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스탈린의 생애(~1917년 10월 혁명 이전까지)스탈린은 1879년 카프카스(=영어로 코카서스) 산맥의 남부에 위치한 그루지야 의 작은 마을 고리(Gori)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오시프 주가슈빌리(Joseph Djugashvili)이다. 농노 출신이었던 아버지 는 제화 공장에서 일했고, 가정 형편은 어려웠는데,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였으며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에 의해 스탈린은 14세에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당시 티플리스Tiflis)에 있는 정교 신학교에 입학한다. 이 신학교에 다니면서, 반러시아적 사상과 마르크스주의 를 접하게 되었으며, 급진적이고 반러시아적 사상을 가졌던 젊은 그루지야의 지식인들에게 영향 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1899년에 신학교에서 퇴학당하고 , 1901년부터 약 10여 년 간 카프카스 남부 지역 에서 지하의 전업 혁명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여러 번의 체포와 시베리아 유배, 탈출을 반복한다. 자금 확보 등 비합법적인 지하 활동을 중심적으로 했기 때문에, 이 당시의 행보에 대해서는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그루지야 사회 민주당원들이 멘셰비즘을 지지했던 것과 다르게, 볼셰비즘을 지지했다는 점과 이 기간에 철저한 러시아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 베트남전의 이미지 형성과 국민 동원 >1. 머리말2. 베트남전의 이미지 형성: 문화 영화와 뉴스 영화3. 국민 동원 방식: 위문사업과 월남붐 조성4. 맺음말1. 머리말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논쟁이 사회적으로 다시 한번 대두되면서, 베트남전에 파병되었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조사와 반성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탈냉전과 베트남 수교가 이루어진 90년대가 되어서야 베트남전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고엽제 피해자 문제는 1991년이 되어서야 공론화되었으며, 베트남 양민학살은 『한겨레21』에 의해 1999년에야 최초로 보도되었다. 파병 50주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끝나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지만, 베트남전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1969년 발매된 김추자의 노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의 폭발적인 인기나 1990년대까지도 멜로 영화 속의 사랑의 장애물로서만 등장하는 베트남전의 이미지를 고려하면, 베트남전에 대한 한국 사회의 기억은 상당히 특이하다. 베트남전은 한국전쟁과 다르게, 경제성장과 반공, 자유수호라는 명분을 통해 낭만화된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근대의 전쟁인 베트남전은 전후방이 구분되지 않는 총력전이었다. 따라서 사회적인 동원은 필수적이었다. 게다가 한국군에게는 생명을 걸고 싸워 성취해야 하는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전쟁이었기에, 월남붐(1967-68년)이 일어나기 전, 파병 초기 단계(1965-66년)에는 해외파병에 대한 병사들의 거부감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전선은 공간적으로 분리된 먼 이국의 땅이었기 때문에 후방에서의 동원 작업이 굉장히 중요했다. 따라서 본고는 참전 초기이자 핵심적인 전쟁 수행기인 1965-1968년까지의 기간을 중심으로, 정부의 국가 총동원 과정에서 영화와 위문 사업이 어떤 식으로 활용되었으며, 어떠한 효과를 낳았는지에 초점을 맞춰보려 한다. 이를 위해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당시 제작된 문화 및 뉴스 영화를 통해 베트남 경제특수와 자유수호라는 명분 하에 월남파병이 어떤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는 온 영상들로 제작된 문화영화였다. 1966년 신정(新正)에 개봉하여 6월까지 상영되었으며, 5월 도쿄에서 개최된 제13회 아시아영화제에서 ‘특수기록영화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전쟁기록 영화의 흥행 가능성이 대두되었으며, 이후 장편문화영화 제작이 활성화되었다.국립영화제작소는 1948년 발족된 공보처 공보국 영화과에서 시작되어, 1961년 재편되면서 정식으로 출범한 국가기관이다. 첫 파병이 있었던 1964년에서 한국군이 철수한 1973년까지의 10여 년 동안 국립영화제작소에서는 총 17편의 베트남전 관련 문화영화가 제작되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1966년에서 1968년까지의 삼 년 동안에 제작되었다. 급격히 악화된 국제 및 국내 여론의 압박을 받은 미국이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철군하기 시작했다는 점과 이 영화들이 어떤 내용을 주로 담아냈는지를 고려하면, 어째서 영화가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는지, 영화 제작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을 살펴보면, 도입부부터 도미노 이론을 근거로 국제관계를 강조하고, “연간 5백만 달러”의 진출 성과 등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거나 “정글에서 보내 딸라 웃음 피는 우리 가족” 등의 직접적인 문구로 경제적 이익을 강조하는 모습이 보인다. 게다가 이 영화들의 대부분이 1966년에서 1967년까지 팀에서 촬영한 영상들을 재편집한 결과였으며, 유사한 촬영분을 활용했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영상은 씩씩한 파병 군인들의 훈련 모습, 파월환송식의 대통령과 수많은 인파, 부산항에서 LST 함선을 타고 해외로 떠나는 장병들과 이들을 배웅하는 국민들과 유명인(정치인⸱연예인)들, 베트남의 이국적인 풍광과 휴식을 취하는 병사들, 유명 연예인으로 구성된 위문단, 한국군에게 생포된 베트콩, 한국군의 대민활동과 그런 군인들을 환영하며 고마워하는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 등으로, 선전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영화들은 강인하고 남성적인 한국군과 은 건장하고 남성적인 구원자로 표현되어 사명감과 자부심을 자극했다. 