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녀 작품에 담긴 감정 표현의 의도- 애정 소재 작품의 진위(眞僞)를 중심으로〔목차〕1. 머리말2. 기녀에 대한 이미지와 감정의 이면3. 기녀 작품에 담긴 감정의 진위1) 작위적인 애정의 표현2) 적극적인 애정의 표현4. 맺음말1. 머리말본고는 기녀의 작품에 담긴 감정 표현의 의도를, 애정 소재 작품의 진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기녀(妓女)는 말 그대로 전문적 기예를 가진 여성 집단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개는 각종 유흥 현장에서 춤, 노래 풍류 등으로 흥을 돋우는 일을 담당하던 특수 직업군의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된다.양반 여성들은 가정 안에 갇혀 지내야 하기 때문에 시조 연행이 이루어지는 풍류판에 근접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기녀들은 신분상의 의무 때문에라도 사대부 남성들의 풍류에 동석해야 하기에, 남성들의 장르인 시조에 친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빈번하게 갖게 된다. 기녀들은 기녀라는 직업의 신분적 종속성 때문에 오히려 당대 여성들에게 보장되지 않던 시조문학 창작의 기회를 제공받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은 비록 사회적 계급으로는 천민에 속했으나 시·서에 능한 교양인으로서 계급 제도 내에서는 특이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기녀의 이러한 특수성은 기녀에 대한 다양한 인상을 낳는 원인이 되었다. 신분제와 부권 중심의 가족 제도에서 매춘부의 모습으로 비춰지는가 하면, 문장과 예술적 전문성, 교양을 두루 겸비한 지적인 여성 집단 내지 풍류를 아는 여성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봉건적 제약에서 벗어나 당대 사회의 모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진취적 여성이라는 찬사를 받는가 하면 남성 주도 질서에 철저히 기생한 존재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기녀에게는 과도한 칭송과 가혹한 폄하가 동시에 따라다닌다.본고는 기녀 시조와 한시를 중심으로 그들의 작품에 나타난 감정 중 애정 표현과 관련하여 그것의 진위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작품의 문면에 드러나는 애정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작자의 의도를 확인하고, 그러한 의도의 진위를 살펴 기녀 시에성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이는 당대 사대부 남성들이 기녀들에게 요구했던 것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명기의 조건이라는 명목 아래 그들에게 12능(十二能)과 5수(五守)를 함께 갖출 것을 요구했다. 단순히 미인이라고 해서 모두 명기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해당 조건을 충족해야만이 명기라 불릴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12능은 각각 삼예(三藝), 삼기(三技), 삼서(三書) 그리고 삼살(三殺)을 모두 아울러 칭하는 용어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삼살(三殺)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로 5수를 함께 두었던 것이다.기녀들에게 이러한 것을 요구한 것은 결국 그녀들의 성적 가치관을 획일화시키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기녀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양반가의 여성들에게도 비슷한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데 이는 곧 계녀가류 가사에서 언급되는 내용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당대 여성에게 성적 가치관을 고착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그 궤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현상들은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따른 가부장제의 강화와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다음에 제시하는 인용문에서 해당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1392년 조선 건국 이래 『소학』의 윤리는 양반과 비양반을 구별하는 신체언어로서 양반에게 장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성적 관계의 지형도에 모종의 변화를 가져왔다.…성적 상대로서의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소학』에서 다시 정립되었다. 그것은 ‘부부간의 예의’로 탄생했다. 부부 사이의 성적 관계는 도덕에 의해서 통제받기 시작했다. 따라서 윤리 이전에 존재하는 양반(남성)의 성적 욕망을 해결할 방법이 필요했던 바, 그 욕망을 해소하는 수단이 바로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첩, 기녀 등이었다.…기녀는 이제 예의의 통제를 벗어난 욕망을 해소하는 제도적 공간이 되었다.위의 장면은 유교적 이데올로기 사회에서의 통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상황, 특히 부부간의 관계(성적)가 도덕에 의해 통제받기 통한 신분적 이동을 생각해보면 단초를 제시할 수 있으리라. 지배층 남성의 쾌락만을 위해 존재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녀는 그러한 쾌락의 활용을 통해 특정 양반과의 지속적 관계를 형성하고 첩으로 신분 이동을 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기도 한다. 