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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로마사 요약
    로마사 요약
    1. 트로이의 유민 아이네이아스가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와 결혼하면서 알바롱가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라티누스의 이름에서 오늘날 '라틴'이 유래함.2. 알바롱가의 사제인 실비아가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는데,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캄피돌리오 언덕 중심으로 국가를 세우는 데, 이것이 로물루스가 세운 나라인 로마의 시작임.3. 로마에 차례로 일곱 왕이 즉위하는데, 7번째 왕 타르튀니우스가 브루투스에게 쫒겨나고 왕의 보좌기구였던 원로원을 중심으로 나라가 운영되는 로마 공화정이 시작됨.4. 켈트족의 침략과 그리스 피로스의 침략 등 각종 침략을 막아내고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자신의 세력권에 넣은 로마 공화정은 시칠리아를 두고 카르타고와 경쟁을 벌임(제 1차 포에니)5.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했지만, 바르셀로나에 거점을 둔 한니발 바르카가 사군툼 점령을 시작으로 알프스를 넘으면서 위기에 빠짐.6. 칸나이 전투에서 기록상 최대 8만명의 전사자와 포로가 나오면서 로마는 멸망 직전에 몰리지만, 로마의 동맹시들이 로마와의 동맹을 끊어버리지 않으면서 한니발은 고립됨.7.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카르타고 본토 공략과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연 전략으로 다시 승기를 잡은 로마는 지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격파함으로서 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와 지중해의 패권을 잡음.8. 로마의 영토가 커짐과 동시에, 장기화된 전쟁으로 자영농이 몰락하고 원로원 의원이 대농장을 보유하는 양극화가 심해짐에 따라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가 토지 분배 및 이탈리아인 전부에게 시민권을 주려고 했으나 암살 및 자살로 실패하게 됨.9. 로마는 일정 재산을 가진 사람들을 병력으로 모집했으나, 양극화의 심화로 병력의 질과 양 모두 저하되기에 이름. 북이탈리아의 킴브리족과 북아프리카의 유그르타 등지에서 로마가 패배하자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군단장이 병력을 모집하는 방식의 군제개혁으로 로마의 패권을 유지하게 됨.10. 하지만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은 속주총독 및 집정관의 사병화로 이어졌고 마리우스와 술라와 같은 군단장들이 병력을 이용해서 정치에 개입하는 불법적인 행태가 계속됨.예를 들어 동방 원정에 가있던 술라의 군권을 마리우스가 빼았자 술라가 무단으로 로마진군을 감행했고 동방전쟁에 필요한 군권을 유지하게 됨.아프리카로 피신한 마리우스는 다시 사병을 모아 로마로 입성한 후 대숙청을 감행해 7번째 집정관에 오르다 폐렴으로 급사하고 이를 놓치지 않은 술라가 다시 로마로 진군하면서 그 유명한 술라의 살생부를 통해 몇 천에 이르는 반대파들을 제거하는 참변이 일어남. 이 시대를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라고 함.11. 술라는 호민관의 권한 축소와 기사계급의 배심원 참여 금지, 원로원의 권한 강화와 로마에 병력을 진군하는 행위 금지 등 원로원의 권위를 극단적으로 높이는 것으로 민중파의 싹을 자르려했지만,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한 술라의 특성상 명분과 현실성이 부족했고 술라 사망 후 술라의 법안들은 폐지되기 시작함.이를 주도한 것이 과거 술라파에 속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이며 이 둘을 중재한 것이 바로 카이사르임.이 세명이 정치를 주도한 것이 바로 제 1차 삼두정치임.12.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와 동방을 사실상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들고,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5년 만에 정복하는 위업을 달성함.초조해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를 공격하다 자신도 전사해버리는 참사가 일어나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간의 동맹관계는 파탄을 맞고 만다.13.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병력해산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하기에 이른다.카이사르의 정예병력을 상대하기 벅찼던 폼페이우스는 동방 그리스로 가서 카이사르를 상대하는데,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패배하면서 그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으로 피신하는 신세로 전락했다.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폼페이우스를 무단으로 죽여버리고, 적이지만 전직 집정관이었던 그를 죽여버렸단 명분으로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제거하고 클레오파트라를 (공동 통치자였지만) 사실상의 이집트의 지도자로 옹립한다.14.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한 카이사르는 공화파들에게 암살당하고,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나와있는대로 18살 짜리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면서 카이사르의 측근이었던 안토니우스와 갈등을 빚는다.15.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먼저 동방에 남아있던 공화파들을 제거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를 포섭하면서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된다.