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에 따른 변모, 변모에 의한 변화세월이 지나거나 환경이 변할 때, 그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깨달음이 있다. 또한 그에 따른 변화가 발생한다. 앞으로 이야기 할 Lewis Carrol의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1865)에서는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한 인물에 대해 잘 묘사되어있다. 4장까지의 내용은 앨리스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앨리스는 크기가 변모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1장에서 나타나는 앨리스의 변모부터 살펴보자.토끼 굴속으로 뛰어든 앨리스는 1장에서 첫 번째 변모를 겪게 된다. 앨리스는 나갈 문을 찾아 복도를 거닐게 되는데 문은 작고 잠겨 있었다. 그러다 탁자 위에서 열쇠와 함께 ‘DRINK ME’라고 쓰여 있는 병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을 마시며 앨리스의 첫 번째 변모가 시작된다. 그렇게 앨리스가 한 입도 남기지 않고 마셨더니 앨리스는 약 25cm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이 때 앨리스의 첫 번째 변모가 의미하는 바는 ‘앨리스의 합류’인 것 같다. 말하는 토끼를 따라 들어 온 이상한 나라는 앨리스가 속한 세상이라기보다는 앨리스가 보고 있는 세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가 주스를 마시면서 그녀 또한 신비하고 이상한 나라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디즈니의 애니메이션도 이와 같은 맥락을 유지한다. 영화에서도 앨리스가 주도적으로 선택한다는 명제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속 앨리스는 소설, 애니메이션과 달리 자신의 변모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감독이 소설의 내용을 각색한 것은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앨리스의 크기변화는 단순히 신비한 나라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앨리스도 다른 작품에서 묘사된 앨리스처럼 결과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변모에 당황하는 내색 없이 진정한 모험을 하는 것을 보아 앨리스의 변모는 모험을 진행해나가는 열쇠 정도의 역할로 보인다. 변모에 대한 반응이 없었기에 영화에서 생략된 부분들을 살펴보자.그 후 앨리스는 탁자 밑에 놓인 유리 상자에서 ‘EAT ME'라고 쓰여 있는 작은 케이크를 발견한다. 케이크를 다 먹어버린 앨리스는 2장에서 두 번째 변모를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발이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거인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약 3m의 크기가 된 앨리스는 문이 열려도 들어갈 수 없게 되어 계속해서 울었다. 이 때 앨리스의 두 번째 변모는 이상한 나라가 앨리스의 뜻대로 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암시해주는 것 같다. 물론, 주스를 마실 때도 앨리스가 작아질 줄 미리 알고 마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앨리스가 바라던 대로 문으로 나갈 수 있는 크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앨리스는 문을 통과하기는커녕 천장에 닿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이 장면이 묘사된 소설과 애니메이션에서 앨리스는 펑펑 울게 되는데 토끼가 흘리고 간 하얀 장갑을 끼면서 다시 작아지게 된다. 이렇게 앨리스가 또 한 번의 변모를 경험하게 되는 이 장면이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세 번째 변모를 통해 앨리스는 상황과 크기 변화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게 된다. 자신이 커졌을 때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다시 작아졌을 때 물속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다른 작은 생물들을 만나 처음으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서 앨리스의 사고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 비교대상이 되는 장면이 바로 2장과 3장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이다.세 번째 변모의 연장선상에 있는 3장에서 앨리스의 변모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크기가 비슷한 쥐와 새들, 여러 바다 생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앨리스는 계속해서 실수한다. 