이때 기녀에게 관능의 기술은 쾌락의 행위를 통해 그들에게 사회적으로 주어진 지배와 종속의 권력적 관계를 변형시키거나 전도시킬 수 있는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이 같이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 관능적인 표현이라는 전제를 설정한다면 기녀 시에서 읽을 수 있는 애정이라는 감정 표현의 의도를 다시 한 번 짚어볼 필요성이 생긴다. 이와 같은 애정이 개인적, 사회적인 이유로 인해 작위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면 그것은 애정이라는 감정이 조작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살펴본 것처럼 이미지화 된 기녀들이라면 그녀들의 작품을 통해 드러내는 애정 또한 모두 작위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3. 기녀 작품에 담긴 감정의 진위(眞僞)이 장에서는 앞서 살펴본 기녀들의 작품 중 한시와 시조로 한정하여 이에 담긴 애정에 대한 표현에 의문을 전제로 작위적인 표현과 적극적인 표현 두 가지 층위로 나누어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1) 작위적인 애정의 표현여기에서 언급하는 작위적인 애정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접근 관점에 따라 달리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기녀 시 전반에 걸쳐 볼 수 있는 관습적인 표현일 수도 있고, 표현 방법에 있어 언어유희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먼저 살펴볼 것은 한시이다. 기녀들의 시는 기방(妓房)이라는 영업공간을 중심으로 남성들과의 사이에서 수작을 위해 지어졌고 호사가적 문맥과 함께 전승된 경우가 대단히 많이 존재한다. 이런 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일종의 한시적 관습구의 잦은 사용 등을 들 수 있다. 한시의 경우 주로 관습적 표현이 드러남을 알 수 있으며, 기방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관능적인 표현이나 성적인 것을 제재로 나타나는 것은 작시의 배경을 고려했을 때 시적 특성이라고 이 같은 한시의 창작 방식은 애정이 제재가 아닌 것들이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을 보인다. 국색의 시가 보여주는 이러한 창작 방식은 적어도 연회석에서 남성을 ‘향하여’ 발화되는 기녀의 한시가 일정 부분 즉흥적인, 집단적 창작의 결과라는 것을 말해준다. 남성의 시 세계에서는 일종의 희작이거나 습작일 뿐인 이러한 관습이, 기녀한시의 경우 여성 일반에게 익숙한 익명성이라는 요소와 기녀의 상업성이라는 요소와 결합하며 기녀 한시의 기본적인 성격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2) 적극적인 애정의 표현이 절에서는 앞서 살펴본 것과 다른 층위의 애정의 표현을 살펴볼 것이다. 인용하여 제시할 작품들은 떠나는 정인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슬픔을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더욱 적극적으로 애정을 원하는 표현임을 논하고자 한다. 또한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녀들이 제도가 뒷받침 하는 욕망의 대상이 된 만큼 일반적인 여성들은 할 수 없었던 관능적인 표현을 문학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허용되는 모습을 시조 작품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梨花雨 흩ㅽㅜ릴 제 울며 잡고 離別ㅎㆍㄴ 님秋風落葉에 저도 날 ㅅㆎㅇ각ㄴㆍㄴ가千里에 외로온 ㅺㅜㅁ만 오락가락 ㅎㆍ노매 (梅窓)위에 제시한 시는 계랑이 지은 것으로, 계랑은 부안의 기녀였다, 계랑은 기녀로서 당대 여러 사대부 남성과 교류했겠지만, 해당 작품의 대상이 되는 정인인 각별한 애정을 나눈 인물은 촌은(村隱) 유희경(1545-1636)이라 전해진다. 두 인물의 얽힌 고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유희경은 일찍이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매창을 보고 파계하였으며 서로 풍류로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런 사랑이 무한히 계속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임진년 왜란이 일어나자 유희경은 의병을 모아 명나라 원군을 도와 싸웠다. 사랑하는 임을 전쟁터로 보낸 뒤의 근심과 한은 남겨진 자의 몫이었다.실상 상대방을 잊을 수 없는 슬픔의 너머에 살펴보아야할 것은 진정성의 여부이다. 만남과 애정에 있어 일시러난 감정만을 표현하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작품의 제재가 애정이라면 작품에 표현된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자들에게는 애정 그 자체로 소비된다.여기서는 작품 속 애정 표현의 의도와 그 진위를 통해 그런 방법으로 애정을 노래해야만 했던 이유에 대해 천착해보고자 했다. 이를 바탕으로 작품에 담긴 애정이라는 감정에 대해 의미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보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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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와 화랑집단1. 머리말향가는 우리의 시가사(詩歌史)가 낳은 최초의 독특한 역사적 장르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이에 대해 보편적인 측면으로만 접근하여 설명하고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김학성은 향가가 전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고유의 독자적 문화가 생성해낸 역사적 장르임을 참으로 전제하고, 이러한 보편성의 논리로써는 향가가 가지는 독특한 세계인식이나 미의식을 다 밝힐 수는 없다고 언급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점에 유의하여 당시의 향가를 향유하는데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랑집단의 향가에 대해 보편성이 아닌 고유성의 측면으로 접근하여 조명하고자 한다.2. 