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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조선의 대외관, 사대교린 정책
    조선의 대외관, 사대교린 정책
    朝鮮의 대외관 : 사대교린(事大交隣)정책-일본(日本)ㆍ유구(琉球)와의 교린관계를 중심으로-1. 조선의 사대(事大)정책 : 대명외교조선의 대명외교관은 사대로 말할 수 있다. 사대라는 표현은 맹자(孟子)에 처음 나오는데, 기본적으로 사대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도리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인(仁)으로 대하는 것을 자소(字小)라고 한다. 사대와 관련된 내용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예전(禮典)에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 사대의 예가 법제화됐다.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한 직후에, 신하들을 명으로 보내 조선의 개국 사실을 알리고 명의 즉위 승인을 요청했다. 이를 통해 태조는 국제적으로 명과의 우호관계를 도모하고 국내적으로는 왕권을 확립하며 신왕조의 정통성을 수립하고자 했다. 또한 조선의 국호를 명에게 결정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요사이 황제께서 신에게 권지 국사(權知國事)를 허가하시고 이내 국호(國號)를 묻게 되시니, 신은 나라 사람과 함께 감격하여 기쁨이 더욱 간절합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國號)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小臣)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奏達)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裁可)해 주심을 바라옵니다.”본 표문을 명에 올린 이후, 명 태조는 조선을 국호로 결정해줬다. 이를 볼 때 조선이 너무 명에 지나친 사대외교를 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하면서 국가의 내치를 다지고자 했다. 또한 태조 대에는 ‘조선’이라는 국호는 인정받았지만 명과의 관계가 제대로 정착된 것은 아니었으며, 한 때에는 정도전 등의 공신들이 명에 강경한 입장을 내세우면서 갈등이 있었다. 정도전이 제거되고, 태종이 즉위한 후에 들어서야 조선은 명과의 우호 관계를 확실히 다질 수 있었다. 조선은 명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다. 1년에 4회 사신을 파견하는 정기 사행이 있었으나,하지만 조선이 중국에서 가져온 문물들, 서적ㆍ의약ㆍ비단류 등은 모두 조선의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2. 조선의 교린(交隣)정책 : 대일본(日本)ㆍ유구(琉球)외교조선은 명ㆍ청을 외에 주변 국가들에겐 교린의 자세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교린이란 기본적으로 서로 필적할 만한 나라가 대등한 자격으로 교류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교린이란 중국에 책봉을 받았던 국가들끼리의 대등한 외교를 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조선 초에는 기본적으로 일본이나 유구와의 관계를 나름 중요시 여겼던 것 같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사신이 오고가며 ‘교린의 예를 닦았다’라는 표현 등이 실록에 자주 보인다. 또한 조선과 일본이 ‘국왕 대 국왕’으로의 대등한 위치에서 교린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상하의 관계도 보인다. 당시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완전한 중앙집권적 정부는 아니었다. 지방 중 일부는 따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대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는 조선이 대마도로부터 조공품을 받고, 회사품을 내리는 형식이었다. 그렇다면 조선과 일본, 조선과 유구와의 교린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1) 조선ㆍ일본관계조선은 초기에 일본과의 관계를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에는 남해안에 왜구(倭寇)가 매우 많이 출몰했으며, 심한 경우엔 경기 이북에까지 출몰했다. 이에 대한 피해가 꽤 컸으며, 조선은 무력보다는 회유와 사신의 교류 등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또한 왜구 문제와 더불어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被擄人)들의 송환문제도 조선이 대일외교를 진행했던 이유였다. 태조 시기에 조선은 다수의 사신을 파견했으며, 당시 무로마치 막부의 수장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조선이 보낸 사신의 답례로 피로인 100명의 송환을 명하기도 했다. 또한 무로마치 막부가 완전하게 지방을 통제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각지에서 사람을 조선으로 보내 물품을 바치기도 했다. 또한 조선에서는 왜일본 각지의 호족들과 무사, 상인, 연해 지역 거주자 등의 계층들이 왜구로서 한반도를 노략질했고, 그 피해가 컸다.결국 조선은 회유책과 사신을 보내는 온건책에서 벗어나 대마도 정벌이라는 강경책을 쓰게 됐다. 쓰시마 섬은 왜구의 주된 근거지 중 하나로 조선에 인접해 있었다. 쓰시마 섬 도주 소오사다시게(宗貞茂)가 왜구 활동을 통제하면서 잠잠해지기도 했지만, 1418년 그의 사망 후 왜구가 다시 늘어났다. 세종 원년인 1419년에 상왕인 태종의 주도로 쓰시마 섬 정벌이 이루어졌다. 삼도도통사 류정현과 삼국도체찰사 이종무가 병선 227척에 1만 7000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두지포(豆知浦)에 상륙하여 소탕 작전을 폈다. 당시 세종실록 을 보면 전투가 꽤 길었으며, 규모도 컸고, 상왕(上王)이었던 태종의 강경한 입장이 굉장히 눈에 띤다. 이 대마도 정벌을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하며, 왜구에 대한 어느 정도에 타격을 가했다. 이후 1443년에는 쓰시마 섬 도주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맺어 삼포(부산포ㆍ내이포ㆍ염포)에서 거래되는 미곡과 면포 등 확대된 수출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조선 출입에 대한 왜인들의 규모에 제한을 두고, 조선에서 파는 물품들도 제한을 뒀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삼포를 통한 왜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관계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또한 조선은 왜인들에 대한 향화를 더욱 유도했다.그러나 성종(成宗)대 이래로 일본과의 교역의 통제가 강화되고, 연산군(燕山君)대 운영상의 모순에 대해서 일본인, 특히 대마도인들의 불만이 컸다. 즉 연산군의 실정에 의해 조선정부의 재정상태가 악화되자 통교 왜인에 대한 접대가 부실해졌고, 이와 함께 변방을 지키는 관리들의 횡포와 접대 위반 사례가 빈발하자 왜인들의 불만이 높아졌던 것이다. 중종(中宗) 원년(1506)에 이르러서야 조선은 통교와 접대를 계해약조대로 환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재정상태의 악화와 접대비용의 과다로 인해 4년 후에는 다시 긴축재정을 시행하게 되었다. 