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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사대부의 묘지 건립 의미 탐구 - 분수원 산송(山訟)을 중심으로 -
    조선 후기 사대부의 묘지 건립 의미 탐구- 분수원 山訟을 중심으로 -심**강의명 : 한국사 입문1. 서론2. 분수원 산송의 전개 과정3. 분수원 산송의 묘지 건립 특징1) 묘지 건립의 확산과 변화된 인식2) 묘지 건립의 폐단4. 결론5. 참고문헌본문요약 : 본 보고서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정치적 혼란기의 영향과 관련하여 산송을 주제로 다룰 것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 사이 일어났던 산송 중에서 현대까지이어진 ‘분수원 산송’을 중심으로 사대부의 묘비 건립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살펴보고자한다. 당시, 묘비 건립은 사대부 자신들의 명예가 걸려있는 문제였다.1. 서론왕권 혹은 가문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왕과 사대부들은 다양한 노력을 했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요히 여겼던 유교적 조선 사회에서 묘지를 건립하는 일은 큰 의미이다. 조선 건국 이후 성리학적 기반으로 고려와 달리 다른 방법으로 통치체제를 만들었고, 종법 의식이 확립되면서 조상의 분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묘지를 세우는 행위는 조선이 건국 초기에 왕들의 왕권을 다지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다. 이에 따라서 사대부들도 점차 묘를 건립하고 조상을 모셨다.조선의 능묘제도는 중국의 역대 왕조 능묘제도와 고려 시대 제도를 참조하면서 조선의 사정에 걸맞게 변형되었다. 직접적인 영향을 준 나라인 명 건국 이후, 주변국들에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조선 또한, 명의 제도를 받아들이고 한과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묘지 제도를 세분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왕릉을 제외한 신분에 따라 묘지의 면적, 규모, 사용되는 재료의 종류 등을 제한하면서 묘지의 무한적 확장을 제재했다. 신분사회의 발전으로 반영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분별한 묘지 확장으로 인한 영토 점령을 막기 위해 영토를 효율적 이용을 도모하였다. 이렇게 묘지 제도가 점차 구체화하여가고 임진왜란이 발생하면서 조선 후기에 최고조로 사대부들 사이의 묘비 건립이 유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사대부들이 묘비 건립에 서로 초점을 두면서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끝나지 않고 현대까지 긴 기간 동안 끝맺음을 쉽게 하지 못했는지 자세히 탐구할 것이다. 그리고 왜 이렇게까지 묘지 터를 지키려 했는지 표면적으로는 조상의 수호를 위한 위선 의식으로 알려졌지만, 목숨을 걸면서까지 조선 후기 사대부들 사이 명예가 달린 내면적인 또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선 후기 청송 심씨, 파평 윤씨 사이 오랫동안 지속한 파주에서 일어난 분수원 산송을 중심으로 전개 과정을 탐구하면서 당시 지식인들의 묘지에 대한 인식과 끊임없이 지속한 산송의 내포된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2. 분수원 산송의 전개 과정청송 심씨 가문과 파평 윤씨 가문은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가 문중들이었다. 17세기 효종 대 청송 심씨 영의정 심지원(1593~1662)은 1614년, 부친의 묘를 파평 윤씨 윤관(1040~1111) 장군의 묘역 바로 위에 조성하였다. 44년 뒤인 1658년, 국가에서 이 일대 땅을 하사받은 청송 심씨 문중 묘역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1662년 바로 이곳에서 심지원의 묘를 조성하였다. 심지원은 윤관 장군 묘가 자신들의 묘역 아래에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윤씨가에게선 먼 조상인 고려 시대의 시중 윤관 장군 묘가 경기도 파주에 조성되어 있었는데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실전된 묘를 다시 찾으려 했다. 윤관 묘가 경기도 파주의 분수원에 있다는 예전 기록에 근거하여 그 일대를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비석 조각(묘갈) 두어 쪽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청송 심씨 심지원 묘의 바로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심지원의 묘 앞에 방치된 묘를 윤씨가 입장에서는 윤관의 묘라고 추측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분수원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에 의지하였다. 설의 주된 내용은 심지원 묘 앞에 방치된 묘가 하나 있는데 이 묘를 윤관의 묘라고 했다. 그리고 분수원에는 여출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윤관의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이 묘가 윤관의 묘라고 입증하기 위해서는 묫자리를 파헤쳐야만 총괄하였다. 심씨가에서 그런 현조의 분묘를 쉽사리 옮겨줄 리 없었다. 과거의 위상과 달리, 산송이 시작된 시점으로서는 청송 심씨가의 위상은 예전과 같지 못했다. 심지원의 넷째 아들 심익창은 1699년,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을 저지르게 된 사건인 기묘과옥(己卯科獄)으로 유배까지 보내는 지경까지 이르러 쇠락한 양반가로 전락해버렸다. 