화랑집단과 향가의 불교성향가에 있어 화랑집단의 역할은 무척 컸을 것이다. 저자는 한때 불교의 승려로만 여겨졌던 이들이 사실 향가의 뛰어난 작가이면서 화랑집단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언급한다. 이와 더불어 득오(得烏)와 같은 화랑의 낭도가 향가를 창작한 사례가 있어 향가와 화랑집단의 관계는 일찍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작품의 규명에 있어서는 그들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주술적, 불교적 혹은 원형적 사유와 관련시켜 해석하고 있기에 이 지점에서 앞에 언급한 문제가 드러나게 되는 셈이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화랑집단의 고유한 사유체계,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인식이나 미의식을 바탕으로 한 향가의 본질에는 제대로 다가서지 못하고 있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그렇다면 화랑집단의 사유체계는 불승(佛僧)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여기서는 화랑집단은 그 뿌리를 불교에 두지 않고 신라 고유의 토착신앙에 두고 있다는 점을 밝히며, 그것을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서는 풍월도(風月道) 혹은 풍류도(風流道)라 하고 고려시대 이후에는 선풍(仙風)이라 칭했다고도 한다. 신라불교는 호국불교라고 규정할 정도로 불교가 신라를 흥하게 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풍월도에서의 호국의식(護國儀式)은 종교자체의 수호의 일환으로서가 아니라 호국에 좀 더 초점을 두기에 불교격은 불교의 관점에서가 아닌 화랑의 입장에서 불교를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화랑집단이 숭상하고 수련했던 풍월도는 신라 고유의 토착신앙에 뿌리를 둔 선종 계열의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그 이전의 원시 토속적 신앙을 보다 ‘합리적’으로 통합하여 고등(高等) 종교로 발전시킨 형태라 할 수 있다.3. 화랑집단과 향가의 주술성여기서는 한동안 우리는 고유의 토속신앙을 무교(巫敎)로 단일화시켜 이해해왔다며, 향가에서도 이러한 무교와 관련된 주술가요 혹은 주술적 사유체계가 어떻게 형상화되었나를 조명해내는 작업이 유행했다고 언급한다. 그렇기에 화랑집단이 창출한 풍월도적 가요도 무속의 원리로 해명되고는 했다. 그러나 무격의 주술가요와 화랑집단의 향가는 그 사유체계와 세계관을 달리 한다. 이처럼 무속과 풍월도는 그 목표와 수단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는 풍월도의 향가를 무속의 주술가요로 해석하는 일은 타당하게 보기 어렵다고 한다.4. 화랑집단과 향가의 상징성화랑이 수행하는 풍월도는 진평왕(眞平王)대에 불교문화와 상호영향을 주고 받으며 하나의 고급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풍월도의 호국이념을 기초로 한 국가주의가 화랑이 창설되면서 진흥왕의 ‘흥방국’의 추구에 결정적인 중심 사유체계로 작용하지만 화랑이 창설되기 이전까지의 풍월도의 사유체계는 신선주의(神仙主義) 혹은 신성주의(神聖主義)가 주도적이었다. 이는 현실세계의 문제를 천지신명에게 맥을 대어 해법을 구하는 ‘신비주의’와 흥방국을 추구하는 ‘국가주의’가 풍월도 사상의 양대축(兩大軸)을 이루는 이념이자 사유체계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지향은 화랑이 창설된 이래로는 병립하기 보다는 신비주의가 국가주의를 지향하는 쪽으로 수렴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색이라 언급한다.이러한 두 지향을 통해서 화랑집단 가운데 호국선(護國仙)은 국가주의에, 운상인(雲上人)은 신비주의에 보다 중점을 두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독특한 이념과 논리를 갖고 있는 화랑집단은 국가의 흥망과 관련된 조짐들을 그들)(여기서 세인은 풍월도의 운상인이 중심이 됨)의 수단인 향가를 빌려 설법(說法 내지는 弘法)을 한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따라서 불교홍법의 목적을 위해 우리말 노래가 필요할 경우는 향가에 담지 않고 원효(元曉)나 대안(大安)스님의 경우처럼 민중에 접근하기 쉬운 단순한 리듬으로 된 화청(和請)에 담아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누비며 포교에 임했던 것이다.이처럼 향가는 〈도솔가〉처럼 천지귀신을 감동시키고, 〈처용가〉에서처럼 역신을 감동시키는 고도로 세련된 고급음악이었다. 그리고 그 감동의 바탕에는 풍월도의 신비주의와 국가주의라는 신라 특유의 사유체계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는 유오산수(遊娛山水)하고 가악상열(歌樂相悅)하는 화랑집단의 풍월도 수련을 통한 풍류가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그 풍류는 곧 천지귀신과 통하는 신명이고 멋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향가를 중국에서 유입되어온 당악이나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범성과 달리 굳이 ‘향가(鄕歌)’라고 칭한 것은 불교나 유교, 도교와 다른 우리 고유의 풍월도를 바탕으로 한 가악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으로 글을 마친다.?해당 논문에서 발견되는 의문점 또는 나아가 문제제기위에서는 해당 글을 요약하여 제시했다면, 여기서는 해당 논문을 통해 공부를 하며 느꼈던 부분 등을 언급해보고자 한다. 타이틀에서 문제제기이라고 제시하고 있으나, 미진하나마 해당 글에서 부족하다고 생각 들었던 부분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나아가 근거를 찾아 이를 보완하여 의문을 해결하고자 했음을 먼저 밝힌다.① 향가의 미학을 더 느낄 수 있는 해석으로 화랑집단의 풍월도를 언급하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이에 대한 개념 제시가 너무도 미약하다. 