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고문 논쟁중어중문학부 000금고문 논쟁이란 금문 학파와 고문 학파 사이에 생긴 분쟁을 일컫는 말로써 한대 시기 두 가지 유교 경전 사이의 진위와 더불어 기존의 해석과 새롭게 출현한 해석이 가지는 주도권을 두고 발생한 논쟁을 가리킨다. 우선 금문은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 한나라 초 제나라 학자 복생의 기억에 의존하여 당시 통용되던 예서로 기록되었으며 당시의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하여 ‘금문’으로 불렸다. 또한, 금문은 한 무제가 국가 이데올로기인 유가의 학술을 장려하기 위해 오경박사를 두면서 관방학술과 관방교육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는 수단이 되었고, 점차 유가의 경사들이 전수하는 학문은 하나의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학문적 권력 계보를 형성하여 양한 시기를 풍미하였다.이처럼 서한 시기 금문 경학이 국가적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는 동안, 한나라 경제 시기 노나라의 공왕이 공자의 옛집을 허물다 벽에서 발견한 춘추시대의 문자체로 쓰인 경전이 대거 등장했는데, 이 유교 경전은 기존의 경전이었던 ‘금문’과 구별하여 ‘고문’이라 불렀다. 이후 민간에서 학자들이 고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되었고 유가 경전에 대한 연구방식이 금문을 중시하는 금문 학파와 고문을 중시하는 고문 학파로 나뉘어 열띤 진위논쟁과 사상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금문 학파는 ‘글자에 메이지 않고 공자와 육경의 참뜻을 헤아리자.’는 미언대의(微言大義)를 중시하여 옛것을 그 자체로 해석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금문 학파가 전한 말기부터 관료 진출을 위한 세속화된 말단 학문으로 전락하자 이에 반기를 들고 실증성과 역사성에 기초한 경전 해석학을 표방하며 고문 학파가 등장했다. 고문 학파는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자.’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여 현실에 더 비중을 두어 유교 경전을 해석하고 현실에 초점을 맞추어 시대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을 주장했다.이후 금고문 논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어졌다고 알려졌는데, 그 결과 고문 경전의 지위가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동한 말년에 고문 경학이 금문 경학을 능가하면서 위진 시대는 금문을 숭상하는 분위기가 점차 줄고 고문경이 학관에 세워진 것이 이를 반증한다. 무엇보다 금고문 논쟁은 학문상의 논의 이외에도 당시 통치 이데올로기라는 성격과 맞물리면서 보수와 개혁 혹은 구세력과 신진세력의 다툼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다른 학문적 논쟁과 차별점이 존재하며 그 의의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