자신의 본래 크기일 때 생각했던 것을 말해 작은 크기의 동물들을 본의 아니게 겁주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함께 코커스 경주를 하며 어울렸던 모든 생물들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 혼자 남게 된다. 이 때 앨리스가 자신의 고양이, 디나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했음을 깨닫는다. 이때까지는 이상한 상황을 인지는했지만 아직 미성숙한 앨리스의 사고가 드러난다.4장에서 앨리스는 또 두 번의 변모를 겪게 된다. 4장은 앨리스의 사고가 성장되는 과정이 보이기 때문에 주의깊게 봐야할 것 같다. 2장에서 자신의 물건을 흘리고 간 토끼가 재등장한다. 이 때 앨리스는 토끼에게 하인으로 오해를 받고 심부름을 위해 토끼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앨리스는 4장에서 크기와 영향력의 상관관계에 대해 인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먼저 토끼가 자신에게 명령했을 때 앨리스의 혼잣말을 통해 알 수 있다.‘How queer it seems,’ Alice said to herself, ‘to be going messages for a rabbit! I suppose Dinah'll be sending me on messages next!'(31)앨리스와 크기가 비슷한 토끼도 자신에게 명령을 하는 상황을 겪으며 훨씬 큰 디나 또한 명령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후 앨리스가 토끼집에서 병에 든 액체를 마셔 집을 뚫고 나올 만큼 크기가 커지게 된다. 앨리스는 겁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소설과 애니메이션에서 토끼가 크게 놀라며 굴뚝 청소부 빌을 들여보낸다. 이 때, 앨리스는 빌을 도와주기위해 굴뚝을 발로차지만 빌이 정신을 잃고 날아가게 되면서 자신보다 작은 생물들에게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주게 된다.소설 속에서는 케이크로 변하는 돌, 애니메이션에서는 당근을 먹고 다시 크기가 작아진다. 애니메이션에는 없지만 소설 속 앨리스는 강아지를 만나게 된다. 강아지를 본 앨리스는 자신의 본래의 크기 때 생각한 것처럼 강아지를 귀엽게 생각한다. 하지만 강아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고, 앞발로 자신을 건드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무서워하게 된다. 나뭇가지를 강아지에게 주어 위기를 모면한 앨리스의 생각을 통해 크기와 힘의 연관성이 여실히 드러난다.‘I should have liked teaching it tricks very much, if ─ if I'd only been the right size to do it!'(39)
미국의 독립 아우성에서 찾은 자신감위키백과에서 살펴 본 결과, 미국의 정신적·정치적 독립정신이 문학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1800년대, 특히 미국의 자주적 문예 부흥기(An American Renaissance)를 살펴봐야 한다. 1830년대와 1840년대의 미국 사회에서는 유럽에 속한 미국이라는 대서양 공동체(an Atlantic community)의 이상이 널리 퍼져있었다. 하지만 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면서 미국인들은 정치적 독립에 걸맞게 지적·정신적 독립을 원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새로운 미국 문학 창조 욕구도 싹 틔웠다. 미국의 낭만주의 문학은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 미국 국민의 개척 정신, 미국의 자연과 과거, 복음주의 종교 등 주로 미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사정에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과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d Fenimore Cooper)가 있다.쿠퍼는 개척자, 인디언과 같이 미국적 특징을 지닌 인물 유형을 묘사하는 작품을 썼다. 어빙은 희화화를 통해 해학적인 풍자를 주로 사용하였다. 미국 최초의 단편집을 썼으며 쿠퍼와 함께 미국 문학의 효시이다. 그의 작품 은 과 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에서도 미국의 독립정신이 나타나 있다. 어빙이 작품 활동을 할 당시 청교도는 소설이 젊은이들에게 부도덕한 생각 즉, 현실성에 대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하며 문학 활동에 많은 제약을 뒀다. 영국을 떠나 미국을 개척한 청교도들이지만 그들 또한 영국적 사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믿었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면 마녀사냥을 했다. 어빙의 작품에서 그 당시 자행되었던 마녀사냥을 비판한 것은 영국적 사상으로 볼 수 있는 청교도로부터 독립한 문학 활동을 꿈꿨기 때문일 것이다.