즉 영상을 통해 재현된 베트남전은 실제 전쟁의 모습이 아닌, 정부가 전달하고 싶은 전쟁의 모습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배경에서 제작된 영상물들은 경제성장과 도미노 이론, 한국의 국제적 위상 제고를 근거로 참전을 정당화하는 것을 핵심내용으로 전달하고 있었다.3. 국민 동원 방식: 위문사업과 월남붐 조성1964년 의료부대와 태권도 교관단 파병을 시작으로, 1965년 10월 첫 전투병이 파병되면서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에 한국군이 참여했다. 이때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한국전쟁의 경험과 1960년 중반부터의 본격적인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전 한국 사회의 실업과 가난이 후방의 동원 사업을 용이하게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인식과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반공 이데올로기, 조국의 경제성장, 민족주의에 근거한 국가적 명예 등이 전시 동원 사업의 기제(機制)가 되었다. 정부는 고국의 국민들을 “70년대의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힘찬 전진을 거듭하는” 또는 “장병들이 개선하는 영광된 그날 변모한 조국의 새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계속하는” 주체로 그려냈다. 이와 같은 인식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파되었는지는 앞서 문화⸱뉴스영화를 통해 살펴본 바 있다.박정희 정권은 국가조직인 ‘파월장병지원위원회’와 반민반관 조직인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인적⸱물적 동원을 위한 조직을 갖추었다. 1966년 5월 설치된 파월장병지원위원회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전국 각지에 2,637개의 지방위원회를 갖춘 조직이었다. 파월장병과 가족 지원, 파병 홍보, 전상자 원호(援護) 대책 등의 업무를 관장했으며, 파월기술자에 대한 행정적 조처 또한 담당했다. 1965년 11월 발족한 해외개발공사는 파독 광부‧간호사에서 베트남 파병으로 본격화된 해외인력 수출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해외 인력 송출 사업은 파병과 참전을 경제적 행위로 이미지화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위문사업은 파월장병지원위72년까지 “파월교체장병 환‧송영행사”만도 춘천과 부산에서 총 120회 실시되었다. 1966년에서 1971년까지 83회에 걸쳐, 총 1,160명이 파월된 연예인 위문단은 2,922번의 공연을 했다. 그리고 베트남의 각급 부대와 국내의 대학 및 중‧고교가 자매결연을 맺었는데, 학생들의 위문편지와 위문품에 대한 보답으로 군대는 장학금(달러)을 보내며, 서로에게 고마운 존재로서 사회적 연계망이 구축되었다. 심지어 정부 주도 아래 각급 관공서, 기업체, 기타 독지가들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파월장병 가족의 자매결연운동이 추진되기도 했다. 이처럼 전선과 후방, 그리고 후방 내부에서의 연결망이 구축됨으로써,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었고, 효과적인 대중 동원이 가능했다.특히 ‘월남붐(1967-1968년)’은 정부가 경제적 욕망을 미끼로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1960년대의 한국에는 여전히 보릿고개가 존재했으며, 1965년 도시‧농촌을 포괄한 공식 실업률은 7.3퍼센트였고, 도시 지역 비농가 실업률은 14.5퍼센트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권은 1966년을 “인력수출의 해”로 선언하면서 해외 인력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해외개발공사에서 주관하는 파월 기술자 모집 광고에는 월급 350~400달러, 별도의 숙식비 180달러를 포함, 총 530~580달러의 월급이 제시되었다.(, 1966.4.13.) “월남에서 1년만 일하면 한밑천 거뜬히 마련한다”는 얘기가 돌았고, 베트남은 “꿀과 우유가 흐르는 약속된 복지”의 땅으로 인식 되었으며, 큰 위험부담에도 “월남행 버스는 언제나 붐비고 있었다.”. 전쟁 기간에 총 2만 4천여 명, 연인원(延人員) 6만 2800여 명의 민간 기술자들이 베트남으로 갔다.군인들의 파병 지원에도 역시 금전적인 유인이 크게 작용했다. 파병 한국군 사병의 전투 수당은 이병의 경우 51.11달러로 남베트남의 사병(55.79달러)이나 미군 이병(235.15달러)보다 낮았지만, 당시 이병의 월급 1달러(약 300원)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다. 정국가조직인 ‘파월장병지원위원회’의 관할이었다. 가족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워 홍보된 모금, 위문 편지 사업과 각종 대형 행사, 위문 공연, 자매결연 등의 위문사업은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덕분에 정부는 특별한 재원이나 지원 대책이 없었음에도, 국민들에게 무임승차하여 전쟁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한국의 높은 실업률과 월남행의 매력적인 경제적 대가에 힘입어, 월남붐이 일었다. 이에 따라 반민반관 조직인 ‘해외개발공사’를 통한 해외 인력 송출 사업은 성공적이었으며, 파월 장병들 역시 파병에 지원하는 데에 경제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월남붐과 한국 사회의 경제성장은 베트남전을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기회로 이미지화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전쟁의 비극이나 슬픔은 지워지고, 전쟁 특수라는 경제적인 효과와 정치⸱이념적인 명분만이 강조되었다. 