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1. 서론2. 동물실험2.1. 정의2.2. 3R 원칙2.3. 현황3. 의무론과 목적론(공리주의)으로의 문제점 접근3.1. 의무론3.2. 목적론(공리주의)4. 대체 방안4.1. 나노 섬유 원천 기술4.2. 오가노이드 기술4.3. 하등 동물 이용 방안5. 결론6. 참고문헌1. 서론한국에서 다섯 명 중 한 명은 하는 것. 무엇일까? 바로 반려동물과의 동거이다. 반려동물 인구수가 10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그만큼 반려동물의 복지에 대한 관심, 동물권에 대한 관심도 상승 중이다. 필자도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고, 그에 따라 동물권과 관련 법안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한국의 동물권 보호는 열악한 수준이다.현재 동물실험은 주로 인간에게 투여되는 의약품의 개발 단계에서 인체 임상실험의 전 단계로서 실행되거나, 화장품 등의 분야에서도 인간에게 끼치는 해가 없는지 실행되고 있다. 또한, 생물학 분야에서의 해부를 통한 교육 및 연구에 쓰이는 동물도 실험동물에 속한다.동물실험에 대해 어떤 이들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라 말하고, 어떤 이들은 불필요한 것이라 말한다. 필수불가결이라 하는 이들의 입장은, 현재로선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 실험하는 대체할 뚜렷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불필요하다 하는 이들은 동물실험이 인간에게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 달성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한다. 동물실험으로 연관성을 밝혀내지 못한 것들이 많으며, 동물실험 후에도 인체 실험을 거치지 않고서는 상용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동물 윤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동물실험에 대한 윤리도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 동물실험은 언제부터, 왜 시작된 것이며 왜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을까?본 글에서는 먼저 동물실험의 정확한 개념과 3R 원칙, 동물실험의 현황 및 해외 사례, 의무론과 결과론을 접목해 살펴보는 양측의 입장과 각각의 문제점, 대체 방안을 살펴본 후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으로 갈무리를 하려 한다.2. 동물실험2.1. 정의동물실험이란 인간의 의학적이어져 오게 된 것이다.2.2. 3R 원칙3R 원칙은 1957년 동물학자 윌리엄 러셀과 미생물학자 렉스 버치가 창안한 개념으로, 동물실험에 있어서 준수되어야 할 규칙 세 가지의 앞글자 R을 딴 것이다. 이는 동물실험을 가능하면 동물이 아닌 다른 실험으로 대체하고, 동물실험이 필수적이라면 가능한 한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행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1) 대치(replacement)살아있는 동물을 사용하지 않고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경우 적절한 선택적 절차에 의해서 대치되어야 한다.2) 최소화(reduction)실험에 필요한 동물의 숫자를 줄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적절한 실험절차를 선택함과 동시에 환경요인의 조절 및 동물집단의 표준화에 의해서 완성될 수 있다. 표준화의 도입은 실험 변이를 줄일 수 있다.3) 개선(refinement)동물에 적용되는 고통의 발생, 심각성 및 괴로움을 주는 절차에 있어서 그 정도를 낮추는 것. 동물실험에 앞서서 동물의 생물학적 욕구를 알고 적절한 사육 및 환경조건을 이행함으로써 실현 가능하다.현재 3R 원칙은 동물실험에서뿐만 아니라 동물 복지에 관련한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추세다. 3R 원칙을 바탕으로 한 가이드라인은 현행 동물실험에서 다소 강제성을 띠고 있다.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학계의 인정을 받을 수 없을뿐더러, 연구비 지원 등의 자격에서 박탈당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2.3. 현황이러한 동물실험은 정말 의학 발전에 꼭 필요한 존재일까? 과연 인간의 수명을 늘리는 데에 그만큼 일조하고 있을까?농림수산검역검사본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0년 기준 한국의 실험동물은 약 143만 8천 마리, 2016년 287만 마리, 2017년 308만 마리, 2018년 372만 마리로 꾸준히 증가세에 있다. 2011년까지 국내에서 발표된 석, 박사 학위 논문 중에서 동물 생체실험 논문은 약 1200여 편에 달한다. 이 수치는 동물 세포 실험, 원생동물 실험, 초파리 실험, 바다 동물실험을 작용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하물며 인간과 장기도 신체 크기도 모두 제각각인 동물들에 실험한다 한들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올 리 없다. 독성학 연구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쥐만 해도 그렇다. 쥐들은 쓸개도 없고, 야행성이고, 소화기관도 인간과 다른 위치에 있고, 피부도 인간과는 달리 흡수하는 성질을 갖는다. 이 중 어떠한 것이라도 약의 물질대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이에 대한 예로 2006년에 있었던 류마티스 신약의 동물실험 실패 사례가 있다. 독일에서 개발된 TGN1412는 백혈병과 만성 염증성 질환의 치료를 위해 개발된 신약이었다. 