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와 경기체가의 소멸 이유Ⅰ. 향가의 소멸 이유향가의 쇠퇴기는 신라 52대 효공왕 때부터 고려 의종 때까지인 10세기부터 12세기 말의 기간이다. 이 시대에 이르면 신라 귀족 간의 왕위쟁탈, 귀족의 사치와 향락, 재정 고갈, 유망민 및 군도의 발생 등 사회의 혼란에 따른 신라의 멸망, 고려의 건국을 거치게 되고, 이어 새로운 중세지성의 출현으로 향가는 점차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소멸의 직접적인 원인은 향가의 형성, 발전에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던 민중계층이 향가의 창작활동에서 손을 떼고 민요창작에 전념하면서 새로운 장르(고려가요)의 창출을 서서히 모색하고 있었다는 점,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망국의 기미가 보이자 향가 전성기의 창작 주체였던 계층이 귀족 또는 민중의 문전을 기웃거리며 한유자적 향가만 읊을 수는 없었으며, 구산을 중심으로 한 선종으로서의 방향전환이 일어났다는 점, 화랑 또는 낭도 계층도 이 시기에는 그 역사적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말아 계층의 존립의미가 없어져 향가의 창작이 어렵게 되었다는 점, 향가의 표기수단이었던 향찰표기도 그 전성기를 지나 이 시기에 이르면 지식인에게는 한문에 의해 그 기능이 많이 대치되고 향찰은 점차 그 사용범위가 축소되어 가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신라 시대의 문학 담당층은 고려에까지 이어져 고려 전기의 문화는 신라 시대의 그것과 유사하였다. 이미 절정에 이르렀던 앞 시대의 문화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한데, 그것이 가능한 세력이 고려 후기에야 등장하였다. 그렇게 되기까지 향가가 지속되다가, 시조 시대로 들어서는 전환을 겪은 것이다. 고려 전기에는 신라의 전통을 이은 문벌귀족이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면서 상층 문화를 담당해 향가가 지속될 수 있었으나 무신난이 일어나 문벌 귀족의 지배 체제가 무너지자 향가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없어져 향가는 자연스럽게 소멸하게 되었다. 즉 기존의 주관적 관념론이 신흥사대부에 의한 객관적 관념론으로 대체되었기에 향가는 가사나 경기체가와 같은 실재하는 사물과 경험을 서술하는 교술 문학, 합리적인 인간생활을 중시하는 시조나 속요와 같은 서정 문학으로 대체되었다.Ⅱ. 경기체가의 소멸 이유경기체가는 내용을 중심으로 총 3기의 변화 흐름을, 형식의 측면에서는 정격-변격-파격의 흐름을 거쳤다. 경기체가의 초기 향유층은 신흥사대부가 대부분인데, 그들은 고려 시대 한림제유에 속한 관인, 지방 향리 출신, 과거 출신, 고려 전기 권문세족의 반대쪽에 선 새로운 권력 담당층이었다. 이들은 조선 개국 이후 ‘사대부’가 된다.경기체가는 귀족문학, 교술문학, 개인 창작문학의 성격이 있었으며 악장문학으로서 집단적 선후창으로 연행되었다는 특징이 있다.경기체가의 제 1기는 고려말로, 한림제유의 이 최초의 작품이다. 퇴폐적이고 향략적이며 현실 도피적인 속성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제 1기 고려말에 변격이 나타나는데 안축의 에서 그 변격성이 드러난다. 5행의 반복구가 생략되고 6행의 ‘경기하여’라는 공식구가 탈락한 것이 그것이다. 공식적인 악장에서 개인 서정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연행방식 역시 집단적 교환창에서 음영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경기체가의 제 2기는 조선 초부터 세종대인데, 정권을 잡은 사대부와 승려들에 의해 경기체가가 창작되었다. 사대부는 조선 왕조의 위대함과 안녕을 노래하고 승려들은 부처에 대한 예찬과 서방정토에의 왕생을 바라는 찬불적인 성격의 작품을 지었다.경기체가의 제 3기는 조선 성종 대부터 선조 대까지를 이른다. 조선 성종조 이후 예악이 정비되고 재도지문(載道之文)의 문학관을 지닌 사림파가 등장해 집권을 시작했다. 퇴계를 비롯한 사림이 향락적인 을 긍호방탕, 설만희압하다고 비판하는 등 경기체가의 내용은 교도적이고 성리학적인 도덕 이념을 담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이에 관인적 이상을 강조하거나 이념지향적인 교술성이 강조되던 경기체가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에서 개인 서정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변격 경기체가는 제 3기에 이르러 사림 중심의 강호문학이 나타나며 자연 친화적인 개인의 서정을 음영으로 논하는 방식으로 완전히 변모했다. 음영 방식에 따라 경기체가는 완전히 파격되었는데, 전대절, 후소절의 구분이 없어지고 감탄사 ‘위’와 4·4조의 반복구는 사라지게 되었으며, 행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구어체화되고 장형화되었다. 그러한 모습은 마지막 경기체가인 권호문의 에서 드러난다. 에서 권호문은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자연을 즐기며 학문을 수양하는 초야 속 선비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찬양하고 감탄할 만한 대상은 떠오르지 않아 경기체가의 관습을 따르지 못했고, 감회를 나타낼 때에는 서정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형식이 산만해 산문에 가까운 작품을 내놓아 경기체가의 해체를 촉진했다. 경기체가는 조선 전기 사대부 국문 시가의 대표적인 갈래로 자리 잡았다. 그때를 경기체가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물을 열거하면서 감탄하는 기본 요건이 경기체가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었다. 조선 왕조가 막 세워진 시기에는 찬양하고 감탄하는 내용의 경기체가가 필요했다. 조선 왕조를 세운 임금의 업적,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건국 이후 시간이 흐르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는 이제 당연한 것이므로, 찬양과 감탄을 노래하는 경기체가는 그 필요성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선비들은 개인의 감정이나 경험 등을 노래하는 시조와 가사 갈래의 문학으로 얼굴을 돌렸다. 경기체가는 개인의 생활 모습이나 마음을 차분하게 살피며 가다듬기에 부적당했기 때문에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