조선측의 엄격한 통제에 따라 통曾)이 죽고, 백성들의 피해가 컸다. 삼포왜란 직후 조선정부는 즉시 대마도와의 통교를 중단시켰다. 난이 진압된 지 1년 후 막부측에서 국왕사 붕중(?中)를 파견하여 강화안을 제시하며 대마도와의 통교를 요청해왔다. 조성에서는 대일통교 단절이라는 강경론도 나왔으나 결국 조건부로 화의 제의에 응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과 일본은 계해약조에 이어서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하였다. 그러나 계해약조보다 통교에 제약이 많았던 임신약조로 인해 일본측의 불만은 컸으며, 지속적으로 통교의 제한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중종 39년(1544)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이 일어났으며, 조선과 일본과의 통교가 끊어졌으나, 명종(明宗) 2년(1547)에 정미약조(丁未約條)를 체결하고 교역 재개를 했다. 그러나 명종 10년(1555)에 발생한 을묘왜변(乙卯倭變)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통교는 단절됐으며, 이후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과 일본의 통교는 없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조선이 일본과의 통교를 할지라도, 왜구의 노략질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었기 때문에 통교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또한 조선도 왜구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며, 단지 통교를 끊거나, 제한을 강화하는 방향만 선택했을 뿐이다.결국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원칙적인 ‘교린’의 관계라기보다는 ‘조선이 상국(上國)으로서 하국(下國)인 일본의 대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국왕과 일본국왕이라는 대등한 칭호를 사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일본을 야만시하는 경향도 강하였다. 일본의 사신이 조선의 국왕에게 군신의 예로 하례를 드리는 것도, 일본을 낮게 보는 한 모습이다. 또한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최대 실권자로서 사신을 보낸 것은 맞지만, 한편으로는 일본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공품을 바치는 경우가 있었다. 결국 무로마치 막부를 여러 통교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을 뿐, 조선과의 대등한 대우는 하지 않았다.2) 조선ㆍ유구관계조선과 유구에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유구의 정보에 대해서 잠시 를 적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숙주(申叔舟)가 저술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의 ?조빙응접기(朝聘應接記)?에는 일본과의 왕례를 위한 외교의례를 적어놨는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빙응접기?를 유구사신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한다고 하였다, 조선은 유구와도 교린관계를 맺었지만, 일본과 마찬가지로 유구를 대등한 관계로 여기지 않았다. 유구 역시 조선에 사신을 보낼 때, 자신들을 한껏 낮추는 모양을 취한다.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어 글을 바치고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잡혀 있던 사람과 바람을 만나 표류한 사람 9명을 돌려보냈다. 서신은 이러하였다. “양의(兩儀)의 덕이 합하매 사시(四時)가 차서 있게 나뉘고, 여러 나라가 편안히 즐기고 만물이 곳을 얻었습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승평(昇平)한 정치를 이루시고 덕업이 융성하온데, 또 가까운 사람에게 교만하지 않고 먼 사람을 잊지 않아서 바야흐로 덕택을 미루어 이웃나라에 은혜를 입히오니, 감히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윽이 생각하건대, 어리석고 몽매하여 궁벽하게 바다 나라에 살아서 특별히 비의(菲儀)를 닦아 사람을 보내어 치헌(馳獻)하옵니다만, 창파가 막혀 있기 때문에 친히 가서 받들어 회합할 수가 없사옵니다. 다만, 덕을 앙모하고 수를 빌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인자(仁慈)하게 살피시어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조선 측은 유구사절을 응대하는 과정에서 자국 문물의 우수함을 동남아 여러 나라에 과시하려 한듯하다. 또한 유구와의 관계를 통해 동남아 해상에 관한 정보를 얻고, 조선의 동남아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조선과 유구와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유구와의 관계에서 가장 걸림돌이 됐던 것은 일본의 방해였다. 일본 측에서 유구인을 가장한 위사(僞使)문제였다. 즉 일본이 유구인으로 위장하여 사신으로 온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이유는 조선이 유구에 대해서 매우 무지했으며, 조유통교를 일본세력이 방해하려 했기 때문.
    인문/어학| 2024.06.01| 5페이지| 2,000원| 조회(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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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청의 팔기제
    청의 팔기제
    淸의 八旗制Ⅰ. 들어가며여진족이 16세기 후반부터 성장하면서 후금, 곧이어 청을 건설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경제적인 요인 혹은 여진족을 통합하고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개인적 역량 등을 제외한다면, 여진족이 흥기한 결정적 원인은 팔기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팔기제의 형성과 구성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소수의 여진족이 대다수의 한족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확인하고자 한다.Ⅱ. 八旗制의 確立과 特徵누르하치(Nurhaci, 努爾哈赤)는 여타 부족장들의 군사력과 자기 영지에서 나오는 경제력을 통해 만주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나오는 중요한 제도적 혁신은 조직의 상층단계에서 기(旗)로 조직된 초(超)부족적인 군대를 창설한 것이다.1). 八旗制현대의 학자들은 ‘팔기제’라는 명칭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팔기는 하나의 집단으로 언급되며 문법적으로도 그렇게 취급된다. 그러나 팔기는 말 그대로 불변했던 ‘제도’이거나 단일한 존재가 아니었다. 팔기는 일련의 군사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기능을 결합시킨 복합기구였고, 시간에 따라 다양한 면이 변화하면서 팔기제도도 변화했다. 군사력으로서의 팔기는 17세기 중엽 만주족의 정복과정에서 팽창의 힘이자 권력의 중추였으며, 18세기에도 중요한 군사적 기능을 보유했고, 심지어 19세기 전반기까지도 방식을 개선해 가면서 군사적인 기능을 유지했다. 