토끼와 원숭이를 상대로 실험을 진행하고 별다른 부작용이 없자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 실험으로 넘어갔으나, 동물실험 때보다 훨씬 더 적은 양을 투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체 일부와 내장 조직이 부풀어 오르고 괴사해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라내야 했다고 한다. 이 약물은 결국 개발이 중단되었다.이처럼 인간과 체외 및 체내의 구조가 현저히 다른 데다 정확도까지 떨어지는 동물실험을 계속해서 고집하는 이유는 순전히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인간에게 적용될 약물을 실험할 대상으로 가장 좋은 것은 인간이다. 인간마다 부작용이 다르게 나타난다 한들 동물에게 실험하는 것보다 정확도가 떨어질까?게다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동물실험은 비단 의학적 목적에만 쓰이진 않는다. 상업적 목적과 해부실험에 쓰이는 동물들도 실험동물이라 불린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실험도 존재한다. 연구 실적을 올리거나 단순한 지적 호기심 충족을 위해 행해지는 동물실험도 있다. 예를 들면 쥐들이 수면 부족 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33일간 잠을 재우지 않는다던가, 막 태어난 쥐의 앞다리를 절단하고 그 뒤에도 정상 상태의 쥐가 하듯 몸단장을 하는지 확인하는 실험, 수컷 쥐를 굶긴 뒤 성적 행동에 변화가 나타나는지 관찰하는 실험, 태어난 지 10일 된 고양이의 눈을 꿰매 눈을 뜨지적 이유건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 다른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어선 안 된다.’즉, 다시 말해 우리는 사실 타인의 고통을 실제로 느끼진 못한다. 그러나 타인이 고통을 느낄 때 나타나는 표정, 행동(환부를 부여잡는 등의), 신음 및 비명 등을 통해 그가 고통을 느낀다는 걸 알 수 있다. 본인이 고통을 느낄 때도 그와 마찬가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동물도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본능적으로 도망치는 행동을 보이며, 고통을 느끼거나 죽음의 순간 울음소리를 내곤 한다. 영아는 어떠한가. 영아들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의사를 표시하는 수단으로 울음을 터트리곤 한다. 굳이 언어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타인 혹은 다른 생명체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실제로 느끼지 못하지만, 그가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 동물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의무론에 따르면 ‘동물이 고통을 받는 것’은 절대적으로 그른 행동이다. 객관적으로 악한 행동이다. 똑같이 생명을 가진 동물에게 고통을 느끼게 한다는 행위 자체가 옳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실험은 절대로 있어선, 행해선 안 될, 규범에 어긋난 행위이다.하지만 의무론적 주장이 대부분 그렇듯 다른 규범과 충돌하기 마련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나 인공 조직 실험만 이용하는 경우 생명체에 적용되었을 때의 결과를 완벽하게 재현해낼 수 없다고 한다. 이런 경우, 많은 (인류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의약품 개발에 대한 속도가 더뎌질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인류의 생명권과 동물의 생명권이 충돌하는 것이다.3.2. 목적론(공리주의)목적론과 공리주의는 엄밀히 말하면 같은 선상에 놓인 이론이 아니라, 목적론적 윤리설을 대표하는 입장이 공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목적론은 행위, 과정에 집중하는 의무론과는 반대로 결과에 집중하는 이론이다. 결과만 좋다면 이를 취하기 위해 에서, 인간의 이익이란 있지도 않거나 매우 불확실하다. 반면에 다른 종의 구성원들이 잃게 되는 것은 확실하고 실제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험들은 종에 무관하게 모든 존재들의 이익을 평등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즉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희생되는 동물보다 그로 인해 얻는 이익이 더 크다면 그것이 옳다고 보나, 현재의 상황은 실험동물들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으며, 심지어 그로 인해 인간이 얻는 이익은 아예 있지도 않거나 불확실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피터 싱어는 ‘실험을 하는 것이 수천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할 때, 심각하고 회복 불가능한 뇌손상을 입은 고아에게도 실험을 하려 하는가?‘에 대해 그렇지 않다면, 이는 명백한 종차별주의적인 행위라고도 덧붙인다.즉 현재의 동물실험은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도 타당성 입증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공리주의에 입각한 동물실험은 ’이루어질 수도 있다‘이다.하지만 의무론이 그렇듯 공리주의도 한계에 부딪힌다.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그것이 악한 행위건 옳은 행위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는 많은 비난을 살 수 있다. 특히 피터 싱어가 지적했듯 ’말을 하지 못하며 본인이 실험 대상이 된다는 자각이 없는‘ 인간에게는 실험할 수 없고, 동물에게는 실험을 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동물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 사이 우열을 가린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크다.4. 