어빙과 쿠퍼의 시대(The era of Irving and Cooper)라고 불릴 만큼 미국 문학 활동 전성기의 서막을 올렸던 그들도 분명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저명한 문학평론가 매티슨(Francis Otto Matthiessen)이 ‘미국의 르네상스(American Renaissance)'라고 불렀던 시기를 더 강조하고 싶다. 이러한 명칭이 영국 르네상스에 견줄만한 미국인의 문화적 자부심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르네상스를 알아보자.미국의 자주적 문예부흥이 일어났던 이 시기에는 초월주의자들이 활동했다. 그들은 넓게 펼쳐져 있는 국가관이 아닌 우리만의 독립된 사상을 추구하자고 부르짖었다. 초월주의를 만들고 이끌었던 랠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Nature’를 출간하여 초월주의 사상을 명확히 나타냈다. 그의 강연문인 ‘미국학자론’(The American Scholar)은 학자를 정의하고 이상주의적인 개인주의를 칭찬하며 유럽문화로부터의 탈피를 역설하였다. 또한 인간 본래의 정신에 자각하여 독창의 세계 안에서 살라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그의 강연문은 당대 미국의 지적 독립선언으로서 받아들여졌다. 대표적 초월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작품 에는 그들의 독립정신이 드러나 있다.그의 대표작 은 당대 급부상하던 산업주의, 물질주의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문학적 시도를 하였고, 정신적 자연생활의 중요성에 대한 문학적 성찰을 보여주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의 작품이 삶의 교훈을 주는 책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당대 미국의 독립정신이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이야기해보자. ‘나는 일등 선실에 틀어박혀 항해를 하기보다 평범한 어부로서 이 세상의 돛대 앞에 꼿꼿이 선 채 갑판 위에 머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있으면 산골짜기를 비추는 달빛이 정말로 잘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시 선실로 내려갈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인용문에 그들의 독립정신이 깃들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일등 선실이 유럽 또는 영국이라고 볼 때, 일등 선실에 갇혀 항해를 하는 사람은 순항을 할 것이다. 설사 폭풍우를 만난다할지라도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는 현재 선실에 있고 그것을 의지하면 된다. 하지만 어부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어부가 되고 싶다고 한다. 다시 선실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왜일까? 그는 일등 선실의 보호 아래 머물고 싶지 않고, 평범한 어부일지라도 꼿꼿이 서서 세상에 맞서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 더 이상 정신적·정치적 보호 아래 있고 싶지 않다는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지금은 다시 선실로 내려갈 생각은 들지 않는다.’라는 부분에서 강력한 독립정신이 발현되었다고 본다.‘인간은 ...... 순수하게 자신만의 방식을 세워나가는 건축사이며, ...... 우리는 모두 조각가이자 화가이며 그 재료는 우리 자신의 피와 살과 뼈이다.’라는 부분에서 그가 얼마나 독립적인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언가에 종속된 것이 아닌 스스로 설 수 있는 자신, 즉 국가를 원하고 있다. 그는 책의 말미에 그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진정으로 모두가 독립된 정신을 갖기를 원했던 것이다. 영국이나 유럽에 속하여 자신만의 방식도 없이 그들의 사상에 맞추어 사는 미국이 아니라, 진정한 독립체 미국에 대한 바람을 서술한 것 같다. 그가 소설 전반에 걸쳐서 이야기하는 것은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닌 기준을 만드는 것이다. 기준을 만드는 인간이 되는 것, 나아가 그러한 미국이 되는 것이 그의 소설에 담겨져 있는 염원이 아닐까?그의 또 다른 저서 에서도 미국의 독립정신은 나타나있다. 이 책은 그가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을 때 세금과 노예 제도 등 미국 정부에 대항하여 쓴 에세이지만, 유럽과 영국에게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미국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I could not help being struck with the foolishness of the institution which treated me as if I were flesh and bones, to be locked up ...... As they could not reach me, they had resolved to punish my body.' 