심씨가의 입장에선 현조인 심지원의 묘를 이장한다면 남아있던 위상마저 져버리는 셈이었다.분수원 산송은 분묘가 위치한 인근 고을인 고양, 파주, 고하에서 사건을 담당한 세 고을의 수령들이 소송인과 인척 관계라면서 모두 피혐하여 해결되지 못했다. 그리고 재상을 지낸 명문 사대부가로서 두 가문의 송사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결국,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문제가 확대되어서, 조정이 소란스러워지자 왕이 직접 나서서 화해하게 하였다.1764년(영조 40) 6월 14일, 영조는 윤관과 심지원의 묘에 모두 제사를 하사하면서 각각의 조상의 묘를 수호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윤관은 고려의 명재상이고 심지원은 조선의 명재상이니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을 순 없다며 두 분묘 모두 왕명으로 제사를 하사했다.이러한 왕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산송은 더 격화되었다. 윤씨의 후손들이 심지원 분묘 앞의 계체를 허물었고, 나중에는 심씨네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와서 폭력 사태까지 일어나버린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 산송은 때에 따라 편파적으로 적용되어 억울한 판정을 받은 측은 죽기를 각오하고 소송해갔다. 청송 심씨와 파평 윤씨 가문은 서로 상언을 올려 자신들의 억울함을 왕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결국, 명분 있는 사대부 출신인 두 가문은 소송에서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조정을 어지럽게 하는 상황에 왕은 매우 분노했다.“임금이 ‘윤희복·심정최는 세가의 대족으로서 조정의 덕의를 몸 받지 못하고 서로 다투었으며 번거롭게 잇따라 호소하였으니, 엄하게 처치하지 않으면 기강을 무너지게 하고 풍화를 위태롭게 하는 일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고 하고, 드디어 친문하겠다는 명령을이 끝맺음했다.3. 분수원 산송의 묘지 건립 특징1) 묘지 건립의 확산과 변화된 인식파평 윤씨 가문은 고려 사회에서 문벌귀족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윤관 장군의 활약으로 기세를 넓히고 있었다. 윤관은 사후 파주 분수원에 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1392년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렇게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윤관의 후손들은 윤관의 묘를 실전해버린다. 그런데도 파평윤씨 가문은 고려조에 이어서 조선조에서도 기세를 넓혔다. 세조비 정희왕후를 비롯하여 조선 전반에 걸쳐 여러 명의 왕후를 배출해냈다는 것이다. 파평 윤씨 처지에서 지금으로써는 가문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자기 조상의 묘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았다. 청송심씨 가문 또한, 파평 윤씨 못지않게 조선의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은 집안이다. 이렇게 조선 초기만 해도 서로의 권위를 나름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국가에서 청송심씨 가문이 분수원을 사패지로 받게 되었고, 묘지터를 지은 것이다. 청송 심씨 가문이 분수원을 하사받기 전에 이의를 제기했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굳이 자신들의 조상 묘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당시 성리학적 사고의 틀에서 300년 전의 조상에 대한 예를 수행할 때 묘에서 제사를 지내기보다는 제실에서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제사로 대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16세기 초반, 유교식 상장제도가 정착되면서 묘소에 비석을 반드시 세워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널리 형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으로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국가적 재난 상황 속에서 문화재, 기록물이 유실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실록마저 편찬하기 힘든 상황에서 개인의 문집과 눈에 띄는 증거 자료로 자신들의 권위를 입증했어야 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와 더불어 『주자가례』의 보급으로 조상에게 예를 갖춰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정치,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던 상황에서 신분 질서가 또한 문란했으며 경제적으로 수취체제가 무너져 향리나 부패한이 대표적으로 분수원 산송 또한, 법을 무시하는 폐단이 일어났다.조선 시대의 법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정소 기한과 횟수가 제한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정소 기한이 없다가 《경국대전》이 제정될 무렵에는 5년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정소 기간은 너무 짧았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몇 차례 논의를 거쳐 사건에 따라 대한(大限, 여러 해 동안 해결되지 않은 전지나 노비의 소송에 대해, 연한을 정하여 마무리를 짓는 것을 일컫는 말.)