대체 방안4.1. 나노 섬유 원천 기술인체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이를 100% 재현해내기란 아직까지도 쉽지 않다고 한다. 동물실험의 대체 방안으로 인체 내 기관을 모사한 바이오칩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 초기 단계이고, 폐, 신장, 피부 등에 있는 기저막은 기존의 나노 기술로 모사해내기는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인체는 3차원이기 때문에 곡면 위에 나노 섬유 막을 만들 수 있어야 했는데, 최근 포항공대의 김동성 교수 연구팀이 이 기술을 개발해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복해본다.
안에서의 랑그와 파롤 분석랑그와 파롤은 한마디로 말해,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랑그는 명명백백히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 파롤은 개인의 경험, 환경, 감정, 가치체계 등에 따라 그 의미가 여러 갈래로 확장되는 것이다. 랑그는 모호하지 않은 것이다. 파롤은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개인 주관에 따라 색깔이 계속해서 달라진다. 여기에 더해 어떠한 사물이나 (영화에서의) 장면은 반드시 랑그만을 가지고 있진 않다. 예를 들어 에서 중간중간 종종 나오는 인어가 마를로 본인을 상징한다는 건(여기에 더해 그 물속이 마를로의 심연이라는 것도 함께) 비교적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인어에 대한 감상은 개인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육지로 올라오지 못하는 인어를 속박의 상징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물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인어를 자유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 전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사람은 육아의 굴레에 갇혀버린 불쌍한 마를로, 그리고 마를로를 구하는 건 결국 본인 자신이구나, 라는 해석을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는데, 자유로워 보이는 그 인어는 자유로웠던 20대의 마를로, 즉 툴리를 상징한다고 봤다. 그런 의미에서 인어가 마를로라는 그 자체는 랑그지만, 인어의 의미가 무엇으로 해석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파롤이라고 본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의 후반부 중 조가 본인의 소설 [작은 아씨들]을 출판사에 가져가자 편집자인 대쉬우드가 ‘주인공은 무조건 결혼해야 하며 판권을 넘기면 500달러를 주겠다.’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조는 이렇게 대답한다. ‘판권은 내가 가질래요. 내 소설의 주인공은 마음대로 할 거예요.’ 여기서 랑그는 보이는(들리는) 그대로이다. 조는 판권을 넘기지 않을 것이며 내 소설의 주인공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한다. 이 대사에 내재되어 있는 파롤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난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할 거예요.’ 이는 에서 이 자매들이 받았던 고통, 고뇌와 더불어 조가 계속해서 강조했던 본인의 생각들이 쌓이고 모여 만들어낸 파롤이다.내가 랑그와 파롤을 분석하려는 영화는 장 피에르 주네와 마르크 카로의 이다. 영화는 식량이 부족해져 인육을 먹게 되는 어느 시대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랑그는 대략적으로 노랗고 뿌연 스모그, 인육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지하세계 이미지 등이 있다. 노랗고 뿌연 스모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굉장히 갑갑한 느낌을 준다. 황사가 연상돼서 그럴까, 어찌됐건 좋은 공기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인육을 먹을 정도로 황폐해진 시대라면, 당연히 공기가 좋을 리는 없을 것이다. 델리카트슨 사람들에서 정확한 시대를 나타내진 않았지만, 노란 스모그를 통해 이만큼이나 환경오염이 심해진 미래를 표현한 것이라 보인다. 또한, 노란색은 따뜻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비겁함과 질투 등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영화는 시종일관 누런 톤으로 진행된다. 다리우스 콘지 특유의 이런 녹슨 듯한 색감은 녹이 슬대로 슬어버려 삐걱거리는 이 세계를 상징하는 것도 같다. 어쨌거나, 이런 이중적인 의미는 델리카트슨 사람들에게 딱 들어맞는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식량-인육-을 얻기 위해 그 어떤 비열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쓰레기통에 숨어든 사람을 향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가차 없이 칼을 내리꽂거나,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살인 계획을 세우는가 하면, 주인공 뤼종이 찾아왔던 방식 그대로 가짜 구인광고를 내 아무것도 모르는 외지인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줄리와 뤼종처럼 이런 비열하고 더러운 세계 속에서도 서로의 위안이 되어주며 마음을 나누는 따뜻한 사람들도 있다. 