이때 키케로와 소 카토 등 원로원 의원들은 제거되면서 원로원의 권위를 수호하려던 세력들(옵티마테스)은 완전히 패배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제거한 삼두는 서방의 옥타비아누스, 동방의 안토니우스로 10년간의 균형을 이룬다.16.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자신 간의 자녀들에게 동방의 영토를 분배하겠다는 선언을 명분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향해 전쟁을 선포한다.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이집트를 자신의 영지로 만들어버림으로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다.17.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호민관의 권한과 군 통수권, 최고 사제와 같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원로원, 민회, 군대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존엄한 자라는 '아우구스투스'를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수여받기에 이른다.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프린켑스라고 부르며 전제군주와 같은 인상을 지우고 원로원과 공화정의 잔재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로마를 안정적으로 통치한다.이러한 방식을 프린키파누스, 즉 원수정이라 한다.18. 기사계급의 참여 촉진과 관료제 정비를 통해 약 40년 동안 안정적으로 통치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경륜이 있던 양아들 티베리우스에게 권력을 넘기며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묻히게 된다.티베리우스는 근위대 등을 이용한 공포정치를 통해 제정을 위협할 수 있는 원로원 의원들을 제거하는 포악한 모습을 보였지만, 특유의 꼼꼼한 성격으로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한다.19.하지만 티베리우스의 조카의 아들인 칼리굴라는 변덕이 심하고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라 근위대에게 암살당하고 티베리우스의 조카, 칼리굴라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른다.클라우디우스는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었으나 행정제도 정비와 오스티아 항구 개발 등 여러 치적을 남기는 유능한 황제였다.다만 클라우디우스의 4번째 부인인 소 아그리파나에게 독살당하고 그 양아들인 네로가 제위에 오르면서 로마는 위기에 빠진다.20. 네로는 자신의 어머니를 암살하고, 운동경기에 참여하는 등 기행과 사치를 벌이며 국고를 탕진한다.총독에 대한 무원칙하고 무능한 처우로 불만이 고조되던 차에 원로원과 근위대 모두에게 버림을 받아 결국 자살로 생을 끝맺는다.게다가 자신의 자리를 넘볼지도 모른다는 중상모략으로 자신의 친족을 모두 제거해버린 터라 아우구스투스가 창업한 울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단절된다21. 1년에 4명의 황제가 등극하는 혼란기를 종식시킨 것은 유대 반란을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였다.베스파시아누스는 공중 화장실에도 세금을 매기는 등 각종 간접세를 통해 재정을 확충해나가면서 나라를 재정비한다.그 뒤를 이은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도 유능했지만, 티투스가 폼페이 화산 폭발에 따른 피해를 수습하느라 과로사하고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에 대해 지나치게 거만한 자세로 일관했기에 암살되기에 이른다.22. 베스파시아누스가 개창한 폴라비우스 왕조가 끝나고, 원로원 의원 출신인 네르바가 약 2년동안 로마의 각 세력을 중재하면서 혼란기 없이 안정적으로 네르바의 양자인 트라야누스에게 제위가 넘어간다.트라야누스는 다키아와 파르티아를 정복하는 등 로마의 최대영토를 구축하였지만 잦은 정복 전쟁으로 국고를 탕진했다는 이중적인 평가를 받는다.23. 트라야누스 이후 하드리아누스는 각종 건축물을 짓고 국가 전체를 순시하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국가를 통치했다.그의 제위기간은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구축되면서 로마가 정복이 아닌 방어로 돌아섰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기였다.그 뒤를 이은 것은 안토니우스 피우스였고 안토니우스 피우스 다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였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안토니우스 역병과 본격화된 게르만족의 침략 등 각종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한 황제로, 명상록을 집필한 철학가이기도 했기에 철인황제라는 칭송을 받는다.24.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인 코모두스는 정신병자로 검투사 경기와 방탕 등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된 황제로, 그가 암살된 후 4년 동안의 혼란기가 지속되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이를 수습한다.그는 각종 규제를 신설하고 근위대의 권력을 강화함으로서 로마를 더욱 중앙집권화하는디 성공한다.세베루스는 이를 통해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했지만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드는 재정 부담과 근위대의 정치개입이 심화되면서 제국의 위기가 가속화된다.25.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암살되면서 근위대와 군대가 황제를 옹립하고 암살하기를 반복하는 군인황제시기가 시작된다.