은 60년으로 그리고 소한은 30년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한번 제소할 수 있는 횟수도 제한해, 원고나 피고 중 어느 한쪽이 두 차례 승소하면 패소한 측에서는 억울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더는 소송을 제기할 수 없었다. 이처럼 제소할 수 있는 기한과 회수를 제한하면서 부질없는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려고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소 기한과 회수는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권세 있는 자들이 정소 기한과 회수를 무시하는 사건이 다수 발생하였다. 특히, 빈번하게 일어난 산송에서 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묘지를 건립하려 불법으로 토지를 점령하고 서로의 묘지터를 침범했다고 산송을 하는 등 무분별한 확장에도 법 제도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던 시기였다. 분수원 산송도 같은 맥락에서 왕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억울함에 죽기를 각오하고 소송을 끊임없이 제기해 조정을 어지럽히게 하였다.강력한 유교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조선의 왕과 사대부들은 형기론을 중요시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사대부들과 양민들은 조상의 묫자리를 잘 써서 음덕을 입어 복을 구하려 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신들의 위상과 권위를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 풍수지리사상이 필요했다. 명당을 확보하려는 경쟁으로 이어가 풍수 사상 형기론을 이용한 묘지터의 명당자리를 둘러싼 산송이 이어졌다. 조선 전기에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풍수 사상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분수원 묘역은 물과 깊이 연관된 지역이고, 풍수에서 선호하는 구불구불한 갔다.
    인문/어학| 2021.04.24| 8페이지| 2,500원| 조회(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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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고대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에게 끼친 비극의 사회적 영향 / 오이디푸스 왕을 중심으로
    1.들어가며소포클레스의 손에서 탄생한 수많은 희곡 중세서 대표작인 <오이디푸스 왕>, <안티 고네>,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 등, 기원전 400년대에 탄생한 비극이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문체로서 인정받고 있는 오이디푸스 왕은 현대까지도 전해져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었다.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철학적인 질문들이 현대 사람들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고대 그리스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연극 문화가 크게 번성하였다. 당시 연극 무대를 하기 위한 원형 경기장으로 시민들은 모여서 함께 연극을 즐기고 평가하기도 했다. <오이디 푸스 왕>은 현대인이 느끼는 것과 달리, 오래전 고대 그리스 이 연극을 즐기던 시민들 은 어떻게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원래 신화였던 ‘오이디푸스 왕’ 이 소포클레스의 연극으로 재구성되고 난 후에 고대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에게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로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1. 고대 그리스 연극 문화1.1. 고대 그리스 비극의 형성고대 그리스 비극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아테네에서 큰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정치 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는데, 신성시되던 왕이 사라지고 소수의 귀족이 세력을 키우기 시 작해 참주정으로 바뀌게 된다. 당시 왕은 신권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왕의 몰 락은 신의 세계로 가는 통로의 단절을 의미했다. 인간들이 신들의 세계에 분리되고 사회 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시작점이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변화와 함께 사회 전반적으 로 변화가 있었다. 그중 장례문화에서 매장 풍습이 사라지고 화장 풍습이 생기게 되면서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고찰이 생겨나면서 예술 면에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더불어 종교적 인 측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귀족들은 민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풍요와 다산의 신 ‘디오니소스’를 부활시켰다.먼저 디오니소스 신을 환대하고 즐겁게 하도록 바쳐진 여러 제 중 하나인 무대극으로 시작했다.
