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의 방법론을 토대로 전기 봉건사회의 배경 및 특징을 논하시오.가장 먼저 마르크스의 방법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마르크스는 역사방법론으로 역사적 유물론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하는데, 여기서 사회적 존재는 경제를, 사회적 의식은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의식을 지칭한다. 이러한 상부구조는 국가나 종교에 의해 형성된다.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은 곧 하부구조인 생산양식(Mode of Product)의 구성요소가 된다. 하부구조인 경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총합을, 상부구조인 사회적 의식은 정치, 법, 국가, 종교 등을 형성한다. 우리는 이를 토대로 전기 봉건사회의 형성과정에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그 전에 역사적 유물론의 개념어를 보다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생산력]은 노동하는 인간이 생산수단을 이용해서 물적 재화를 만들어내는, 사회전체의 총체적 능력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생산력의 지표는 노동생산성(Q/L)이 있으며, 분업(Division of Labor)은 노동생산성을 증진시킨다. [생산관계]는 경제적 과정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의미하는데, 생산 관계는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는지에 따라 규정된다. 직접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할 때 이것을 소생산(자영업자, 자영농)이라고 부른다. 직접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공동소유 하는 것은 공동체 사회이다. 마지막으로 직접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비생산자가 소유하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며, 이는 곧 생산수단 소유에 따른 계급의 분화로 나타난다. 생산양식은 기본적으로 잘 바뀌지 않고, 생산력은 필연적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보통 생산관계사 생산력이 발전하도록 지지하는 상태는 정상적이지만, 이들 사이에 괴리감이 커질 때 생산양식이 급격하게 교체된다.마르크스는 역사 발전 단계론에서 원시공동체, 노예제,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의 4가지 단계들을 제시하였다. 그 중 봉건사회의 전기 부분을 마르크스의 역사 방법론(사적하지만 국경이 안정되고 정복 전쟁이 줄면서 노예의 가격은 폭등했고, 이는 노예에게 대가를 주고 부역노동을 시키는 소작제도가 확대되었다. 그렇게 소작인이 된 노예 계층은 콜로누스(Colonus)라고 불렸는데, 이들의 토지 이동 금지 칙령은 중세 장원제도로의 이행으로 가는 첫번째 계단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패리 앤더슨은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에서 서유럽 봉건제가 출현할 수 있었던 이유를 로마의 노예제적 생산양식과 게르만적 생산양식이 혼합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충분히 타당한 주장이지만, 노예제도에서 장원제도로의 생산양식의 총체적 변화는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고대에서 봉건사회로의 이행 과정을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의 시각에서 분석해 보자.고전 장원은 게르만 왕국의 제도였다. 따라서 게르만 민족이 중세 봉건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을 아는 것은 고전 장원의 역사적인 성립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게르만 촌락 공동체는 전통적으로 계급 관계가 미약한 소규모 민족 집단이었다. 이들은 민족 대이동 이후 로마와 국경을 맞대기 시작하고 그들의 전쟁용병으로 차출되면서 오랜 시간동안 로마의 전제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는 게르만 내부에서 귀족에 해당하는 신분들의 등장을 유발시켰다. 이들은 이후 서로마가 몰락하고 5세기 초 다수의 게르만 왕국이 성립하는 상황속에서 토지와 군사를 거느린 영주(제후)가 되었다.영주들이 대토지를 소유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게르만 왕국의 군주는 정복 전쟁으로 얻은 토지를 무상 증여의 형태로 영주들에게 배분했다. 