    인문/어학| 2023.10.08| 7페이지| 2,000원| 조회(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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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일본과 한반도의 서로 다른 역사적 궤적 -메이지유신과 봉건제를 중심으로(서울과기대 교양)
    일본과 한반도의 서로 다른 역사적 궤적 -메이지유신과 봉건제를 중심으로(서울과기대 교양)
    역사와 인간일본과 한반도의 서로 다른 역사적 궤적-메이지유신과 봉건제를 중심으로목차1. 머리말2.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의 봉건제3. 헤이안시대와 통일신라 이후의서로 다른 역사적 궤적4. 일본과 한국 간 역사적 차이와 이유 분석5. 맺음말6. 참고문헌1. 머리말20세기 이후 식민제국의 몰락과 독립국가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서구열강으로부터 비롯된 수탈과 치욕의 역사이며, 이러한 분노가 국민국가 형성의 자양분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근현대사의 한 축이 서구의 시민사회 형성과 산업혁명이라면 다른 축의 역사는 비서구 문명권이 서구열강의 침략을 저지하고 반외세와 반봉건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우리나라의 역사적 트라우마는 조선의 근대화 실패와 일본의 성공이라는 대비와 열등감에서 기원한다. 조선 정부의 무능과 여흥 민씨의 부패로 쉽게 치환되는 조선의 근대화 실패는 그 이전부터 지속되던 역사적인 궤적을 무시한 설명이다. 일본의 근대화 성공, 즉 메이지 유신은 단순히 서구의 문명을 배워 일본에 이식한 것이 아니라 조선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중앙집권적 사회와 다른 체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좀 더 정확한 설명은 최소한 일본이 통일신라와 당을 모방해 율령제 국가를 시도하던 헤이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며, 착실하게 중앙집권제를 실시해 왔던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을 비교해야 한다.이 보고서는 조선의 중앙집권적 체제와 근대화 실패의 관련성을 다루고 있다. 물론 하나의 요소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에는 심각한 오류가 따르지만, 이와 같은 설명이 근대화라는 화제성 높은 화두와 관련성이 있으며 우리나라 역사를 설명하는 한 축인 중앙집권화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할 것을 발상에 따라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하였다.2.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의 봉건제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조선과 명, 청과 다른 정치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 160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가문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서군과 간토의 다이묘(大名)였던 도쿠가와 이에아스를 지지하는 동군이 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가문이 이끄는 동군이 승리하면서 1603년 에도 막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약 260년 동안 일본의 실질적인 정부로 기능한 에도 막부는 조선과 명, 청과 근본적으로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중앙 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해 지방을 다스리는 중앙집권국가가 아니라 지방의 수조권과 사법권을 독점한 다이묘들의 연합에 불과했다. 다이묘가 지배권을 행사한 지역을 번(藩)이라 하고, 이런 다이묘들의 대표가 바로 막부(幕府)였으며, 막부의 수장인 쇼군(將軍)이었다. 번과 막부는 유럽 중세사회의 영주처럼 느슨한 계약관계로 결합되었으며, 이러한 막부와 번의 연합관계를 막번(幕藩)체제라고 한다.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서군의 다이묘였던 모리 가문과 시마즈 가문은 삭번(削藩-영지로 통치해오던 번을 몰수하는 것)을 면했지만 중앙 정치에 진입하지 못했다. 여기서 중앙 정치와 지방 정치가 일원화 되지 못하고 중앙정부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을 일소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막부와 번의 결합, 즉 막번체제의 허약함을 보여준다. 역으로 봉건사회의 정점인 막부와 대결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메이지유신과 같은 급진적인 개혁의 성공 요안이자 전제 조건이었다.중앙 정계에 진입하지 못했던 모리 가문과 시마즈 가문이 점유하던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1866년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삿초 동맹을 맺고, 삿초 동맹이 군사적 압박을 가하자 2년 뒤인 1868년 정치적 권한이 막부에서 교토의 조정으로 넘어가면서 도쿠가와 막부로 상징되는 봉건체제의 청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메이지유신과 같이 급진적인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은 청나라의 양무운동이나 조선의 동도서기와 달리 새로운 세력이 명분을 확보한 채 집권할 수 있었던 데에 있다. 