청(淸) 초에는 각각의 기가 지도급 인물들의 권력기반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중요했다. 세 개의 기에 대한 직속 지휘권을 가졌던 황제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팔기제는 청이 개발한 독창적인 기구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기구라 할 수 있다. 중국고유의 군사조직이나 민간조직 가운데 팔기와 비슷한 것은 없었다. 중국적 상황에 비추어 팔기가 새롭고 이질적이기 때문에, 명을 전범으로 삼는 청대 행정조직의 다른 부분보다 팔기에 대한 이해가 현격히 떨어지게 되었던 것 같다. 맹삼은 1936년에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청은 스스로를 만주족의 나라로 생각했지만, 만주족은 스스로를 기인이라고 구별했다. 즉 모두 만주를 청의 본국本國이라고 여겼다. 모든 만주족은 기인이었으므로, 만주족의 나라 안에 팔기가 포함되고, 중국 안에 만주족의 나라가 포함되었다. 만주족과 한인은 하루도 섞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청이 중국에 입관하여 267년이 지났어도 중국의 사람들은 팔기가 진실로 어떤 것이었는지 모르고 있다.만주족과 한인이 섞인 적이 없었다는 말은 과장이겠지만, “사람들은 팔기가 진실로 어떤 것이었는지 모르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팔기는 군사조직이자 행정조직이기도 하였다. 원래 팔기제도는 화살이라는 의미의 니루[niru, 牛錄]를 기본단위로 하였다. 이때 니루는 만주족의 수렵과 전투를 수행하는데서 발전한 일종의 씨족조직과 관련된 것으로 초기의 1니루는 혈연적 성격을 지닌 10인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니루는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해가면서 만주사회가 확대되어감에 따라 그 성격이 변하였다. 만주족을 통일하는 과정의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얻은 투항자들과 전쟁포로들을 점차 니루에 편입시킨 것이다. 따라서 니루는 지연적인 성격을 지닌 300인을 단위로 하는 행정적이고 군사적인 조직으로 변화되었다. 이렇게 300인으로 구성된 1니루에 한명의 니루어전[牛?額眞(厄眞)], 5니루에 한명의 잘란어전(甲喇, 잘란 = 잘란어전)을 두었고 5잘란에는 한명의 구사어전(固山, 고산)을 두어 1구사를 조직하였으며 이에 따라 기(旗)가 성립되었다. 1607년에는 홍(紅), 황(黃), 남(藍), 백(白)의 4기가 성립하였고 1616년에 이르러 양홍(?紅), 양황(?黃), 양남(?藍), 양백(?白)의 4기가 더해져 팔기가 성립하였다. 청조는 이러한 8개의 기를 통해 만주족을 지배했으며 팔기에 속한 자를 기인(旗人)이라 부르고 기지(旗地)를 지급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팔기가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기인은 일종의 무사계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팔기는 토지지급을 매개로 하여 군사상의 의무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봉건적인 제도였다고도 할 수 있다.팔기군은 청조의 중추군사력으로 평소에는 일반적인 경찰업무에 종사하다가 반청활동이나 반란이 일어났을 경우 무력으로 진압하는 활동을 하였다. 북경에 주둔하는 팔기군은 금려팔기병(禁旅八旗兵)으로 불렸고 지방의 요충지에 주둔하는 팔기군은 주방팔기병(駐防八旗兵)으로 불렸다. 금려팔기병은 낭위(郎衛)와 시위(侍衛)로 조직되어 수도를 방위하였다. 이 중 낭위는 황제의 궁성인 자금성 각 문의 호위를 담당했으며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이 통솔하였고 시위는 북경의 외문(外門) 일곱 곳과 내문(內門) 아홉 곳의 수비를 담당하였으며 보군통령(步軍統領)이 통솔하였다. 주방팔기병은 입관 초기에 태원(太原)과 서안(西安) 등 새로 정복한 전략적 요충지에 팔기병을 파견하여 주방을 설치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중원을 통일한 뒤에는 총독이나 순무가 거주하는 지역에 팔기병을 주둔시켜 지방권력이 민권과 군권을 동시에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팔기군은 금려팔기병과 주방팔기병 모두 엄격하게 무술검열을 받았으며 정기적으로 합동훈련을 하였다.누르하치는 각 부족과 민족들의 연합을 공고히하고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직계가족 간의 결합에만 의지하지 않았고, 칭기스칸처럼 부하들과의 동료관계를 활용했다. 또 팔기제는 신생 금나라의 분산적인 요소들을 통합하여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통일체로 변모시켰다. 또한 새로운 수직적 조직망을 제공함으로써 부족과 종족이 기존에 갖고 있던 중요성을 배제하고 당시에 아직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중앙의 정치권력을 보완해 주었다.2). 八旗制의 民族的 特徵청의 건국과정에서 팔기의 중요성은 주로 군사적(무력으로서의 팔기), 정치적(권력 기반으로서의 팔기)측면에서 논의되었다. 반면 민족적 측면, 즉 민족의 보존체로서의 팔기는 간과되어 왔다. 팔기를 민족별로 셋으로 분리하는 작업이 청 초에 진행된 다른 변화들과 동시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여진족은 니루에 등록됨으로써 수평적인 혈연관계와 지연관계가 약화되었고, 이 과정은 팔기가 여진족에게 제국의 백성으로서 단일화된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촉진되었다. 홍타이지(皇太極) 치하에서 팔기의 민족적 정체성이 더 분명히 구분된 것은 새로운 제도적 요소들이 추가되고 그것이 혼합되어 만주족의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진족으로 구성된 팔기 이외에도 몽고팔기와 한족팔기가 따로 구분되어 민족분리의 원칙을 시행하였다. 특히 여진족은 몽고족과의 문화적인 특징과 정체성이 일치한다고 말하며, 몽고족을 조력자로 생각하여 강한 동질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반면 한군팔기의 경우 중국 정복을 전후한 시기에 점진적으로 증설됐는데 이는 청의 한인에 대한 정책이 신중했고 불안정했음을 반영한다. 한군팔기는 상대적으로 뒤늦게 구성되었고, 팔기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들은 처음부터 관계가 빈약했고 중무기를 운반하는 고역을 배정받았다. 중국을 정복한 후에는 모든 기인이 누렸던 월급, 법적인 특권, 면책, 특별 감옥, 과거합격의 할당배정, 관직승진 특혜, 황실수렵에의 참가 등의 특권은 한인에게는 감소된 형태로 제공되었다. 이들이 이등시민이라는 증거였다.Ⅲ. 淸의 蒙古八旗政策청은 몽고리아 남부의 부족들을 재편성하여 팔기제도에 편입하였다. 각 기의 단위는 전통 부족의 구분에 따라 조직되었는데 본질적으로 이전의 부족들을 새 기로 조직한 것이다. 기존 몽고 우두머리들은 계속 부족민을 이끌면서 청으로부터 관작을 받았고 정해진 영토에 자리잡게 되었다. 부족민들은 50호의 단위로 나위어 할당된 지역에 배치되었다. 이 정책은 보수적인 칭기즈 칸 가계 엘리트들의 권리를 재차 확인하였고 그들은 만주족에 의지하여 권력을 유지하였다. 동시에 몽고인들을 작은 단위로 나누면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새 지도자를 찾는 것을 금지하여 혼란의 가능성을 줄였다. 또 높은 벌금 규정을 선포하여 부속민이 도망하는 것을 방치하거나 도망자를 받아들이는 부족장들은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되었다. 1662년 규정들은 더욱 강화되어 사냥을 하다가 팔기 영토를 벗어나는 것도 죄에 해당되었다. 