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슬럼(slum)영어로는 빈민촌을 ‘슬럼(slum)’이라고 한다. 슬럼의 어원은 slumber(잠, 선잠)로 슬럼이 눈에 띄지 않는 뒷골목 같이 잠든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유엔의 정의에 따르면, 슬럼은 삶의 질이 낮으며 오염되어있는 쇠락한 도시 혹은 도시의 일부 지역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과 이루어지고 대도시가 등장함에 따라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세계 최대의 슬럼은 멕시코시티 외곽에 있는 거대한 판자촌 '네사, 찰코, 이스타' 지역이 있다. 그곳에 거주하는 인구는 무려 400만 명이나 된다. 이집트 카이로에는 맘루크 왕조 시절의 무덤을 개조하여 빈민들이 살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하는 거대한 슬럼 지역이 있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는 하룻밤 사이 쓰레기 더미 위에 슬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슬럼에는 마실 물을 구하기 어렵고 하수시설이나 화장실도 부족하고 자연재해에도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위생의 문제는 말로 무엇하겠나2. 슬럼투어슬럼투어는 이 같은 지역을 둘러보는 ‘체험 여행상품’이다. 슬럼지역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지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위해 슬럼가 주민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거나, 슬럼가의 아이들이 노는 것처럼 공터에서 축구하기 같이 세부적으로 상세한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도 있다.최초의 슬럼관광은 산업혁명 때이다.18세기 산업혁명은 폭발적인 생산력 증가와 함께 인류를 빈곤으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빈부격차, 노동착취나 실업과 같은 노동문제 와 같은 사회 문제가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간신히 생계를 이어갈 정도의 저임금 속에 긴시간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일을 해야만 했다. 값싼 노동력인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노동착취는 더욱 가혹했다. 자본가들은 호화 주택을 짓고 편안한 생활을 누렸지만, 넘쳐나는 노동자들은 가난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빈익빈 부익부는 갈수록 심해졌다.슬럼 투어는 1880년대 런던의 상류층이 슬럼가를 돌아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관찰한 데서 시작됐다. 당시 호기심 많은 영국 런던 귀족들이 자선을 명분 삼아 경찰의 호위 아래 슬럼가를 둘러보던 것이 시초라는 것이다. 풍요로운 생활을 즐겼던 도시 상류층들이 영국의 런던 북동부 템스강 이스트엔드로 대형 버스를 타고 관광을 했다. 안내 책자 까지도 나왔다고 한다. 이스트엔드는 산업혁명 이후 공장, 항만에서 일하는 최하층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극빈지구였다. 슬럼가 관광을 한 것이다. 뉴욕의 부유층들이 자선을 명분으로 뉴욕 파이브포인트 등 슬럼을 찾아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찰하는 하기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인 1980년대 백인들이 흑인 거주지역을 돌며 ‘흑인의 삶’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투어가 만들어졌다. 인종 분리 정책을 지지하는 인종차별주의자적 외국인 관광객이 합세하며 호황을 누렸다.현대에 와서 이슈가 된 슬럼 투어는 브라질 리우데자이네루의 호싱야지역 투어이다. 1992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호싱야는 남미에서 가장 큰 슬럼가 중 하나로, 호싱야를 투어하는 사람은 연 4만 명에 달하며, 2016년 리우 올림픽 당시에는 50만 명이 몰려들 정도로 엄청난 인기였다. 인도의 경제수도 뭄바이의 빈민가 다라비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주민들의 삶을 체험하는 관광상품이 출시됐다. 아시아 최대 빈민촌인 인도 뭄바이 다라비에서는 하룻밤을 묵는 숙박 프로그램도 있었다. 여행옵션으로 홍등가 지역을 구경할 수도 있다. 투어전에 사진 촬영은 자제하도록 안내하며, 투어 수익의 80%는 마을 발전을 위해 기부된다. 