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과 세계문학세 가지 갈등양상을 중심으로라오서 작가의 『마씨부자』는 20세기 초, 영국으로 이주한 중국인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약소국 중국이 겪는 민족적이고 인종적인 멸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중국이라는 나라에 있어서 20세기 전반기는 혼란이 극으로 치달은 때였다. 근대화라는 이름은 오랜 시간동안 자국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왔던 사고방식에 조금씩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근대화가 가져온 사회적이고 관념적인 혼란은 배척, 혹은 극복의 대상이었다. 라오서는 『마씨부자』 이야기 안에 여러 종류의 인물들을 형상화 해 놓고 그 인물들의 말을 빌려 중국의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마씨부자』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갈등을 가지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첫 번째는 영국인, 중국인 간의 갈등으로 다뤄지는 인종간의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의 양상은 이야기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는 영국인들의 허위의식을 풍자적으로 다룸과 동시에 그들의 눈에 비춰지는 중국인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20세기 초 세계 최 강대국인 영국인의 눈에 비춰지는 중국인의 모습은 피하고 싶은 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국인은 미개하며 더럽고 음험한 사람들이었다. 간혹 중국인에게 잘 대해주는 싸이먼 남작이나 에번스 목사가 등장하지만 그들도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으로 호의를 베풀 뿐이다. 라오서는 중국인에 대한 그러한 시각이 제국주의와 지나친 배금주의, 그리고 그에 따른 가난한 나라에 대한 민족적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라오서는 소설 안에서 젊은 세대인 ‘리쯔룽’, ‘마웨이’, ‘캐서린’등의 캐릭터를 통해 그러한 멸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학업에 정진하고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가 되는 길을 제시한다.그러나 소설 안에서 이러한 인물들은 순탄하게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모세대와의 충돌을 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 두 번째 종류의 갈등, 즉 세대 간의 갈등이 다뤄진다. 이야기 안에는 인종간의 갈등 못지않게 기성세대들과 젊은 세대들의 갈등 양상이 두드러진다. 책을 통해 많은 중국 독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고자 했던 라오서는, 보수적 세계관을 가지고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기성세대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에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적극적인 고민을 하는 젊은 세대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어쩌면 그들의 태도를 본받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소설 안에서 아들 마웨이는 장사를 하려는 노력도, 외국에서 멸시받지 않으려는 노력도 없는 아버지 마쩌런에게 실망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그려진다. 결국 이 이야기의 결말은 마웨이가 말이 통하지 않는 아버지를 떠나면서 마무리 된다. 작가는 이러한 결말을 통해 구시대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향해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젊은 세대로 그려지는 여러 캐릭터들을 보다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에번스 목사의 자녀 캐서린과 폴의 경우가 그렇다. 그 둘은 둘 다 1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낳은 시대의 젊은이지만 그들의 사고와 행동패턴은 전혀 다르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1차 세계대전을 두렵고 극악무도한 행위로 인식했지만 폴은 전쟁이란 영웅적이고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들은 이처럼 한 가정의 자녀이며 같은 세대를 공유하지만 전쟁 뿐 아니라 혼인, 종교, 그리고 중국인에 대한 시각마저 모두 정 반대의 방향성을 보인다. 또한 캐서린과 에번스 부인의 딸 메리 또한 같은 세대의 젊은 여성이지만 그 둘의 사고방식도 거대한 차이를 보여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같은 맥락으로 리쯔룽과 마웨이의 갈등도 그려진다. 이것이 소설 안에서 나타나는 세 번째 종류의 갈등양상이다. 이는 격변하는 시대를 맞은 사람들을 한 가지의 관념으로 일반화 시키지 않으려는 근대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이야기 안에 섬세하게 서술된 개개인의 고뇌와 각자의 극복과정을 보며 그들의 이야기에 조금이나마 더 가까워질 수 있음이 느껴졌다.