이 인용구문은 그의 몸이 비록 가둬진 상태일지라도 그의 영혼과 정신은 가둬지지 않는다며 제도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의 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얻은 후, 다른 인종을 노예삼아 지배자 노릇을 하는 것은 아직 영국적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의 지배를 받을 때, 일부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영혼과 정신만은 지배받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본 미국은 인간이 자유를 얻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라, 신분이 명확히 정해져있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계층으로 나누어진 제2의 영국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미국 정부에게 일침을 가하기 위하여 이 에세이를 쓴 것 같다.
오만과 편견이 만든 개츠비의 비극『원더풀 아메리카』에 따르면, 1920년대 미국은 역사상 가장 젊고 화려했던 시기이다. 하지만 상위 1%의 소득이 미국 전체 소득의 21%를 차지할 만큼 빈부 격차가 심각했다. 이러한 소득의 불평등과 부의 쏠림현상은 결국 사회를 파탄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F. Scott Fitzgerald의 장편소설 에서는 1920년대 부유층의 횡포와 이기심을 통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잘 묘사되어있다. 작가는 인물을 공간적으로 대조시켜 계층문제를 표현하였다. 뉴욕의 동쪽에는 상류계층인 톰(Tom)과 데이지(Daisy)가 살고 있고, 서쪽에는 닉(Nick)과 신흥부자 개츠비(Gatsby), 그리고 재의 계곡에는 하류계층 윌슨(Wilson) 부부가 산다. 원문을 통해 상류계층 톰을 살펴보자.의 내용을 요약해석하자면, 상류계층의 횡포를 대변하는 톰은 등장부터 남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닉이 사촌 데이지의 집을 방문했던 날도 톰은 닉의 동업자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며 닉을 불쾌하게 만든다. 하류층 윌슨 부인 머틀(Myrtle)은 톰의 정부이다. 이들의 밀회장면 묘사에서 상류계층의 오만함과 그 오만함의 출처는 돈과 지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머틀을 데리러 윌슨의 정비소에 들렀을 때, 차를 매매하는 것으로 윌슨을 농락하는 장면이나 머틀이 강아지가 갖고 싶다고 이야기하자 개장수에게 돈을 주면서 이 돈이면 열 마리 이상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돈으로부터 오는 그의 오만함을 볼 수 있다. 또한, 자신의 내연녀인 머틀이 아내 데이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자 참지 못하고 머틀의 얼굴을 내려치는 상황이 연출된다. 이 장면에서 나타난 그의 폭력성은 한 개인의 힘이 아니라, 계층의 힘이라고 보아도 과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누구든지 간에 상류층에게 도전하면 짓밟아버리는 상류층의 모습을 보여줬다. 후에 개츠비를 모함하여 죽게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3장까지에서 나타나는 상류층의 횡포는 톰에게 한정되어있다. 상류계층으로서 데이지의 횡포와 이기심은 그녀가 개츠비를 만나는 순간부터가 진짜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 속에서 오로지 물질을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 개츠비의 차를 이용해 톰의 내연녀 머틀을 죽이는 장면, 그 일의 가해자로 개츠비가 오해를 받아도 함구한 일, 개츠비의 죽음 뒤에도 장례식장에 오지 않는 행동까지 그녀의 상류계층으로서의 횡포와 이기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3장까지에서 데이지의 모습은 현실의 만족하고 있지만 무기력하고, 톰이 내연녀가 있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감추려 하는 가식적인 모습이 보일 뿐이다. 그들의 횡포에 희생되는 인물들을 살펴보자.하류계층 출신 개츠비는 자신의 능력(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이용하는 것도 개인의 능력이라고 본다)으로 부를 획득하고 자신의 출신이 싫어 이름마저 바꾼 인물이다. 상대적으로 머틀과 윌슨은 삶에 대한 근면 성실한 노력이라든지 목표의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머틀은 상류계층 톰의 내연녀이면서 아내라도 되는 듯 말하고 행동한다. 밀회장소로 가기 전 수많은 택시를 돌려보내고 라벤더 색의 택시를 잡아타는 모습, 같은 하류계층이면서도 자신이 더 고귀한 체를 하며 남편 윌슨을 욕하는 장면, 맥키(McKee)부인이 옷을 칭찬하자 눈썹을 올리며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고서는 그녀에게 가지라고 이야기를 하며 허세를 부리고, 하인을 시키겠다고 말하며 마치 자신이 상류계층이라도 된 체 한다. 