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로고 이미지첨부과목명지도교수교수님단과대이름학과학년학번이름6.25전쟁목차Ⅰ.서론Ⅱ.본론1) 6·25전쟁이 일어나기전 상황2) 마오쩌둥, 스탈린, 김일성의 무력남침 계획3) 전쟁의 발발4) 유엔군의 파병& 맥아더장군 유엔 사령관 임명5) 남북 전쟁 상황6) 휴전협정Ⅲ.결론1) 한민족에 미친 영향2) 6.25전쟁이 북한과 남한에 미친영향3) 국제관계상의 영향4 )경제적 영향5) 군사적 영향6) 사회적 영향7) 6.25전쟁의 의의Ⅰ.서론6·25전쟁은 대한민국에서 발발한 70년 채 되지 않은 한반도의 가장 마지막 전쟁이고 민족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건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대한민국전체는 황폐화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또한 약 천 만명의 이산가족이 발생시켰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은 한반도에서 겪은 어떠한 전쟁보다도 우리 민족에게 매우 큰 상처와 고통으로 다가왔고 이로인해 우리민족은 전례 없는 비극을 경험하였다.예전부터 6·25전쟁이 가지고 있는 민족사적, 세계사적 중요성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현실과 여러 사실을 다양한 각도와 시각에서 조명하려는 국내외의 활발한 이론적 시도들이 진행되어왔다. 소련과 중국의 한국전쟁에 관련된 문서들이 공개된 이후 전쟁 발발 약 70년이 되는 시점에서 6·25전쟁과 관련한 여러 문서들이 공개된 이후 기존에 존재하던 이론적 쟁점들을 재조명하려는 시도들이 국내외에서 또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이와 같이 기존에 존재하던 연구 쟁점들을 다시 정리하고 이에 기초하여 이후 연구과제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제시하면서 6·25전쟁을 이해할 수 있는 이론적·경험적 근거들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현재 대한민국과 북한은 전쟁 가능성이 상존하는 불확실한 분단상태에 있다. 6·25전쟁의 배경과 발발과정, 6·25전쟁과 관련된 여러쟁점들을 연구하고 6·25전쟁 이후 남아있는 남·북에 관련한 여러 정책들과 통일 문제를 현대세대들이 해결해나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따라서 6·25전쟁의 시기별 구분에 만 소련 군사령관은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결국 유엔 소총히에서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를 결의하였고 1948년 5월 남한만 선거를 하였고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하여 9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를 선포하여 공산주의으 여러나라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승인하였다. 이에따라 한반도에서 남한과 북한이 각각 다른 정권을 수립하여 분단을 공식화 했다. 1948년 10월 북한이 미국과 소련 군대이 철수를 요구하였고 1948년 10월 소련군대가 철병하였고 1949년 6월 미국은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기고 남한에서 철병하였다.북한은 일본으로부터 매우 거대한 준공업 지대를 물려받았고 김일성 내각수상 선임 등 빠르게 독재 체제를 구축하여 당시 북한은 무력침공의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소련이 북한의 남한 공산화 계획을 매우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반면에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는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잡는 것만으로도 벅차 북진통일주장은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보다는 북쪽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다.2.마오쩌둥, 스탈린, 김일성의 무력남침 계획김정일은 무력 남침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김일성은 소련을 동원한 무력남침의 계획을 스탈린에게 알렸고 스탈린은 아직은 남침의 전력이 완벽하지 않다고 북한을 말렸지만 이를 위해 소련은 북한에게 많은 무기를 지원하며 무력남침의 준비를 격려했다. 스탈린은 북한에게 남침전쟁을 마오쩌둥과도 협의하도록 권유했고 마오쩌둥과 협의결과 마오쩌둥 역시 스탈린의 주장대로 전쟁을 유보할 것을 권유했다. 남침을 위해 마오쩌둥은 북한에게 중국인민해방군 내 조선인 2개 사단을 북한에게 지원해 주었다. 소련이 전쟁을 유보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소련은 원자탄을 보유하지 않아서 미국의 원자탄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1947년 6월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자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삼척일부지역 점령을 요청했고 북한은 남로게 계획한 전쟁이다. 김일성, 마오쩌둥,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계획을 크게 3단계로 나누었다. 첫 단계에서는 서울지역점령, 두 번째로는 대전까지 점령 세 번째로는 부산까지 완전히 점령하는 계획을 세웠다.이와 같이 소련은 남침작전을 지휘하는 데 깊이 관여를 했다.3.전쟁의 발발1950년 2월16일 스탈린은 남침 날짜를 6월25일로 승인하였다. 마오쩌둥 스탈린 김일성이 남침 전쟁 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고심한 것은 미군의 전쟁 참전 가능성이었다. 미군의 전쟁 참전가능성에 대한 대책으로 김일성과 스탈린은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전쟁을 빨리 끝내버리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북한이 남침에 대해 세세한 전략을 세우고 있을 당시, 대한민국은 북한의 대규모 무기와 병력이동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고 북한의 기습 남침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 또한 6월23일 부로 경계강화조치를 해제시켜서 전방부대 3분의 1이 외출이나 휴가를 나가서 대한민국은 의도치 않게 북한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고 있었다.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도선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사전에 미리 계획되고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초반에 유리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김일성은 북한의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이 북한의 모든 평화통일 제의를 거절했고 오늘 아침에 옹진반도에서 북한을 공격해 북한은 이에 대해 반격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선제 남침을 은폐하려고 했다. 