이러한 은대지 배분은 로마의 제도에서 비롯되었고, 이후 전문 무사(Knight)의 등장으로 인해 이들에게 지급된 생존수단으로의 토지들은 모두 유사한 맥락에서 분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강화된 전문 무사들은 싸우는 자와 일하는 자의 구분을 가져왔고, 일하는 자인 농민들은 영주의 군사적 보호에 대한 보상으로 공물과 노동력을 제공하게 된다.우리는 여기서 토지(생산수단)의 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봉건 질서는 영주들이 생산수단인 토지를 소유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따라서 장원은 촌락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토지와 농미에게 침투한 것’에 가깝다. 봉건 사회의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가 정치적, 군사적 부문의 사회적 분화로부터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상부구조(주종제도, 종교)등이 하부구조(농노 생산제도)를 결정했다고 오인해서는 안 된다. 군주와 영주의 관계를 뜻하는 주종제도(Vassalage)는 단순한 신분제도가 아닌 봉토(Fedum)를 매개로 하는 군사적 의무와 충성을 의미했다. 이는 신분관계가 결성된 배경에 물적인 관계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봉토는 로마시대에 존재하던 부역에 대한 대가로서의 제공된 [은대지]에서 유래했다. 주종제도는 게르만적인 군사적 요소와 로마의 요소(은대지)가 결합된 결과인 셈이다.정리하자면, 사적 유물론자들은 중세 장원제도의 상부구조인 봉건제도와 신분제도가 생산수단(토지)의 소유관계라는 하부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의 3가지 큰 신분 구분을 보면 이를 더욱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직접 생산자인 농노(일하는 자)는 신분 구조의 가장 아래 계급을 차지했고, 이들이 착취와 지배를 견딜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농노제도(Serfdom)는 결국 영주와 그의 토지에 예속된 소농민 간의 관계를 의미한다. 농민들은 생산수단 소유자인 영주에게 예속되어 잉여 생산물과 잉여 노동을 납부해야 했는데, 이들의 납부를 강제하는 수단으로서 “경제외적 강제”가 사용되었다. 이는 아래에서 봉건 전기 사회의 특징을 살펴볼 때 더욱 자세히 논할 것이다.지금까지 전기 봉건사회로의 이행과정과 성립 과정을 마르크스의 방법론 중 생산양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다음은 전기 봉건사회의 특징들을 마르크스의 역사 방법론에 따라 분석해 보자. 마르크스는 봉건사회의 큰 특징 중 하나로 동일 토지에 대한 이중적 토지소유 관게 처분할 권리를 의미한다. 이는 경제외적 강제에 해당했다. 경제외적 강제는 경제 부문 이외에 영주가 피지배계층들에게 행사한 권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영주는 재판권과 치안 경찰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인신 지배권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영주가 장원 내부에서 독점적이고 특권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한 배경으로는 [불수불입권(면책특권)]이 있었다. 국왕은 영주가 소유한 영지에서 직접 조세를 거둘 수 없었고(불수), 행정력 역시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불입). 이러한 불수불입권은 하향적으로 분화되어 피라미드적 계급 형성을 고착화화를 도왔다. 따라서 자연히 국왕의 영향력은 영주의 영지에 미치지 못했고, 지방 분권적 질서가 성립하게 된다. 영주의 봉토 내의 공적 권력 독점이 공고화된 것이다.하지만 농민들이 생산수단인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봉건 전기 사회의 농노는 자유민에서 노예까지 신분이 다양했고, 따라서 이들의 토지소유관계를 확정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이들은 영주에게 토지를 분급 받아 경작하고 지대를 지불하는 직접 생산자였지만, 봉건 사회에서 완전히 직접생산자의 생산수단 비소유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농민들은 스스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소토지(분할지)를 경영할 수 있었고, 채마밭 등은 온전히 농민의 소유였다.봉건 전기 사회의 또다른 특징 중 하나로 고전 장원의 봉건지대를 꼽을 수 있다. 봉건 지대는 생산관계에 따른 잉여의 이전(Transfer)로 인해 발생했으며, 경제외적 강제는 봉건지대가 농민을 효율적으로 괴롭히게 하는 좋은 수단이었다. 