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의 무사도 정신과 일본사회-목차-Ⅰ. 서론Ⅱ. 본론1. 시대적 배경: 유학의 유입2. 정치적 배경: 무가제법도와 다이묘 통제3. 변화한 무사도 정신과 그 영향Ⅲ. 결론Ⅳ. 참고문헌Ⅰ. 서론조선의 선비정신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흔히 이야기 되는 것이 일본의 무사도이다. 일본의 무사계급은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를 거치며 약 700년 간 실권을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근세 일본사 연구에 있어서 무사들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사무라이라는 용어는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을 가진 侍라는 글자에서 나온 말로, 헤이안 시대 말기 무사계급이 발달하자 셋칸케(攝關家)등 귀족 가문에서 경호를 위해 무사들을 채용하였다. 이 때 귀족의 사병으로 일하는 무사들을 사무라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점차 무사계급을 일반적으로 사무라이라고 통칭하게 되었다.무사도라는 개념이 문헌에 처음으로 명시된 것은 에도시대로, 이전에는 확실하게 무사도가 존재한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사회 기반에 깔려 있는 무사들의 공통된 가치관은 존재하였다. 이 당시 무사들의 가치관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잇쇼겐메이(一生懸命,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함)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一所懸命', 목숨을 걸고 자신의 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무라이 발생 초기의 가치체계에는 의리나 인정, 충성의 덕목은 보이지 않으며 자신들의 생활 기반이 되는 잇쇼(一所)를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 초기의 무사도라고 할 수 있다.이후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창건하며 본격적으로 무사정권이 시작되게 된다. 이 시대에는 쇼군이 고케닌이라고 불리는 무사들에게 그 공로에 따라 땅이나 직책을 주었고 고케닌들은 쇼군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하였다. 즉, 당시의 주종관계는 은급(恩級)과 충절(忠節) 혹은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이라는 공적관계로 이루어진 봉건적 주종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당시의 무사도는 경제적, 실리적인 측면을 중시하였다.무로마치 시대와 전국시대의 무사들의 었다. 그러나 불교는 내세를 중시하며 현세에는 관심이 없었고 기독교는 평등사상을 주장했기 때문에 당시 에도정부가 추구하던 엄격한 신분제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주목받게 된 것이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선에서 유입된 성리학, 즉 유학이었다.막부는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의 신분 등급제를 시행하여 신분의 유동을 엄격하게 제한했는데 여기서 사는 조선이나 명처럼 선비를 의미한 것이 아닌 무사계급, 즉 사무라이를 의미했다. 1719년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방문하였던 신유한은 일본 사회의 신분제에 대해 "나라에 사민(四民)이 있는데 병(兵)농공상이다. 선비는 그 중에 속하지 않는다." 고 설명한다. 에도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야마가 소코(山鹿素行)는 사도(士道)를 제시하며 무사는 유교적 윤리와 덕목을 갖추고 '농공상'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또 무사가 문무의 덕과 지혜를 구비하면 자연스럽게 위정자로서의 사회적 지위가 분명해지는데 이를 무사의 직분이라고 보았다. 즉, '사'와 '농공상'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설정한 것이다.점차 도시가 커지고 상품경제가 발달하자 쇼군과 다이묘의 관심이 점차 군사에서 민생 중심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군사적 임무를 담당하는 무사는 소외되고 행정을 담당하는 무사들이 대우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시대의 전투원으로서의 무사도가 아닌, 유교의 사(士)의 개념에 입각한 문치 관리로서의 무사도가 요구되게 된다. 이를 통해 사농공상의 유학적인 신분체계에서 유학자는 배제되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고 헤이안 시대부터 일본 사회의 중요세력이었던 무사들의 권력이 공고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당시 유학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에도 주목받았던 성리학자로는 하야시 라잔이 있다. 그는 유학의 가르침을 실제로 사회에 응용하고자 했는데 대표적인 예는 성리학을 일본의 관학으로 공인하게끔 하여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사상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막부의 통치자들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문치를 펼치고 예절을 명령을 내린다. 이들이 복수를 준비하는 1년 여 동안 수많은 관련자들은 이들이 복수를 성공할 때까지 기밀을 누설하지 않았는데 이들의 행동이 무사도에 알맞는 행위라는 당시의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막부 또한 무사 사회가 만들어낸 가치관을 실천한 47인의 무사들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갖춘다는 명목으로 처형이 아닌 할복 처분을 내린다47인 사무라이의 집단 복수극은 당시 화제가 되어 『주신구라』라는 대본으로 만들어져 가부키와 인형조루리와 같은 무대예술로 상연되기도 했다. 이처럼 47인의 사무라이는 목숨을 걸고 주군에 대한 의리를 다해 목숨을 바쳤고 이는 당시 사회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정치적 배경: 무가제법도와 다이묘 통제에도시대는 쇼군을 정점으로 하는 막부와 다이묘를 정점으로 하는 번이 일본의 토지와 백성을 지배하는 막번체제로 규정되는데 이 때 막부와 번, 쇼군과 다이묘의 관계가 문제가 되었다. 