인도 말고도 케냐 나이로비의 키베라 등 제3세계의 거대한 슬럼가도 인기 있는 장소로 꼽힌다. 싱가포르에는 ‘슬럼 호텔' 도 있다고 한다.3. 슬럼투어에 대한 의견슬럼투어를 옹호하는사람들은 빈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현지인들 계몽할 수 있다고 한다. 현지 가이드를 채용하기 때문에 고용이 창출되고, 주민들은 장사를 할 기회가 생긴다는 거다. 그러나 반대가 거세다. 슬럼 투어는 결국 인권 문제로 이어진다. 빈민가 주민들의 삶을 느끼는 것이 아닌, 수박 겉핥기처럼 관찰할 뿐이라는 것이다. 짧은 여행과 체험을 통해서는 주민들을 진심으로 공감할 수 없으며, 그저 가난한 빈민가 주민들을 관광이라는 이름 하에 구경거리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된다는 것이다. 그곳에 사는 지역 주민들은 거대한 소외감과 박탈감을 안겨주고 하나의 낙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게다가 지역주민들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관광사만 배불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케냐 나이로비의 빈민가에서 자란 한 소년은 “관광객들은 이틀동안 굶주린 나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들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우리는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이 소년은 “슬럼투어가 가난의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다.” 라고 꼬집어 말했다.
아내를 판매 합니다내 아내는 태생 독사입니다 미친개 같고 으르렁 거리는 사자 같아요 장전된 권초같은 여자이니 콜레라를 피하는 것처럼 이 교활한 여자를 조심하세요. 하지만 이 여자는 소젖을 잘 짜고, 노래를 잘하고, 술동무 하는 역할을 잘합니다 이 여자의 장점과 단점을 다 합쳐서 50실링에 팔겠습니다1832년 아내를 팔았다고 알려진 조지프 톰슨이라는 남자가 낸 아내 판매 광고이다.18세기부터 영국에서는 자신의 아내를 가축처럼 파는 '아내 판매제도'가 유행했다. 아내를 팔기로 결정한 남편은 지역신문을 통해 광고를 했다. 1780년부터 1850년까지 팔려나간 부인들의 수는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만 해도 300명이 넘는다. 보통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니 실제 아내 판매는 훨씬 많았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앞서 말한 조지프 톰슨은 50실링이라는 가격으로 아내를 판다고 했지만 이렇게 판매하는 방법은 사실은 아내 판매의 관행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보통은 아내를 판매할 때 소나 양 또는 돼지와 똑같이 무게를 달아서 ‘몸무게 몇 그램당 얼마’ 하는 더 모멸적인 방식으로 아내의 단가가 매겨졌다고 한다.그렇다면 도대체 왜 아내를 판매한 것일까?첫 번째는 당시는 아내가 남편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남성의 소유물이 되었다. 소, 돼지, 집 등에 대한 재산세를 내듯 아내에 대해서도 재산세가 매겨졌다고 하니 국가에서 아내를 남편의 재산으로 공인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싫증난 소유물이 된 아내를 시장에서 처분하는 것은 당시 남성들에게 그다지 이상할 게 없었다.두 번째는 결혼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이유 때문에 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결혼은 19세기나 되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당시는 결혼을 재산상속이나 2세 생산을 위한 실용적인 이유로 했었다.세 번째는 이혼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1753년 영국의 결혼법이 제정되었다. 결혼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남자 14세이상 여자 12세 이상이면 누구나 쉽게 혼인이 가능했다. 하지만 결혼은 쉬우나 이혼은 쉬운일이 아니었다.그당시 이혼할 방법은 두 가지였다.첫 번째 방법은 남편으로부터 생명이 위태로워질 때까지 폭행에 시달린 아내가 사법기관에 남편을 고발하는 방법이 있었다. 두 번째 방법은 부부가 각각 약 2,300만 원이 소요되는 법원의 소송을 거치는 방법이다. 그렇다보니 엄청난 부자가 아닌 이상 이혼할 방법이 없었다.그래서 아내 매매의 매도 증서에 따르면 경매에 올라가는 아내들도 슬퍼하거나 분노하기보다는 즐거웠다한다. 