고전 장원에서의 봉건지대는 노동지대의 형태였다. 노동 지대는 다시 3가지로 분류되는데, 영주의 직영지에서의 부역노동을 의미하는 잉여 노동과, 농노가 분할지에서 생계를 위해 경작하는 필요노동, 부정기적으로 요구되었던 임시 부역으로 나누어진다. 장원청 수리, 담장 건축등의 임시 부역은 분할지를 경영해야 하는 농민들을 괴롭게 했다.부역 노동 외에도 농노는 예속의 표시로서영주의 것이 아닌 다른 사설 시설의 이용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이러한 생산수단의 독점적 소유권은 영주의 금제권이라고 불렀다.마르크스는 이처럼 전기 봉건 사회를 계급의 착취가 존재하는 상태로 보고, 생산수단의 소유관계가 이 배경에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봉건사회가 가지고 있던 게르만적 공동체의 특징 역시 언급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공유지의 경영과 경작지의 경영 방식 등을 들 수 있다. 개인에게 분할하기 힘든 장원의 외곽지대들은 농민들에게 개방되어 공유지로 사용되었다. 전기 봉건사회의 농민들은 공유지에 해당하는 목초지, 삼림, 늪, 휴경지 등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공유지에서 이루어지는 이삭줍기, 땔감 얻기, 사냥, 방목 등을 통해 최소한의 생존을 이어갔다. 공유지는 중세 농민 경영을 보충하는 필수 요소였던 셈이다.이외에도 경작지의 경영방식에서도 게르만 공동체의 유산들을 살펴 볼 수 있다. 전기 봉건사회의 경작 방식은 소농적 경영과 공동체적 평등원리가 결합되어 있었다. 경지의 보유 형태는 혼재 경지제(Scattered system)과 개방 경지제(open-field system)로 이루어졌다. 혼재 경지재는 토지의 보유 조건을 균일하게 하고 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각 농가에게 배분된 토지를 의미한다. 이는 농민의 평등성을 유지하고 일정한 생산력을 유지하는데 일조하였다. 개방 경지제는 휴경지를 공동의 방목지로서 농민들에게 개방했던 것을 지칭했다. 그러나 이런 평등성은 이후 영주들이 공유지 이용권을 사유화하고 농업 생산력과 상업의 발전이 뒤따르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역사발전단계설의 보편성은 설득력을 잃었지만,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 따라 변화하는 역사를 통찰한 그의 업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 기초해서 중세 유럽 봉건사회의 전기 부분을 살펴보았다. 토지의 배분이라는 하부 구조의 변화는 봉건사회와 장원 농노제의 성립이라는 상부구조의 변화를 유발했다. 이는 영주가 가지고 있던 .
칼 폴라니 :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는 나에게 생소한 학자였다. 그의 명저인 “거대한 전환”도 이 수업을 수강하면서 처음 접했다. 그러다보니 수업시간에 요약된 내용들을 잘 이해하기는 어려웠었다. 호혜성의 원리에 따른 공동체 하의 시장과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를 비교하는 그의 관점은 처음에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책을 펼치기 전에 수업시간의 필기본을 다시 복습하면서도 큰 기대가 없었던 것 같다. 이런 무료한 생각의 전환점은 검색창에 그를 검색하면서부터 였다. 예전부터 책을 읽기 전 저자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미리 접하는 것이 버릇처럼 굳어졌기 때문에, 이번에도 예외 없이 칼 폴라니라는 이름을 어색하게 검색창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나온 결과들은 의외였다. 하나같이 왜 우리가 지금 폴라니를 알아야 하는지, 그의 이론이 지금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역설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 3의 길”이라고 부르는 이 책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왜 사람들은 1944년에 쓰여진 그의 책에서 2020년의 “미래”를 찾고 있는걸까? 지금부터 폴라니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자.사탄의 맷돌먼저 폴라니는 18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시장 경제를 ‘사탄의 맷돌’(Satanic Mill)이리고 부른다. 