청은 몽고에서 보수적이고 야심이 없는 귀족들에 의한 통치를 실행하면서 조정에 적대적인 정치세력의 발전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이번원(理藩院)으로 하여금 몽고에 관한 모든 업무를 주관하도록 했다. 이번원은 각 부족에게 고정된 영역을 지정해 주고, 새로운 부족장의 계승을 인정해 주며, 관직과 작위를 수여하고, 부족 상호간의 활동을 감시하면서 교역을 규제하고, 조공을 관장하였다.Ⅴ. 나가며지금까지 청나라의 초기 역사와 팔기제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청나라의 성립배경에는 강력한 군사력이 있었다. 이를 이루는 주 제도는 바로 팔기제였다. 이 팔기제는 비단 여진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몽고와 한족에게까지 그 구조가 열려있었다. 그러나 중국을 정복하고 나서부터는 한족에 대한 대우는 많이 차등을 두었다. 반면에 몽고부족에 대한 대우는 일정부분 지속시키면서 그들의 저항이나 반항을 미연에 차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청은 팔기제를 통하여 분명히 민족적인 선을 그어놨을 것으로 추측한다.
    인문/어학| 2024.06.01| 4페이지| 2,000원| 조회(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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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유럽과 현대사회
    ‘빛 좋은 개살구’ 19세기의 양 극단, 그리고 ‘목소리’19세기의 장점, 이익, 긍정, 이로움…….유럽의 19세기는 바야흐로 성장의 최고점인 시대였다. 그 이전 시기부터 들어오던 식민지의 자원들은 유럽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유럽은 이를 통해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했으며, 비록 빈부의 격차는 늘어났지만,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던 시기였다. 영국에서 촉발된 산업혁명은 유럽 각지로 퍼져 생산력의 증가를 불러왔고, 이전과 다른 엄청난 생산력의 증가를 불러왔다. 물질적 풍요가 동반되기 시작하자, 소수의 지배층ㆍ귀족층 외에 새로운 계층이 형성됐다. 그들은 부르주아라 불렸고, 그들은 시민이 되었다. 시민 개개인의 의식이 형성되고, 주권의식이 싹텄다. 이윽고 영국에서 시작된 혁명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에도 그 파장이 미쳤다. 혁명은 기존의 소수 지배관계를 해체시켰고, 훨씬 다양한 사람들이 국가를 운영하고, ‘정치’라는 것에 참여하고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의 자유가 확대되고, 정치의 참여가 확대되고,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급진적인 확대가 아닌 점진적 확대가 추진되던 시기였지만, 기존의 시대보다 확연히 ‘열린’ 시대였다.경쟁의 시대와 ‘문명화’19세기의 유럽은 경쟁의 시대였다. 식민지를 통한 영토의 확대는 유럽 열강들에게 지속적인 부를 가져다주었고, 유럽 대륙의 발전에 큰 힘이 됐다. 식민지 확대를 위한 유럽 내 국가들 간의 경쟁 또한 심화됐다. 이 경쟁은 때로는 극단적인 전쟁을 야기했지만, 유럽 각국 간은 경쟁을 통해서 더욱 큰 성장을 이뤘다. 또한 식민지를 많이 차지하는 국가가 패권을 쥐기 시작한다. 대영제국도 그러한 틀에서 탄생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 그대로 영국은 가장 많은 식민지를 차지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영국을 따라 하기 위해 유럽의 다수 국가들이 앞 다투어 식민지 확보에 힘을 기울인다.한편 유럽의 식민지 확대의 기본 인식은 미개한 이들에 대한 ‘문명화’였다. 문명이란 것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아직도 ‘미개함’에 빠져있는 식민지들에 대해서 ‘문명’인으로서 돌봐줘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것은 문명인으로서의 당연한 책무이자 의무였다. 그리하여 식민지에 자본을 투입했고, 근대적 건물과 도로 확충, 의료 설비의 건설 등 다양한 혜택을 식민지에 주었다. 또한 유럽은 미개한 사회에 문명을 전하고 미개인들을 개화시킨다는 인도주의와 선교 사업에 고을 들였다. 이는 미개한 사회의 허가가 없는 강제성을 띠고 있었다.제국주의의 시대19세기 유렵 열강들은 너도나도 없이 식민지의 확장에 주력했다. 이는 제국주의의 형성으로 귀결됐다. 제국주의 형성의 내부적 요인은 국민들의 민족의식, 식민지 보유 확대가 국가의 지위와 위신을 상승시켜 준다는 생각, 민족주의적 팽창의식 등이었다. 한편 그들은 앞서 말했던 미개사회의 문명 전파와 그들의 개화를 책임진다는 것, 인도주의와 선교사업 등으로 제국주의 합리화에 나섰다. 이러한 요인들이 제국주의 형성의 외부적 동인이라고 할 수 있다. - 물론 외부적 동인은 그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개인적 사견이다. -사실 19세기는!19세기는 유럽의 화려한 문명, 발전 등의 수식어로 표현할 수 있지만 실제로 ‘빛 좋은 개살구’라 할만하다. 외형적인 발전에 비해서 내부적인 발전은 더디기만 했다. 민주주의는 답보상태였으며 소수의 지배층이 권력을 담당하는 사회 ? 물론 왕정에 비해서 늘어난 지배층 - 가 한동안 유지됐다.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의 바람은 비교적 거셌다. 그러나 외형적인 발전에 비해 정신적 성숙은 매우 더뎠다. 물론 급성장의 폭이 매우 컸기 때문에 정신적인 성숙의 발전은 쫓아가기 쉽지 않았다. 정치의 방향에 대해서 파벌이 심하게 나뉘어 갈등을 빚었고,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큰 혼란기를 겪었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큰 국력을 가진 것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개혁과 보수 사이에서 큰 갈등을 겪고 있었다.제국주의는 19세기 유럽의 가장 큰 폐단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문명이라 여기고 식민지의 대상이었던 국가들을 비문명이자 미개함으로 단정 지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의 자원을 강제 탈취하였고, 개방을 강요하였고, 인적 재원의 수탈을 자행했다. 우리나라의 근처에 있던 일본의 조선 강점이 이를 보여주는 가장 큰 예일 것이다. 아프리카는 그들 스스로의 결정 없이 국가가 나뉘거나 합쳐지고 자원을 빼앗겼다. 영국의 경우 청을 강제 개방하기 위해서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청에게 많은 것들을 강제로 얻었다. 이렇듯 유럽의 열강들은 제국주의를 통해 식민지 획득에 열을 올렸고, 식민지들의 자원을 파렴치하게 강탈해갔다.19세기는 ‘자본’이 지배하던 사회였다. 돈이 최고가 된 시대였다. 돈을 가진 자가 지배층으로 편입되었고, 못 가진 자는 점차 사회 최하층으로 떨어져만 갔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는 턱없이 부족했으며, 이들을 도와주려는 노력도 부족했다. 돈과 물품이 풍족해지면서 이를 소비해야만 경제가 운영되었고, 소비가 위축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가 쌓여서 생긴 것이 20세기 세계대전이었다. 