윌슨 또한 톰이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고 부유한 톰의 방문에 반색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부부의 모습은 개츠비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들은 상류계층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류계층은 부유층 손님이 오거나, 부유층과 함께 어울리면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것 마냥 행동한다. 부유층들은 이러한 하류계층의 생각을 원동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머틀은 톰의 성적 노리개밖에 될 수 없었던 것이고, 윌슨도 끝까지 톰에게 농락당해 머틀 사건에서 아무런 죄가 없는 개츠비를 죽이게 되는 것이다.개츠비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자. 미국의 사회학자 Immanuel Wallerstein은 미국사회는 개인의 능력으로 권위를 갖는 능력주의 사회라고 이야기했다. 미국은 능력주의 권위를 찬양하는 듯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개인의 능력에 대한 질시가 함께 성장한다고 했다. 덧붙여 매일경제에서 기사화한 미국의 경제 자문위원인 Ellen Kruger교수는 개츠비의 이름을 인용해 경제이론을 발표했다.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가 도출한 개츠비 곡선을 살펴보면 덴마크나 노르웨이와 같이 상대적으로 소득분배가 균등한 국가에서는 부모의 부(富)가 자식에게 이전되는 정도가 낮은 반면 미국이나 영국같이 소득분배가 불균등한 국가에서는 부모가 부유할수록 자식도 부자일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개츠비 곡선은 부의 불평등 정도가 심각할수록 사회ㆍ경제적으로 계층 간 이동이 어려워진다는 이론이다.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개츠비를 이야기해보자. 개츠비는 개인의 능력으로 권위를 갖는, 소위 ‘아메리칸 드림’의 성공적인 예이다. 개츠비 곡선이 말해주듯이 빈부격차가 심하여 계층 간 이동이 힘든 사회에서도 그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부를 일궜다. 그렇다면 그는 상류계층인가? 매일 파티를 열지만 베일에 감춰진 개츠비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의 돈의 행방에 대해서 말이 많다. 위의 논리에 따르면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으로 권위를 갖게 되면 질시가 따른다. 그렇다면 그는 진정으로 권위를 얻은 것인가? 능력주의 사회, 능력주의 권위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톰과 데이지와 같은 상류계층에게 그가 진정 상류계층으로 보였겠냐는 말을 하고 싶다. 그들의 눈에는 그는 신흥부자, 졸부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3장 이후에 전개될 내용을 보면, 그가 상류계층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영국에게서 독립되어 나왔고 그들의 계급사회를 부정했지만, 미국은 물질에 의해 보이지 않는 신분이 생겼다. 1920년대부터 진정으로 미국의 물질 만능주의, 물질적 개인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질이 곧 권력인 사회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상류계층에게 개츠비와 같은 신흥부자가 달갑게 느껴졌을 리는 만무하다. 작품 초반부, 상류계층의 상징인 톰을 묘사할 때 ‘restless'라는 말을 쓴다. 그가 왜 불안정했을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누군가에게 권력을 빼앗기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서 오는 불안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불안감이 있었던 그에게 신흥부자 개츠비가 나타났을 때 그의 심리는 아마도 지배욕, 소유욕, 불안감이 뒤엉켜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고, 머틀에게 손을 휘둘렀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류층에게 도전하면 누구든지 간에 짓밟아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것 같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 데이지의 옛 애인이라는 사실 또한 그런 일을 하는 데 한몫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내연녀 머틀을 계속해서 만나면서 데이지가 가톨릭신자라는 거짓말을 하며 이혼하지 않은 것은 분명 여자에 대한 소유욕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