남명, 감상문내용정리은 벼슬을 사양하고 지리산 자락에 은둔하며 학문을 하였던 이조 중기의 대표 도학자 남명 조식의 지리산 유람록이다. 제목의 ‘두류’라는 것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 ‘두류산’에서 따온 것이다. 남명은 두류산을 무릉도원이라고 표현했을만큼 지리산을 사랑하여 총 17번이나 올랐다고 한다. 이 은 그 중 1558년 4월 10일부터 16일간 그의 나이 58세에 지리산을 다녀온 내용을 담고 있다. 이번 유람에 그는 제자들, 그리고 진주목사 김홍, 고령현감 이희안, 청주목사 이정 등 뛰어난 학자들과 함께 두류산을 올랐다. 에는 조식의 거주지인 합천군 삼가면을 출발하여 진주→사천→곤양→하동→악양의 삽암(鈒巖)→도탄→악양정(岳陽亭)→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신응사를 지나는 여정이 날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작품 특성 및 감상남명 조식의 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가 사용한 비유법이었다. 매우 작은 방을 ‘말만하다’거나 ‘개미언덕만도 못하다’고 표현한 부분은 재치가 느껴졌고 연산군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화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높은 바람이 불자 벽을 사이에 두고도 한기를 느끼듯’ 이라는 말로 돌려서 서술한 부분에서는 감탄을 했다. 또한 ‘최근 내린 비에 불어난 시냇물이 돌에 부딪혀 솟구쳤다가 부서지니 … 희뿌연 은하수에 별들이 쏟아지는 듯하기도 하였다.’라는 문장 등 많은 문장에서 비유적 표현의 아름다움이 느껴져 이 문학작품으로써 가지는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지 새삼 깨달았다. 이러한 문학적 가치와 함께 남명의 은 당대의 풍습과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유산록 안에 당시 억불정책으로 지리산의 폐찰된 절의 모습이라든지 따라서 천민신분으로 전락하게 된 승려들이 지리산 사찰을 방문한 관리나 선비들에게 극진히 대접하는 모습 등을 자세히 기술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기행문 내용에 산수유람에 따른 ‘감상’을 주로 기록하면서 산수 유람을 구도행위로써 인식했던 당대의 선비들의 모습도 보여지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남명의 기행문에는 보통의 유학자들처럼 지형지물에 대해 영감을 얻는 깨달음 보다는 그가 보고 느낀 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식의 깨달음이 많다는 점이다. ‘진정한 산수 유람은 물을 보고 산을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다 간 사람을 보고 그들의 시대를 살펴서 삶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그의 성리학자로서의 철학적 사고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처럼 이 단순한 산수 유람과 자국 영토에 대한 미적 탐색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기행문은 아니라는 점과 작자가 실천적 수양을 중요시 여긴 학자였다는 점에서 서명응의 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이 단순한 관광과 관람에 대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이 유산록이 가볍지만은 않은, 깊이 있는 철학 서적처럼 느껴진다.
서명응, 감상문내용정리는 북학파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조선 후기의 문신 서명응이 북쪽 변방으로 유배를 가게 된 기회를 통해 백두산을 유람하며 남긴 기행문이다. 서명응의 에는 산행의 동기와 일정, 행적과 감회가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또한 유람 내용 전반에 이용후생을 추구하는 그의 실용적이고 탐구적인 학문 정신이 드러난다는 것이 특징점이다. 서명응은 일행 100여명과 함께 백두산 유람을 떠났다. 이들의 백두산 유람은 1766년 6월 10일에 시작해 6월 17일 끝났다. 가는 데 4일, 오는 데 4일 걸려 모두 8일이 소요됐다.작품 특성 및 감상“옛 사람들은 일을 할 때 항상 몇 가지를 겸하였다. 우리가 한갓 산천의 경치나 즐긴다면 천박한 일이다. 관방의 지세를 살펴보는 것도 좋고, 북극성이 떠오르는 것을 관측하는 것도 좋다.” 의 작자 서명응이 백두산을 유람하며 가졌던 태도를 한 눈에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의 산수 유람이 다른 선비들의 유람과 달랐던 점은 바로 이러한 대목에서부터 시작된다. 북학파의 시조이며, 조정의 중신이었던 서명응은 북쪽 변방으로 유배를 갔다가 백두산 유람을 하게 되었다. 우연히 얻은 백두산 유람의 기회를 서명응은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가 실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그는 산수를 단순히 미적 대상으로만 탐색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실용적인 이치들을 발견하는데 힘썼다. 이 글을 쓰게 된 과정이 유배를 갔다가 유람한 과정을 기록한 것이지만, 글을 읽다보면 마치 유람을 위해 유배를 간 듯 느껴지기도 한다. 백두산의 생태와 동식물의 자세한 묘사 뿐만 아니라 백두산의 정상에 올라 백두산정계비를 살펴보며 그곳에 국경선이 그어지게 된 경위를 살피기도 하고, 북극고도 측정을 통해 조선의 자연지리적 환경을 알아보는 등 물 만난 물고기 같은 그의 여유 있는 모습이 정말 유배 온 사람이 맞나 싶어 매우 흥미로웠다. 