이 맷돌은 무자비한 힘으로 인간과 자연을 갈아버리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그는 당시의 주류 경제학인 자유주의와 전혀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변화와 진보를 무조건적으로 예찬하는 시각을 반대하면서, 폴라니는 이렇게 말한다. “변화를 통제할 수도 없고, 속도도 너무 빠르다면, 속도를 늦추어서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폴라니는 그가 말한 이 “상식”이 낡은 헛소리로 취급받던 시대에 맞서 차근차근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종획 운동첫 번째 시작점은 종획 운동(Encloser Movement)이다. 비어있거나 공동으로 소유되던 땅에 울타리를 긋고 농경지를 목초지로 만들던 종획 운동은 지금까지 시장 원리에 입각해서 “진보의 한 과정”히 새로운 이론을 개진시키는 책이 아니라,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들을 올려놓은 단두대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그가 발견해낸 주목받지 못하는 여러 가치들을 살펴보면서, 본격적으로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폴라니는 앞서 자생적 진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우선 자생적 진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진보를 위한 모든 개입과 손길이 순식간에 “불필요”하게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는 종획운동에서 정부가 수행한 진보의 속도를 조절하는 규제가 무시당하는 것을 꼬집었다. 그 규제가 없었다면, 진보의 속도가 지나치게 가속화되어 사회 전체의 퇴락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사회의 진보(산업혁명, 정보화 혁명, 4차 산업 혁명 등)는 항상 양날의 검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은 그것을 ‘진보’가 아닌 ‘변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명 역사와 문명은 앞으로 달려나가며 거시적으로 몸집을 불리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작아지고 작은 요소들이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폴라니는 이러한 변화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변화가 당장 진보가 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변화로 인해 낙오된 사람이 새로운 조건에 적응할 것인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스스로의 인간적 모습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변화로 인해 새롭게 창출되는 분야에서 사람들이 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변화의 방향이 아닌 속도에 달려있다.경제적 인간에 대한 반박폴라니가 두번째로 던지는 의문은 더욱 재미있다. “인간 역사의 모든 사회는 정말로 시장경제였는가?” 이를 민주주의로 치환한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2000년 전 아테네에서 실존했다는 사실은 믿기 힘들어하고, 당연히 인류가 진보하며 쟁취해낸 완전히 새로운 변화 요소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시선으로 절대왕조나 중앙집권 고대국가를 분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다르다. 사람들은 종종 당장 400년 전의 왕국에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존재하지 않았음을의 망령이며, 사실 이득과 물물교환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경제를 사회에서 독립시켜 신격화하는 19세기 시장 경제 체제는 근간부터 잘못된 것이다. 사실상 시장 경제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역사는 매우 단기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이 그것이 영속적인 경향인 양 착각해 왔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폴라니는 경제사와 사회학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시각에서 “인간이 물질적 재화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온전히 사회에 종속된다”는 입장을 가져온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서멜라네시아 제도를 비롯한 여러 원시고대 사회를 예시로 들면서, 사람들의 생산과 분배활동이 이득이 아닌 사회적 명예, 공동체의 생존 등을 위해 이루어졌음을 설명한다. 경제적 동기는 오로지 사회생활의 맥락에서 생겨났다.