일례로 고엽제 피해 군인에 대한 보상이나 치료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4년 고엽제 제조회사에서 미국, 호주, 뉴질랜드의 참전 군인들에게 총 1억 8,000만 달러의 기금을 보상금으로서 지급했지만, 한국군은 그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1993년이 되어서야 한국 정부는 고엽제 후유증 환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는데, 그 지원마저도 환자 판명의 어려움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1964년 8월의 첫 파병에서 시작해 1973년 3월까지, 약 8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연병력 32만 4,864명의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그중 5,099명이 전사했다. 본격적인 파병이 있었던 1964-65년에는 거센 한일협정 반대 투쟁에 밀려, 베트남 파병이 사회적으로 큰 쟁점이 되지 못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해 참전했으며,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이 전쟁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는 여전히 적으며, 기억의 많은 부분이 개인과 집단의 경험 대신, 정부에 의해 형성된 공적인 기억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전쟁 동원 과정뿐만 아니라, 종전1-
- 정은이, 「북으로 간 재일조선인 ‘째포’의 삶」 요약1. 실시 배경2. 귀국사업1) 진행 과정2) 재일조선인 귀국자의 특징3. 귀국자의 삶4. 북한 사회에 미친 영향1) 경제적 영향2) 사회적 영향5. 맺음말*1959년부터 1984년까지 북송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가게 된 해외 거주 조선인을 북한에서는 ‘귀국자’, 일본은 ‘귀환자’, 남한에서는 ‘북송동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원문에서 사용한 ‘귀국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였다.실시 배경한국전쟁 직후, 북한의 인구는 감소는 큰 문제였다. 1961년판 『조선중앙연감』에 따르면, 1949년 말 약 962만 2천 명이던 인구는 전쟁 직후 1953년 12월 849만 천 명으로, 대략 113만여 명이 사망 혹은 이주로 북한에서 사라졌다. 기존의 인구도 남한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던 북한은 이로 인해 전후 복구와 국가 안보의 위기에 봉착했다. 심지어 중국인민지원군이 1958년에 완전히 철군하면서, 전후 복구의 핵심인 청장년층 남성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귀국을 전후처리의 일환으로 인식했으며, 일본의 우익 진영은 미국의 암묵적인 동조 하에, 사회적으로 문젯거리인 非국민 재일조선인의 수를 줄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고, 진보 진영은 사회주의 북한의 건설에 재일조선인이 공헌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자주적인 성향을 가진 데다가 그 규모도 큰 조선족의 수와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방책으로서 북한의 귀국사업에 적극 협력했다. 이렇게 북한과 각국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재외조선인의 귀국 사업이 진행되었다.2. 귀국사업1) 진행 과정이러한 배경에서 1950년대 후반부터 북한은 일본과 사회주의 동맹국들을 중심으로,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와 고아들을 대상으로 귀국사업을 펼치기 시작하는데, 이 사업으로 약 35만 명이 북한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약 20만 명, 소련에서 약 6만 명이 북한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에서는 9만 3339명(결된 캘커타 협정에 따라, 적십자국제위원회의 간략한 인터뷰를 거친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배가 니가타항과 청진을 오가는 귀국사업이 12월부터 시행되었고, 1984년 7월까지 총 186회에 걸쳐 단속적으로 북송이 이루어졌다.북한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후 총련)을 앞세워, “북조선은 지상낙원이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한다”고 선전했으며 조국의 사회주의 건설에 공헌할 것을 독려했다. 일본의 진보진영은 답사를 통해 북한의 실상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귀국사업 초기부터 귀국자의 인권 문제가 대두되었으나 이러한 선전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2) 재일조선인 귀국자의 특징재일조선인 귀국자들은 부모 세대의 고향에 따라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부모가 모두 조선인이며 남한이 고향인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이며, 세 번째는 일본인이지만 조선인 가정에 입양되거나, 부모의 재혼으로 조선인 가정을 구성하게 된 경우이다. 이들 부모 세대의 직업적 분포와 경제적 여건 역시 다양한데, 도쿄대 출신을 비롯 파친코나 식당을 운영해 경제적 기반을 갖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용직 노동자 등 빈곤한 가계도 많았다.특이한 것은 정작 재일조선인 2·3세는 대부분 일본 태생으로, 북한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으며 조선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한 출신의 부모들이 많았으며, 일본 내에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심했기 때문에 부모들이 최대한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북한행을 선택한 것은, 재일조선인 2·3세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으며, 전후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던 일본 사회의 혹독한 차별과 멸시로 인해 제대로 된 기회를 얻기도 어려워 생활고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남한은 이들의 대안이 될 수 없었는데, 남한은 정치적 혼란기였으며 재일조선인들의 귀국에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했다. 