아내 판매가 불행한 결혼 생활 청산이자 합의 이혼이었던 것이다. 당시 영국정부에는 아내 판매 법안 제안이 없었기에 아내 판매가 더욱 성행하게 됐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 손중산(1866~1925)손중산은 1866년 11월 11일에 광둥성(廣東省) 향산현(香山縣: 지금의 중산현)취향촌에서 빈농의 3남으로 태어났다. 1800년대 청나라가 외국에 문을 열어 놓고 있었던 유일한 곳 광둥성 광저우. 근처 농촌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쑨원은 외국인과 그들의 생활 및 문화에 대해 또 선교사님과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기독교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손중산이 어렸을 때 많은 중국인들이 궁핍을 탈피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 등지로 이주해 갔다. 손중산의 큰형 손미(孫眉)와 숙부도 하와이 이민을 갔다. 고향에서 서당을 다니던 손중산도 14세가 되자 부자가 된 친형 쑨메이의 초청을 받고 하와이로 떠났다.거기서 이제 미국식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데 기독교 계통의 교회학교하와이에 있는 에 입학해서 공부를 한다. 그 당시 그는 기독교 신앙에 강한 열심을 갖고 주변 중국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자 했다.손중산이 중국으로 돌아오던 시기 중국에서는 근대화를 위한 변화가 시작 되었는데 양무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과 불상을 파괴하기로 계획 했고 이를 계기로 홍콩으로 도망가게 된다.1883년 11월 홍콩에서 쫓겨난 손중산은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 그 다음해 여름 여러 선교사와 전도여행을 하고 홍콩과 마카오 등지에서 포교 활동을 한다. 그리고 의료 선교사가 되고자 의학을 공부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서양의 정치학과 사회학 등과 같은 인문학을 접하게 되고 중국 근대와에 대한 이상을 품게 된다.1894년 청일 전쟁이 일어나고 그해 11월 24일 하와이에서 최초의 혁명 단체인 흥중회를 창설한다. 민족적 위기에서 조국을 구하고 만주정권과 전제 정치를 타도하자는 것이었다.흥중회의 입회원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구국혁명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손중산은 중국인의 문제가 공자의 유가사상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잘못된 사상을 만물의 주권자이시며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 참된 지식을 참되게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실천가 였다.1895년 2월 홍콩으로 돌아와 홍콩중흥회를 결성했고 이 당시 19세기 말은 중국은 서양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주권을 잃고 쇠락의 길로 나가도 있었다. 1895년 전근대시기 세계 최대 제국의 하나였던 청나라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서구 열강도 아닌,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에 중국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손중산은 요동치는 정국을 틈타 혁명 봉기를 도모했다. 홍콩에서 홍중회라는 비밀 조직을 만듭니다. 하지만 손중산의 봉기는 시작도 하기 전에 청 정부의 감시와 단속에 발각 됐다. 그래서 일본을 거쳐서 하와이로 도망을 가던 중 스승 캔틀리 부부를 만나서 영국에 가게 된다.그의 망명 생활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으며 영국 런던에서 생활하면서 대형 박물관 부설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공부를 하게 됩니다.서방의 정치 경제 문화 외교에 관련된 책을 보며 정치 철학과 새나라에 대한 연구를 합니다. 그 때 조국 중국 한족을 살리는 유일한 답이 삼민주의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기독교 신앙과 신앙에 근거한 통치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손중산은 민보라는 동맹회의 발간지에서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 혁명구호를 제창한다. 삼민주의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이 주장한 3가지 원리 민유, 민치, 민향에서 나온 것이다.