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ⅱ 우고 차베스의 등장 배경ⅲ 우고 차베스의 행보ⅳ 나가는 말ⅰ 들어가는 말인간은 불완전하며 감각과 추상적인 개념 등 쉽사리 오류에 빠지기 쉬운 허약함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 반대로 인간은 인문적인 주체이기도 하다. 타인이나 외적 현실에 충실하기 보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함으로써 주어진 재능과 소질을 완전히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도 분명 무지하고 가련한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그 가련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불균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당연히 국가도 인간들이 만들어 낸 정의이자 완전하지 않은 지식이기에 분명 불완전하며 균형적이지 못할 것이다. 일련의 예로 효율을 중요시하던 자유방임주의는 기본적인 인권과 빈부격차 등 사회적 문제를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했다. 이로 인해 , 형평과 복지를 중요시 여겨야한다는 하나의 슬로건인 수정자본주의 (제 1의 길)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 또한 부담이 커져 신자유주의(제 2의 길)라며 다시금 효율을 중요시하자는 아이러니에 놓이게 되었으니 앞서 말한 인간은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다시금 보여주는 대목이라 생각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 종식이 가능하다는 새로운 관점으로 개혁을 실천하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였다. 이번 에세이의 주제를 그리 정하게 된 것도 이러한 시각을 제시한 것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다. 고로 , 우고 차베스가 왜 이런 주장을 펼치게 되었는 지 관련 배경과 더불어 그가 실행한 특정 정책을 살펴봄과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이번 시간을 통해 간략히 풀어보려 한다.ⅱ 차베스의 등장 배경베네수엘라는 1950년대 중반 이후 종종 게릴라 운동을 통해 표현되는 군부와 좌익 폭동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정치적 불안정에 직면해 있었다. 이 혼란 속에서 안정적인 정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지도자들은 “1957년 12월 , 기독사회당의(COPEI) 라파엘 칼데라와 민주행동당(AD)의 로물로 베탕쿠르가 뉴욕에서 논의를 진행했고, 결국 1958년 10월 , 푼토피호 협약을 체결하기까지 한다.”(김달관, 2016) 푼토피호 협약은 기독사회당과 민주행동당의 협의를 통한 주권 배분, 이들 당사자 간의 협의를 바탕으로 한 통일 정부 구성, 양당 상호 합의를 통한 최소한의 공동조치 이행 등 세 가지 주요 원칙에 기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민주행동당과 기독사회당 사이에 설립된 푼토 피호 시스템은 석유 이익을 공유하고, 선거 결과에 대한 존중을 보장하며, 양당 간의 민감한 국정 문제에 대한 논의를 용이하게 하며, 선출된 정당에 대한 독자적인 후견주의적 배분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특히, 이 시스템은 체제가 몰락하기 시작한 1989년까지 독점적인 정부의 결정과 집중으로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국가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중앙집권적인 통제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었으며 더불어 '붕당정치'를 내세워 정당들은 사회조직을 조장하고 통제함으로써 시민사회 내에서 이들 정당이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성을 배제하였다. 이에 따라 이 시기에는 기독사회당과 민주행동당이 국가와 사회의 ‘독점적 매개체’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새로운 정치적 인물이 등장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는 앞서 언급한 1989년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며 “가장 불안정하고 양극화된 정치 체제가 되었다. 이유는 1980-1990년대 석유세입의 장기적 하락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50년 정도 유지되었던 환율이 1983년 1달러당 4.3 볼리바르에서 7 볼리바르로 인상되었기 때문이다.”(김달관, 2016) 이러한 상황에서 1988년 민주행동당의 안드레스 페레스가 재선에 성공하게 된다. 그렇게 대통령이 된 안드레스 페레스는 IMF으로부터 긴급차관을 받으면서 IMF가 요구하는 권고를 수용하게 되는데 그것이 대변혁이라고 하는 정책이자 “공기업의 민영화, 공적 지출 축소, 자유화, 탈규제 등으로서 신자유주의 정책이었다.”