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시골 귀족 출신이지만 가난해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작가 세르반테스는 소설 같은 인생을 살았다. 젊은 시절, 길거리 싸움에 휘말려 형벌을 당할 위기에 처해 로마로 몸을 피해 살기도 했었다고 한다. 1571년 유럽 연합군과 터키군이 벌인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다가 왼손을 잃게 되었고, 스페인으로 돌아오던 중에는 해적에게 납치되어 알제리로 끌려가 5년간 노예 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스페인으로 돌아와서는 세금 징수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으나, 업무상 실수로 징계를 당해 쉰 살의 나이에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세르반테스는 감옥에서 자신의 소설같은 인생을 반추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완성된 작품이 바로 이다. 그리고 는 근대 소설의 문을 연 작품으로 평가 받으며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세르반테스는 험난하고 굴곡이 깊은 인생을 살았지만 현재는 스페인의 국민적 영웅이자,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를 집필한 대작가로 기억되고 있다.17세기 스페인의 라만차 마을을 배경으로, 알론소 키하노가 취미로 읽던 기사도 이야기를 담은 소설에 빠져들어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칭하며 모험에 나서게 된다. 볼품없는 그의 말에게도 ‘로시난테’ 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며, 같은 마을 농부 산초를 불러내어 유랑 기사의 여행을 시작한다. ‘악의 무리를 무찌르고 약한 자를 지켜내는 기사도’의 정신에 불타 그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일들은 전부 그의 상상 속에서 탄생한 기사 돈키호테의 사명이다. 여행에서 처음 도착한 여관을 성이라 부르며 여관 주인과 하녀들의 비웃음 속에서 기사 작위를 받기도 하며, 동행하기로 한 산초와 풍차를 공격한 유명한 일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양 떼를 군대라고 착각하여 덤비다가 목동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장례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도 하는 ‘얻어맞는 일상’의 일화들이 그를 충동적 몽상가 정도로 평가 받게 한다. 그러나 약자를 위하는 연민을 드러낸 일화들은 그가 꿈꾸던 기사도 정신이 마냥 정신 나간 사람으로만 보이도록 하지 않는 역할을 한다. 돈키호테의 가상의 공주 둘네시아가 소설 속 실존의 인물이며 그가 산초를 설득할 때 말했던 섬의 영주 자리를 주겠다던 약속 또한 현실로 이루어져 현실과 이상을 넘나드는 소설적 장치 또한 이 작품이 주는 의의에 영향을 미친다.세르반테스가 살았던 16세기, 17세기 당대의 대중들은 허황된 과장으로 점철된 기사 문학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시대는 변하고 기사도 정신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대중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기사와 공주가 나오는 허황된 이야기의 환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그런 대중들과 더불어 중세의 시사도 정신을 비웃고 싶었던 것일까. 실제로 세르반테스는 이 책을 쓴 목적이 '기사도 이야기가 세상에서 갖는 권세와 명성을 타고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니,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책 속의 이야기를 눈앞에 실제로 펼쳐지는 현실로 착각하여 자신의 본명인 '알론소 키하노'로서의 정체성을 버린 주인공 돈키호테가 바로 세르반테스가 비판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툭하면 말에서 떨어지고 싸우다 다치는 돈키호테를 통해 기사도의 이야기를 최대한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싶었으리라. 실제로 돈키호테는 꽤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부정적 인물로 인식되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 생각 없이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인간형을 바로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곤 했었다. 이와 반대되는 인간형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 의 주인공 햄릿이 제시되기고 한다. 그러나 돈키호테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필요한 것 같다. 냉혹한 현실 속에서 과거의 낭만을 꿈꾸는 사람, 이제는 의미가 흐릿해진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 자신만의 신념이 확고한 인간형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돈키호테는 아직까지도 캐릭터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며 이에 대한 수많은 콘텐츠들이 생산되었다. 최근의 해석은 후자에 가까운 쪽으로 많이 옮겨가고 있는 듯 하다.