먼저, 민족주의란 국가의 주권과 존엄성을 유치하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또한 민족들 간의 화합과 평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둘째, 민권주의란 민주헌정질서와 제도를 바로 세우고, 독재와 전제정치를 반대하며 수 천년 동안 반복되어온 전제 군주제도를 몰아내는 것이다. 셋째, 민생주의란 모든 국민이 균등하게 부와 복지를 향유하며, 평화를 중시하고 정의로운 시장경제체제를 건설하는 것이다.실천적인 내용을 보면 민족주의의 핵심은 만주지배를 타도하는 것, 민권주의의 핵심내용은 군주지배의 타도, 공화국 건설, 국민의 정부를 건설하는 것, 민생주의의 핵심내용은 사회모순의 해결, 평균지권에 대한 것이다. 영국생활 이후 전 세계를 돌며 돈을 모금을 합니다. 전세계의 차이나 타운을 돌면서 연설을 하고 후원을 받아 중국 내 반청 운동의 자금으로 사용합니다. 당시 중국 철도는 지방의 민간 회사들이 운영이 되었는데 국유 재산이 아니라 민간 회사에서 운영을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지방에 있는 청년들 취직도 시켜주고 월급도 주고 그런 상황이었는데 이 청나라 정부가 영국에 돈을 다 갚아주고 나니 돈이 없어지자 지방 철도의 수익을 탐내서 철도 국유화를 추진합니다.1911년 10월 10일 오후 9시, 우창에서 무장봉기를 알리는 총성이 울렸는데 서구 열강 앞에서 민생은 뒷전인 청 왕조에 환멸을 느낀 혁명파 군인들은 마침내 우창(武昌)에서 무력 봉기하고, 한 달이 채 못 되어 12개의 성이 독립 정권을 수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해혁명이다.신해혁명이 있었던 1911년 12월 29일 난징에서 진행된 각성대표회의를 통해, 손중산이 초대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다. 다음해 1월 1일 상하이로부터 난징으로 간 쑨원은 총통부에서 취임식을 갖고 서약함으로써 임시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지정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시아최초로 민주 공화정이 수립되는 결과를 낳았다.하지만 손중산의 초기 목적은 아직 미완성 단계에 그쳐있었다. 비록 공화정을 통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손중산이 타도하려고 했던 청왕조는 아직 그 세력을 유지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청조를 무너뜨리기에는 부족했던 임시정부 세력을 이끌던 쑨원은 결국 혁명군 진압을 지휘하고 있던 원세개(위안스카이)와의 협상과 연합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슬람 세계관1.용어정리①아랍:흔히 아랍과 이슬람을 동일시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아랍은 ‘종족적인’ 개념이고 이슬람은 ‘종교적인’개념이다. 아랍인은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②회교:회교는 중국인들이 ‘회흘’(回紇)로 부르던 위구르족이 이슬람교를 믿게 되면서 ‘위구르족의 종교’란 뜻으로 사용된 한자이다. 위구르족은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인데, 이슬람교가 위구르족만의 종교가 아니므로 회교(回敎)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현재는 ‘회교’란 말 대신 ‘이슬람교’로 통일해서 쓰고 있다.③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신도로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를 가리킨다. ‘모슬렘’(Moslem)은 영어식 표현이고, ‘무슬림’(Muslim)은 아랍식 표기다. 또한 모슬렘은 단순히 영어 식 표기일 뿐 아니라 이슬람교도를 격하시킬 때 사용 된다.④무함마드:이슬람교의 창시자로서 아랍어 식 표기다. 영어 식으로 ‘마호메트’(Mahomet)로 표기 하는데, 이 역시 서구인들이 무함마드를 격하시켜 부르는 표현이다.⑤꾸란:꾸란은 이슬람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경전이다. 이슬람의 신(神)인 알라(Alla)가 인간에게 주는 마지막 계시라고 믿고 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주후 610~632년까지 간헐적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3대 칼리프 우트만이 수집하여 묶어 놓은 책이다.모든 장은 ‘자비롭고 자애하신 알라의 이름으로’(Bismilla-hirrahmani-rahim)라고 시작한다. 