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위클리프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1. 서론잉글랜드의 신학자이며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인물이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보다 150년이나 앞선 인물로 생전에는 탄압을 받았고, 사후에는 부관참시되어 화형을 당했지만 그의 뒤를 이어 보헤미아(체코)의 얀 후스, 독일 작센 지방의 마르틴 루터, 스위스의 츠빙글리가 차례로 나타나며 그의 행적과 주장에 대해여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현재에는 마르틴 루터에 앞선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며 위클리프의 생애와 사상을 알아보도록 하자.2. 생애역사가들마다 이견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위클리프는 1320년 또는 1328년에 태어난다. 존 위클리프의 출현은 서부 유럽의 기독교 왕국이 혼란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아직도 가톨릭교회의 교황의 권위는 하늘보다 높았고, 세속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중세의 마지막 신비주의를 표방한 토마스 아 켐피스의 가 1418-1427경에 쓰인 것을 보아도 존 위클리프의 등장은 무려 백년 가까이 이르다.1340년대는 영국에 흑사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위클리프가 졸업 후 잠시 베일리어 대학의 학장이 되기도 했지만 일 년 만에 그만두었다. 자신의 연구 수행을 위해 두 개의 성직록을 받고 1372년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그 시기에 교황 그레고리 11세가 그에게 좋은 자리를 약속했지만 당시 가톨릭의 부정과 부패한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국왕을 섬기는 직분을 얻게 된다.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는 그에게 루터워스 교구를 하사하고, 위클리프는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1377년 웨드워드 3세가 사망하고 리처드 2세가 즉위한다. 그러나 그는 겨우 열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에드워드 3세의 4남이던 랭커스터 공작이 섭정을 하게 된다. 랭커스터 공작은 위클리프의 명성을 듣고 그를 왕궁에 초대한다.당시 교황청은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 교황이 대립하던 상황이었다. 전통을 이어받은 아비뇽 교황은 백년전쟁 동안 프랑스의 편에 서서 영국을 적대적으로 대하던 상황이었고 당연하게도 영국은 그런 아비뇽 교황을 좋아할리 없었다. 아비뇽 교황이 다시 로마로 돌아가면서 교황은 친 프랑스 추기경들을 추방하거나 숙청을 한다. 그와 동시에 쫓겨난 프랑스 추기경들은 그들만의 교황을 선출함으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 위클리프는 이러한 시기에 외교관과 논쟁가로 활동하면서 교황과 교회의 민낯을 가감 없이 보게 된다. 어느 교황이든 친 영국적인 사람은 없었고, 위클리프는 사태를 조망하면서 교황과 교회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기 시작한다. 위클리프는 교황이나 교회가 영적 한계를 벗어나 세속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악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교회의 부정을 옹호하는 식의 전통은 결코 성격적이지 않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 어떤 권위보다 성경이 우위에 있으며, 교황이라 할지라도 성경의 권위 아래 있다고 주장하였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교황제도는 무너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 1215년 가톨릭교회가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확정한 화체설을 부정하였다. 위클리프는 화체설을 미신이나 가현설과 다르지 않으며, 성육신을 부정하는 비성경적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위클리프의 주장은 당대로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적지 않은 권력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심지어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들까지 반론을 제기한다. 결국 옥스퍼드는 1381년 경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기에 이르렀다. 위클리프는 쫓겨나다시피 하여 궁정에서 나오게 되고 조용히 저술활동에 전념하게 된다.1384년 위클리프는 병으로 숨을 거둔다. 이후 헨리 5세가 즉위했을 때는 화체설을 부인한 위클리프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극심하게 핍박을 하게 된다. 위클리프는 죽어서도 편하지 못했다.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대립 교황이던 요한 23세는 위클리프의 개혁을 이어받은 얀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위클리프를 부관참시하여 그의 저작들과 함께 화형식을 거행하게 된다.역사가들은 존 위클리프를 ‘종교개혁의 샛별’이라고 부른다. 위클리프는 영국 안에서만 영향력을 미친 것이 아닌 영국을 넘어 대륙까지 넘어갔다. 비록 미완성이었기는 하지만 존 위클리프의 가장 위대한 사역인 ‘성경번역’이다. 그는 비록 불가타 역을 참조하기는 했지만 성경을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을 시도했다.성경 번역이 중요한 이유는 먼저는 그릇된 가톨릭의 절대적 권위를 무너 뜨리기 위한 위클리프의 생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은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제들을 통해서만 성경을 읽고 배울 수 있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성경 번역은 모든 사람들이 직접 성경을 읽고 연구할 수 있도록 만들게 되었고 링컨의 말로 알려진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위클리프가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하기 위한 구호였다. 위클리프는 과 의 논문들을 통해 장차 도래할 민주주의를 위한 이론을 제공하고 있다. 종교개혁과 근대가 모든 권력이 시민에게 있고, 모든 성도는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파격적인 선언 하며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서 역할을 감당했다.위클리프의 파격성은 성경 번역에서 끝나지 않았다. 교회사에 길이 남을 ‘롤라드파’가 위클리프에 의해 탄생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한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일종의 ‘순회 전도자들’을 결성하게 된다. 그들은 대부분 중.하층민들이었고, 위클리프를 헌신적으로 따랐습니다. 그들은 청빈과 가난, 겸손과 도덕적 청결을 주장했고, 위클리프의 신학사상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것이며 탁월한 설교자들이었다. 그들은 전국을 떠돌며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강해하였고 비록 모든 성경이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번역된 일부의 신약 성경과 시편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성직자들의 우화나 성인들의 생애를 이야기한 반면 이들은 성경을 직접 강해하고 가르쳤고 성경을 읽고 그것을 풀어주고 해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초기에는 성경을 강해하는 것이 중점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패를 지적하며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