세계대전의 원인은 가히 19세기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의 적폐가 쌓여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19세기에서 교훈을 찾을 수는 없을까? 19세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외형적 성장에 비해 정신적인 성숙이 뒷받침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시기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유럽의 19세기에서 긍정적인 모습도 있다. 여성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통해 그들의 권리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정치 참여의 자유를 얻기 위해 다양한 혁명도 전개됐다. 그 와중에 실패와 좌절이 있었고, 큰 인명 피해를 입기도 했으며, 영국과 같은 완만한 해결로 불만을 잠재우기도 했다. 한편 19세기는 제국주의로 인해 이미 정신적인 인간성 부분이 매우 떨어진 체제였다. 식민지의 수탈이 매우 정당화된 시기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을 가해야한다. 그러나 19세기에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운 여성, 노예, 노동자 등의 목소리는 우리가 새겨야할 점이다. 비록 그들이 잦은 분열과 합의의 실패 등으로 인해 혁명의 큰 이해가 성사되기 어려웠지만 목소리를 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만약 목소리조차도 내지 않았다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19세기 이전의 소수가 지배하던 사회처럼 소수의 지배층이 다수의 일반인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사회로 회귀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만큼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투쟁했던 것은 매우 중요했다.
    인문/어학| 2024.06.01| 3페이지| 1,000원| 조회(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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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백제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백제
    朝鮮王朝實錄을 통해 본 百濟Ⅰ. 들어가며Ⅱ.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백제 관련 사료Ⅲ.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백제의 의미ⅰ). 삼한계승의 의미로서의 백제ⅱ).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의 의미ⅲ). 일본(日本)과의 관계로서의 의미ⅳ). 지역적 편견으로서의 의미Ⅳ. 나가며Ⅰ. 들어가며한민족, 반만년의 역사, 백의민족(白衣民族), 외세의 침입에 끝까지 저항하며 우리의 자긍심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은 평화의 민족. 이러한 용어, 수식어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리키고는 한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용어 자체는 17~19C 근대에 생겨난 용어일 뿐, 그 이전에는 이러한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민족’이라는 용어 자체에 빠질 경우 우리의 역사, 더 구체적으로는 한반도의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 혹은 역사 관련 교재에서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발해ㆍ고려ㆍ가야 등의 나라에서 전성기를 구가한 것에 대해, 마치 지금 현대인들의 자랑스러운 역사인 듯 혹은 그들이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듯 표현하고는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다.“우리는 그들을 알지만, 그들은 우리를 모른다.”즉, 지역적으로는 같은 공간일지 몰라도 시간적으로 흐른 변화상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면 과거를 바라보는 시각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그래서 ‘지금 현대인의 연구 성과를 바라보기 보다는 한 번의 이전시대의 자료만 가지고 더 이전의 과거를 보면 어떨까’라는 방향을 정했다. 본고는 “백제”라는 나라 혹은 시대를 바라본 조선인의 시각에 주목했다. 왕과 신하들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조선인이 바라본 백제와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백제와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을 분류하고, 반복되는 내용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에게 백제가 가진 의미를 정리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서 과거와 현대의 인식에 어떤 연결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Ⅱ.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백제 관련 사료조선왕조실록에서 ‘백제’로 찾을 수 있는 사료을 부각시켜 우리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려 했으며, 백제 지역의 땅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역적 편견으로서의 의미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지역에 대한 우호적인 내용과는 달리, 전라도 지역, 혹은 백제 지역에 대한 비난이 많다. 신라가 통일한 후 다시 ‘후백제(後百濟)’가 생기면서 전라도 지역, 혹은 백제 지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점점 더 심해진 것 같다. 이 부분은 현대의 지역주의와 다소 연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을 통해 실록에서 볼 수 있는 백제 관련 주제를 크게 4가지로 나눠봤다. 그 외에도 삼한 시대에 있던 성의 위치들을 참고하여, 그 자리에 다시 성을 짓자는 내용도 다수 있었으며, 삼한 시대에 역사서가 부족하여 다시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들도 있었다. 특히 삼한의 대결 구도가 치열해 같은 시기에 있던 내용을 다르게 썼다고 지적하는 내용은 흥미가 있었다. 다음 기록을 참고하기 바란다.정사를 보고 경연에 나아가 《시경(詩經)》 시월편(十月篇)을 강하였다. 주전(朱傳)의 "일식과 월식은 비록 떳떳한 돗수가 있으나, 임금이 덕을 닦아 정치를 잘 하면 먹을 것도 먹지 아니한다."는 데에 이르러,세종(世宗) : 이 말이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내가 일찍이 《삼국사략(三國史略)》을 보니, 신라에는 일식이 있었는데, 백제에서는 쓰지 아니하였고, 백제에는 일식이 있었는데, 신라에는 쓰지 아니하였다. 어찌 신라에서는 일식이 있는데, 백제(百濟)에는 일식이 없었다 하겠는가. 아마도 사관의 기록이 자상한 것과 소략한 것이 다르기 때문인가 한다."시강(侍講) 김돈(金墩) : "그렇습니다. 음(陰)·청(晴)이 달랐으면 달랐지 어찌 노(魯)나라에서는 일식이 있었으면서 제(齊)나라에서는 일식이 없었으며, 제나라에서는 일식이 있었으면서 노나라에서는 일식이 없었을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世宗實錄 , 卷26, 世宗 6年, 11月 4日(乙亥) -Ⅲ.