그러나 9장만은 이 내용으로 시작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9장에는 알라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최후의 경고가 담겨 있고, 그들에게는 알라의 자비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꾸란에는 그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아랍어가 사용되었다. 이슬람에서는 반드시 아랍어로만 기록된 것을 꾸란이라고 한다. 아랍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된 꾸란은, 아무리 완벽하게 번역됐다고 해도 아랍어가 아니기 때문에 ‘꾸란’이 아닌 ‘꾸란 해설서’라고 한다. 따라서 무슬림은 “꾸란은 지난 1파이다.이슬람에는 순니(Sunnis)와 시아(Shiites)라는 두 개의 종파가 있다. 순니파가 전체 무슬림들의 약 85∼90%를 차지한다. 이슬람 초기에 본류로부터 분파한 시아파는 현재 이슬람 세계의 가장 큰 소수종파를 형성하고 있다. 분파의 이유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후 그의 계승권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지도력이 ‘이맘’(시아파의 이맘은 모스크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역할만 가진 순니파의 이맘과는 개념을 달리한다)이라 불리는 성스럽게 지명된 지도자에 의해서 계승되어야 한다고 믿었다.시아파에 의하면, 무함마드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최초의 이맘이 된다. 첫 이맘인 알리의 계승권은 그의 아들들인 하산과 후세인(예언자의 외손자들)에게, 그리고 그 후계자들에게 이어져야 한다. 따라서 시아파들은 무슬림들의 다수가 그들의 지도자로서 이러한 이맘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고 믿는다.순니와 시아의 분파는 정치적인 이유뿐만 아니고, 약간의 신앙의 차이도 포함한다. 시아파에서는 이맘을 매우 중요시하여 심지어 영적인 능력도 가진 사람으로 본다. 그리고 이맘은 예언자로부터 무오성(無誤性, 이스마(i?mah))을 이어받은 존재로 본다. 물론 순니파는 시아파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2.이슬람의 역사이슬람이라는 단어의 뜻은 ‘복종’입니다. 이슬람의 기원은 A.D.610년,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상인으로 살아가던 무함마드에게 알라의 천사가 나타나서 신적인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고 하는 전승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무함마드가 천사에게 직접 전해 듣고 구술한 내용이 바로 이슬람의 경전인 ‘꾸람’이 되었고, 이후 23년간, A.D.632년 무함마드의 임종 시까지 이런 신의 계시가 계속되었다고 한다.A.D.622년, 무함마드는 당시 다신교 전통 속에 살던 메카의 지도자들에게 쫓겨나 메디나로 가는데 이것을 ‘헤지스(Hegira)'라고 하며, 이때를 기준으로 이슬람의 달력이 시작된다. 메디나에서 군사력을 가지게 된 무함마드는 메카를 점. 즉 알라의 종 혹은 알라를 섬기는 자라는 의미다. 무함마드의 조카 이름은 우바이두일라(Ubaidu'Ilah)인데, 이는 '알라의 작은 종'이라는 뜻이다.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은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알라의 집"(Baitu'Ilah)이라고 불렸다.알라는 무함마드가 속한 쿠라이쉬 부족의 신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신은 3명의 딸을 두었다고 한다.'알라'에 대한 개념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차용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성경의 하나님과 꾸란의 알라 사이에 공통된 부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꾸란의 알라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오직 한 하나님, 즉 유일한 알라만 주장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부정한다. 따라서 꾸란의 알라는 성경의 하나님과 다르다. 꾸란 자체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삼신(三神)으로 기독교를 다신교의 일종으로 간주한다.②천사들에 대한 믿음:이슬람에서 천사는 알라가 창조한 영적 존재들이다. 무슬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천사들의 실재는 빛의 형태로 구성된 영혼이며, 남성이나 여성으로 묘사되지 않고 먹거나 마시지도 않는다. 