쇼군은 다이묘에게 영지를 하사하고 다이묘는 쇼군에게 군역 등의 의무를 가졌는데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쇼군의 토지에 대한 지배권이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다이묘의 영지 소유는 쇼군의 허가에 의해 유지되는 봉건제의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에도막부는 사무라이의 충성이 막부의 체제를 안정시키는데 유용했으나 특정 주군에 대한 충성은 오히려 중앙 정부의 질서를 어지럽힐 것으로 보고 지양하였다. 이는 당시 지방분권적인 봉건제 하에서 중앙인 막부와 자신의 주군인 다이묘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사무라이의 충성이 분열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무라이의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봉건제 하에서 모순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막부는 다이묘를 통제하기 위하여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시행한다.무가제법도는 관례적으로 새로운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반포하였는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수정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무가제법도의 반포는 쇼군과 다이묘의 지배관계를 확정하고 막부의 정치 운영 방침을 무가 신분 전체에 알리는 효과가 있었기 규 축성을 금지하고 성의 보수 신고③ 혼인에 있어 막부의 허가 필요칸에이령(寬永令)16353대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① 대형선박 건조 금지② 산킨코타이(參覲交代) 시행③ 겐나령 1조에 있던 ’궁마에 대한 보충설명‘ 삭제④ 겐나령 13조에 있던 ’고쿠슈는 정무능력에 따라 결정‘ 삭제칸분령(寬文令)16634대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① 기독교 금지② 불효자의 처벌③ 순사를 구두로 금지텐나령(天和令)16835대도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① 문치주의적 색채를 띠기 시작- 1조: 문무·충효에 힘쓰고 예의를 바르게- 순사의 금지를 명문화- 양자를 들일 수 있게 함② 기독교의 금지 조항 삭제호에이령(寶永令)17106대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① 기독교 금지 조항 다시 명문화② 대형선박 건조 금지 조항 삭제쿄호령(享保令)17178대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텐나령으로 복귀 무가제법도의 변천에 관한 표이에미쓰는 쇼군과 다이묘의 안정적인 주종관계를 위해 산킨코타이를 시행한다. 산킨코타이는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와 에도 사이를 정기적으로 왕복하며 교대로 근무하는 것을 말하는데 다이묘가 에도에 머무르는 기간을 산킨으로, 영지에 돌아가는 기간을 코타이로 불렀다. 산킨코타이는 다이묘들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약화시켜 막부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였다. 다이묘들은 에도와 자신의 영지에 1년씩 교대로 체재해야 했는데 그 가족은 에도에 인질로서 머물러야 했다. 이러한 반복적인 에도 행차는 막부에 대한 군역의 의미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군사적인 행군 형식을 띠고 있었으나 점차 화려함을 추구하는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이러한 중앙집권적 종속관계를 추구하는 경향은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강해진다. 막부는 뉴반(入番)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가문에 따라 오를 수 있는 직위를 한정한 제도로 개인의 능력이나 의지와는 관계가 없었다. 이처럼 도쿠가와 이에쓰나 정권은 개인적 결합관계를 지양하고 가문의 결합관계에 기초를 둔 주종관계를 형성하고자 했다. 이러궁마에 대한 보충설명이 삭제되고, 텐나령에서는 이 조항이 완전히 지워지게 된다. 대신 "문무·충효에 힘쓰고 예의를 바르게 할 것"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막부의 통치 방식이 완전히 문치주의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3. 변화한 무사도 정신과 그 영향이처럼 에도 시대의 무사도는 막부의 통치체제의 변화와 유교의 유입으로 인해 이전의 무사도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변화한 무사도가 일본의 근대화 시기와 맞물려 국민적 서사로 만들어지게 된다. 에도시대 일본에서 사무라이는 많아야 총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무사도는 당시 일반 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사도는 근대에 이르러 군국주의적 내셔널리즘으로 재탄생해 국민 일반의 보편적 덕목으로 교육되고 선전되게 된다. 무사도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를 성공시킨 일본 정신의 상징으로, 천황만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군인들의 비장함으로 포장되기 시작한 것이다.1890대 이전까지 근대일본의 주류는 에도시대의 사무라이 문화를 전근대의 유산이라고 부정적으로 인식했으나 전쟁을 준비하며 징병제를 확대하고 학교 교육까지 군사화하면서 군국주의의 합리화를 위한 전통을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무사도가 주목받게 되었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무사도는 일본인의 국민성을 말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1890년대 이전까지는 무사도에 관련한 책이 거의 나오지 않았는데 1890년대에는 거의 해마다 한 권씩 나오고, 1901년~1905년에는 47권이 출간되는 등 무사도에 대한 관심도 급증하였다.청일전쟁 이후 출간된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에서는 무사도가 '근대 일본을 성공적으로 이끈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며 동양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세계적으로 우수하고 보편적인 도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무사도라고 주장한다. 니토베 이나조가 주장하는 무사도 정신은 오늘날 현대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품고 있는 그대로의 무사도를 담고 있다. 그런데 니토베 이나조가 무사도의 전형으로 삼았던 것이 사가번의 무사 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