조금 다른 색깔과 예시이긴 하지만, 플뤼세 또한 그저 비열하고 비겁하기만 한 인간들과는 다른 부류라고 본다. 그는 시종일관 붉은색 옷과 구두를 신고 나오는데, 그에게는 델리카트슨을 뜨겠다는 위대한 욕망이 있다. 자신에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그에게 정열, 열정을 상징하는 붉은 색은 꼭 맞는 색깔이다. 또한, 결국에는 클라페를 죽이는 데에 결정적인 한 방을 제공했으니, 엄연히 다른 부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색깔로 표현된 랑그는 또 있다. 바로 초록색이다. 극 속 오로르는 항상 반듯하게 단장한 머리, 까칠해 보이는 인상을 주는 세모난 뿔테 안경 등을 쓰고 나온다. 그의 집은 온통 초록색이며, 그가 입고 나오는 옷마저도 짙은 초록색 계열이다. 이런 지적이고 부유해 보이는 이미지와는 반대로 그는 만성 우울증과 정신착란을 겪고 있다. 배수관을 타고 내려오는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지시하는 대로 항상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계획은 번번이 실패한다. 오로르 외에도, 지하 어딘가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일명 ‘프로그 맨’의 방 또한 온통 녹조로 뒤덮여 초록색으로 보인다. 그곳에는 초록색 개구리도 살고 있다. 프로그 맨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로베르 플랑케트의 상브르와 뫼즈 연대 행진곡이 흘러나온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한 듯한 이 더럽고 오수로 가득 찬 지하실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클래식이다. 이 두 상황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초록색은 보통 차분함, 인내, 풍요로움, 정적 등을 뜻한다. 한쪽은 이런 외연적 이미지에는 부합하나 심적으론 정 반대고, 한쪽은 외연적 이미지는 거리가 멀지만 심적인 이미지는 초록색이 지니는 의미와 꽤나 부합한다. 이처럼 우리네의 보편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델리카트슨을 표현하는 방식의 일부로서 색깔이 사용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델리카트슨의 사람들은 배수관을 통해 많은 것들을 한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이를 불러보기도 하고, 누군가의 정신세계를 조종하려 하기도 하고-오로르처럼 불안정한 사람을-, 물건을 전달하기도 한다. 얼핏 보면 이건 굉장히 은밀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클라페는 그 배수관을 통해 오가는 이야기들을 모두 듣고 있다. 마치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또 하나의 랑그, 지하세계 사람들이다. 에서의 벙커 사람들처럼, 지하세계 사람들은 지상의 사람들에게 ‘야만인’으로 불린다. 그들은 인육을 거부하며 콩, 옥수수 등을 조달해 살아가는 것이 목표인 사람들이다. 지상에서 위기에 처한 동료를 구하러 올라가기도 한다. 그들은 언제나 지상의 사람들을 피해 숨어 사는 신세지만,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동료를 소중히 하는,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델리카트슨에서는 이들이 ‘비정상적’인 사람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하세계에 숨어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델리카트슨은 우리의 보통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우리에게 정상적인 사람들이 비정상적이고, 우리에게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정상이다.엔딩 장면 또한 랑그의 일종이라 생각한다. 영화 내내 스모그에 휩싸여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던 하늘이, 엔딩에서는 파랗고 구름이 있는 형태로 드러난다. 뿌연 먼지들은 서서히 걷히며 주인공들을 드러낸다. 짙게 드리워 있던 스모그는 점차 걷히고 푸른 하늘을 보여준다. 짙은 스모그에 싸여있던 델리카트슨이 조금은 그 내면을 드러내고 자정 능력을 회복한 것만 같다.그렇다면 파롤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많은 것들이 랑그로 표현되는 연극 같은 영화인지라, 사실상 파롤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찾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주관적인 것’, ‘색깔이 달라질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영화를 계속해서 보다 보니 줄리와 뤼종이 연주하는 음악이야말로 가장 주관적인 것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줄리는 첼로를, 뤼종은 톱 악기를 연주한다. 그 음악은 뤼종의 동료이던 리빙스톤이 생전 가장 좋아하던 음악이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를 생각하며 들을 땐 추모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고, 조금은 구슬픈 가락으로 들린다.