앞서 요약한 문헌에서 이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추상적인 개념만을 이해한 채로 글을 읽어 갈 수밖에 없다. 지면을 통해 ‘유?불?도’의 성격을 지녔다고 언급은 되나 자세한 설명은 없는 부분이 아쉽다고 느껴진다.이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찾기 위한 가장 손 쉬운 방법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는 것이겠으나 ‘풍월’이란 말이 쓰였고, … 그러니까 화랑의 정신을 나타내는 ‘풍류’ 또한 본디 고유한 정신을 외래종교인 ‘삼교’의 정신적 내용과, ‘풍류?풍월’ 등의 한문 문헌의 개념으로 설명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본디 고유한 개념으로 민족의 유풍을 풍류?풍월도로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이를 통해 비록 명명백백한 정의까지는 아닐 지라도 화랑집단의 풍월도에 대한 이해에 보탬이 되는 자료를 찾아 확인할 수 있었다.② 이런 식으로 자료를 찾다보니 위에서 언급한 화랑의 정신인 ‘풍류(風流)’라는 개념이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어떤 식으로 통용(通用)되었던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이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한 실마리로 우선 앞에서 다룬 김학성의 글 속에 나타난 최치원을 통해 사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해당 면에서는 「선사(仙史)」 외에 자세히 기술되지는 않지만, 이를 추적하여 살펴본 결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風流를 거론한 이는 신라가 기울어질 무렵 활동한 최치원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언급한 풍류는 ①의 문헌 속에서 드러나는 것과는 조금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를 통해 그 존재가 알려진 「난랑비서(鸞?碑序)」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풍류는 ‘현묘지도(玄妙之道)’ 즉, 현모한 도로서의 풍류이다. 다음은 『삼국사기』 신라 진흥왕 37년 조(條)에서 볼 수 있는 「난랑비서」의 일부이다.“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한다. 가르침을 세운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그 내용은 곧 삼교를 본디부터 포함한 것으로서 많은 사람을 접촉하여 교화한다. 이를테면 들어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의 주지(主旨)와 같고, 자연스럽게 일을 처리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주사의 종지(宗旨)와 같으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의 교화(敎化)와 같다.풍류에 대한 최치원의 생각을 볼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지만 읽어 보면 삼교를 본디수 있었다. 화랑의 교육 내용을 발췌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혹은 서로의 도의를 닦고, 혹은 서로 가악으로 즐기며, 명산과 대천에서 즐겁게 노닐며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다.”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통해 풍류에는 이미 삼교가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서로 교육 내지는 수행하는 내용(道義)이 삼교에 있어 어떠한 연관성이 있으리라 예상된다. 이와 관련하여 김학성 역시 화랑의 풍월도 수행에 있어 “도의상마, 유오산수, 가악상열”이 중심이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이외에도 위에서 언급된 교육 내용을 바탕으로 차례로 살펴보면, 가악상열의 가악은 향가(노래)와 이와 함께 사용된 악기를 뜻한 것이리라. 여기서의 악기는 삼현삼죽(三絃三竹)을 뜻한다. 유오산수란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다니며 자연을 둘러봄으로 인해 정신을 수련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수행 방법을 통해 단련된 풍류를 기반으로 화랑의 교육이념을 다져나갔을 것이다. 이는 나아가 신라의 문화의 주류 가운데 하나로 형성되었을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이러한 화랑의 교육이념 그리고 이를 통해 확인한 화랑집단과 풍류에서는 도의상마, 유오산수, 가악상열하며 수양하는 것을 말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최치원은 이를 현묘지도라 표현했다. 여기서 드는 또 하나의 의문점은 최치원의 생애를 보건대 그는 무척 영특하고 똑똑한 것임을 알 수 있다(중국으로 건너간 그의 행적들을 비추어 생각해보건대). 그래서 그는 어릴 때보다 공부를 하고 시험을 통해 인정 받을 수 있었던 중국의 풍류 개념에 익숙했지 않을까 추정이 되는데, 그가 왜 신라의 풍류를 자신이 공부했던 중국의 풍류 개념을 차용하지 않고, ‘현묘지도’라 언급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나라 말기의 혼란과 인재를 알아주지 않는 자국일 지라도 이것이 민족의 자주성과 같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 지 이 부분은 온전히 추정에 불과하기에 이와 같은 의문을 한 줄 남겨본다.1) 저자는11면.