심지어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남한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밀수선뿐이었으며 그마저의 차별과 빈곤에 지친 재일조선인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북한행을 선택했다.3. 귀국자의 삶청진항에 도착한 귀국자들은 선전과 전혀 다른 현실에 직면했다. 귀국 초기에 유일하게 제공된 생활수단은 2주에 한 번 있는 배급뿐이었다. 북한 당국은 사회주의적 원리원칙을 적용하는 것과 동시에, 귀국자의 정치적 반감을 누르고 체제에 복종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배급제를 활용했다. 일본에 남아 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충당할 수 있었던 생필품과 달리, 식량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에 귀국자들은 정착 1~2년 뒤에는 북한사회에 동화되었다.귀국자들은 북한에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못하고,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귀국자들은 자신들이 북한 주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북한 주민과 거리를 두었다. 북한 주민들 역시 귀국자를 ‘째포(在胞)’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경제적으로 더 여유로운 귀국자에 대한 열등감과 부러움, 미움 등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지막은 제도적 차별이다. 귀국자를 감시 대상으로 규정했기 떄문에, 초기의 환대는 순식간에 이웃의 밀고로 돌변했으며, 1968년부터 10년간 체포되어 끌려간 뒤 소식이 끊긴 귀국자가 많았으며 갖가지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갔다는 증언이 있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귀국자들은 보위부나 안전부, 당원이 되기 어려웠고 좋은 직장을 얻는 것도 힘들었다. 게다가 북한의 반일 역사교육이 귀국자를 증오의 대상으로 인식시켰다. 북한은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으로 성분을 구분하는데, 적국이자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재일조선인 귀국자들은 동요 또는 적대 계층에 속했다.귀국자의 경제적 지위는 재일 친척의 원조에 달려있었는데, 친척의 원조는 북한에서의 생활 수준을 결정짓는 요인이면서, 정치적 탄압을 피하고, 신분 상승의 방법이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는 특히 귀국자의 경제적 지위가 급부상한 시기였다. 소량의 생필품 중심으로 도움을 받던 1960년대와 달 펼쳤고, 그 결과 부유한 상공인 집안 출신들이 귀국자가 되었다. 1973년에 외화상점이 생기고 조선은행을 통한 해외 송금이 가능해지면서 귀국자들 간의 계층 분화가 촉진되었다. 심지어 1980년대에는 재일 친척의 북한 방문까지 가능해지면서 일본 제품과 엔화가 대량으로 유입되었다.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의 위기와 세대의 사망 등으로 재일 친척의 원조가 중단되고, 고난의 행군과 함께 배급이 중단되면서 귀국자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했으며, 많은 탈북자가 발생했다. 차별적인 제도와 혈연과 지연을 중시하는 북한 사회의 관행, 미약한 인적 네트워크 등의 이유로 장기간 친척의 원조에 의지해왔던 귀국자들은 별도의 생활 수단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몰락은 오히려 정치·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이 시기에 경제적 지위가 급부상했던 중국 연고 귀국자들과 대비된다.4. 북한 사회에 미친 영향1) 경제적 영향1958년 농업과 상공업의 협동화로 인해 북한의 시장은 그 기능이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배급은 대부분 곡물이 지급되었고, 생필품은 1년에 한두 번밖에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귀국자는 귀국 시에 가져온 재산이 있었으며, 친척의 원조를 지속적으로 받았다. 이에 따라 북한 주민과 귀국자 간의 상품 거래가 자연스럽게 발생했고, 이것은 암시장의 형성과 발달의 기초를 형성했다. 심지어 1970년대 북한에 생긴 외화상점은 가전제품에서 조미료에 이르기까지 소비재의 유일한 공급지 역할을 했는데, 귀국자는 송금받은 외화로 이곳에서 물품을 구입해 북한 주민과 화교에게 판매했는데, 여기서 판매된 일본 제품이 중국에까지 유입되었으며, 귀국자는 환전상의 역할도 했다.그리고 귀국자는 북한의 산업, 특히 경공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재일조선인들의 귀국으로 전문기술을 가진 숙련공들이 유입되었다. 특히 1970년대부터 자산가 계층 출신의 귀국자들이 늘어나면서, 외화 자본까지 유입되었다. 당시 북한에서 자랑할 만한 평양시 소재의 편직, 봉제, 맥주 공장 등로운 생활을 누렸다. 이와 같이 여유로운 귀국자들의 삶을 통해 북한 주민들은 그동안 받아온 반자본주의 교육과의 괴리감을 느꼈다. 그리고 귀국자들 대부분이 도시에 거주했기 때문에 북한의 엘리트층을 자극했다. 1968년 유일사상 체계의 확립으로 배제된 러시아 문화의 빈자리를 귀국자 문화가 채웠다. 비디오와 가전제품을 사용하고, 일제 의류, 세이코 시계, 자전거, 마일드세븐 담배 등의 상품에 대한 특권층의 소비 욕구를 자극했다. 그리고 귀국자와 조총련은 북한 정권의 정치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5. 맺음말귀국자와 북한 주민은 문화·정치적으로 갈등했으나, 경제적으로는 북한 경제체제의 모순으로 인해 공생관계에 있었다. 저자는 북한 사회를 형성하는 데에 귀국자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재일조선인 귀국자들의 북한에서의 생활과 영향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실제 생활이나 송금액의 규모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간단하고, 재일조선인 귀국자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재일조선인 귀국사업 관련 문서들이 21세기 이후에 공개되기 시작했고, 특히 한국에서는 이전까지 관련 사료 발굴과 연구가 미미했다.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를 참고하면, 귀국사업은 국제사회의 정치적인 역학관계 하에 이루어졌으며, 대규모로 이루어진 집단적 이민이었고, 북한의 대일정책과 한일관계 분열을 위함이었다는 의견도 있는 등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건이다. 게다가 재일조선인 문제는 남한의 현대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더 많은 관심과 함께, 다각도에서 종합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게다가 여전히 진행 중인 재일조선인들의 인권 문제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참고문헌- 정은이, 「북으로 간 재일 조선인 ‘째포’의 삶」,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60년대』, 창비, 2016.- 박정진, 「북한의 대일접근과 재일조선인 ‘북송(귀국)문제’」, 『북한연구학회보』 vol.15, 2011.- 테사 발제)
