볼 수 있다.지리학 부분에서 태종때 혼일강리 역대국도지도를 제작하였다. 중국중심으로 되어있고 중국이후의 중심은 우리 조선이라는 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함을 알 수 있다. 그후 동국지도를 제작하였고 세종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으로 종합 하였고 후에 신증동국여지승람로 편찬했지만 그당시 지도그리는 것이 기밀 이기에 그림과 글로만 이뤄져있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각 지역에 관련된 역사와 기록들을 잘기록하였기에 역사를 펼칠 때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 조선의 지도 만드는 기술의 집약체가 바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임을 알 수 있다.그 외 수학에서는 구수략,마방진,산통이 있었고 화약무기 기술에서 총통등록을 편찬하여 무기에 대해 정리하였고, 금속활자기술로 계미자,경자자,갑인자로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여러 책 인쇄를 위해 주자소를 설치하여 중국보다 더 뛰어난 인쇄기술을 발전시킬수있었다.조선후기에 들어서는 과학이 쇠퇴하였지만 성리학 기준으로 과학이 또 양에서는 주술적의미가 강한 성형수술과 외과 수술이 발달되어 있었고 대표적으로 진한에서 행해진 어린아이의 머리를 누르는 편두를 꼽을 수 있다. 한의학은 우리만의 독자적인 의술로 발전했지만 한의학의 한자 나타날 때 ‘한’자가 중국에 영향을 받을 정도로 우리 의학은 중국에 많은 영향을 받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한반도의 최초 의료활동은 삼국유사- 단군신화에 기록되어있는데 호랑이와 곰에게 쑥과 마늘을 처방 했다고 묘사되어있다. 제왕운기에서는 약을 마셨다고 표현이 되어있는데 이는 쑥과 마늘을 처방했다는 의미가 처방전으로 부족들에게 치료활동을 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황제내경에서 만주,한반도만의 특유의 의술인 편석이 있다는 것을 알 수있으며 실제 함북 경흥군 옹기면 송평리에서 침이 발굴되어 침의 역사가 신석기까지 기원됨을 확인할 수 있다.과거 역질과 역병은 왕에 대한 잘못으로 생각하여 주술적 행위인 벽사의식이 진행되었는데 오늘날까지도 오랜 시간 치유행위로 행해지고 있으며 삼국시기에는 승려들이 이관하여 불교적의식으로 수행했다. 고려노사방, 신라법사방에서 간략한 약재의 내용으로 어떤 병이 있었는지 추측을 할 수 있다.백제 성왕이 양나라황제에게 의사를 파견을 요청한것과 중국 오나라 지총이 고구려를 거쳐 일본으로 중국의 의학이 정착되었다고 서술할정도로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동북-한반도과 중국,일볼의 활발한 교류안에서 의학이 발전되었다. 실제로 동옥저, 백제, 신라, 고구려 국가에 현재 기록으로는 어떤 행위를 했을지는 모르지만 의학을 담당하는 관직이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의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존재하였다. 하지만 의학은 중앙중심으로만 이뤄져 민간에 혜택이 전해지지 않아 민간은 민간의학이 발전되었다.고려시대 때는 혜민국 등 대민의료지원 전담 기구가 출현했으며 도호부,목,군에 의학관직을 두었지만 중앙에서만 있거나 호족들을 위한 서비스로 민간에서 크게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향약구급방이란 우리나라 최초의 약재서를 만들었지만 후에 고려시대 의학관련자료가 소략되여 연구가져왔다.
교량설계 설계조건<2경간 연속보> (작은 계곡사이를 지난다고 가정)교각T자형 4차선 길어깨 1.5m 가량경간장25m~35m자동차 전용도로중앙분리대 설치(폭 조사)교량 전체 길 어깨 4차선 폭(인도 불필요)노변 필요(길어깨, 길 가에 있는 공간)1등급 교량 으로 설계 (DB24 트럭하중이 다닐 수 있도록)충격하중 고려(교량이므로)지진하중 고려?(수평x, 수직으로)활하중 조합 최소 7가지 이상상판 두께 250mm 이상확보콘크리트 구조 상부구조(거더와 상판을 의미)[27Mpa 이상], 하부구조[24Mpa 이상]기초 직접기초(기초가 암위에 바로 있다는것을 의미)상부구조 중량 10% 교자장치(상부구조물 지지하는것 즉 교각,교대 상부)에 교축직각방향 재하(기둥에 축력+모멘트 작용)하천중앙 교각, 교대는 양쪽 재방에교대기초 교각기초 레벨차이 고려시간있다면 사용성, 철근 정착문제 검토 [설계기준을 다만족시키면서 거더의 높이를 줄이는 방향으로 최종 설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