이옥, 무엇 하는 者인가1. 머리말조선 후기 연암(燕巖 朴趾源)과 다산(茶山 丁若鏞) 그리고 정조(正祖)를 필두로 하여 문화적 코드를 읽어낼 수 있었던, 그 시대의 한 편에 이옥(李鈺, 1760-1815)이 있었다. 그는 자신만의 길을 걸었고, 그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있었다. 당시 정조의 이와 같은 행보를 통해 이옥의 문체는 몇 번이고 지적(指摘)을 받는다.그는 문체로 인하여 정조에게 여러 번의 지적을 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록에는 정조가 이옥의 장원급제한 글을 읽고는 급제를 취소하고 꼴찌로 처리해버린 일도 있었다. 계속 언급했던 문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심지어 양반의 자제는 해당 되지 않는 군역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뜻을 문학 작품에 담아내어 체제에 대한 반기를 표하거나 볼멘소리를 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글을 썼을 뿐이다.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에서 다루는 인물인 이옥의 이야기이다.이 책을 통해 저자는 이옥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글쓰기의 의미를 이옥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이옥이 정조의 문체반정으로 인한 문체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일관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글을 써내려간 그 태도에 주목한다. 당시 이옥의 글은 주류 담론도 아니었으며, 이에 반(反)하는 대항 담론도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적 세계나 유교적 가치관보다 가장 흔하게 눈에 보이는, 어디에나 있는 존재들인 하층 민중들이나 생활 주변의 일상 이야기를 썼다. 시정인뿐만 아니라 상추와 벌레, 담배 등 그가 글의 소재로 택한 것은 다양했다. 그렇게 그는 글 속에서 다양한 변주(變奏)를 보여주었다.그는 그저 눈에 보이는 다양한 소재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저자는 이러한 이옥의 글을 통해 주자학적 질서가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던 때에, 그의 글쓰기로 인한 시대의 아주 작은 흔들림을 놓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글쓰기에서 엿볼시도 머물지 않고 사물과 사람들 사이를 부유한다. 아주 가까이, 때론 아주 멀리. 아주 빨리, 때론 아주 느리게.이러한 그의 시선은 고문을 벗어나 본인이 밟고 서있는 땅위의, 주변의 것들로 향했다. 관점의 변화는 그의 세계를 변하게 하였고, 이는 자연스레 그가 사용하는 언어인 문체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을 것이다. 저자의 책을 통해 생각해보건대, 이옥은 아마도 그의 문체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너무나 당연스러운 말일 수 있으나 임금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이어나간 그의 일관된 모습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기에. 오늘에 이르러 200여 년 전 이옥이 발산(發散)했던 빛이 지금 우리에게 찬란하게 전달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3. 이옥의 글쓰기 소재일상생활의 먹고 마시는 일이나 이름난 꽃과 과실 등 그 위계를 가리지 않고 기록할 만한 것은 차별 없이 모두 기록한다! 이게 이옥의 글쓰기 원칙이다.이처럼 이옥의 글쓰기 소재로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혹은 일상에서 당대 글쓰기의 소재로 크게 조명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눈길을 주고 있다.이 고장 사람들은 9월부터 개고기를 먹지 않다가 이듬해 4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먹는데, 때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 말에 이때 먹게 되면 신神이 부정하다고 여겨 집안에 해가 된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이때는 개가 매우 헐값이어서 살찐 것도 겨우 삼사십 전밖에 나가지 않는다. 바다 가까이에서는 더욱 헐값이 되는데, 뱃일 하는 사람들은 일 년 내내 먹지 않기 때문이다.(「문여文餘1 - 봉성문여鳳城文餘」 중 ‘개고기를 꺼리다忌狗’)당대의 지역적 특색이나 이에 따른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문장을 구사하는 자가 글의 소재로 취한 것이 개고기라는 점에서 그의 글쓰기 소재의 범위가 다채로움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이외에도 이옥의 글의 소재로 주목되는 것 중 하나가 여성이다. 정환국(2013)은 “이옥의 여성소재 글쓰기가 당대 다른 문인들보다 압도적이라는 점은 주지하는 사실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한 평가1818년, 어떤 젊은이가 어지럽게 쓴 원고 뭉치를 들고 한 노인을 찾았다. 자기 부친이 남긴 유고의 교열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성균관에서 함께 과거 공부를 하던 젊은 시절, 아침저녁 틈날 때마다 지은 벗의 글이었다. 원고를 뒤적이다가 문득 그가 죽고 없음을 깨닫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하여 남긴 글을 하나하나 가려 정갈하게 베껴 쓴 뒤, 그 이듬해 오월 단오에 작은 문집으로 엮었다. (중략) 그리고 그런 벗의 유고를 눈물로 갈무리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준 인물은 담정(?庭) 김려(金?; 1766~1821)이다. 이옥에 대한 오늘날의 기록이 전해지는 것은 역사의 기록인 실록 외에 담정이 엮어 전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당대에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주목을 받았던 이옥이지만, 여기서는 다른 의미에서 이옥에 대해 평가해보고자 한다.