여성 영웅 서사의 이중구조: 바리공주와 감춰진 성취욕1. 들어가며2. 남성 영웅과의 차이: 여성 영웅으로서의 특징1) 여정의 동기2) 영웅의 능력과 문제 해결 방식3. 여성 영웅의 감춰진 성취욕1) 스스로 결정하는 고난의 대가2) 바리공주가 성취한 보상의 성격4. 신화의 살아남기: 욕망과 현실의 타협1. 들어가며바리공주 이야기는 현재 약 90여 편이 채록되어 있으며,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서 전승되고 있다. 서울의 진오기(지노귀)굿과 새남굿, 강원·경상 지역의 오구굿, 호남의 씻김굿 등 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사령(死靈) 의례의 과정에서 구연된다. 바리공주 이야기는 서사무가로서 그 시작점을 특정할 수 없는 적층문학이고, 신성한 의례에서 불리는 무가임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성격을 보인다. 그리고 가무악희(歌舞樂戱)의 방식으로 행해지는 종교 의례이면서 동시에 문학 텍스트이며, 20세기 이후에야 채록되기 시작하면서 구술 전승과 문자 기록의 경계에 놓인, 복잡한 성격의 텍스트이다. 따라서 바리공주의 이야기는 전승 지역, 구연자(무당), 구송 환경 등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서울을 비롯한 중서부 지역에서는 바리공주, 동해안 경상 지역에서는 바리데기라고 불리는 등 구연본에 따라 호칭이 다른데, 부모의 이름, 남편, 아들의 수, 약수를 구하러 가는 여정 등 무가의 내용 역시 전승 지역과 구연본마다 차이를 보인다.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바리공주는 ‘영웅’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위해 고난을 무릅쓰는,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모습 때문에 대중에게는 영웅보다 ‘효녀’로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바리공주의 서사가 일반적인 남성 영웅의 것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무를 완수한 바리공주가 만신의 몸주가 되기를 ‘원하는’ 마지막 장면은 과연 바리공주가 오롯이 ‘효의 윤리’를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감내한 것인지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따라서 본고에서는 바리공주가 어떻게 남성 영웅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분석하고, 그 차이점의 배경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고 하늘을 날던 페르세우스는 멀리서 아름다운 처녀가 바위 위에 알몸으로 묶여 있는 것을 보았다. 안드로메다였다. 에티오피아 왕의 딸인 그녀는 어머니가 포세이돈의 딸들을 모욕하는 바람에 바다 괴물의 제물로 바쳐져 있던 참이었다. 그녀를 구해주면 결혼을 허락해 주겠다는 부모의 말을 들은 페르세우스는 괴물을 퇴치하고 안드로메다를 데리고 세리포스 섬으로 돌아갔다.”“테바이(=테베)는 상반신은 여자이고 하반신은 사자인 스핑크스라는 괴물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스핑크스는 테바이의 성문이나 높은 바위에 앉아서 도시의 청년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풀지 못하면 죽이곤 했다. (중략) 라이오스 왕이 죽은 다음 섭정을 맡은 사람은 이오카스테의 오빠인 크레온이었는데, (중략) 그는 오이디푸스에게 괴물을 처치해주면 왕비와 결혼시키겠다고 말했다. 혼자된 왕비와 결혼한다는 것은 곧 왕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성공하고) 스핑크스는 지식의 경합에서 패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 걸터앉았던 바위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왕이 되어 도시를 다스리게 되었다.”하지만 바리공주는 보상을 위해 길고 험난한 여정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바리공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난의 여정을 시작했다. 심지어 문제 상황을 알게 되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해결을 위해 떠날 것을 결정한다. 즉각적이고 단호한 결정의 표면적인 이유는 부모님의 낳아주신 은혜, 즉 효심이다.“일곱째 공주 불러내어, 부모 효양 가겠느냐. 국가에 은혜와 신세는 안 졌지만 어마마마 배안에 열 달 들어 있던 공으로 소녀 가오리다.”p.359심지어 바리공주는 보상의 존재에 대해 묻거나, 보상의 조건이나 종류, 크기를 거래하려 들지 않으며, 직접적으로 여정의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바리공주의 아버지는, 줄줄이 딸을 낳게 된 것이 점괘를 무시한 자신들의 잘못 때문이었는데도, 태몽 덕에 한껏 부풀었던 기대를 배신하고 태어난 일곱 번째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바리를 내다 버렸다다. 따라서 바리공주는 싸우거나 속이는 대신, 약수로 향하는 길을 지키는 무장신선과 평화적인 거래를 하고, 묵묵하고 충실하게 약속한 거래를 이행한다. 남자 영웅과는 달리, 바리공주는 약속된 일을 완수하기 전에는 무장신선을 속여서 약수를 훔쳐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은 특이한 점이다. 심지어 바리공주는 “배우지 않은 글이 상통천문 하달지리 육도삼략을 무불능통(p.356)”일 정도로 배움이 빠르고 영리하다. 