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백제의 의미ⅰ). 삼한계승의 의미로서의 백제본 장은 단순히 백제에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며, 고구려)하여 각기 완성한 나라가 되었고, 고구려는 수 양제(隋煬帝)·당 태종(唐太宗)의 막강한 병력으로도 오히려 뜻을 얻지 못하였으니, 그 강함을 알 수 있다. 고려[前朝] 태조(太祖)가 통합한 이래로 토지와 병민(兵民)을 통합하여 하나가 되었으니, 그 국세(國勢)가 삼국이 정립(鼎立)하였던 때보다 강하여야 하겠는데, 현종(顯宗)·공민왕(恭愍王)이 파천(播遷)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조종(祖宗)의 업(業)을 이어 받고 가득찬 것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을 지키는데도 오히려 실추(失墜)됨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서 군사를 강성하게 하여 큰 기업을 굳게 하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면 군액(軍額)이 넉넉하여지고 사졸(士卒)이 정예하게 되며, 군령(軍令)이 엄하여지고 장수로 훌륭한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숙위(宿衛)하는 군사가 무기와 갑주(甲胄)가 무디고 헤어져서 이름은 기병(騎兵)이라고 하나 말[馬] 없는 자가 오히려 많다. 그래서 한 번만 열무(閱武)하는 일이 있으면 군졸(軍卒)이 당황하여 서로 꾸기에 여념이 없으니, 평시에도 이러한데 급한 때를 당하면 어떻게 보전할 수 있겠는가? 이 폐단을 구제하고자 하면 그 방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대부(子大夫)는 고금의 일에 널리 통달하였으니, 반드시 능히 이것을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솔직하게 진술하여 대답하라. 내가 장차 관찰하겠다."하였다.- 成宗實錄 , 卷201, 成宗 18年 3月 16日(丙辰) -(나) (중략) 운남(雲南) 향공 진사(鄕貢進士) 최헌(崔?) : “새 천자(天子)는 심히 엄명(嚴明)하여 온 천하가 모두 심복(心腹)하고 있으며, 또 기순(祁順)·동월(董越) 등의 사신들이 돌아와서 모두 그대의 전하(殿下)는 현명하다고 하고 칭송하여 중국(中國)에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대의 전하는 과연 어떠한 임금입니까?”성절사(聖節使) 채수(蔡壽) : “우리 전하께서는 성명인서(聖明仁恕)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시며, 재예(才藝)에 이르러서도 그 정묘함이 극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으시어, 온 나라의 김유신이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멸할 때에, 전 좌평(左平) 성충(成忠)이 계책을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백강(白江)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의 군사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간신이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성충은 귀양중에 있는 몸이니 그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여 드디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아, 신하의 충의(忠義)로운 마음이야 유배지에 있다고 하여 다를 수 있겠습니까.- 中宗實錄 , 卷72, 中宗 27年, 3月 1日(庚戌) -(라) “삼가 아룁니다. 흥망은 조짐이 있고 치란은 기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닥치기 전에 말을 하면 흔히 신임을 받지 못하고 일이 닥친 뒤에 말을 하면 구제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신이 예전 역사를 읽다가 장구령(張九齡)과 성충(成忠)의 이야기에 대해서 매양 책을 덮고 깊이 탄식하면서 마음을 잡지 못하였습니다.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의 어둡고 용렬한 것이야 본래 말할 것도 없지만 당나라 현종(玄宗)처럼 명철한 지혜로서도 선견지명에는 어두웠으니, 의자왕이 성충의 말을 쓰지 않은데 대해 후회한 것이나 현종이 곡강공(曲江公)에게 제사를 지내준 것이 난망(亂亡)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宣祖修整實錄 , 卷17, 宣祖 16年, 4月 1日(壬子) -(마) 백제(百濟)는 강포하고 전쟁을 좋아하여 전사(戰死)한 임금이 넷이나 되고 또한 나라가 먼저 망했다.- 肅宗實錄 , 卷6, 肅宗 3年, 1月 12日(己丑) -사료의 내용을 살펴보면 멸망의 원인을 직설적이게 표현하고 있으며, 백제의 마지막 상황에 대해서 자주 곱씹는다. (가)의 사료는 매우 직설적이다. 이는 다름 아닌 세종이 위 내용을 담은 책을 인쇄하라고 명령을 내린 부분이다. 세종은 술이 가진 폐해와 훈계를 오랫동안 말했고, 나라가 망한 것도 다 술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사료는 반정(反正)으로 왕에 등극한 세조 즉위 초에 양성지(梁誠之)가 올린 상소문의 일부이다. 이 상소에서는 백제의 )과의 관계로서의 의미조ㆍ일관계는 외교적인 친근감에 의해서 맺어진 것은 아니다. 조선은 영토의 주변을 자주 약탈하는 왜구(倭寇)문제로 근심이 많았다. 왜구의 규모는 일반적으로 소규모였지만, 크게는 약 100여척의 전함이 침입해왔다. 일반적으로 왜구가 남해안에 출몰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국 해안에 침입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를 통해, ‘왜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당시 일본은 중앙의 막부(幕府)보다 지방의 영주(領主)들에 힘이 더 강했고 각 지방마다 나름의 외교행위를 하던 상태였다. 특히 이들 중 일부, 대표적으로 대마도(對馬島)의 경우 조선과의 관계를 통해서 경제적인 부족함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조선에 오면서 자신들이 백제의 후손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반도에 연고가 있다는 점을 부각해서, 조선과의 외교에서 좀 더 나은 결과물을 얻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백제’라는 존재가 조선보다 일본인들에게 부각되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백제의 후손임을 공공연히 언급하는 걸로는 일본의 ‘대내전(大內殿)’이 유명하다. 대내전에 대해서는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대내전 : 다다량씨(多多良氏)는 대대로 주 안의 대내현(大內縣) 산구(山口)에 거주하면서 주방(周坊)ㆍ장문(長門)ㆍ풍전(豊前)ㆍ축전(筑前) 등 4개의 주를 다스리며 군사력이 가장 강하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백제왕 온조의 후손이 일본에 들어와 주방주의 다다량포에 처음 정박하였기 때문에 그것으로 성씨를 삼았고, 지금까지 800여 년이 되었다 한다.이들은 조선의 근심인 ‘왜구’ 통제를 적극적으로 할 것임을 약속하는 한편, 백제의 후손임을 적극적으로 밝혔다. 대내전 외에도 일부 영주들이 자신이 백제의 후손임을 들어 백제 지역 내의 땅을 요구하기도 했다. 백제의 후손이라고 지칭한 일본 영주들이 나오는 사료는 다음과 같다.일본 좌경 대부(左京大夫)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이 구주(九州)를 쳐서 이기고 사자(使 같다.