당시 이옥은 여러 가지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썼지만, 특히 소수자를 주목했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분은 조명할만한 부분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부분에 대한 평가가 재고(再考)할 필요성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이러한 생각으로 책을 다시 한 번 접했을 때 아주 작은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옥의 『동상기』, 「제2절」의 노처녀의 시집가는 장면을 언급하는 모습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이야기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이미 이옥은 길을 잃었다. ‘유생’이라는 주체성을 망각한 채 노처녀에 빙의되었을 뿐 아니라, ‘규범적 언어’를 잃고 생동하는 타자들의 언어를 갖게 되었다. 계급적으로 다른 지평에 있는 이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낌으로써 이옥은 자신의 ‘지루함’을 잊는다. 이옥을 매혹시키는 건 경전 속 성인들의 위대한 도가 아니라 비루한 인간들의 일상 속에 깃든 진정성이다. 오직 후자만이 이옥으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다.그가 소수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는 건 오늘 날의 소수자에 대한 배려 차원의 시선과는 조금 다른 의미임을 유추할 수 있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이 드나 언급한 근거가 부족하기에 여기에서는 ‘전기성’ 측면으로 접근하여 이를 대신하고자 한다.17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애정소설인 「주생전」과 「운영전」의 서사의 주된 골자는 현실적인 장벽인 신분제도 또는 양란을 비롯한 현실적인 소재가 기반을 이루며 애정 서사를 이어간다. 앞서 언급한 「심생전」의 창작 시기는 추정하건대 후반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주생전」 그리고 「운영전」과 달리 전기성이 약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점으로 미루어 보면, 이옥은 그 이전 시대의 전기성, 즉 ‘막연하지만 이루어질 법한 가능성’보다 조금 더 현실성을 드러내는 작품을 쓴 것으로 보여진다.해당 논의를 다루는 작품의 범위가 무척 한정되어 있으며, 이를 전기성 측면에서 논하는데 그쳤지만 이옥의 「심생전」에서 이전 애정 전기소설과는 다르게 전기성이 약화됨을 언급한 것에 의의를 두며 이에 대한 논의는 차후 수정·보완하고자 한다.6. 이옥의 반시대성반시대성이란 단지 시대에 반함을 뜻하는 게 아니라, 자기 시대로부터 질병의 징후를 읽어 내는 민감성,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공감을 의미한다. 여기서 반시대성은 동시대성과 통한다. … 동시대성은 자신의 시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자의 현실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저자는 책의 제목에서 언급한 이옥의 반시대성을 ‘동시대적 공감을 통한 반시대적 글쓰기’라고 표현한다. 즉, 이옥은 그의 관심이 미치는 곳곳에 위치한 대상에 대해 관찰하고, 그것을 글의 소재로 취함으로 인하여 기존과 다른 의미로의 저항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이옥의 반시대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나는 이옥의 반시대성에 대해 저자와 조금은 다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우선 저자가 말하는 동시대성은 ‘자신의 시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자의 현실감각’이다. 그러나 내가 이해한 동시대성은 ‘어떤 징후(徵候)를 포착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저자가 말한 ‘자기 시대로부터 질병의 징후를 읽어내는 를 동시대성에 초점을 맞추어 나름의 해석을 했었다. 그러나 이옥의 반시대성에 대한 다른 학우의 의견을 통해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 사유의 시발점은 과연 그의 그러한 행위(본인만의 길을 꿋꿋이 걸어 간)가 저항으로만 해석할 수 있냐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으로 놓고 보아도 당대 우리 사회에서 이옥의 글쓰기 스타일은 주류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의 스타일은 사회에서 소수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한 길만 걸어간 외곬인 셈인데, 결과적으로 그는 시대에 저항한 인물이 되어 버린다. 이는 이옥이 저항의 의지를 글에 담아내고 있지 않았더라도 그 표현의 결과로 인하여 시대는 저항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이옥 스스로가 이러한 반시대성에 대한 의식이 있었는지 여부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문체에 대한 외곬 같은 기질이 스스로를 고립시킨 것인지, 스스로가 이러한 시대에 대한 저항을 의식하고 글을 썼는지는 작품 또는 작가의 삶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옥 개인의 생애에 대한 자료의 부족과 작품의 소재만으로는 이를 판별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②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조금 더 눈여겨 보아야 할 지점은 이옥의 이러한 반시대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저항(그것이 자의이든 타의이든 간에)이라는 키워드다. 이옥의 소품체는 그 소재가 정말로 무궁무진하며 일상의 모든 것 그리고 당대의 글쓰기의 소재의 중심으로 다루지 않았던 것조차 그는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조명해야할 지점은 그의 ‘저항성’으로 대변되는 반시대성보다 오히려 이옥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글쓰기의 다양성일 지도 모른다.우리가 이옥을 해석함에 있어 반시대성에 얽애며 저항에 초점을 두고 그를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소재나 내용 등의 다양한 면모를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자칫 편식의 우려를 낳을 수 있다. 당시의 주류로 다루던 문체나 소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를 다시 책을 내면서까지 조명하는 이유는 어떤 이유.