길에서 만난 석가세존에게서는 ‘라화(羅花)’를 받아 지옥의 영혼들을 서방정토 극락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리의 능력인 영리함이나 라화는 당장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별로 쓸모가 없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한 약수를 얻는 데에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리공주의 ‘여성성’이다. 바리공주와 무장신선의 거래는 집안일과 관련되어 있으며, 무장신선의 부인이 되어 일곱 아들을 낳는 것 역시 여성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강요된 혼인과 출산은 일종의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나무 값 가지고 왔소총만중에 잊었나이다물 삼년 길어주소, 불 삼년 때어주소, 나무 삼년 베어주소석삼년 아홉 해를 살고 나니, 무장신선 하는 말이 (중략) 그대하고 나하고 백년가약을 맺어 일곱 아들 산전(産前) 받아주고 가면 어떠한가.그도 부모 봉양을 할 수 있다면 그리하겠나이다.”p.361그리고 이것은 동해안 경상 지역 구연본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동해안의 구연본에서는 무장승이 아니라, 천상에서 쫓겨나 속죄 중인 동수자가 등장한다. 아들 셋을 낳으면 삼십 년 죄를 갚고 천상에 등천할 수 있기 때문에, 동수자는 바리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삼형제를 낳아줄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 무장신선이 처음에 제시한 9년간의 세 가지 노동이 여성적인 성격을 갖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아이를 낳는 일은 오로지 여자만이 가능한 일이다.“옷을 줄 때에는 나하고 부부간의 약혼을 맺고, 당신 사는 집에 다시 돌아가 결혼식을 올리면, 옷을 이 자리에서 줍니다.”겉보기에 바리공주는 남성 영웅 ’ 사람에 불과하다. 하지만 줄곧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던 바리공주는 오히려 스스로 보상의 종류를 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짧지만 성취를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바리공주가 어려운 길을 떠난 것이 단순히 자식된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2) 바리공주가 성취한 보상의 성격그렇다면, 바리공주가 성취해낸 보상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도 있다.중서부 지역의 구연본에서는 바리공주는 대왕이 주고자 했던 것들 대신에, 완전히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 바리공주는 “만신의 몸주”가 되겠다 말하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망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 “신”이 된다. 그리고 바리공주의 요구에 따라 바리공주의 남편인 무장신선과 일곱 아들은 물론이고, 조력자인 석가세존과 바리공주를 키워준 비리공덕할미와 할아비, 인산 행렬에 대한 소식을 알려준 강림도령까지 신에 좌정된다. 대왕의 역할과 지위 그리고 바리공주에게 신의 자격을 부여한 주체가 다소 불분명하기 때문에, 바리공주가 아버지의 지위를 뛰어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나라의 반”을 물려받는 것 대신, 만신의 몸주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확보한 것은 물론이고, 아버지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음은 분명하다.조금 더 가부장적인 성격을 보이는 동해안 경상 지역의 구연본에서는 바리가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부분이 없다. 하지만 바리가 “오구풀이를 해서 왕생극락 세계에 모두 인도하는”, ‘신’이 되는 것은 동일하다. 동해안 경상지역 구연본에서는 바리의 아버지가 “오귀대왕”이며, “그릇 죽어 된 귀신을 오귀를 하여 왕생극락 보내는” 일을 한다는 점이 언급된다. 즉, 바리는 기존의 자신이라면 절대 가질 수 없었으며, 아버지 오귀대왕이 끝까지 딸에게는 물려주기를 거부하던, “태자(후계자)의 역할”을 획득했다. 영웅적인 업적을 통해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특별한 욕망과 현실의 타협그렇다면, 여성 영웅의 성취욕은 어째서 표면에 드러날 수 없었을까?바리공주에서 드러나는, 목표를 위한 주인공의 표리부동한 태도는 전근대의 서사에서 종종 확인할 수 있다. 비슷한 예시로 얼녀(즉, 천인)이지만, 가부장적인 질서에 가장 부응하는 방식인 ‘정절 지키기’를 통해 고난을 겪어낸 뒤, 양반인 이몽룡의 정실부인으로서 인정받는 성춘향이 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명분을 지키는 것은 여성 인물에게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 인물이고 소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기도 하는 본초(本初) 원소(袁紹) 역시 얼자였지만, 6년간 적모(嫡母)와 아버지의 삼년상을 완벽하게 해냄으로써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적인 인정을 받아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특정 질서를 준수할 것이 가장 덜 요구되는 인물들이 그 질서에 복종함으로써, 그 질서에 가로막혔던 한계점을 극복하는 장면은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롭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은 인물들이 욕망하는 목표가 비현실적일수록, 명분과 질서를 완벽하게 지킬 필요가 생기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이와 같은 핵심 인물의 이중적인 태도는 이야기가 덜 공격받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인물들의 실질적인 욕망이 분명 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전근대 사회에서는 성별과 신분에 따른 현실적인 한계가 확고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강력하게 뿌리내린 사회적 관념과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强而避之라고, 오히려 강력한 상대는 정면돌파 하기보다는 피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나라를 뒤흔들 만한 능력을 가지고서도, 조선이 아니라 율도국의 왕이 되는 것은 사회적 고정관념이 걸림돌로 작동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모티프에서 남성 영웅의 서사가 ‘투쟁과 성취’의 클리셰로 대표되는 것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남성에게 적용되는 ‘남성성’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