에서의 조명 분석많은 주제 중 조명을 선정한 이유는 1) 촬영을 전공하려 했음에도 조명에 약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이론 전공으로 세부 전공을 바꾸었지만, 줄곧 촬영 전공을 하려고 했음에도 조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물론 촬영과 조명은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 수 있는 분야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야이기도 하다. 특히 의 경우 카메라와 조명이 합을 맞춰 전달하는 메시지가 많기 때문에 분석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고 판단했다. 외국의 경우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따로 있지 않고 한 사람이 도맡는 경우가 많다. 촬영을 하려는 사람은 조명에 대해서도 박학다식해야 한다. 그래서 조명을 좀 더 집중적으로 보고 분석하고 싶었다. 2) 조명 하나로 장르가 달라지는 것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한 사람이 하이키 조명 아래에 있다면 흡사 뮤지컬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로우키 조명 아래에서는 광기 서린 살인마의 모습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3) 단순히 하이키, 로우키 외에도 얼굴을 반만 비춘다던가, 과다노출을 통한 메시지(예를 들면, 에서 과다노출로 빛의 홍수를 만들어 신의 은총을 표현했듯이)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조명을 분석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 내의 모든 미장센이 그러하듯, 조명 또한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조명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표현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는 리얼리즘을 위해서이다. 표현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은 보여지는 기표 이외에 여러 가지 기의를 생산한다는 것과 같다. 가령 필름 느와르 장르에서는 느와르라는 말 그대로의 어둠 자체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내면의 어둠이라는 기의를 생산한다. 리얼리즘을 위해서라는 말은, 우리가 실제 눈으로 현관 불만 켜진 아파트를 보는 것보다 카메라로 담았을 때가 한층 더 어둡다. 때문에 실제 같은 영상을 위해 인위적으로 조명을 설치해야만 실제처럼 보인다는 모순을 담고 있다.조명의 기본은 삼점 조명이다. 가장 밝은 빛의 주광원(키라이트), 주광원으로 인해 생기는 그림자를 완화 시켜주는 보조광원(필라이트), 그리고 밋밋한 평면의 느낌에서 피사체를 분리하는 후광(백라이트)이 삼점 조명의 구성요소이다. 삼점 조명에서 보조광원을 약하게 쓰거나 아예 쓰지 않으면 대비가 높은 로우키 조명이 된다.일반적으로 하이키 조명은 사실주의 영화에서, 로우키 조명은 표현주의 영화에서 주로 쓰인다.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의 특징 중 하나가 보조조명이 거의 없는 로우키 조명이다. 대비가 강하고, 전체적으로 패전 후 우울한 분위기가 어두운 조명과 그려진 그림자, 기괴한 모양의 세트를 통해 한층 더 두드러진다. 하이키 조명이 사실주의 영화에서 많이 쓰이는 이유는 가장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잘 나타내는 조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키 조명이 사실주의 영화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뮤지컬같이 대체로 밝은 이야기를 다루는 장르에서도 자주 쓰인다. 또한, 한 영화가 한 조명 체계만을 채택하는 것은 아니며 처럼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모습은 하이키 조명을, 살인마로서의 모습은 로우키 조명을 통해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는 드라마이면서 스릴러 장르이기도 한 영화다. 이에 맞게 일상(에바에겐 지옥인) 장면은 전체적으로 다소 어둡긴 하나 삼점 조명을 제대로 갖춘,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조명으로 보여주는 반면, 케빈의 학살과 연관된 장면에서는 고대비의 붉은색 조명을 강하게 쓴 모습들을 보인다.영화는 시작부터 온통 빨간색으로 물든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으깨진 토마토가 넘실대는 사이로 온몸에 토마토를 바른 채 빼곡이 들어찬 사람들의 모습은 기괴하다. 높은 대비와 강렬한 색채로 인해 토마토라기보단 피의 형상에 가까워 보인다. 행복해하던 에바는 곧 사람들이 과하게 부어대는 토마토 즙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사운드 역시 케빈이 죽인 아이의 학부모가 에바를 탓하는 목소리가 겹친다. 그리고 화면은 곧바로 온통 붉은 조명으로 가득 찬, 케빈의 학살 이후의 집안 풍경으로 바뀐다. 케빈의 학살 직후 장면은 그야말로 온통 붉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는 케빈의 학살 직후와 그 이전의 모습들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그 외 영화의 시작 부분인 토마토 축제, 에바와 그의 남편이 만나던 장면 등도 모두 붉은색의 조명을 썼는데, 케빈을 낳기 전 모든 것이 에바에게 경고하는 것만 같다. 마치 케빈을 낳은 후 이어질 핏빛 미래를 이 붉은 조명을 통해 경고하는 것같이 보인다. 에바는 붉은 페인트로 물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붉은 빛을 받으며 과거를 회상한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빨간색과 검정색만 존재해 다소 소름 끼치기까지 한다. 피임 없는 섹스 장면에서조차 빨간색 디지털 시계가 깜빡이고, 그 후 세포가 분열하는 모습도 붉은빛이다. 케빈의 탄생은 학살 장면과 연계되어있다. 예견된 것이라는 듯이.케빈을 낳은 후 에바의 모습은 기쁨에 겨운 클로즈업이 아닌, 멀찍이 떨어진 풀샷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때 조명은 창에서 들어오는 빛을 통해 에바의 얼굴이 케빈이 있는 오른쪽은 어둠으로 물든다. 환한 빛 같았던 에바의 삶이 케빈으로 인해 어둠으로 접어든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우는 케빈을 달래는 장면에서도, 창문을 통한 빛은 과다노출로 바깥이 전혀 보이지 않고 이들 모자의 모습은 역광으로 인해 어둠에 잠겨있을 뿐이다.