상호성의 원리그렇다면 이런 비시장체제에서 생산과 분배의 질서는 어떻게 보장되었을까? 폴라니는 3가지의 행동 원리를 그 대답으로 제시하고 있다. 가장 먼저 상호성의 원리이다. 상호성의 원리는 주로 가족과 친족을 기준으로 작동하고, 등가교환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노력은 곧 개인과 친족이 누리는 공동체의 이익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이외에도 상호성의 원리는 경제 행위가 사회 관계의 일부임을 보여준다.재분배의 원리두번째가 바로 저장의 측면에서 보는 재분배이다. 집권적인 권력자가 재화를 거둬 들여서 다시 공동체에 나눠주는 시스템이 오랫동안 여러 사회의 조세, 노동분업, 대외 무역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런 식의 행동원리는 사회 내에 존재하는 여러 제도들을 도움을 받아 더욱 많은 효과를 창출한다. 상호성은 대칭성이라는 제도와 상호작용한다. 상호성과 대칭성이 함께 발현하는 “쌍대성”은 트로브리엔드 제도의 섬에서 벌어지는 쿨라(Kula)교역에서 그 예시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권력자의 재분배는 종종 중심성의 원리와 함께 작동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원리에 의해 돌아가는 무역과 국가들이 절대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바빌로무역은 장거리 운송의 문제이고, 마을 장터는 지역에서의 자급자족을 담당한다. 이 두 교역을 구분하는 것은 지리적 거리의 문제이며, 서로는 보완적인 관계이다. 하지만 국내교역의 성격은 이 둘과는 다르다. 폴라니는 국내 전국 시장을 본질적으로 경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폴라니가 설명하는 국내 시장의 탄생 과정은 굉장히 흥미롭다. 그는 시장이 만들어낸 가장 큰 요소인 도시가 오히려 시장을 보호하고 규제하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주목하면서, 도시의 자유민들이 스스로의 권리 보호를 위해 마을 시장과 대외 무역을 구분하고, 이 둘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도시 밖의 농촌들은 당시 도시경제와 대외 무역에서 단순한 백지일 뿐이었다. 진정한 국내 시장의 전국화는 영방 국가(Territorial state)가 등장한 15세기와 16세기, 중상주의체제(Mercantile system)과 함께 만들어졌다. 이 체제는 장터와 도시 간 무역의 배타주의(Particularism)을 없애버렸고, 전국적으로 통일된 시장의 출현을 가져왔다. 그리고 당시 시장 체제에서 지배적인 경향은 경쟁이 아니라 규제였다. 중상주의의 자유화는 규제의 지리적 범위 확장에 불가했던 것이다.허구의 상품화와 이중운동다음은 폴라니가 설명했던 시장 경제의 가장 큰 모순이자 본질인 “허구의 상품화와 자기조정적 시장”에 대해서 좀 더 파고들어가 보자. 앞서 시장 경제가 상품화 할 수 없는 노동, 토지, 화폐를 상업화시키는데 성공한 과정을 간단하게 알아보았다. 이들은 상품이 아님에도 상품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폴라니는 이들을 허구적 상품(Commodity fiction)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허구적 상품은 곧 사회의 파멸을 가져온다. 인간과 자연환경의 운명이 시장에 맞겨진 사회를 상상해 보라. 그는 인간성의 상실과 자연의 파괴를 우려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인간과 자연이라는 실체가 사탄의 맷돌에 노출된다면, 무지막지한 상품 허구의 경제 체제가 몰고 올 결과를 어떤 사회도 유사한 정책의 지지 방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적어도 그는 그런 발전 방향에 사회가 적응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들을 제시했었다. 그리고 벤담이 죽고 난 후인 1840년대 부터는 “은행을 세우기에 앞서 화폐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없어졌다”.폴라니는 맬서스와 리카르도와 같은 회의적인 시장주의자들도 통렬하게 비판한다. 영국의 스피넘 랜드 법은 역설적인 효과를 가져왔는데, 노동자의 임금은 생계를 이어갈 수 없을 만큼 낮추고, 고용자들의 돈은 효과적으로 절약했다. 그리고 당시에 밝혀진 인구법칙과 임금 철직은 이러한 극도로 인위적으로 조성된 상황 속에서 나왔다. 그것도 모르고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당시의 시장경제를 지배하는 법칙들이 자연의 절대 진리라고 떠받는 셈이다. 그렇게 사회와 경제가 철저히 분리되기 시작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은 자연의 비극적인 법칙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처야 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맬서스의 인구법칙이 인류에 선고한 종말만큼 아이러니한 것은 드물 것이다. 