청과 조선의 근대화운동이 서양 세력의 방해와 더불어 내부적으로 신사층과 사대부 등 집권층의 반발로 동력을 잃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자면 에도 막부를 자력으로 제압했다는 사실이 전면적인 개혁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에도 막부를 대체한 삿초 동맹이 근대화에 적극적인 세력이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설명이지만 지방의 독립적인 성향의 세력이 정권을 잡는다는 것은 500년 이상 안정적인 중앙집권제를 운영해 온 조선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3. 헤이안 시대와 통일신라 이후의 서로 다른 역사적 궤적역사적으로 고대와 중세의 분류와 기준은 많은 논란거리가 있다. 하지만 중앙집권제의 강화와 단일민족의식의 형성을 기준으로 할 때 통일신라 이후 후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를 통일한 고려를 한국사의 중세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일본은 나라 시대와 헤이죠코 시대, 그리고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천황 중심의 율령국가를 시도하다, 귀족 세력의 조정 장악과 무사 계급의 성장으로 고려와 같은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정치 및 사회의 유의미한 변화를 기준으로 할 때 일본은 헤이안 시대에서 무사 계급이 형성한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로 넘어가는 약 10세기에서 12세기 정도의 기간이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전환기라 볼 수 있다. 이렇듯 고려와 가마쿠라 막부가 맞이한 중세의 차이는 근세로 분류할 수 있는 조선과 무로마치, 에도 막부로 이어지며 양국의 개화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이와 같은 차이가 벌어지게 된 이유는 ‘4. 일본과 한국 간 역사적 차이와 이유 분석’에서 알아보는 것으로 하고, 이번 장은 고려가 통일신라의 지방통제력 상실로 벌어진 후삼국시대를 어떻게 통일하였으며, 일본의 막부와 달리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권을 확립하는 과정을 알아볼 것이다.통일신라의 8세기 후반과 9세기는 원성왕부터 무열왕의 직계가 단절되고 이후 진골귀족의 왕위쟁탈전으로 인해 지방통제력이 약화되는 시점이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도 후지와라 씨의 섭관 정치와 상황의 원정(院政-천황의 아버지가 후견인으로서 정치를 주도하는 중세 일본의 정치 형태) 등으로 왕가의 정치적 영향력이 훼손되는 시기였다. 본격적으로 신라가 후삼국시대로 접어들게 된 계기는 김헌창의 난 이후로 볼 수 있다. 김헌창의 난은 신라 진골인 김헌창이 청주를 중심으로 일으킨 반란이었는데, 이 때부터 지방 세력이 중앙 정치의 분란에 개입하게 되면서 신라 왕실이 지방의 호족을 통제할 명분과 실질적인 능력 모두 상실했음을 드러냈다.통일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중간기인 후삼국시대의 삼국은 지방 호족들의 연합 정권에 가까웠는데, 궁예가 미륵을 자처하며 폭정을 일으키다 패서 세력의 대표인 왕건이 왕으로 추대된 사건도 후삼국의 호족 연합국가의 성격을 보여준다. 즉, 궁예가 철원으로 무리하게 천도한 것과 국호를 후고구려에서 마진, 태봉으로 교체한 것도 송악을 중심으로 한 패서 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으며, 폭정이라 기록된 행동도 왕권 강화의 일환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고려의 재통일 이후에도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는 한계가 있었는데 고려를 지지한 여러 호족들과 왕건의 결혼동맹은 고려의 불안한 정치적 상황과 호족의 연합 정권이라는 한계를 보여주는 방증(傍證)이었다. 고려의 4대 왕인 광종의 숙청과 왕권강화를 통해 호족 세력을 문벌귀족이라는 중앙귀족으로 정착시키지 않았다면 고려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처럼 고려도 지방에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들이 연합한 정권이었으나 고려 6대 왕 성종의 치세에 이르러 12목(牧)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8대 왕 현종은 지방을 5도 양계로 나누어 개성 왕씨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를 완성시켰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통치는 조선 조(朝)에 이르러 더욱 정교화된 형태로 자리잡았다.4. 일본과 한국 간 역사적 차이와 이유 분석분열과 통일이 국가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는 유럽과 중국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유럽은 인도 아대륙과 비슷한 크기에 약 50개 국의 국민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나 영국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등 오늘날보다는 적은 몇 개의 국가가 유럽의 패권을 다투었지만, 명·청 제국과 비교했을 때 유럽은 영구적인 분열상태가 지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중국은 오늘날까지도 통일을 유지하려는 강력한 원심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문/어학| 2023.06.10| 6페이지| 2,500원| 조회(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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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학금 자기소개서(장학생 선정됨)