케빈의 학살 후 할로윈, 사탕을 달라는 아이들의 외침에 불을 끄고 주저앉은 에바의 모습은 대부분이 어둠에 잠겨있고, 에바를 마구잡이로 비추는 플래시 빛들은 에바에게 무언의 해명을 요구하는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같이 보인다.에바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딘가로 내려가는 장면에서는 짙은 그림자 선이 에바를 지나치더니 이내 에바는 완전한 어둠에 잡아먹힌다. 이 장면에서는 뉴욕을 떠나기 싫어하는 에바와 아이에겐 넓은 마당이 필요하다며 이사를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남편의 대화가 오간 뒤, 결국 이사를 간 모양인지 새 집의 구조를 설명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에바가 어둠에 침식되었을 때, 이 가족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는 중이다. 이 짙은 그림자는 마치 감옥의 창살 같기도 한데, 어딘가로 내려가는 이미지와 더해져 에바를 지옥이라는 감옥으로 끌어내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에바는 모성의 강요와 더불어 내가 원하는 곳에 살 자유마저 빼앗긴 것이다.에바와 케빈, 남편이 함께 식사하는 장면은 전체적으로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온화한 조명이지만 케빈이 리치를 먹는 장면은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함께 유독 과한 빛이 케빈의 얼굴 윤곽선을 비춘다. 이로 인해 리치의 과즙이 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선명히 보이며 관객으로 하여금 역겨움을 느끼게 한다. 실리아의 눈을 다치게 했다는 의심을 받는-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케빈이 좋아하지도 않는 리치를, 눈알과 유사하게 생긴 리치를 일부러 씹어먹는 이 장면은 조명을 통해 윤곽선과 과즙을 강조함으로써 엄마를, 그리고 관객을 기분 나쁘게, 역겹게 만들겠다는 의도를 한층 더 부각시킨다.그 후 현재의 에바는 어느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는데, 온통 붉은 조명으로 가득 찬 건물 외벽과는 달리 에바가 들어가 있는 카페 내부는 초록색의 조명이다. 빨간색과 보색 관계인 초록색은 대체로 평화, 휴식, 자연 등을 상징하는데, 에바가 붉은색으로 가득한 지옥 같은 일상에서 유일하게 도피할 수 있는 곳으로 보인다.마침내 케빈이 학살을 저지르고, 에바는 예의 그 붉은 조명에 휩싸인 채 학교로 도착한다. 케빈이 범인일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강당 문가로 다가간 에바는 며칠 전 온 케빈의 택배에서 보았던 자전거 자물쇠가 잘려나가는 장면을 보게 된다. 자전거 자물쇠는 두 동강이 나 바닥에 떨어지고, 조명은 자물쇠만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소방대원들의 발이 위치한 가장자리는 어둠에 잠겨있다. 에바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카메라 앞으로 걸어오고, 카메라의 플래시는 온통 붉은색으로 물든 화면에서 짧은 찰나마다 번뜩거린다. 곧이어 케빈은 그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마치 톱스타처럼 등장한다. 앞서 에바가 할로윈 때 받은 플래시 빛들은 아마 이 장면의 회상 격이었을 것이다.안 그래도 검은 제복의 경찰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었을 흰 옷의 에바와 케빈은 강렬한 대비로 인해 한층 더 눈에 띈다. 마치 이 세상에 그들 모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피해자들이 실려 가는 장면에서 실제로 피는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로지 빨갛기만 한 조명은 실제 피가 얼마나 나왔는지는 상관없이, 오로지 ‘피로 물들었다’는 느낌만 준다. 학살을 위한 학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광기 서린 이 대량 살인 행위는 그야말로 비정상적이고 기이한 느낌이며, 보통 영화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원색 조명은 이 ‘비정상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데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그래서일까, 중간중간 보이는 흰 벽과 흰 셔츠를 입은 케빈이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비정상적인 조명 가운데 활시위를 당기는 케빈이 유일한 정상처럼 보인다.
사실주의와 형식주의는 절대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개념이다. 전적으로 사실주의인 영화도, 전적으로 형식주의인 영화도 드물다. 이 두 가지 형식은 1900년 이전부터 발전해왔다. 뤼미에르 형제의 은 사실주의, 조르주 멜리에스의 은 형식주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둘을 적절히 섞은 영화를 고전주의라고 하는데, 많은 극영화가 고전주의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사실주의 영화는 소재에 대한 조형, 조작 없이 왜곡을 최소화하여 현실 세계가 드러나는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영화다. 영화 예술의 다큐멘터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우리가 얼마나 외부 현실의 세계를 정확히 반영했는가에 따라 평가된다. 주제가 최상의 위치에 있으며, 기교나 기술은 그것을 충실히 뒷바라지 할 뿐이다. 세자르 자바티니와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같은 사실주의 이론가들은 영화란 본질적으로 사진의 확장이라 말한다. 