모든 천사들을 관장하며 무함마드와 선지자들에게 알라의 계시를 전달하는 천사를 지브릴(Jibril)이라고 하며, 지옥을 지키는 천사장(꾸란 66:6)은 말리크(Malik)이다. 심판의 날에 심판을 알리는 천사로 이스라필(Israfil)이 있으며, 아즈라일(Azrail)은 죽음을 담당하는 천사장(꾸란 32:11)이다. 그 외에 사람들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천사(꾸란 82:11-12)와, 메카의 카바 신전을 돌면서 알라를 찬미하는 천사가 있다. 이슬람에서 천사와 인간 사이 영계의 실재 중 하나는 '진(jinn)'이다. '진'은 원래 무함마드의 이슬람이 발생하기 전부터 아랍 지역의 셈족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그 지역의 악령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이 무함마드에 의하여 이슬람의 정통 교리로 수입되었다. 꾸란에 의하면 알라가 천사듬어 여러 차례 다시 기록되었다. 결국 원본은 사라질 정도로 변질·왜곡되었다. 자브르(Kitab Zabur)는 다윗을 통하여 계시된 경전인데, 왜곡된 구약의 내용을 정정하는 가르침과 기도들이 계시되었다. 알라는 다윗의 제자들에게 '모세에게 계시한 구약에 있는 가르침과 규칙들'을 따르도록 하였다. 인질(Kitab Injil)은 알라가 마리아의 아들 예수에게 계시한 복음서이다. 그동안 왜곡된 구약을 정정하고 신앙의 지침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 알라가 지브릴(Jibril, 가브리엘의 아랍어)을 통하여 선지자 예수에게 계시한 인질은, 신앙과 교훈과 경고의 복음서다. 그러나 예수가 남긴 원문은 그가 떠난 후에 불탔으며, 계시된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대체되었다. 알라가 2천 년 전 예수에게 주었던 복음서를 더 이상 순수한 계시라고 믿을 수 없다. 위의 3권의 경전들이 변질되고 왜곡되었기 때문에, 알라가 마지막 경전으로 무함마드를 통하여 꾸란(Quran)을 주었다는 것이다. 꾸란은 가장 새로운 형태이자 이전에 계시된 성경을 포함한 가장 완벽한 경전으로서, 심판의 날까지 그 기록과 전승이 보존된다. 꾸란 이전의 경전들은 특정 민족이나 시대를 위하여 계시됐지만, 꾸란은 인류를 위하여 알라가 준 마지막 계시인 것이다.④선지자에 대한 믿음:선지자와 사도는 인간들 중 선택된 사람들이며, 완벽한 인간성을 보이고 있다. 선지자와 사도의 임무는 사람들에게 알라의 말씀을 전하고 유일신 알라를 섬기라고 인도하며 사람들 사이에 윤리와 미덕을 가르치는 것인데, 특별한 사명을 받은 6명의 선지자들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 예수, 무함마드다. 이들은 모두 아담의 자손들이다. 또한 그 중에는 여성도 있는데, 예언자의 언행록에 근거하면 예수의 모친 마리아, 모세의 모친, 파라오의 딸 아시야, 무함마드의 아내 카디자와 그의 딸인 파티마가 여성 예언자이다. 무함마드는 기적을 일으켰던 일이 전혀 없다(꾸란 6:37).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를 완벽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만, 꾸란을 살펴 보면 슬림들에게 엄격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꾸란은 이를 지지하고 있다(꾸란 33:21).⑤마지막 날에 대한 믿음:이슬람에 의하면, 죽으면 부활이 있기까지 무덤의 세계 즉 '비르자크(Barzakh)'로 들어간다. 바르자크란 현세의 삶 이후 부활하기 전까지의 상태를 말한다. 이슬람의 천국(Jannah)이란, 알라를 믿었던 신앙인을 위하여 준비된 곳이다. 천국에는 아름다운 여성과 맛있는 음식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100개의 단계가 있다. 알라에 대한 믿음과 복종의 정도에 따라 신앙인이 사는 곳이 다르다. 반면 이슬람을 안 믿는 자들은 불지옥으로 안내될 것이다. 알라를 부정하는 자들에게는 가공할 만한 징벌이 준비되어 있는 곳이다. 최후의 심판 때 알라는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한다. 심판은 꾸란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인데, 꾸란 전체의 14%나 되는 구절 속에 마지막 날 심판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최후의 심판에 어느 누구도 예외 없으며, 선지자들이나 예수조차도 종속된다. 오로지 무함마드만이 이미 낙원에 있기 때문에 최후 심판에 서지 아니한다.⑥운명에 대한 믿음:운명론이란 알라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내일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지, 인간의 상황 하나하나, 언행 하나하나, 생명의 기간과 운명을 모두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또한 알라는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에 운명과 숙명을 결정해 두었다. 