조선후기 화장의 성격과 의의- 문헌 속 여성 인물의 외양 묘사와 화장 소재를 중심으로〔목차〕1. 머리말2. 고전소설 속 여성에 대한 미의식의 양상1) 외양 묘사에 관한 서술2) 화장 소재에 관한 서술3. 조선후기 여성의 화장에 대한 의식1) 문헌 속 화장에 대한 기록2) 이상적인 여성상4. 맺음말1. 머리말본고는 문헌 속 등장인물에 대한 외양 묘사와 화장 소재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화장 문화의 성격과 의의에 대해 조망하고자 한다. 고전소설 속 여성 인물들은 대부분 아름다운 인물로 형상화된다. 〈박씨전〉과 같은 경우처럼 여성 인물이 추녀로 설정되기도 하지만 결국 추녀도 아름다운 여성으로 환골탈태하는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고전소설의 여성 인물은 기본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고전소설에서 아름답게 묘사되는 여성 인물에 대한 의식과 이러한 형상을 가능케 하는 지점을 조선후기의 화장(化粧)문화와 연관시켜 살펴보고자 한다.다양한 고전소설 속 등장인물에 대한 외양 묘사에서 알 수 있듯 화장(化粧)을 비롯한 신체를 가꾸려는 행위는 비단 오늘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화장에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의미를 넘어 해당 시대를 살아가는 일종의 생활양식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화장 문화에 대한 기록은 적게나마 문헌상의 남아있는 기록과 현전하는 문학 작품의 존재로 확인할 수 있다.본고가 조선후기의 화장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 다루는 작품은 모두 3편으로 〈소현성록〉, 〈현씨양웅쌍린기〉, 〈여용국전(女容國傳)〉이다. 여기서는 해당 텍스트를 통해 여성 인물에 대한 외양 묘사와 화장 소재에 대한 언급이 조선후기 화장 문화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이것을 당대 화장과 관련한 생활사의 기록이 담긴 문헌을 통해 조선후기 화장의 성격과 의의를 확인할 것이다.2. 고전소설 속 여성에 대한 미의식의 양상1) 외양 묘사에 관한 서술고전소설 속 여성의 외양과 관련된 기존 연구들은 언어학의 의미론적 방법을 사용하여 용모, 몸매, 품성 및 덕성, 나무라고, 키는 조비연이 작은 것을 부족하다고 여기는 듯하였다. 그녀는 날렵하지만 가볍지 않고 풍성하고 그윽하지만 투박하지는 않아, 천태만광이 태양의 빛을 가렸다.위의 장면은 석씨의 전체적인 인상(덕, 눈썹, 두 눈, 입술, 허리, 키,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 석씨의 외모는 색채적 이미지와 자연을 비유하거나 대비하는 방식으로 아름다움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에 그치지 않고 내면의 지혜와 덕이 밖으로 작용하여 외모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과 같이 표현되기도 한다. 특히 석씨의 외양 묘사에 대한 언급 중 “하늘에서 주신 강산의 빼어난 기운”과 “깨끗하고 맑은 기운이 어리어”있는 것은 내면의 지혜가 겉으로 드러나도록 표현한 것이다. “눈썹 언저리에는 오색의 상서로운 기운이 영롱하고 찬란하며”라는 표현 역시 석씨의 외모에 내면의 지혜가 외면의 아름다움과 결부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마음에는 태임과 태사의 덕과 도량을 깊이 간직하였고”는 석씨의 덕을 표현함으로써 그녀가 지니고 있는 성품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 묘사는 석씨의 아름다운 외양과 내면의 지혜와 덕을 언급하여 외면과 내면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고전소설에서 여성 인물의 외양을 묘사하는 다른 방법은 흑백, 청홍 등의 색채를 사용하여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내면의 아름다움은 덕과 지혜 등을 가진 것으로 표현된다. 여기서는 흑백, 청홍과 같은 색채를 통해 여성의 외모와 의상 등과 연관시켜 이에 대한 묘사가 드러나고 있다.다음 장면은 의 현수문이 윤소저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현수문은 첫눈에 윤소저의 미모에 매혹된다.동녘 익랑(翼廊)에서 베 짜는 소리 나거늘, 문을 열고 일개 연소(年少) 여자가 돌아앉아 북을 던지거늘 뒤에서 보니 구름 같은 머리를 땋아 지웠는데 옥(玉) 같은 귀밑에 맑은 영채(映彩) 엉기었는지라. 생(生)이 괴히 여겨 기침하니 그 여자가 대경(大驚)하여 베틀에 내려 피할새 옥면성안(玉面星眼)과 연협단순(蓮頰丹脣)에며, 이를 가장본(家藏本)일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해당 《순암집》에 수록되었던 원본의 실체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여용국전〉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서지학적 관점에서 원본과 이본을 밝히고, 작품의 전반의 구성 및 내용의 차이점을 통해 가치를 조명하는 관점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용국전〉에 등장하는 여성의 화장 소재를 통해 화장 문화를 면밀히 고찰한 논의도 있다. 특히 해당 작품에 서술된 화장품과 화장도구를 문헌의 기록을 통해 오늘날의 모발관리, 피부관리, 색조화장 개념으로 나누어 살펴본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여용국전〉은 화장 소재를 의인화한 가전(假傳)으로, 〈효장황제장대기공록〉이라고도 한다. 해당 작품은 효장황제가 화장을 하는 것에 게을러지자 국가(女容國)에 때(垢), 이(蝨) 등 적당(賊黨)이 침범하여 얼굴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른다. 이때 화장도구 등의 신하들이 나서서 도적의 무리와 싸움을 벌이고 물리쳐 다시 나라를 회복하는 내용이 주가 된다.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과 관직은 다음 표와 같다. 