- 편집을 통해 살펴본 영화의 서사구조 -들어가며아마도 박찬욱 감독은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화면을 구사하는 스타일리스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화면은 단순히 말쑥하고 잘 빠진 화면과는 다르다. 강렬한 리듬의 시각적 에너지, 잔혹한 폭력의 액션, 독특한 조형미의 미장센은 과거의 한국영화는 물론이고 당대 어느 영화와 비교해보아도 분명 새롭고 독창적이다.나는 2002년에 개봉된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우연히 시나리오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터라 영화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졌다. 시나리오에서는 동진의 딸 유선이 유괴당해 죽기 전까지의 전반부를 흑백 화면으로 처리하고 죽은 유선을 동진이 발견하는 부분부터 컬러로 바뀌어 2부가 시작되는 구성이었다.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를 살펴봐도 이런 구성을 처음부터 염두에 뒀던 것 같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는 여러 가지 여건상 이런 구성을 포기하고 전체를 컬러 화면으로 채웠다. 봉준호 감독의 조언을 듣고 수정했다는 영화의 엔딩도 시나리오와는 달랐다. 아무튼 완성된 영화는 영화를 보기 전 나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드보일드’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 영화는 대사가 간결하고 음악이 거의 없다. 인물의 감정이 드러나면, 그 순간 다른 화면으로 바뀐다. 폭력이 등장하는 섬뜩한 장면일수록 뜸들이거나 예고하는 일 없이 바로 스크린에 들이닥친다. 망설이는 틈을 보여주지 않는다. 낭비가 없이 꽉 짜여진 미쟝센과 잘 다듬어진 사운드, 정교한 타이밍의 편집 등으로 관객의 감정선을 움켜잡고 의도한 방향으로 내몬다. 치밀하게 계산되어 힘이 잔뜩 들어간 샷들은 가끔 지나치리만큼 인위적으로 느껴지고 오히려 이러한 부분들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기괴한 유머를 자아내고 있다.은 스타일리스트로서 박찬욱의 면모와 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문제는 이러한 스타일이 지니는 의미이다. 이제부터 이 영화에 나타난 편집 스타일을 살펴보고 네러티브 전개에서 어떤 효과로 작용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본론 1 - 생략의 수 있다. 생략적 편집 스타일은 이야기를 하는 기법 가운데에서도 고도록 진화된 기법이다. 의 힘은 생략적인 편집 스타일에 있으며, 이 편집 스타일은 이야기의 의미를 인정하고 이 의미에 몰입할 것을 요구한다. 샷의 생략적인 전환으로 인해서 시각적, 청각적 재료의 일부가 제외되면서 관객은 오도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각적, 청각적 단서들이 텍스트에서 빠진다고 해서 관객이 전반적인 문맥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동진이 중국음식점의 배달부를 살해하는 광경을 관객이 볼 필요는 없지만,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들로 이 영화의 흐름을 꿰어 맞출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이 영화의 특징이자 장점이다.영화의 오프닝은 편지를 읽어주는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편지는 청각 장애인 류가 보낸 것으로, 그는 자신의 병든 누나와 의사소통을 하는 한 가지 방편으로 방송국에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때 진행자의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로 들리면서 화면이 제시되는데 초점이 흐려져 있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추상 이미지 같다. 그러다가 카메라가 패닝하면서 서서히 초점이 맞게 되면 마이크의 클로즈업 샷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목소리의 주인공과 사연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박찬욱은 혼란스러운 샷을 불쑥 던지는 식으로 새로운 씬을 곧잘 시작하곤 한다. 영화는 수수께끼의 모든 조각들을 서서히 풀어내놓는다. 관객이 류의 모습 전체를 보는 데에만도 5분이나 걸린다.누나의 수술에 대해 의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그렇다. 혈액형이 맞지 않아 이식을 못한다고 의사가 주인공에게 설명을 하는 장면인데, 여기서도 대화의 앞부분이 생략된 채 갑작스러운 클로즈업 샷으로 시작한다. 게다가 이어지는 샷 역시 구도가 부자연스러운 클로즈업으로 상당히 파격적이고 낯선 이미지다. 절망적인 소식을 전하는 의사의 입을 클로즈업한 장면은 청각장애인 류의 시점을 표현한 것인데 웅웅거리는 소리가 사운드를 대신하고 있다. 류는 의사의 사무실에 앉은 채로 비에 젖은 창문이 머리 두 개 달린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도 그렇다. 화면중앙을 거울의 시커먼 뒷면이 차지하고 있고 인물들은 그 거울에 가려져 신체의 일부만이 보인다. 대개 관객의 시선이 프레임의 중앙으로 몰리기 마련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중앙이 가려진 이 장면에서 관객의 시선은 방황하게 된다. 게다가 이 장면에서 샷들은 거울을 통해 180도 법칙을 완전히 무너뜨린 채 연결되어 있어 공간적 관계를 이해하기도 만만치 않다.12-12-2이러한 스타일이 과장되어 거의 만화적인 표현으로 보이는 장면도 있다. 바로 주인공이 사표를 쓰는 장면인데, 펜을 건네는 직장 상사의 팔이 위협적으로 프레임의 전경에 침범해 들어와 있고 그 뒤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주인공의 상반신이 보인다. 그러다 이번엔 90도 틀어진 각도에서 앙각으로 찍힌 롱 샷이 갑자기 툭 끼어든다. 앵글과 화면의 크기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관계로 관객들은 이미지를 손쉽게 지각하지 못한다. 