    5·18희망장학생 지원서성명소속대학부(과)학과(전공)학년학번1. 가정환경넘어지는 이유는 다시 일어서는 방법을 배우기 위함이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유도나 태권도 등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무술에서도 정작 싸우는 기술보다 잘 넘어지는 법인 낙법을 먼저 가르칩니다.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훌훌 털고, 고무공처럼 다시 튀어오를 수 있는 힘. 이것이 오늘날 스트레스와 비교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 사회가 더욱 주목받고 있는 회복탄력성의 본질이 아닐까 합니다.저에게 이러한 회복탄력성을 가르쳐준 것은 역설적으로 저희 가정환경 속 어려움 덕분입니다. 저희 가정은 경제적으로 윤택하지는 못합니다. 아직도 저희 어머니는 60이 넘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식당에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고된 노동의 후유증으로 인해, 제대로 거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십니다. 사실상 어머니 홀로 우리 가족을 부양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200만 원도 안 되는 월급으로 부모님과 저, 그리고 치매로 인해 오늘 날짜도 헷갈리시는 친할머니를 책임지는 것은 너무나도 고달픈 일입니다.하지만 이런 고달픈 가정상황은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실패에 굴하지 않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의지와 적극성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제가 이번 5.18 희망장학생에 신청하게 된 계기또한 제 진로에 필요한 자원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더불어 부모님께 의지하기보다 자기 주도적인 문제해결로 어려움을 돌파하고자 하는 책임감 또한 제 가정환경의 산물입니다. 몸에 쓴 약이 건강에 좋다는 말처럼, 저만의 독특한 ‘의지’유전자가 제 삶에 축적된 셈입니다.또한 주저앉는 시간도 사치라며 악착같이 노력하신 저희 어머니를 보면서 저도 어머니의 뒤를 따라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시장에서 바나나빵과 계란빵을 판매하시며 저를 키우셨습니다. 비록 추위와 고됨이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일이었지만, 저희 어머니는 어디서든지 당당하셨습니다. 용의 꼬리가 될 바에는 뱀의 머리가 되는 게 낫다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려는 어머니의 당찬 모습이 지금도 제 안의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제가 말씀드린 절박함, 회복탄력성, 그리고 책임감은 대학교 생활 내내 저를 지탱해 준 소중한 가치들이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용돈을 받은 바 없이 저 스스로 생활비를 마련한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학교 1학년부터 2학년까지 저는 도서관에서의 행정 아르바이트로 제 생활비를 충당하였습니다. 또한 지금도 독서실에서 학생들을 관리하는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받지 않는 자립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아르바이트는 단순히 저의 지갑을 채워주는 수단이 아닌 제 봉사정신과 지향점을 일깨워주는 마중물이 되었습니다.2. 가치관 및 삶에 대한 태도가치관이란 결국 행동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가치관은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겪고 있는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전문가가 되고 싶습니다. 따라서 저는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는 물론이고 제가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를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도록 제 역량을 키워왔습니다.먼저 지역사회에서 저는 고령자와 장애인분들이 쉽게 정보를 이용할 수 있도록 시립도서관과 민간운영도서관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바 있습니다. 저는 이 봉사활동에서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비치해놓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역사회에서 도서관은 새로운 삶의 기회와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특히 컴퓨터 이용이 미숙하신 정보취약계층에게 도서관은 세상과의 유일한 창구인 셈입니다. 이러한 도서관의 소중함과 가치를 체감하면서 저는, 저소득층 가정의 어린이들에게 문화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아울러 앞서 말씀드린 정보취약계층 분들이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컴퓨터 이용을 가르쳐드리기도 했습니다.