6세기 이후, 한반도에서의 쇠뇌(弩) 운용Ⅰ. 머리말Ⅱ. 쇠뇌의 구조와 특징Ⅲ. 6세기 이후의 쇠뇌 운용1. 고구려와 신라의 쇠뇌 이용2. 적극적인 쇠뇌 이용의 배경Ⅳ. 맺음말Ⅰ. 머리말노(弩)라고도 불리는 쇠뇌는 기계 장치로 화살을 쏠 수 있게 만들어, 활보다 시위를 당기는 데 힘과 기술은 덜 필요로 하면서, 정확성과 사정거리는 높인 원거리 무기이다. 중국의 경우 유물과 사료가 많이 남아 있는데, 최소한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는 쇠뇌가 주요 무기로써 사용되었으며, 전국시대와 삼국시대(위·촉·오), 兩晋(서진·동진)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하여 활발히 이용되었다. 그러나 활을 주요 무기로 사용하던 한반도에서는 쇠뇌의 활용이 서양이나 중국보다 덜 두드러진다.한반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최초의 쇠뇌 유물은 영천 용전리 유적에서 2004년에 출토된 B.C.1세기 중후반의 청동 노기(弩機, 발사장치)인데, 이것 이외에도 이 시기의 쇠뇌 유적은 대부분 낙랑이 있었던 서북 지역을 중심으로 소량 출토되므로, 한반도에서도 이 시기에 쇠뇌를 주요 무기로 사용했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백제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대략 6세기 이후부터는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쇠뇌를 이용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를 바탕으로 비교적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고구려와 신라의 기록을 살펴보고, 6세기 이후에 한반도 내에서 쇠뇌의 이용 양상을 추측해볼 것이며, 남겨진 쇠뇌의 흔적이 적은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자 한다.Ⅱ. 쇠뇌의 구조와 특징쇠뇌는 길쭉한 막대기 형태로 되어 사격 시에 손으로 잡는 부분인 ‘노비(弩臂)’를 중심으로, 앞부분에는 ‘노궁(弩弓)’이 직교된 형상으로, 뒷부분에는 발사장치 ‘노기(弩機)’가 장착되어 있다. 발사장치인 노기는 쇠뇌의 핵심 부분인데, 활의 현을 거는 ‘아(牙)’와 아가 처지는 것을 막는 ‘우(牛)’ 그리고 방아쇠인 ‘현도(懸刀)’가 서로 고정되어 상자 안에 들어가 있고, 아의 뒤쪽에 조준기인 ‘망산(望山)’다. 노비는 주로 나무로 되어 있는 반면, 노기는 대부분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쇠뇌의 크기는 여러 가지였는데, 漢代의 기록을 대신 참고하면, 개인용은 50~80cm 길이의 노비를 가지고 있었으며, 강도는 6石(약 160kg) 정도가 일반적이었으나, 최소 1石에서부터 최대 10石(약 267kg)까지의 강도를 가졌다. 그래서 노의 종류에 따라 손 이외에도, 발이나 허리를 이용하는 다양한 장전 방식이 사용되었다.쇠뇌의 장점은 기계로 활시위를 고정시키기 때문에, 팔 이외에도 신체의 다양한 부분을 이용해 더 강력한 힘으로 시위를 당길 수 있고, 특별한 기술을 습득할 필요가 없었으며, 무거운 화살이나 여러 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활보다 사정거리가 길며, 화살의 속도가 빨라 관통력이 더 강력하고, 명중률도 높았다. 하지만 장전과 발사에 걸리는 시간이 활보다 훨씬 오래 걸렸으며, 말 위에서 사용하는 것은 어려웠다. 심지어 대형 쇠뇌의 경우에는 크기와 무게 때문에 이동과 방향전환이 어렵다는 약점이 있었다.Ⅲ. 6세기 이후의 쇠뇌 운용1. 고구려와 신라의 쇠뇌 이용고구려의 경우, 영락 18년(408) 광개토대왕 대에 만들어진 덕흥리 고분의 벽화 묵서(墨書)에 “계현령이 쇠뇌를 들어올렸다(薊懸鈴□軒弩).”라는 글귀가 있어, 고구려에도 6세기 이전에 쇠뇌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3세기의 기록인 『위략(魏略)』과 달리, 6세기 중반 이후의 『주서(周書)』에서는 고구려가 쇠뇌를 주요 무기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4~6세기 무렵에 쇠뇌가 고구려군에 보급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三國遺事』에 실린 「보장봉노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에는 614년 수 양제의 마지막 고구려 침공에서, 양제가 표문을 들어 읽을 때 어떤 사람이 품속에 감추고 있던 소노(小弩)를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資治通鑑』에도 이사마(李思摩)가 고구려의 백암성(白巌城)을 공격하다가 쇠뇌 화살에 맞자, 당 태종이 친히 신라는 쇠뇌와 관련된 기록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우선 『三國史記』를 보면, 진흥왕 19년(558) 나마 신득(身得)이 포노(砲弩)를 만들어 국원소경(國原小京)의 성 위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에서 쇠뇌가 처음 등장한다. 이후 무열왕 8년(661)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투석포(抛車)로 공격하자, 신라는 노포(弩砲)를 설치하여 성을 지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662년에는 김유신이 한밤중에 벌어진 고구려군의 공격에 만노(萬弩)로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669년에는 당(唐)에서 신라의 쇠뇌 기술자인 사찬(沙湌) 구진천(仇珍川)을 데리고 가 천 보를 날아가는 쇠뇌를 만들 것을 명하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실패를 거듭하는 기록도 있다. 671년의 기록에서는 ‘노당(弩幢)’과 ‘노사지(弩舍知)’라는 특수 직책이 등장하며, 731년에는 성덕왕과 백관(百官)이 모여 차노(車弩)의 사격을 관람하고, 741년에는 효성왕이 대신 정종에게 노병(弩兵)을 검열하도록 명하였다. 