가장 빛나는 진보라고 평가되던 시장경제속의 인간은 옛날보다 작아지고 있었다.이런 ‘바보들’과 구분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은 로버트 오언이었다. 폴라니는 오언이 사회를 동물적인 접근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를 거부하고, 인간이 새롭게 획득한 권능으로 사회와 시장을 올바르게 이끌어야 함을 역설한 점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또한 그가 공장제 생산의 악영향을 꿰뚫어 보았고, 동시에 공장제 생산의 성공만이 노동자들을 구원할 유일한 방안이었음을 알았다는 사실에도 찬사를 보낸다. 폴라니도 오언도 진정한 문제는 “인간과 경제가 분리되고, 사회적 관계가 황폐화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자유방임에 대한 비판시장체제가 무섭게 확산하면서 이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개입주의(interventionism)도 힘을 얻었다. 폴라니는 이런 이중운동의 측면과 경제 계급들 사이의 충돌이 망가뜨리는 시장 경제를 다시 한 번 주목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악마의 맷돌을 가열차게 돌린 것은 자유주의라는 이다.
페르낭 브로델의 브로델은 2세대 아날학파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그는 3권 서론 및1장에서 그가 해석하는 세계사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세계의 거대한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서, 이 학자는 복잡하지만 동시에 매우 간단한 분류 기준들을 사용한다. 그가 세운 기준들은 곧 세계의 역사라는 거대한 식재료를 자르고 요리하기 위한 칼이며, 다른 말로 [방법론]이라고 불린다. 지금부터 우리는 브로델의 역사학 방법론을 중심으로 그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무기를 사용했는지를 살펴볼것이다.브로델이 속한 아날학파는 정치나 외교와 같은 사건(event)보다는 그 사건을 구성하는 다양한 장치(인구, 지리, 교통, 기후)들을 중점적으로 살피는 학파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브로델이 보기에 “세계사는 하나의 강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강이다.” 더 쉬운 말로 풀어쓴다면 그가 생각하는 세계사는 지구에 존재하는 물 전체의 흐름에 가깝다고 하겠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나누어 놓은 대양의 조류와 여러 개의 큰 강들이 모두 하나의 “지구 수계”로 이어지듯이 “모든 역사는 필연적으로 세계사이다”. 그는 따라서 전체사를 강조하고 사건사를 비교적 하대하는데, 세계사에 있어서 사건이란 집 앞 도랑에 튀는 물방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로델의 역사학 방법론은 ‘전체를 보는’성격을 띈다.하지만 브로델이 단선적인 ‘사건사’를 무시했다고 해서 그가 전세계적인 차원의 거대하고 눈으로 보이는 변화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수 백년 전 작은 소도시들의 거리에 팔리던 상품과 그 도시가 생산품을 팔로 가는 도로에도 시선을 맞춘다. 작은 물방울 하나가 모든 물의 흐름을 결정한다는 사고방식은 경계해야 하지만, 결국 강은 도랑의 모음이고 바다는 강의 모음인 셈이다. 따라서 브로델은 광범위한 사료들을 토대로 과거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거대한 흐름을 움직이는 작은 물줄기들을 밝혀낸다.브로델의 역사학 방법론의 두번째 특징은 ‘연결성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그는 모든 것을 연결했다. 문화, 경제, 정치의 권역을 의 영국에 있었고, 이제는 20세기의 미국 그 자체가 되었다.브로델이 세계-경제를 설명하는 말들을 좀 더 살펴보자. 그는 세계-경제의 정의를 “경제적으로 독자적이며, 핵심적인 것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고, 내부적인 연결과 통일성을 이루는 단위라고 생각했다. 세계-경제는 대단히 넓으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정치-문화-국경과 같은 다른 종류의 경계들을 넘나든다. 브로델은 16세기의 예시로 이러한 특징을 설명한다. 서로 다른 문화, 정치가 팽팽한 경계를 유지하고 스스로를 차별화하기를 시도할 때도 경제는 언제나 그런 다른 종류의 경계를 뚫고 화폐와 교역을 뒤섞어왔다는 것이다.세계-경제는 시대를 불문하고 보편적으로 존재해왔다. 