관직 및 인물의 품명(이가원 역주, 「여용국전」, 『이조한문소설선』 참조) 국가명: 여용국(女容國)/ 배경: 능허대(凌虛臺)황제: 효장황제(孝莊皇帝)/ 승상: 명경(明鏡) 동원청(銅圓淸)관직명인물명/ 지명품명/ 부위명전란 후 관직명문신태부(太傅)주련(朱鉛)연지화국공(華國公)소부(少傅)백광(白光)분-형부시랑(刑部侍?)방취(芳臭)육향상산후(常山侯)안무사(安撫使)백원(白圓)면분-도지휘사(都指揮使)납용(蠟容)납유(밀기름)도평후(都平侯)도어사(都御史)차연(釵延)비녀운성후(雲城侯)총융사(摠戎使)윤안(潤顔)곤지이경후(侯)무신평장군(平將軍)섭강(?强)족집게철성후(鐵城侯)전장군(前將軍)소쾌(梳快)빗-후장군(後將軍)소진(梳眞)참빗-호치장군(皓齒將軍)양수(楊樹)양치백양후(白楊侯)수군도독(水軍都督)관정(?淨)세수복성공(公)참군교위(參軍校尉)마령(磨零)비누도성후(?城侯)전전지휘사(殿前指揮使)포엄(布掩)휘건-무위장군(武衛將軍)포세(布洗)수건-적당구리공公主)가 함장전(含章殿) 난간(欄干)에 누웠다가 매화가 날라 이마 위에 떨어졌는데, 마침내 이마에 단사(丹砂)를 찍는 단장(丹?)을 만들고 이름지어 매화장(梅花?)이라 하니 이로부터 곤지 찍는 법(法)이 생겼다.빙허각은 송 무제의 딸 수양공주가 이마에 떨어진 꽃잎 모양을 모방해 만든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곤지의 유래를 매화장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조선후기의 여성들에게 화장에 대한 의식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해당 물품의 유래가 기록으로 남을 정도로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한편 이덕무의 저술인 《사소절(士小節)》에는 부녀자의 몸가짐에 대한 예절을 기록하고 있다. 해당 문집은 세 편으로 나누어, 선비·부녀자·어린이에 대해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예절과 수신(修身)에 관한 교훈을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하고 있다. 수록된 내용 중 부녀자의 화장에 대한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을 제시한다.3-11 웬만한 병에는 머리를 빗고 낯을 씻는 일을 폐지해서는 안 되며, 비록 가난하더라도 옷은 반드시 깨끗하게 빨아 입어야 한다. 부인은 단정하고 정결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요…머리털이 헝클어지고 얼굴에 때가 있는 자는 게으른 여자다.3-15 부녀자가 이것저것 노리개를 차는 것보다는 오직 찰 만한 것은 합향(合香)이다. 용뇌(龍腦)와 사향(麝香)이 비록 적절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오히려 몸을 단장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앞서 《규합총서》에서 언급한 것과 달리 《사소절》에서는 몸을 단정히 정돈한다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각각의 문집의 성격과 저자가 다른 연유이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조선후기 유교윤리 사회에서의 여성에게 요구되는 몸가짐을 추정해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여용국전〉에 등장하는 가꾸지 않은 모습으로 정사를 게을리 하는 군주, 흐트러진 모습을 도적떼에 비유한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화장의 성격은 보다 아름답게 외양을 치장하는 것이 아닌 단정한 모습에 가까운 성격을 지닌 것이다.2) 이근 형이고, 야위지 않았으며, 살빛은 흰 편이고, 흉터나 잡티가 없다. 전체적인 골격은 건강한 편이고 머리숱이 많으며 검다. 인중은 긴 편이고 입술색이 붉은 편이다.이처럼 당대 유교윤리를 규범으로 삼는 조선시대의 사대부 남성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내면과 외면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여성임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여성을 당시에는 맏며느리 감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살펴본 고전소설 속 여성에 대한 미의식의 양상 중 살펴보았던 〈소현성록〉의 석씨에 관한 묘사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조선시대 사대부 남성에게 있어 여성의 화장이란 일정 범주를 넘지 않을 때에만 화장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그렇다면 당시 사족들은 이상적인 여성상의 기준을 넘는 화장을 한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았던 걸까. 조선시대의 남자들이 예찬한 미인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옥같이 흰 살결, 가늘고 수나비 앉은 듯한 눈썹, 구름을 연상시키는 숱많은 머리, 복숭아빛 뺨, 앵두빛의 입술, 박속처럼 흰 이, 가는 허리, 그리고 백모래밭의 금자라처럼 아기작아기작 걷는 걸음걸이와 옥반에 진주를 굴리는 듯 목소리가 낭낭한 여자….그러나 이런 유형의 여성은 주로 아름답다고 소문난 명기(名妓)의 생김새를 조합시킨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 혹은 며느리는 이런 형이 아니길 바랐다. 단지 궁녀와 기생은 그러한 미모의 소유자여야만 환영받았다. 결국 당대의 사대부 남성들은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여성상과 아름다운 여성상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여성의 화장이 당대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규정 지어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자 화장이 단장 이상의 것으로 나아갔을 때 오히려 여성에게 안 좋은 이미지를 씌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4. 맺음말지금까지 조선후기 문헌을 통해 당대 생활사의 일부분인 화장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문헌 속 등장인물에 대한 외양 묘사와 화장 소재를 중심으로 고전소설에서 아름답게 묘사되는 여성 인물에 대한 의식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