이 기록들을 통해 신라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쇠뇌를 관리하고, 쇠뇌를 전담하는 특별한 직책까지 편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 적극적인 쇠뇌 이용의 배경쇠뇌가 보급된 이유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기존 연구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6세기 이후 한반도의 국가들이 쇠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된 원인을 추측해 볼 수 있다.고구려의 쇠뇌 운용과 관련된 기록 중 눈에 띄는 것은 590년 수(隋)의 문제가 평원왕에게 보낸 새서(璽書)로 고구려가 수에 첩자를 파견해 쇠뇌 기술자를 유치한 것을 힐난하는 것이다. 그 이전 시기에도 쇠뇌가 있었음이 분명한 고구려에서, 수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기술자를 데려와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590년은 평원왕 재위 말년이면서, 동시에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던 시점이었다. 게다가 중원의 새로운 왕조로서 581년에 등장한 隋가 이후 돌궐을 분열시키고 복속하는 데 성공하였으며,하면서 대외적인 위협이 거세진 시기이다. 8년 뒤인 598년(영양왕)에 수 문제의 1차 고구려 침입이 있었다는 점도 이러한 국제 정세를 뒷받침한다. 특히 수와 당은 궁노서를 설치하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쇠뇌를 개발하고 관리하였는데, 고구려 역시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쇠뇌의 보급이 필수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중국의 쇠뇌 발전사를 참고하면, 쇠뇌는 앞에서 언급한 단점으로 인해 보병의 주력 무기였으며, 특히 돌진하는 기병을 막는 데에서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중국에서도 漢代에 흉노와의 전쟁을 겪으면서 쇠뇌가 크게 발전하였다. 활과 다르게, 쇠뇌를 다루는 데 오랜 훈련은 필요하지 않으면서, 위력이 좋다는 점도 중요했다. 고구려의 5세기 병력 규모는 5만으로, 이는 3세기의 약 2만과 비교할 때 급증하였다. 이것은 民으로 병력 동원을 확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대부분 보병으로 편성되었을 것이다. 이는 4~5세기 고분 벽화에서 보병이 기병보다 약 3배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 방증한다. 게다가 661년 5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공격하자 신라가 노포를 설치하여 성을 방어한다. 당시 성에는 남녀 2,800명뿐이었기 때문에, 성주 동타천(冬陁川)은 어린이와 약자까지 동원해 고구려의 공격에 맞섰다. 쇠뇌의 사용법이 활보다 간편했기 때문에, 평범한 백성들로 구성되는 지방군이 쇠뇌를 이용해 효율적으로 방어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게다가 6세기 중반 이후 超長頸形이 주로 쓰이는 등, 고구려의 화살촉은 점점 파괴력을 위해 크고 무거워졌는데, 이것에서 원거리 무기가 발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도 시기별로 출토된 주요 무기를 분석해보면, 5~6세기부터 철제 마구가 출토되는데, 이것은 중장기병전술이 본격화되고 원거리 전술이 행해졌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신라의 전쟁기사를 분석해보면, 6세기 이후부터 성에서의 전투 횟수가 증가하며, 삼국통일 전쟁기인 7세기에는 野戰보다 약 2배 많은 전투가 있었다. 따라서 6축조하는 것만큼이나, 원거리용 守城 무기가 중요했으리라 생각된다. 고구려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쇠뇌 유물이 성곽 유적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문무왕 대의 기사에 등장하는 구진천(仇珍川)에 대한 기록은 신라의 弩 제작 기술과 운용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음을 방증한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쇠뇌는 木弩인데, 이것은 唐의 『通典』 兵5 守拒法의 기록에 의하면, 활 길이가 무려 1장 2척(약 3m 60cm)에 달하는 대형 쇠뇌이다. 연천군 무등리 2보루에서는 총길이 21cm에 무게는 75g인 노촉(弩鏃)이 발굴되기도 하였다.Ⅳ. 맺음말사료를 살펴 볼 때, 6세기 이후의 대내·외적인 상황과 맞물려 한반도에서는 점차 원거리 무기가 중요해졌고, 중앙집권화에 따른 징병제의 시행으로 군사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지 않은 사람들이 군대에 대거 편입되면서, 이들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무기를 보급할 필요성이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의 경우는, 7세기의 삼국통일전쟁과 이후의 나당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신무기가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와 부합하는 것이 쇠뇌였고, 크기와 용도가 다양한 쇠뇌가 적극적으로 개발되고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6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한반도에서 쇠뇌가 활발하게 사용된 기록들을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토되는 유물의 수가 적다. 이에 대해 연구자들은 청동을 주재료로 사용한 중국과 달리, 한반도에서는 썩기 쉬운 나무나 뿔로 쇠뇌의 노기를 제작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참고문헌- 이정빈, 2010, 「6~7세기 고구려의 쇠뇌 운용과 군사적 변화」, 『군사』제77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이재옥, 2012, 「新羅의 弩 運用과 그 의미」, 『역사교육논집』48권(역사교육학회)- 이준성, 2014, 「서양, 중국, 한국에서 쇠뇌(弩)의 역사와 전술적 운용 고찰」, 『군사연구』 제137집(육군군사연구소)- 육군군사연구소, 2012, 『한국군사사: 고대Ⅱ』, 육군본부·경인문화사-PAGE * MERGEFORMAT1-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