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분단과 베트남전의 전개 양상김아영 (인문대학/국어국문학과/2021-12790)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남북 베트남의 성립 과정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프랑스 정부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통상 요구를 거절하였지만, 가톨릭 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설립되었다. 프랑스의 식민통치는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어졌다.베트남 내부에서도 독립을 위한 노력은 계속 있었다. 호치민 등의 민족주의자를 중심으로 1927년 베트남 국민당이 창당되었다.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이 베트남에 진출하였는데, 이때에도 호치민 중심의 베트남 독립동맹회(이하 월맹)에서 프랑스와 일본에게서의 독립을 추구했다.1945년 3월, 베트남과 일본의 이익관계에 따라 바오다이 황제는 일본군에 협력하였고, 일본 영향력 하의 베트남 제국이 수립되었다. 이 때에 일본의 수탈로 인해 베트남은 엄청난 기근을 겪게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호치민의 월맹은 적극적인 독립운동으로 전국민적인 지지를 얻었다. 결국 일본이 항복함과 동시에 소위 8월 혁명을 통해 베트남 제국을 몰락시켰다. 이후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선언과 함께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발표했다.하지만 이들은 통일은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지역의 재점령 의사를 비추고, 열강들도 우호관계 유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연합국 측의 베트남 민주공화국 승인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945년 7월의 포츠담회담에서 북위 16˚선을 경계로 중국 국민당 군대와 영연방 군대가 분할 점령하기로 정해졌었다. 하지만 중국과 영국은 베트남에 대한 월권을 일삼았다. 특히 중국군은 북베트남을 엄청난 수준으로 약탈했고 이로 인해 북베트남의 경제가 위기에 빠지기까지 하였다.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호치민은 민족주의적 전략으로 노선을 변경해 중국군 축출을 목표로 프랑스와 협조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11월 공산당의 해체를 선언했고, 동시에 프랑스와의 협정을 맺는다. 하지만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던 그의 목표와는 다르게 프랑스는 남베트남을 ‘자유공화국’이라고 승인하며 괴뢰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악화된 상황은 프랑스에 대한 월맹의 공격으로 이어졌고, 오랜 기간의 인도차이나 전쟁을 통해 프랑스군으로부터 승리를 얻어낸 베트남은 다시 한번 통일을 이룰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열강의 이해관계로 인해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세계대전 이후 미소의 냉전체제가 심화되었고, 강대국들도 프랑스를 돕고자 하였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 종식과 관련되어 이뤄진 1954년의 제네바 협정에서 북위 17˚ 선을 임시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여 월맹과 프랑스가 남북을 통치한다는 내용에 조인하였다. 왜냐하면 최종선언서에서 남북 총선거를 명시하였으며, 이미 월맹도 전쟁으로 지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선은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베트남의 분단으로 이어졌다. 북베트남은 호치민이, 남베트남은 바오다이 황제의 베트남국이 성립되었는다. 1955년 응오딘지엠이 베트남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공산주의와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이 대치하게 되었다.베트남전의 전개 양상남북 베트남의 대립, 미소 냉전의 결과로 전쟁이 발발했다. 1955년부터 1975년까지 무려 20년이라는 세월동안 전쟁이 지속되었다. 미국이 개입하기 이전의 전쟁은 남북 베트남의 내전의 모습을 보였다. 이후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한 1964년부터의 기간은 미국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국제전적인 성격을 띄었다.응오딘지엠의 베트남공화국은 토지개혁에 실패하고, 독점 권력을 보이며 민심을 잃어가고 있었고, 이에 따라 1960년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 결성되었다. 소위 베트콩이라고 불리었던 이 조직은 남베트남 정부를 공격하며 남베트남 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1964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했다. 이때를 베트남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본다. 1965년부터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로 개입하기 시작했는데, 이 이유는 남베트남의 독립 뿐만 아니라 반공에 대한 미국의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였다. 특히 끊임없는 공격에도 베트콩을 뿌리뽑지 못하고, 게다가 이들이 사이공에서 미국 대사관에 테러하면서 미군은 본격적으로 병력을 증강하였고, 이에 따라 호주, 뉴질랜드, 대한민국 등의 국가의 병력이 추가되면서 국제전으로 번지게 되었다.1967년 말부터는 민족해방전선군대가 미군의 소모전에 대한 한계를 일깨우고 전세를 장악하기 위해 주요 도시 기습공격과, 베트남 전역에서의 동시다발적 봉기를 계획했다. 따라서 테트 축제일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테트 대공세는 미국에게 전쟁이 계속 지속되리라는 점을 각인시키고 이에 따라 미국 내에 반전여론이 일기 시작했다.자국내의 전쟁회의론, 군력의 부족, 전쟁비용의 급증 등의 이유로 1968년 3월 31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존슨은 폭격 축소 및 협상을 요구하였다. 10월에는 미국의 폭격 완전 중지가 있었고 이에 따라 미국과 하노이 당국이 파리에서 평화회담을 가졌다. 이 사이 존슨 이후 당선된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를 추진하였다.파리 평화협정은 별 소득이 없었고, 1970년 캄보디아에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전쟁이 다시 시작되자 미국의 반전여론은 더 강화되었다. 1972년까지 지속되었던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도 평화 협정을 조인하려는 협상이 끊임없이 이뤄졌다. 결국 1973년 베트남 전쟁의 종결 및 평화 회복에 관한 협정, 즉 파리 평화 협정이 조인되었다.한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박정희의 군사 정권은 가난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당시 한국의 경제는 자본이 부족한 상태였다. 박정희는 외국 자본의 조달을 위해 직접 정상외교를 추진하였다. 박정희가 먼제 케네디에게 베트남전 참전을 요청하였지만 이는 반려되었다. 하지만 린든 정부시기에 미국의 한국군 파견 요청이 있었고 이에 따라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이 확정되었다.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1차 파병에서는 의료부대의 지원만이 있었다. 하지만 통킹만 사건 이후 베트남전의 미국화가 본격화되자 후방 지원 부대의 추가 파병이 이루어졌다. 이후 1965년 미군의 피해가 상당하자 한국이 다시 한번 추가 파병을 지원했다. 단 이때 한국군의 현대화 지원 등의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이렇게 참전 기간동안 누적 32만명의 병력을 파견하게 되었다. 1970년에 접어들며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정책에 따라 파병 병력의 철수를 검토하였다. 이후 파리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미군이 철수하며 한국군도 같이 철수하였다.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 5천여 명이 전사하였고, 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또한 전쟁 기간 중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피해만 있던 것이 아니라 전쟁 특수로 인한 득도 분명히 존재했다. 미국으로부터 2억 3000만 달러 가량을 지급받았다. 이 때 얻은 자본으로 대한민국은 엄청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여러 사업에 투자하면서 베트남전 특수를 누릴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파병 이전에 비해 GNP가 5배정도 성장하였다. 또한 베트남전 참전으로 군대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조재현, , 《동남아연구》11, 한국외국어대학교 동남아연구소, 2002.02.동북아역사넷, Hyperlink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edeah.d_0006_0020_0030_0020"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edeah.d_0006_0020_0030_0020.오홍국,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과 국방현대화 과정 분석’, “군사논단”67, 한국군사학회, 2011.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