어떤 측면에서 브로델의 세계-경제 이론은 신현실주의의 강대국순환론과 닮아 있는데, 브로델 역시 세계-경제의 존재 흐름을 순환적으로 자연 발생하는 세력교체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세계-경제는 동 시대에 여러 권역으로 존재하고 또 서로 다른 시대에 각각 존재해 왔으므로 우리는 시대간-공간간 비교를 통해 세계-경제에 관한 특정한 유형학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앞서 세계-경제는 다른 종류의 경제를 넘나든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경제가 경계 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계-경제는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막강한 경계들을 스스로의 국경으로 가지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과 대서양이 그런 것이다. 또한 하나의 세계-경제에는 언제나 단 하나의 중심이 지배적인 자본주의의 본고장으로 위세를 떨친다. 여러 개의 중심이 관찰되는 순간은 그 세계-경제가 변곡점으로 가는 격동기를 겪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세계-경제의 내부는 개별 경제/도시들이 스스로 계서제를 이루고 있다. 이런 계서제의 불평등함은 국제분업을 야기하고, 분업은 곧 거대한 세계-경제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게 따지면 빈자와 부자의 굴레는 마르크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온 인류역사의 보편 현상이었던 셈이다.브로델은 세계-경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글자수참고해야 할 것 같다.브로델은 세계 도시의 불변성을 부인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강대국 순환론처럼, 하나의 번영은 곧 하나의 쇠퇴이다. 암스테르담의 발전은 펠리페 2세가 리스본을 떠나지 않았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처럼 세계-경제의 중심에는 한 번에 오직 하나의 극점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20세기 미국의 단극 체제에서 뉴욕에 비견될 만한 도시가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은 세계화의 바람이 세계-경제의 권역을 극단적으로 넓힌 결과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단극질서는 막을 내렸고, 미국이 펼친 자본주의(사전적 의미의)와 민주주의의 세계-경제는 축소되었다.우리가 서로 상이한 세계도시들을 구분하는 것은 더 큰 함의를 가지고 있다. 세계도시들은 각기 다른 경제력과 여러 무기들(크레딧, 상공업, 제해권 등)을 가지고 발전했는데, 어떤 무기를 언제 가지느냐에 따라서 세계도시의 영광이 오르내렸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배의 무기들이 가지는 가치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앞서 세계-경제들 내부의 각 권역들은 계서제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곧 브로델이 설명한 세계-경제의 세번째 법칙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러한 계서제가 세계-경제 아래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지방의 경제는 계서제의 틀 안에 존재했지만 상층구조가 어떻게 바뀌는 지에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상층의 변화는 하층을 바꾸는 혁명이 아니라, 진행되는 하층의 흐름을 독점하고 주도하는 경쟁이었다. 브로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한 적절한 예시로 베네치아식 지배 도식을 제시한다.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하는 시장 경제를 상층 경제가 포괄하고 통제하면서 지배적인 체계는 공고화된다.계서제의 본질은 불평등이다. 브로델은 이 본질 역시 놓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세계-경제의 연결을 도식화시켰다. 좁은 중심부 – 발달한 두번째 지역 – 외부의 거대한 주변지역으로 나뉘는 세계 경제의 3가지 지대(aire)의 연결 수준은 상이하다. 중심부는 많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가장 빛나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상주의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곧 그들이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제국과 세계-경제브로델이 보기에 제국은 세계-경제에서 중심부가 되기에 적합한 정치제도가 아니었다. 