    역사학| 2023.07.01| 10페이지| 3,000원| 조회(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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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조선중화주의에 대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다각화적 이해
    조선중화주의에 대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다각화적 이해
    朝鮮中華主義에 대한 實學者들의 多角化的 解釋 方式Ⅰ. 들어가며Ⅱ. 朝鮮 後期 北伐論과 朝鮮中華主義ⅰ. 17세기 이후 조선의 상황과 北伐論ⅱ. 朝鮮中華主義와 그 限界Ⅲ. 朝鮮中華主義에 대한 實學者들의 多角化的 解釋 方式ⅰ. 星湖 李瀷의 청조긍정론과 서양인식ⅱ. 洪大容의 華夷觀과 ?山問答ⅲ. 北學派와 北學思想Ⅳ. 朝鮮中華主義에 대한 實學者들의 多角化的 解釋 方式, 그 의의와 한계 ? 나가며를 대신하여Ⅰ. 들어가며조선 후기는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 휩싸여있었다. 양난의 후유증 극복이라는 과제와 중앙 정계의 당쟁 속에서 조선의 주류 성리학자들이 선택한 방식은 바로 조선중화주의였다. 본고의 저자는 조선중화주의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다. 조선중화주의는 정신적인 승리이자 관념의 세계일 뿐, 현실적인 감각이나 넓은 국제정세에 대해서 무지한 논리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서 실학자들은 조선중화주의에 대한 새로운 논리나 인식을 제시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불안정한 대내요소들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조선 후기의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관념인 조선중화주의에 대해서 알아보고, 실학자들은 조선중화주의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가졌는지, 조선중화주의에 대한 실학자들의 다각화적 해석 방식을 알아보고자 한다.Ⅱ. 朝鮮 後期 北伐論과 朝鮮中華主義ⅰ. 17세기 이후 조선의 상황과 北伐論조선은 倭亂과 胡亂을 겪으면서 대ㆍ내외적인 큰 위기를 맞았다. 조선은 양란 후유증의 극복이라는 큰 과제를 앉게 된다. 丙子胡亂 이후 朝ㆍ淸 관계는 조선의 일방적인 굴복 속에서 이뤄졌다. 조선은 洪翼漢ㆍ尹集ㆍ吳達濟 등의 3학사와 世子ㆍ鳳林大君과 대신의 자제들을 심양으로 보내야만 했다. 이들은 淸의 강요로 체포되어 호송된 사람도 있었으나, 청의 관원이 직접 조선에 들어와 사람을 잡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굳건해진 崇明思想과 청에 대한 항쟁의식 때문에 反淸감정이 높아졌다. 청이 지시한 연호를 바꾸는 것도 이행하지 않았으며, 중앙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금군 6백여 명을 전원 기병화시켰다. 나아가 1655년에는 금군의 병력을 1천 명으로 확대시켰다. 훈련도감도 증강시켜 나갔는데, 신식 무기 훈련도 병행하였다. 북벌의 열기는 정부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가정에서는 좋은 말을 기르고, 마을에서는 수백 명을 모아 활과 조총의 사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편 명 후예의 재기가능성과 러시아의 극동 진출 등 대륙의 심상치 않은 형세로 북벌 계획에는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 그러나 북벌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으며 중국의 형세는 여전히 명나라의 잔존 세력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또 러시아에 대해 청을 물리쳐 주기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조선은 청의 요구로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 정벌군을 보내야 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북벌 준비로 인해 백성의 부담이 가중되면서 효종의 계획에 대해 의심을 품는 사람까지 생겼다. 특히 왕권 강화를 반대하는 집권 세력의 반발로 효종의 군사 정책은 제동이 걸렸다. 북벌의 열기도 점차 식어가기 시작했다.그러나 북벌은 당시 조선의 내ㆍ외적 현실에 전혀 맞지 않았다. 먼저 중원을 차지한 청의 세력은 매우 막강했다. 대국 청을 상대로 북벌을 준비한 조선은 내부적으로 양난의 후유증도 해결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내부적으로는 민생이 회복되지 않았고, 가뭄이 심하여 물자를 축적하기도 어려웠다. 가뭄이 심하여 기우제를 지내라는 孝宗實錄 의 기사도 보인다.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 기우제를 지내거나, 백성들을 구휼하거나, 대동법 등의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조선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민생, 재정적 어려움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효종 3년(1652년), 어영군의 증강을 명했다. 이에 대해서 당시 좌의정인 김육이 극구 반대했으나 효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상 북벌론은 효종이 삼전도의 치욕으로 인해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국내 인심과 분위기를 조선왕조로 묶으려는 하나의 결속력이 형성되길 바랬다. 한편 효종의 북벌은 그의 의지대로 이어지지 못했고, 결국 송시열 등 山黨세력의 지식인들은 인식의 변환기를 맞았다. 원래 북벌을 추진하던 과정 속에서 명의 잔존세력과의 연결을 꾀했었는데, 南明 세력의 소멸을 계기로 명의 중흥을 기대할 수 없게 된 현실에 직면했다. 송시열은 효종 사후 중화의 적자가 없던 상황 속에서 華夷論과 尊周論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좌의정 許積이 병자호란 때 청에서 죽은 3학사에 대한 비판을 했는데, 송시열은 이를 비판했다. 또한 호란의 결과가 비록 부득이한 선택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삼학사의 의리가 조선에 필요한 시대정신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런 존주론과 화이론관을 강조하면서, 인조대 척화론이나 효종대의 대청복수론과 같은 청에 대한 원한으로 비롯된 주장이 아닌, 새로운 국제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다. 