    인문/어학| 2021.04.24| 8페이지| 2,000원| 조회(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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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세계디자인탐구_그래픽디자이너 에릭요한슨에 대하여 / Places Beyond 전시회 관람
    평소에 여행하고 전시회를 감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들의 개인 전시회를 둘러보면서 그들만의 영감을 찾고 창의성에 중점을 둬서 감상한다. 레포트 작성을 위해 자료 조사를 수집하면서 인테리어 디자이너, 자동차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듯이 디자이너들이 활동하고 있었다.올해 2월 초 핀란드와 스웨덴을 여행하는 동안 직접 탐방했던 전시회가 떠올랐다. 핀란드의 Design Museum부터 Design District까지, 그리고 스웨덴의 Fotografiska 등을 돌아다니며 북유럽 특유의 디자인 철학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그래픽 디자이너인 ‘에릭 요한슨’을 선정하였다.스웨덴의 대표적인 시각 예술가라고 불리는 에릭 요한슨은 현재까지도 활동 중인 사진가이며, 그의 작품은 다른 사진을 결합하여 만든 초현실적인 세계로 묘사된다. 세계 곳곳마다 자신의 작품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Toyota, Pink Floyd, Volvo, Adobe 회사와 협업을 맺어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예체능| 2021.04.24| 8페이지| 2,500원| 조회(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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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디자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스웨덴 문화의 특징 / 칼 라손, 카린 라손 부부와 제니 니스트롬을 중심으로
    1. 서론실용적으로 널리 알려진 북유럽 디자인은 역사가 뿌리 깊다. 대표적인 나라로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이 떠오른다. 그저 평범하게 앉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의자가 아닌 앉은 상태에서도 자 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의자부터, 디자인 거리, 박물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듯이 북 유럽 국가들은 디자인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나에게 북유럽 디자인이란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세 련된 목재 나무, 단조로우면서도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문화가 떠올랐다. 같은 북유럽 국가인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국가만의 디자인 특징 또한 서로 유사하면서도 각 국가만의 특징은 분명 있을 것이다. 북유럽 디자인은 스칸디나비아풍으로 현대에 와서도 촌스럽지 않고 많 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디자인이며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꽃 피우고 있다. 비록 스칸디 나비아 역사와 더불어 디자인 측면에서 북유럽 국가들의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 지만, 이 국가들 중에서 스웨덴만의 디자인을 넘어서 문화의 특징까지 살펴볼 것이다. 개인의 자 유를 추구하지만 집단 생활 또한 중시하는 문화가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스웨덴은 예로부터 루터 교의 영향으로 예술에서는 절제미를 보여주기도 한다. 겸손하면서도 단순한, 그리고 실용적인 디 자인을 추구한다. 그리고 스웨덴의 대표 디자이너들에게서 사회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은 디자인 의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 스웨덴의 디자이너이자 화가로 유명한 칼 라손 부부와 일러스트 작가 제니 니스트롬의 작업물들을 살펴보면서 스웨덴 문화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2. 칼 라손과 카린 라손2 – 1. 릴라 휘트내스와 정원 디자인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자라 활동했던 대표적인 디자이너 칼 라손의 집은 세계적으로 정말 유명하 다. 집 내부의 벽에다가 직접 엮어서 만든 텍스타일 디자인이 눈에 띈다. 현대 이케아의 디자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체능| 2021.04.24| 7페이지| 1,500원| 조회(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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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후기 전민변정과 조선 초기 노비 정책의 의의와 한계에 대하여