(김달관, 2016) 하지만 이러한 급진적 전환은 전반적인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정책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의 카라카소(Caracazo)로 이어지게 되었다. 카라카소는 1989년 2월 27일에 일어난 3일 동안의 대대적인 시위였다. 당시 정부는 경찰이 아닌 강력한 군 진압이라는 잔인한 방식을 사용하였고 그러한 과정으로 3000여명의 사람들이 사망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 사건으로 민중들의 불만을 간파한 우고 차베스는 반미와 반 신자유주의를 내걸고 1992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2년간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투쟁은 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게 되면서 기존의 푼토피호 협약에 진절머리를 앓고 있던 서민들의 희망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서민들에게는 하나 뿐인 희망이자 , 빛나던 동아줄이었던 것이다.ⅲ 우고 차베스의 행보(1) 볼리바리안 헌법 : 새로운 사회주의의 시작그렇게 등장한 우고 차베스는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56%에 이르는 역대 최다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기독사회당과 민주행동당 두 보수정당이 번갈아 가면서 집권하던 베네수엘라는 차베스가 이끄는 MVR에 의해서 새로운 정치지형이 형성되었다. 취임 후, 차베스는 공약으로 내걸었던 제헌의회를 국민투표를 통해 소집한 후, 제헌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를 통해 131명의 제헌의회 의원을 선출했다. 제헌의회 의원 중 반대파측 의원은 6명밖에 안될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제헌의회를 통해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라 불릴만한 ”볼리바리안 헌법“을 1999년에 만들게 된다. ”1999년의 새헌법은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대의적·형식적 민주주의와 비교할 때,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새헌법은 더 광범위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고, 국민들이 헌법을 발의하고 공직자를 소환할 수 있게 하고, 지역계획위원회(Local Planning Councils) 등을 통해 시민들이 정치에 보다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김창근, 2010) 이러한 과정으로 차베스 정권은 새로운 헌법을 통해 개혁법안들을 준비했으나 반동보수 , 기회주의적 세력으로 인해 대립과 함께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들은 자본파업과 더불어 볼리바리안 헌법을 역이용해 대통령 소환투표를 감행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차베스는 소환투표에 대응하기 위해 민중들에게 스스로 한 걸음 나아갈 것을 간곡히 요청한다. 그렇게 2004년 8월 15일 , 소환투표 당일 200만표의 압도적인 차이로 차베스의 소환이 부결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고 반동세력의 공세를 민중의 단결된 힘으로 돌파한 희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2) 새로운 사회주의 선언 이후 나타난 공동체 위원회 : 하나의 연결고리이처럼 개정과 대립의 시간이 끝난 차베스는 지난 2005년 1월 세계사회포럼 총회에서 ‘새로운 사회주의’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 선언을 전후하여 굉장히 급진적인 정책을 실제로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그는 “2006년 4월에 공동체위원회법 을 통과시킨다.” (김창근, 2010) 사실 이러한 행동의 기저에는 2002년 제정된 ‘지역계혁위원회법’으로 생긴 위원회의 단점들이 우후죽순 생긴 탓이었다. 일련의 예시로 “공공사업 자금조달과 집행이 지연되는 등 어려움이 있었고 , 시당국은 자주 금융적 관리적 자원에 대한 권한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김창근, 2010)고 한다. 차베스는 이러한 문제의 대안으로 시정부를 우회하여 하부 단위인 공동체위원회에게 직접 국가예산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이로 인해 지역조직과 중앙정부 간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만들게 된다. 그리하여 이 법에 따라 도시와 농촌으로 구성된 공동체 위원회는 사회 프로그램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았다. “2006년 8월까지 1만 4,655개의 위원회가 있었으며, 이는 인구의 거의 5분의 1에 해당한다.”(김창근, 2010) 이 또한 베네수엘라 역사 상 이례적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