영화와 사진은 우리를 둘러싼 가시 세계를 기록한다는 점에서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예술가의 역할은 간섭과 조작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왜냐면 영화는 창조의 예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관객들은 사실주의 영화의 스타일을 거의 눈치챌 수 없다. 사실주의의 극단은 다큐멘터리이다.형식주의 영화 이론가들은 영화는 일상의 현실과 다르기 때문에 영화의 예술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사실주의와는 다르게 소재를 의도적으로 양식화하고 왜곡하고 대상을 조작한다. 이들에게 현실 세계란 가공되지 않은 소재들의 저장창고와도 같으며, 자기표현은 소재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가 각각의 경우에 받아들이는 정보는 그 내용의 형식에 따라 결정된다. 형식주의 이론가들은 이런 차이점을 주목하면서, 사진을 통해 물리적 현실 세계를 완벽하게 재생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바로 영화를 일종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다. 형식주의 영화는 테크닉과 표현성을 강조하고 영상을 치장해 형식 자체가 소재가 되기 때문에 관객들이 스타일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 수월주의 영화는 관객에게 객관적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것이 목표이다. 감독이 임의로 특정 대상을 선택해서 강조하지 않는다. 때문에, 특정 인물의 감정을 극대화 시켜 전달하는 클로즈업 등은 피하게 된다. 대부분의 쇼트는 롱쇼트, 풀쇼트, 혹은 미디엄 쇼트 정도로만 구성된다. 관객과 동일하게 흘러가는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하여 롱테이크와 함께 병행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임권택 감독의 중 한 장면에서는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인물들이 걸어오며 익스트림 롱쇼트 -> 롱쇼트 -> 풀쇼트까지 들어온다. 또한 마찬가지로 특정 감정을 강조하지 않고, 긴 쇼트를 작업하기 위해 딥포커스 쇼트인 경우도 많다.반면 형식주의에서는 감독이 특정 대상을 선택해 부각하는 일이 잦다. 누군가의 아주 극적인 감정을 전달할 때 클로즈업,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매우 효과적인 쇼트이다. 이창동 감독의 중 공중전화 박스 씬에서 한석규의 얼굴을 클로즈업함으로써 감정 상태의 동화를 유도한다. 조금 더 다가갈수록 그의 불안한 감정을 표출하고 그로 인한 결말을 예측하게 한다. 히치콕의 샤워 장면에서도 살해당하는 주인공의 표정을 클로즈업해 상황의 긴박함을 강조했으며, 하수구와 눈을 각각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담아 둘을 동일시 한다.-앵글앵글이 극단적이면 영상의 중요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주의 감독들은 극단적인 하이, 로우 앵글 등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주의 감독들은 보통 150~160cm 높이의 아이레벨 앵글을 사용한다. 실제의 관찰자가 어떤 장면을 볼 때와 거의 같은 높이이다. 사실주의 감독들은 관객이 카메라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등 자신의 작품들에서 일명 ‘다다미 쇼트’라고 불리는, 지면에서 약 120cm 가량 떨어진 위치에서 촬영을 하는데, 이는 관객들이 등장인물을 저자세로 보거나 감상적으로 보려는 뜻을 아예 단념시킨다. 자신의 카메라를 중립적으로 냉정하게 유지한 것이다.형식주의 감독들은 인물을 무 저하시키기 위해 하이 앵글을 사용한다. 아서 펜의 엔딩에서 주인공들은 하이 앵글을 통해 무력하고 덫에 걸린 듯이 보여진다. 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속에 갇혀 총탄들을 받아낸다. 반대로 로우 앵글은 대상을 위대하고, 강인하고, 영웅처럼 보이게 한다. 속도감은 빨라진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에서 잠파노는 권력이 있었을 땐 로우 앵글로 담기다가, 엔딩에서 힘을 잃은 그는 하이 앵글로 표현된다. 에서 범인이 로우앵글로 담기면 관객은 연약한 위치로 위축된다. 중 1층에서 찍은 익스트림 로우 앵글 쇼트는 마치 신이 하늘에서 하강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레니 리펜슈탈의 는 선전영화로서 히틀러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앙각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예이다. 사실주의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앵글로서 형식주의 영화에서는 사각 앵글도 사용된다. 수평을 맞춘다는 촬영의 기본적인 룰을 깨고 비스듬하게 기울여 비현실성, 불안정함, 긴장, 변화 등을 야기한다. 종종 더치 틸트라 불리는 이 앵글은 에서 호텔의 사면이 기울어지는 장면에서 쓰였다. 에서는 꿈과 현실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얽혀 있음을 의미한다.-명암조명 스타일은 보통 키(Key)라고 불리는데, 이는 영화의 테마와 분위기뿐만 아니라 장르와도 맞물려 있다. 예컨대 코미디와 뮤지컬은 밝고, 화려하고, 그림자가 거의 없는 하이 키(High Key) 조명이다. 비극과 멜로 드라마는 보통 거친 빛줄기와 극적인 어둠이 대비를 이루는 하이 콘트라스트(고대비, High Contrast) 조명을 사용한다. 미스터리, 스릴러, 갱스터 영화는 음영이 늘어나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로우 키(Low Key) 조명을 주로 사용한다.사실주의 감독들은 빛에 있어서도 유별난 조명 사용을 원치 않는다. 보통 자연광을 선호하여 한낮 옥외 촬영에서는 별다른 조명 없이 반사판만을 사용하기도 한다. 