    고려 후기 전민변정과 조선 초기 노비 정책의 의의와 한계에 대하여이름 : 심**1. 서론‘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내용은 고려 시대의 정치 세력, 통치 제도, 국제 관계, 불교사까지 보편적인 고려의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었다. 그 중에서 나는 통치 제도의 개편과 정비 목차에서 전민변정과 노비 정책과 관련된 내용을 비판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2부 통치 제도와 개편의 정비에서는 수령 중심의 군현 편제의 전개와 연속성과 전민변정과 노비 정책, 토지 제도 개혁과 사회 변화, 재정 구조의 연속성과 공납제 등의 내용을 살펴볼 수가 있는데 전반적으로 고려가 어떻게 유지되어 왔고 어떤 형식으로 정책이 개편되고 발전해나간 양상을 살펴볼 수 있지만 한계점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전민변정도감의 시행으로 인한 장점과 단점을 알아볼 수 있고, 조선 초기 노비 정책에 대한 의의와 한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가 있다. 노비제와 전민변정이 고려에게 있어선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한 내용을 상세하게 읽어보았고, 이에 따른 내 생각과 의견을 풀어낼 예정이다. 단순한 정치투쟁으로만 끝나질 않았던 고려왕조가 조선왕조로 건국되기 까지 고려시대에서 두드러졌던 문제점 인 토지제도와 노동력 문제의 모순점에 대한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국가에 있어서 빠질 수가 없는 토지와 노비 정책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2. 고려 후기의 전민변정2.1. 전민변정의 시행나중에 건국될 조선 왕조도 고려 시대에 일어났던 모순된 과전법 시행의 구조를 본받아 개혁하고자하는 노력을 보인다. 세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농업 생산을 통한 조세 수취는 국가 운영에 있어서 가장 큰 핵심 이었다. 말 그대로 조세가 있기에 국가에서 행정을 어떻게 관리하고 유지를 할 수가 있었고, 경제적 측면에서의 고려는 개혁을 단행해왔지만 장단점이 있어 보였다. 고려 초기부터 후기 까지 시기가 달라질수록 그에 걸맞는 조세 수취 제도가 정비 되어야 했고, 그 중 전민변정의 시행은 고려에게 있어서 큰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고이후로 관품에 따라 관료들에게 녹과전을 지급하자는 주장과 사실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관품에 따라 관료들의 수조지를 지급하기 위해 토지와 경작자에 대한 사전 파악이 되어야했었고, 앞서 말했듯이 몽골과의 오랜 전쟁으로 토지는 황폐화가 되고 국가 재정이 축소된 상황에서 백관의 녹봉도 제대로 지급을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국가 회복에 있어서 고려는 하루빨리 행정 운영을 정상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하여 조세 수취를 하기 위해선 이런 부담자의 파악이 정말 중요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토지하 줄어들고 황폐해져 당시의 토지와 인구 공부를 다시 정하도록 멸령을 했다는 것이였다. 상황은 변해가고 있는데 기사년에 정한 공부 액수를 그대로 거두어 들이는 폐단이 일어난 점을 지적하고 전과 구를 파악하기 위해 전민계정을 실시하기도 했다. 즉 이 시기의 전민변정의 시행은 토지와 민을 어떤식으로 처리할건지에 관한 고민부터 파악까지 단행하였던 점이다. 이러한 전민변정사업은 토지와 민을 함께 조사하고 변정하였다. 농업 생산의 노동력과 토지에 있어선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는 이유이다.2.2. 농장의 발전고려의 권력자들은 이러한 전장을 많이 설치하였다. 전장과 사전을 가리지 않고 토지를 확보한 권력자들이 토지를 경영하기 위해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확보하려 했다. 조세를 포탈하고 달아난 자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전장으로 사전을 받았던 사람들이 민을 유인하여 전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원래는 이러한 민들이 원래는 조세를 내는 국역 부담자였던 신분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농장주의 권력에 의하여 농장민으로 존재하면서 과도한 부채 때문에 농장주의 노비로 전환되었는 사례들이 여럿이 드러났다.2.3. 전민변정의 한계점과 의의전민변정의 시행의 한계점이 추후에는 고려에서 권력을 쥐고있던 자들이 농업 경영을 극대화하여 일반 농민들을 노비로 전략되어 버렸다는 점이 노비제도와 전민변정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지속적인 몽골과의 전쟁과 홍건적, 왜구의 침입을 거치게 된다. 이로형성의 사례들이 실제로 있었다. 이러한 두가지 이유를 들어 농장이 발전하게 되었다. 권력자의 토지를 안정적으로 개척할려면 반드시 그 밑의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이러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일반 농민들을 노비로 전략시켜버렸다는 점이 안타까운 점이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농민들을 노비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또한 당시 계속 증대되었던 국역에 대한 부담은 농민들을 스스로 노비로 전략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고려 말의 노비는 상품 가치도 못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양인들이 양반 밑으로 노비화가 되게 되자 국역 부담자가 감소할 수 밖에 었었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양인이 맡았던 조세부담이 줄어들면 당연히 양반 계층에게도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약한 세력의 사람의 노비를 빼앗는 일도 빈번했으며 양인의 급감과 노비 소유 문제는 전계층이 피해를 입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혼란스러운 분쟁을 야기 했다. 토지제도와 노동력 문제는 항상 연관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모순점에 대해서도 고려도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있었다. 충렬왕 때 설치되었던 인물추고별감을 시행하기도 했지만, 효력이 미미했고 16차례 동안 전민변정이 계속해서 시행되었다는 의미는 이러한 문제가 전혀 해결되이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거나 당시 사회상황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하더라도 전민변정사업은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개혁방안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이런 인식하에서 원종, 충렬왕대 전민변정사업도 기본적으로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사업을 파악하면서도, 대외적으로 원의 간섭, 주체세력의 미형성 등의 요인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3. 