세계-제국은 단독으로 세계-경제의 공간을 차지하려고 한다. 브로델은 월러스틴의 설명을 가져와서 세계-제국을 ‘경제에 대해 정치가 우월한 형태’로 정의하고 있다. 제국의 존속은 세계-경제의 성장은 지연된다. 초 국가 아래에서는 그 어떤 상인과 자본가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경제는 제국이라는 감옥에서 결국 살아남아 스스로의 존재를 확대한다. 국가는 사회보다 강하지만, 국가가 경제보다 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세계-경제의 각 권역에서의 전쟁브로델이 세계-경제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전쟁을 넣은 것은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브로델이 여기서 지속적인 발전에 대한 회의감을 조금 내비친다는 점이다. 그는 대다수가 전쟁은 무조건 진보를 불러오며 세계의 중심지에 의해 일어난다는 생각에 의문을 던진다. 전쟁은 근대국가를 만들고 자본주의가 자리잡는 토대였지만 때때로 전쟁 그 자체는 퇴보하고 때로는 ‘야만적인 형태’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것은 과거 유럽의 공성전이 가지는 특징과도 닮아 있어서, 전쟁은 항상 강한 상위 세력에 의해서 약한 하위세력의 공간에서 발발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쟁은 종종 “촌스러워졌으나” 여전히 전쟁은 전쟁터 밖의 사람들을 배부르게 했다.#사회와 세계-경제여기서 브로델은 다시 순환론적인 사고를 가져온다. 다른 모든 것들(역사를 포함한)이 그렇지만, 특히 경제는 더욱 그러하다. 그는 노예제와 임금노동제를 동일선상에 놓고 바라보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둘은 모두 사회가 요구하는 분업의 필요성에 대한 시대가 내 놓은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이는 사회가 내놓은 “가장 적절한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그것이 가장 최선의 해결책으로 꼽히지 않게 된다면, 사회는 또 지 세계의 전체사를 역설하다가, 또는 거대한 권역의 순환성에 집중하다 아주 갑작스럽게 시야를 좁힌다. 이라는 확인 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 하나로 시대의 국면을 찾으려는 그의 시도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자의적이고,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또한 나는 여기서 브로델이 가진 유럽 중심적시각을 느낄 수 있었다. 가격의 콩종크튀르가 가지는 협소성을 가리기 위한 그의 노력은 눈물겨운데, 어쨌든 브로델의 설명에 따르자면 세계-경제의 중심인 유럽의 가격 변화는 주변부와 다른 권역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장기추세장기지속에 대해 설명하는 이 부분은 주어진 텍스트 중 가장 중요하고 심오하지만 동시에 가장 간단하고 부실한 부분이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브로델이 장기 지속에 대해 스스로 확답하는건 “어쨌든 존재한다”라는 것 밖에 없어 보이니 말이다. 사실 그가 말하는 장기지속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인류의 태초부터 지금까지 장기적을 지속되며 우리가 감히 볼 수 없는 거대한 변화들을 통해 진보해왔다. 브로델은 이런 대전제에 그만의 이름을 붙이고 길들이기를 시도하지만, 사람이 자신이 서있는 지구의 공전을 길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다.#세계 경제를 설명하는 연대그리고 생각보다 브로델이 생각하는 장기 지속은 굉장히 짧은 주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다시 한번 세계사를 여러 권역으로 나눈다. 여기서도 그가 가진 유럽적인 시각이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 1980년대를 살면서 프랑스의 지성으로 살다 간 브로델을 지금 와서 비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그에 따르면 아주 중요한 장기지속의 연결점은 1350년의 흑사병이었다. 두번째는 1650년의 “17세기의 위기”이며, 세번째는 1817년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1973-1974년의 석유파동 시기를 장기지속의 연결점으로 제시한다. 위에서 말했던 것 처럼 세계사의 거대한 전체를 요리하고자 했던 브로델이 스스로 살던 시대가 당장 맞닥뜨린 위기를 세상의 큰 변환점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