심지어 알라는 사람을 방황하게도 한다. 꾸란에는 알라가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지 않도록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꾸란 16:93; 13:27; 25:9). 이슬람에서 심판의 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운명론이다. 꾸란에서 인간의 운명은 모두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알라가 결정하고 인간이 수락하는 것이다. 이슬람에서 이슬람력 8번째 달 15일은 알라에 의하여 그 해의 모든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숙명론의 개념을 보면 왜 무슬림들이 항상 "인샬라"(Inshallah, 모든 것이 알라의 뜻이며)라고 말하는지 알 수 있다.4.이슬람의 한다.
중국의 외교전략1. 일대일로일대일로는 안으로 중국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추진하면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경제통합을 주도하고 국제금융시장에서 중국의 입지를 강화해 글로벌 차원에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다목적의 지정학적 전략이라고 보아야 한다.1)중국의 꿈2012년 제18차 당 대회에서 부터 세계 일류의 선진 문명과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중국의 꿈”을 이야기 하였고, 실제 이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착수 되었다.후진타오 시기까지 중국의 주류 전략 사고는 중국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발전도상국‘이라 인식하였다. 안으로 중국경제의 재도약을 이루고 밖으로 지경학적 영향력을 강화겠다는 국가대전략이다.2)일대일로2013년 말에 처음 제시된 새로운 국가전략의 개념이다. 일대일로는 겉으로 보여지는 면에서는 경제적인 부분에 초점을 한 국가 전략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는 미중간의 전략경쟁 차원에서 외교안보적 측면에서 대중국 견제의 핵심구상인 ‘아태 재균형 전략’과 더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을 추진하고 있다. 일대일로의 실천이 역내 협력에 주는 긍정적 협력을 강조하고 있고 경제적 논리와 외교안보적 관점을 통합적으로 목표로 하고 있다.그림 1 출처: 김경민, “亞~유럽~阿 잇는 `일대일로` 본격화…`팍스 시니카` 개막,” 『이데일리』(2015. 3.29) http://media.daum.net/economic/world/newsview?newsid=*************1152(검색일: 2015.11.1.)일대일로는 ‘팽창을 통한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이다. 규모로 볼 때 21세기 최대 메가 프로젝트이다. 철도 길이만 8.1만 Km인 거대 프로젝트의 총 투자액은 약 8,000억 달러로 추정된다. 팽창의 패러다임과 거대규모는 아시아-태평양-유라시아 지역에 지대한 정치경제적 여파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메가 경제개발 프로젝트를 이니셔티브로 아시아, 태평양, 유라시아 지역의 경제통합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이다. 2014년 11월 베이징 APEC 정상회담에서중국 주도하에 ‘아시아, 태평양 자유무역지대 (FTAAP: Free Trade Area of the Asia-Pacific) 로드맵’에 대한 참여국들의 동의를 확보한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Trans-Pacific Economic Partnership)을 경계하고 동 지역경제통합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1) 육상 실크로드과 해양 실크로드한나라 시절 육상실크로드와 명나라 시절 해상실크로드를 재현하여 중화민족의 위대한 위상을 확립하려는 거대전략이다. 목적은 육상, 해상 운송망을 각 지역별 주요 국가들을 중심으로 연계하여 유라시아단일 경제권을 형성하는 것이다. 중국 서부 및 중남부 지역과 유라시아 핵심 거점지역에 철도, 도로, 항만, 공항 등 사회간접자본사업으로 육상 해상 연계망을 건설하여 운송인프라를 구축하고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 (AIIB: Asia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을 중심으로 금융인프라를세워 유라시아 경제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일대일로는 육상 3개 노선, 해상 2개 노선으로 구성된다. 