실학자로서의 학문적 호기심도 있었겠지만 조정의 중신이었기 때문에 귀양길을 가는 와중에도 나라의 안위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서명응의 는 실험 결과 보고서 같은 역할만 하는 것일까? 그것 또한 아니다. 서명응은 기행문학이라는 갈래적 특성에 맞게 사실적인 산수의 묘사와 다양한 비유적 표현들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백두산 천지에 둘러싸인 여러 봉우리들을 마치 성 같다고 묘사하기도 하며 백두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경치와 백두산을 기점으로 사방으로 뻗은 여러 봉우리들의 모습을 눈에 보이듯 장엄하고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각기 다른 봉우리들을 선녀가 쟁반을 이고 있다거나, 큰 붕새가 부리를 들고 있다는 등의 약간은 도가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또한 는 여행목적, 여행지, 여정, 체험, 감상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내용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부분도 눈여겨볼만 하다. 서명응의 는 백두산을 유람하며 쓴 기행문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문학적 자료일 뿐만 아니라 국방, 생태, 과학 등여러 측면의 정보를 제공해주는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홍순학, 감상문작품 소개, , 으로 불리기도 하는 홍순학의 는 사행 목적으로 중국(청나라)을 다녀 온 뒤 그 기행 내용을 기록한 기행가사이다. 고종 3년인 1866년에 고종이 왕비를 맞이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중국에 사신을 보냈는데, 홍순학이 당시 서장관의 임무를 맡아 북경에 갔다 온 것이다. 작품에서는 4월 9일 서울을 출발하여 6월 6일 북경에 당도하고 40일 간의 부경 체류 후 8월 23일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130여 일 간의 여정과 견문이 기술되어 있다. 가사 작품으로는 보기 드물게 장편인 점, 치밀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대상이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묘사된 점, 한자의 사용 없이 순 한글로만 기록되었다는 점을 특징으로 가진 작품이다. 김인겸의 와 더불어 조선 후기 기행 가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작품 감상를 읽으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은 25살의 젊은 감성, 특히 솔직함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25살이면 지금 22살인 나와 3살차이 밖에 나지 않는 나이다. 국가의 막중한 임무를 지고 청나라로 떠나게 된 젊은이의 설레고 들뜬 마음과, 이국의 문화를 흥미롭게, 호기심 가득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문학 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젊고 어린 사람이 쓴 기록이다 보니 그 나이에 맞는 솔직함이 드러나는 부분도 있다. 서구세력에 대해 과도하게 경계하고 폄하하는 서술하는 방식이 그런데, 이는 조선후기 다른 연행가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지점이다. 우선 그는 청나라 사람들을 ‘호인(好人)’이라고 지칭했다. 호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야만인, 오랑캐라는 의미로써 그들을 멸시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처럼 초반에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에 대한 관념화되고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연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중국에 도착하여 청의 발달된 문명을 접하면서는 이러한 의식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들이 살고 있는 새로운 문명에 대해서 홍순학은 이질감 보다는 새로움과 신선함, 즐거움을 느낀 것이다. 그런 생각에 따라 홍순학은 청나라 남녀의 모습이나 옷차림, 육아법, 베 짜기, 가옥, 식생활 등을 보고 느낀 대로 서술했고, 세밀하고 생동감 있는 묘사가 탄생하게 되어 독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문학적인 가치도 높아지게 되었다. 그가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봤던 호인들의 문화에도 새롭고 특이한 문명이 있음을 알고, 또한 자신이 그들이 세운 청나라의 황제를 만나러 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홍순학은 심리적 갈등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홍순학은 그러한 그의 감정을 모른 체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으로써 유교적 이념을 내면화함과 동시에, 이색적인 문명 공간을 경험하면서 중세적인 틀을 깨고 나오려는 작자의식을 문학 속에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25살의 젊은 지식인의 열린 시각이 보인다. 이와 같은 솔직함은 당대의 독자들에게도, 현대의 독자인 우리에게도 당대의 모습이 생생히 전해지는 서술방식을 만들어 내었고, 따라서 시대를 아우르며 사랑받는 문학도 만들어졌다.