북한군은 거의 모든 면에서 남한보다 유리했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군은 6월25일 개성, 동두천, 포천, 파주를 거치고 중부전선에서는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격하였다.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이 단순히 한 민족 내부의 분쟁이 아니라 세계 자유 진영에 대한 공산 진영의 공격이므로 세계자유진영이 총 반격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4.유엔군의 파병& 맥아더장군 유엔 사령관 임명7월7일 유엔군이 파견되었고 7월말 남한군 낙동강을 최종 방어선으로 지정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사실을 보고 받고 매우 격노하며 “남한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였다가 반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차 방어선을 한강을 시작으로 2차방어선을 금강방어선, 낙동강을 3차방어선으로 정하였다. 북한군에 밀려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8~9월 중순까지 낙동강 전선에서 전쟁을 계속하였다. 유엔군 상륙 부대가 한반도 중부에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면 낙동강 전선에 유엔군에 대해 반격을 한다는 계획이였다. 인천상륙작전 후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유엔군과 국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이승만대통령은 북한의 침공으로 38선은 없어졌고 북한정권을 몰아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38선을 넘어 북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50년 9월에 이승만 대통령은 38선 돌파에 관한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50년 10월1일 국군3사단이, 7일에는 유엔군이 38선을 넘었다. 10월19일 국군1사단이 가장먼저 평양에 입성하고 국군6사단은 압록강에 도달했다. 또한 유엔군도 한반도에서 공산군을 몰아내기위한 마지막 공세에 돌입했다. 김일성은 다급하게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또한 김일성은 10월 12일 비밀리에 평양을 탈출하고 14일 덕천으로 이동하여 19일 평안북도 대유동으로 이동하여 이후 압록강변 오지로 옮겨 다녔다.소련과 중국은 전쟁 참전을 결정하였다. 마오쩌둥은 “순망치한 즉,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것처럼 북한이 망하면 중국이 위태로워진다.”라고 주장하며 군대를 보냈다.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이 가진 것처럼 북한군의 작전권은 중공군에게 있었다. 1950년 11월 소련군이 참전하였다. 중공군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한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렸고 11월1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공격을 했다. 이로 인해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고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11월27일부터 12월11일 15일간 함남 장진호전투에서 사상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 1950년 12월15일부터 12월23까지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성공적으로 철수 하였다. 유엔군은 자유를 원하는 북한주의 안보를 약속한다는 방향으로 기울어졌고 이승만은 1953년 6월18일 2만7천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했다. 이는 미국의 소극적인 자세에 대해 압력을 넣고 방위조약체결에 대한 입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이루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미국은 정전후에 한국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하기로 약속했다.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전제하에 휴전협상을 받아들이고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에도 협조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1954년 7월 27일 오전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3년1개월2일 총 1129일 동안 계속되었던 6.25전쟁은 휴전상태로 들어갔다.Ⅲ.결론1. 한민족에 미친 영향대한민국은 전쟁으로 인해 매우 큰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대한민국의 군인 전 사상자와 실종자는 약62만명, 민간인 사망, 부상, 실종자는 약99만명, 유엔군 사상자는 약 15만명에 달했다.또한 이산가족이 1000만명에 달했다. 북한 측도 많은 인적, 물적 피해가 컸다. 6.25전쟁은 대한민국의 국민의식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을 겪으며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애국심과 국민의식을 갖게 해 주었다.2. 6.25전쟁이 북한과 남한에 미친영향6·25전쟁의 피해는 북한에서 더 컸다. 유엔군의 화력이 훨씬 더 강하였고, 특히 중공군의 참전 이후, 그리고 휴전협상의 막바지에서 공중에서 집중적으로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피해 차원뿐만 아니라, 6·25전쟁은 북한사회 전반에 대하여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쳤다. 6·25전쟁이 이처럼 독특하고 치열했기 때문에 그것이 교전 쌍방의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 또한 매우 크고 깊었다. 6·25전쟁이 미친 정치·사회적 영향은 남한이 심각했다.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정체와 남한 사회의 개방성이 전쟁의 상처를 더 심하게 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대한민국의 정치에 미친 중요 영향으로는 통치의 독재화, 반공(反共)의 공고화와 중도파(中道派)의 몰락, 대미(對美)의존의 심화 등을 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