육상 3개 노선은 중국-중앙아시아-러시아-유럽, 중국-중앙아시아-서아시아-페르시아 만-지중해, 중국-동남아시아-남아시아-인도양을 연결한다. 해상노선은 중국-남중국해-인도양-유럽, 중국-남중국해-남태평양 2개 노선이다. 일대일로에 포함되는 국가는 26개국으로 예상되며 인구는 총 44억으로 전 세계 인구의 63%, 경제규모는 약 21조 달러로 전 세계 GDP의 29%, 역내교역은 전 세계 교역량의 23.9%로 추정된다. 중국은 일대일로 선상의 연선국가들과 정치, 경제, 문화를 포괄하는 ‘이익공동체,’ ‘운명공동체,’ ‘책임공동체’를 형성하여 경제협력동반자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2)일대일로 구상의 전략적 의미일대일로는 미중 전략경쟁, 중국 국내정치, 세계적인 차원에서 미중간 상호의존이라는 변수,등을 다 고려하는 복합적인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① 미중 전략 경쟁: 미국은 2008년~09년 세계적인 금융위기 이후 실추된 국제적인 위상과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하여 외교?안보면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재균형 전략”, 경제면에서는 범태평양 동반자 협정(TTP)과 범아틀란틱 무역투자 및 태평양 지역에서 밀려오는 미국과 미일 동맹의 거센 도전에 대응하기보다는 중국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중장기적으로 미국을 포위하며 압도하는 방법의 전략을 채택했다고 볼 수 있다.중국이 상대적으로 열세인 군사력과 하드파워 대신 경제력과 소프트 파워의 결합, 정치 현실주의적인 대응 대신, 자유주의적 발상과 대응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지도력을 약화 시키려는 노력을 추진하였다.②중국 국내정치1978년 개혁개방을 이래 30여 년간 연평균 10%대의 고속성장을 이룩하였나 2010년 10.4%의 성장률을 기록한 후 계속해서 감소세를 나타냈다. 중국경제의 이러한 성장률 감소세는 단순한 경기변동(cyclical)의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나타난 것이어서 고속성장으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는 평가다. 게다가 중국경제는 현재 중진국에 진입한 후 고소득 국가로의 전환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성장률 감소세를 해결하지 못하면 자칫 ‘중진국의 함정’(middleincome trap)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는 평가다.과잉설비와 과잉생산 문제를 해결개혁개방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투자와 수출을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을 추진해왔다. 중국의 이러한 성장방식은 중국경제를 급속도로 발전시켰다. 중국의 이러한 과잉설비문제는 현재 경제성장을 둔화시키는 핵심 요인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자산수익률을 악화시켜 중장기적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시급히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이다.동서부지역 간의 발전격차 문제 해결개혁개방 이후 중국경제는 고속성장으로 G2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국가의 균형발전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동부 연해 지역을 먼저 개방하여 발전시킨다는 선부정책(先富政策)에 따른 불균형 발전전략의 결과이다. 따라서 중국의 중서부지역은 동부 연해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다. 중국의 이러한 동부지역과 중서부지역 간의 발전격차는 중국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제한함은 서부지역의 사회불안 요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중국의 동서부지역 간의 발전격차는 어떤 의미에서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차이라고 받아들여져 소수민족들이 자신의 전통?종교?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분리독립 움직임 등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