이러한 봉사활동은 저에게 또 다른 교훈을 주었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매 순간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배우려고 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특히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께서 컴퓨터를 배우기 위해, 손자뻘인 저에게 존대하시면서 지식을 얻으려 하는 모습은 저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저는 비록 제가 계획하거나 원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배울 것이 하나라도 있다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도전했습니다.이러한 자세는 제가 약 2년동안 우리대학 신문사에서 활동한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사실 저는 신문사에 꼭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기사를 쓰고 편집하는 과정이 저에겐 너무나도 버거웠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만나볼 경험이 없었던 사람들과 인터뷰하고,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비록 밤 12시가 넘어서도 신문제작에 시간을 쏟아야 했던 적이 부지기수였지만, 제가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은 언제나 저의 성장에 마중물이 된다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그 결과 제가 작성한 우리대학 어플리케이션 개선 방안에 대한 보도가 어플리케이션 개발을 위한 자료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저는 저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다른 이의 성장을 이끌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3. 향후 계획저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가지고 있는 전문성으로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질을 개선하는 방향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저는 ESG 경영에 필요한 법률적, 경영학적 지식을 제공하는 인사노무컨설턴트를 제 진로로 잡았습니다. 특히 ESG 경영이란 기업의 경제적 이윤추구만이 아닌 사회적, 윤리적 책임을 이끌어내는 경영방식입니다.제가 이러한 진로를 선정하게 된 이유는 제가 앞서 말씀드린 봉사활동의 영향이 컸습니다. 특히 제가 도서관의 사서 역할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저에게 큰 보람을 주었습니다. 또한 행정학과가 추구하는 전인적, 인간적 조직 운영도 저의 이러한 진로 선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즉 기업의 목표와 조직 구성원의 목표를 일치시키려는 현대적 인적자원관리가 우리나라의 기업 운영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단순히 직장 생활을 경제적 수단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고용인의 자기 계발의 장으로서 바라봐야 한다는 현대적 인적자원관리의 시각은 매우 참신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회사의 운영과 근로자의 근로 환경 개선에 앞장서는 인사노무컨설턴트가 되기를 희망합니다.아울러 현재 직업선택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구직자와 법의 사각지대에 몰려 있는 일용직근로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특히 저희 아버지께서는 일용직으로 근무하시다가 부상을 당하신 후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하셨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겪으셨던 일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저는 ‘이타적인 전문가’, 그리고 ‘실천적인 전문가’가 되고자 합니다.이를 위해 저는 올해 1월에 열린 ESG 경영 증진대회에 참여함으로써 직접 경영과 창업에 앞장서는 벤처사업가 분들을 인터뷰할 수 있었습니다. 해당 대회에서 저는 제가 생각하는 윤리적, 환경친화적 경영을 위해 현실적으로 필요한 게 무엇이 있는지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직접 기업을 운영하시는 분들과 질문과 논쟁을 통해 저는 제 꿈을 좀 더 다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울러 해당 대회는 지역사회가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논의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제주도에서 만연하게 발생하는 녹조류를 가공한 플라스틱 제품을 건의하였습니다. 이는 지역사회의 실업자와 취약계층을 근로자로 고용함으로서 농촌사회와 소비자 모두 상생할 수 있는 아이디어였습니다.
    기타| 2023.06.10| 4페이지| 3,500원| 조회(1,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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