조선 초기3.1. 노비제도 유지와 문제고려에서 일어난 노비제도의 모순점들은 조선에서도 이어저 해결하지 못한체 더욱 격화되었다. 새 국가가 건국되었음에도 이러한 노비, 노동력 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고려의 옛 제도를 그대로 시행하여 양반 세력들은 여전히 를 두고볼 수 만은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료층은 사전을 혁파한다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말 글대로 노비와 관련된 원 문서를 따져보고 새로운 공문을 만들어 주는 대신 원래 문서는 사전을 혁파한다는 점이었다. 옛 문서를 불태워버리고 새로운 노비 문서로 재감정하자는 의미였다. 이러한 대규모 작업은 정부가 노비와 양반의 소유 관계를 일일이 다 따져보고 노비였던 사람들이 원래 신분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작업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소유권 문제와 더불어 노비를 원래 소유하고 있었던 권력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만을 삼을 수 밖에 없었던 일이었고 어려운 과제이기도 했다. 노비제도 자체를 긍정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어 어느정도 노비 소유관계도 인정하되, 기존의 관계에서 소유권 분쟁이 발생한다면 재변정하다는 주장이었다.대신 이러한 지주 계층에서 노비 문서를 자체적으로 발급하는 것이 아닌 모든 노비 문서는 국가가 관리하고 새로 발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했다. 조선 정부가 노비제도를 인정해줌으로서 옹호했다는 점에서 상하차별의 원리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상하 관계는 자연적 질서이자 인간관계르 유지할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는 논리였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임으로 이러한 노비와 양반관계 뿐만이 아니라 신하와 왕, 부자, 부부 관계 등에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의미였다. 고려 후기 홍자번의 주장에선 노로써 주인을 섬겨야한다고 하여 이러한 주노관계와 부자관계를 동일시 했었다. 주노 관계가 격하게 심화됨으로써 토지제도의 문제점이 일어나고 정상적인 양인의 조세수취를 못하고 있는 가운데 주노관계는 군신, 부자 관계에 있어서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조선에 들어와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신하가 절대적으로 임금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의미였고 절대적 사회관계라는 보편적 의식이 깔려있었고 지주 계층의 권리를 인정해 준다는 것이였다. 주인에게서 노비를 부릴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되며 이러한 사상 고 고려시대 내내 노비제도와 관련된 개혁 조치가 시도될 때마다 이러한 명분 때문에 조선은 노비제도를 옹호할 수 밖에 없었고 문제점은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예의를 중요시하고 유교를 갖추었던 조선이 되는 것에 이러한 것들이 크게 기여했다. 사대부들이 노동을 담당하는 노비를 소유해야만 전통적인 유교 사회를 수립할 수 있다는 논리부터 노비제도가 이 땅의 교화를 실천했다는 등 조선 시대에 들어서서 유교 사상이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있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3.2.조선시대의 신분제조선의 지배층은 노비와 양인이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정교화했다. 노비와 양인, 그리고 양반 등의 신분 체제에 있어서 서로 다른 별도의 존재로 인식이 되었으며 이러한 인식 또한 노비제도를 옹호했다는 점이다. 노비는 죄인의 후손으로 일반 양인과 구별하는 존재이므로 그저 낮게 바라본다는 시선이 깔려있었다. 조선 초기는 이렇게 고려와 마찬가지로 노비제를 존속시키며 고려시대의 노비제 옹호를 보다 구체화 시켜 지배층과 노비의 관계에 있어서 더욱 단단하게 했다.3.3. 노비제도의 한계점앞에서 말했듯이 조선은 노비제도를 존속시킴으로서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노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안고 갔다. 하지만 계속 이러한 상태로 정체되면 당연히 조선왕실에 있어선 피해가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고려 후기 전민변정에 대한 모순으로 인한 노비 문제는 조성 왕실 입장에선 면밀히 검토하여 더 나은 해결책 방안을 제시했어야 했다. 고려시대 때 있었던 노비세전법은 노비 주인이 대를 이어가며 노비 자손을 지배, 사역하는 이 제도였고 그대로 계승이 되었다. 이것은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가혹한 법률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고려의 지배층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양반계층 혹은 지식인 계층은 아무도 이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노비제도를 오호하되 사적으로 소유하고 점진적으로 세습 상속이 되는 것이 보장되면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도 마련했어야 했다. 노비 소유권 분쟁은 대부분 요했다.
    인문/어학| 2021.04.24| 6페이지| 1,500원| 조회(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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