다만 몇 개의 샷이 제시된 이후에서야 전후 관계를 통해 이 샷들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류가 사직서에 사인한 후 다시 직장 상사의 팔이 악수를 청하며 제시되는데 이는 앞선 샷과 대조를 이루며 아이러니를 일으킨다. 이 장면은 다시 롱 샷으로 이어지는데 이때 갑자기 벽에 걸린 뻐꾸기시계가 울리며 침묵을 깨뜨린다. 이는 류가 처한 비극적 상황에 대조적으로 유머를 더하고 있는데 만화적 표현을 의도한 장면으로 보인다.123456789이처럼 이 영화는 충분한 공간정보 없이 화면을 제시하고 있는데다가(설정 샷의 부재), 파격적인 화면 구도와 기이한 앵글, 카메라를 거의 정면으로 쳐다보는 배우의 도발적 시선, 광각렌즈를 이용해 공간의 깊이를 과장하는 것 등이 더해져 관객의 지각적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러한 화면 제시방법은 영화 내내 반복해서 사용된다. 그런 점에서 이는 이 영화의 중요한 스타일적 기법이라 할 것이다.다음으로 동진이 유선의 장난감 인형과 함께 류의 협박편지를 받는 장면을 보자. 이 부분에서 유선의 장난감 인형은 생략된 장면의 연결 장이를 사랑해요” 라고 말하는 깨끗한 새 인형의 클로즈업이 동진이 전달받은 인형의 클로즈업과 겹치면서 영화의 서사는 류의 시점을 배경으로 밀어낸다. 깨끗한 인형은 망가졌다. 인형은 붉은 립스틱으로 더렵혀졌고 인형을 둘러싸고 있는 조명도 어두워진다. 더럽혀진 인형을 통해 둘의 시점을 묶는 것은 이후 둘에게 닥칠 파국과 둘이 걷는 평행선을 예고하기도 한다. 유선, 류의 누이, 영미가 죽은 다음 류와 동진은 양자 각각이 자신의 복수 계획의 포로가 되고, 인질이 되어버리는 뒤틀린 변형을 이루게 된다. 둘은 모두 상처를 갖고 있고, 그로 인해 결국에는 무감각한 마비상태에 이르게 된다. 샷들 사이에 지속되는 연속성의 패턴은 두 인물을 서로에게 다가가게 만들면서 성격의 발전에 일조한다.123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전환이 보인다. 바로 유선이 죽은 뒤 망연자실한 채 유선을 바라보는 류의 모습과 유선의 시체에서 곧이어 유선을 내려다보는 동진의 모습으로 넘어가는 장면이다. 이 장면 역시 과감한 생략으로 아이러니한 비극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어질 동진의 복수계획과 바로 그 자리에서 벌어질 파국을 예고하고 있다.123덧붙여 영화 전반에 나타나는 생략적인 편집 스타일 가운데에서 사운드 편집은 중요한 특징이 되고 있다. 사운드의 연결은 관객에게 충격을 주는 동시에 이야기의 세계에서 분산되어 있는 지점들을 연결시키는 통로가 된다. 예컨대 몸값 전달이 이뤄진 다음 우리는 개 짖는 소리를 듣고 난 후에 류의 아파트를 떠나게 된다. 우리는 그 다음 공원의 가로등에 묶여있는 동진 앞에서 개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카메라의 주관적 시점은 동진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여준 다음 초점을 도시의 원경으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바로 그때 우리는 먼 곳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는다. 이것은 다시금 우리를 류의 아파트로, 류의 누나가 죽자 눈물을 흘리는 유선에게로 돌아가게 만든다. 이러한 사운드 편집과 청각적인 암시들은 인물들을 연결시키고 서사의 흐름을 고도로 양식화된 인 관계로 풀지 않았다는데 있다. 이 영화의 독특한 접근은 자본주의 착취 구조의 비인간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기묘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 동진과 류는 서로에게 이유와 동정, 연민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가차 없이 칼을 들이대며 처절한 복수극을 벌인다. 복수의 대상은 어쩌면 서로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주고 있는 이 세상의 구조에 있는 것임에도 그들은 그걸 깨달을 틈이 없다. 복수를 꿈꾸는 두 사람의 시선과 표정에서 잔인함보다 비참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류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설정 역시 두 주인공이 원천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단순히 류가 동진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동진 역시 류의 사정을 알아챌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비정의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편집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영미가 류에게 “(장기밀매조직을)찾으면 어쩔 거야?”라고 묻자, 경찰관과 통화하는 동진이 대답한다. “죽여야죠.” 이러한 교차편집에서 보이듯 대조의 효과 역시 이 영화의 중요한 스타일로 쓰이고 있다.한 침대 위에서 네 명이 청소년이 자위를 벌이는 장면은 류와 그의 누나가 살고 있는 소란스런 주거환경에서 펼쳐진다. 옆방에서 들리는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몇 명의 청년들이 자위행위를 하고 있다. 네 명의 청소년은 잡지에 나온 에로틱한 여자 사진이 주는 시각적인 쾌락과 아마도 옆방의 오르가즘 비명으로 여겨지는 소리를 동시에 즐긴다. 하지만 카메라가 수평으로 트래킹 해 옆방을 보여주면 주인공 누나가 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관객은 그것이 벽의 다른 쪽에서 류의 병든 누나가 죽어갈 듯이 발작을 하면서 신음소리를 내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몸부림 바로 옆에서 성적 쾌감을 탐닉하는 청소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섹스의 쾌락이 육체의 고통으로 바뀌는 순간 관객은 이러한 급격한 역전에서 현기증을 느낀다. 또한 이 장면은 후경의 고통스러워하는 누나의 신음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