한문 산문이곡, 감상문내용정리고려 말의 학자인 이곡(1298~1351)은 52세 되던 1349년에 내외 금강산과 해금강을 유람한 후 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이곡은 1349년 8월14일 출발하여 8월22일에 금강산에 도착한 뒤 9월4일까지 13일 동안 금강산의 여러 명승지를 유람한 뒤 돌아왔다. 그는 개성을 출발하여 금강산에 도착한 뒤 배재령을 시작으로 표훈사, 정양암, 신림암, 장안사, 국도, 총석정, 금란굴, 삼일포 까지 구경했다. 국도, 총석정의 사선봉, 삼일포의 사선정, 성류굴 묘사 부분은 아주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그 절경에 대해 극찬 또한 아끼지 않는다. 읽는 것만으로도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직접 본 듯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작품 특성 및 감상고려의 한문산문인 이곡의 는 기행문학에 특성에 맞춘 작품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 지역을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유람기라는 갈래답게 는 그가 유람하는 도중 겪은 모든 것들이 직접 가보지 않고 최대한으로 느낄 수 있도록 묘사되었다. 금강산의 각 장소에 대한 세세하고 실감나는 묘사들 뿐만 아니라 ‘단발령’ ‘관동’ 등 지명의 유래까지 덧붙여있는 부분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여행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통해 독자의 이해를 높인 것이다. 때문에 는 현재 남아있는 금강산 및 관동 일대의 기행산문으로서는 가장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도 그 문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당시에 관동지방의 승경을 탐방하는 지침서가 되었다는 것 또한 의심할 바가 아니다. 또한 는 불교를 계승하던 고려시대의 작품인 만큼 작품 속에서 불경과 사찰 이름 등 불교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불경에서 전하는 대로 금강산을 인간 세계의 정토라 보았던 이곡은 작품 안에서도 불교와 관련된 그의 사상들을 많이 녹여내었다.금강산을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몇 달 전에 고성에 있는 통일전망대에 가서 금강산을 본 경험이 있다. 이곡이 에서 말한 대로 금강산은 구름과 안개 때문에 제대로 그 경치를 관람할 수 있는 날이 얼마 없다고 한다. 나는 운 좋게 그 몇 퍼센트 안에 드는 날에 그 곳에 가게 되어서 나름대로 선명한 금강산 자락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미시령 고개를 넘으며 바라보는 설악산도 이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데 수많은 학자와 여행가들이 극찬하는 금강산이란 곳은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울까 하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직접 샅샅이 구경하고 감탄할 수 있었던 그들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또한 이렇게 가고 싶어도 가볼 수 없는 후대인들을 위해서인지 작품 속 친절한 묘사가 돋보였는데 ‘안 보이던 눈꺼풀을 떼어 내고 바라보듯’ 이라는 등의 비유적 표현들이 더욱 실감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보덕관음굴’ 이나 ‘정양암’등 굴이나 절 이름 등을 정확하게 표기해놓아서 국어사적, 역사적 연구를 위한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