더 나아가 중화를 한족 자체만이 가진 것이 아니며, 문화적 화이분별의 인식을 통해 조선이 중화문화의 계승자이자 주자학과 의리론의 계승자임을 강조했다. 즉 조선중화주의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의 문화적 전통은 이제 명의 부흥 가능성이 사라진 시점에서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이었다.조선중화주의는 성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중국의 학문을 뛰어넘어 논의가 진행되고, 이러한 의식이 ‘우리가 중화에 닿았다’라는 것으로 확대됐다. 조선사회에서는 존명의 의리를 저버리고 천자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亂臣賊子로, 그들을 처단하고 천자의 질서를 지키는 것을 춘추의 의리로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정신적인 승리만을 담보할 뿐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못하였다. 즉 조선 지배층만의 관념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위해 현실로부터 유리된 이데올로기를 지향했고, 국제정치현실에 점차 멀어져갔다. 조선중화주의에 바탕은 둔 대외인식은 자기중심주의의 고립주의로 경직화되어, 이후 청 및 일본에 대하여 명분론을 강조하여 현실적인 대응능력을 둔화시키는 장애요인이 되었다.Ⅲ. 조선중화주의에 대한 실학자들의 다각화적 해석 방식성리학자들은 현실적인 국제역관계를 망각하고, 조것은 중국을 구세하려는 뜻으로 온 것인데, 중국의 지배층은 우물안 개구리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성호의 인식은 더 나아가 중국 밖의 세계로 미쳤다. 중국은 하나의 넓은 세계의 일부 일뿐, 그 밖에는 많은 지식ㆍ문화ㆍ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호는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서양 과학의 효용성을 인정하고, 지식의 축적을 토대로 한 기술의 발전을 분명히 했다. 다음은 성호가 청조의 관료들에 닫혀있는 의식을 비판한 구절이다.만력 41년(1613, 신종41)에 남경(南京)의 태복시(太僕寺) 소경(少卿) 이지조(李之藻)가 서양의 역법(曆法) 14건을 올리고 아뢰기를,……3년에 서양 배신(陪臣) 탕약망(湯若望 Adam Schall von Bell)을 징소(徵召)하고 또 서양 배신 나아곡(羅雅谷 Jacques Rho)을 징소하여 함께 역국(曆局)에서 종사하게 하였다.……대개 중국의 역법은 원(元)나라 태사(太史) 곽수경(郭守敬) 때에 이르러 가장 정밀하고 통달했다고 말하지만 서양 책에 비하면 더러 그 껍질도 헤아리지 못하는 정도였다.……서양이 중국과 지역이 서로 붙어 있지 않고 각자 황제와 군주의 영역을 지니고 있는데, 저들은 단지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뜻으로 멀고 험한 길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관직을 주어도 받지 않고 오직 대관의 봉급만 받고 있으니 바로 한낱 객경(客卿)의 지위일 뿐인데, 중국의 군신이 바야흐로 그 영향을 많이 받아 존경하기에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견문이 낮고 좁은 이가 감히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말을 하며 그들을 배신 아무개라고 하니, 어찌 식견이 통달한 자의 비웃음을 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사필(史筆)을 잡은 자를 위하여 안타깝게 여긴다.星湖全集 , 跋天問略성호 이익은 청의 중신들이 서양의 역법의 효용성에 대해선 인정하면서 서양인들에 대해서만큼은 한없이 낮추는 태도에 대해 비판하면서, 《천문략》의 후미에 자신의 평가를 서술했다. 청조의 좁은 견문을 비판하면서, 서양의 기술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편협하고 고집스런 조선의 주자학자들에게 ‘열린 자세’를 촉구하려고 한 것이다. 열린 자세를 가지고 학문을 논하는 것에 대해서 의산문답 은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實翁과 虛者의 대화를 통해 허자가 배우려는 하는 태도는 이를 짐작하게 해준다.“이 허자는 동해의 한 시골 사람입니다. 옛사람의 찌꺼기[糟粕]에 마음을 붙이고 종이 위의 문투만 외면서 속된 학문에 몸을 의지해온 까닭에 작은 것을 보고 도(道)로 여겨 왔는데, 이제 부자의 말을 들으니, 심신이 개운하여 깨달은 바가 있는 듯합니다. 감히 대도(大道)의 요체를 묻나이다.”?山問答위 대사는 허자의 말로 실옹에게 큰 타박을 받은 후 깨닫게 되는 내용이다. 이후 자신에게 더 가르침을 주길 원하는 허자의 의지가 담긴 말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공부가 좁은 소견이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잘못을 과감히 인정하고 있다. 즉 허자는 비록 실옹을 만나기 이전까지 유학 또는 성리학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왔으나 기본적으로 개방적 태도를 지닌 인물이었고 자신의 견해와 사상에 대해 고민하던 학자였다. 허자에 대해서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위 구절에서 보이는 허자의 열린 시각을 생각했을 때, 무조건 성리학자를 지칭하고 글을 썼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 어떤 이들은 허자를 홍대용의 분신으로 생각하면서, 실옹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사상적 편협함을 깨닫는다고 보기도 한다. 자신의 사상적 변화내지는 지적 성숙을 허자와 실옹의 두 인물로 대비시켜 허자가 실옹을 통하여 진리를 깨달아 가는 모습을 그려낸 것이 의산문답 인 것이다. 홍대용의 이러한 인식은 의산문답 전체에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 조선의 사회ㆍ경제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홍대용은 화이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제시했으며, 조선의 성리학만이 전부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ⅲ. 北學派와 北學思想북학파들은 이용후생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북학론을 주장했다. 즉 북으로 청조문화를 주거늘……
    인문/어학| 2023.06.29| 8페이지| 2,000원| 조회(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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