어떤 감독들은 특수 렌즈나 고감도 필름으로 전혀 인공조명 없이 촬영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스타일-사실상의 감독들은 대체적으로 빛을 적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빛을 통해 어떠한 상징을 나타내려고 한다. 같은 뮤지컬 영화에서는 하이 키 조명을 사용하여 밝은 주인공을 나타낸다. 조명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을 표현하기도 한다. 에서는 주인공이 평범한 가장일 땐 하이키 조명을, 살인자일 땐 하이 콘트라스트의 로우 키 조명을 사용하여 섬뜩함을 드러낸다. 한편 인간성의 분열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에서는 하이 콘트라스트의 측면 조명을 사용하여 이중적 자아가 갈등하는, 내적 욕망을 표현했다. 얼굴의 반은 짙은 그림자가, 반은 밝은 빛이 비추며 인간성의 분열을 나타낸 것이다. 프랑스어인 필름 누아르(film nori)는 영어로 black cinema이다. 이처럼 검은, 어두움을 뜻하는 장르의 조명은 말 그대로 어둡다. 로우 키 조명을 사용한다. 영화의 배경은 대부분 도시이다. 도시의 덧없음, 허무의 상징 등을 로우 키 조명을 통해 나타내기 때문이다. 필름 누아르의 한 종류인 은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강조하는 염세주의로 가득 차 있다. 주제는 폭력, 욕망, 탐욕, 배신, 부패를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누아르 조명 스타일을 통해 범죄와 사기가 판을 치는 로스앤젤레스의 상황, 비관적인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조심스럽게 처리해야 할 우발적인 시체 등을 담고 있다. 반대로 과다노출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도 있다. 에서는 과다노출, 흘러내리는 빛-빛의 홍수-을 통해 신의 은총과도 같은 연출을 나타낸다. 반대로 이러한 전형적인 의미들을 비틀어 표현한 장면들도 있다. 의 마지막 총격 씬은 오히려 환한 대낮에 이토록 비극적인 일이 이루어짐으로써 관객에게 더 큰 충격을 안겨준다.-컬러색은 1940년대까지만 해도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널리 보급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색상에 대한 실험이 있었는데, 멜리에스의 영화 중 몇몇은 필름의 미세한 부분을 하나하나 손으로 칠한 것이었다. 은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불타는 장면은 붉은 색조, 야간은 푸른 색조, 러브 씬은 연노랑들은 대개 인공적이거나 이국적인 배경이 많았고(화려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높여주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기에), 따라서 사실적인 드라마에는 색이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초창기 컬러 처리는 요란하고 화려함을 강조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컬러가 보편화된 지금은 사실주의적인 영화에선 오히려 흑백을 사용하지 않는다. 컬러가 보통의 것이 되어 오히려 흑백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적인 영화는 특정 컬러를 강조하거나 색상을 화려하게 사용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흑백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지금은 흑백이 오히려 가장 ‘예술적인 티를 내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영화에서 색은 잠재적인 요소를 갖는다. 지적이기보단 정서적 호소력이 강하다. 일반적으로 차가운 색(푸른색, 초록색, 보라색)은 정숙, 냉정, 평온을 암시하며 움츠러드는 느낌을 준다. 은 로맨틱 코미디임에도 불구하고 촉촉하고 감상적인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사랑이 승리하는 마지막 장면은 쌀쌀함을 동반한 푸른색이다. 은 심리적 범죄 드라마로서 햇살이 내리쬐는 바르셀로나의 분위기를 누그러트리기 위해 청색 필터를 사용한다. 이는 염세주의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따뜻한 색(붉은색, 노란색, 주황색)은 공격성, 폭력성, 흥분 상태를 나타내며 앞으로 나온 듯한 느낌을 준다. 은 전체적으로 푸른 빛을 띠나 경고 상황에서만 붉은 색을 사용한다. 또한 이는 차가움을 (화염으로써)녹여 평화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의 이미지를 상징하기도 한다. 는 빛바랜 사진처럼 암갈색으로 탈색되어 있다. 고상하게 절제되고, 방정하고, 거의 억압되어 있는 이 색깔은 그 사회 자체의 보수적 가치를 반영한다. 붉은색으로 갈 수 없는 억제된 색인 것이다. 붉은색은 주로 섹스와 관련된 색이다. 에서 붉은 장미꽃잎은 불타는 성적 욕망의 상징이다. 에서는 위험, 폭력, 피의 색깔로서 붉은색을 사용한다. 피는 에이즈의 전조인 HIV의 주요 전달자이다. 이처럼 형식주의 영화에서는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나타내고 이에 얽힌 메
사고와 표현올드보이에 나타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목차1.서론2.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무엇인가3.올드보이 속 오이디푸스 콤플렉스3.1.오대수의 이름3.2.오이디푸스와 올드보이의 공통점 - 사건3.3.오이디푸스와 올드보이의 공통점 - 인물3.4.미장센에서 나타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4.한국 고소설에 나타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5.개인적 감상6.참고문헌1.서론박찬욱 감독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올드보이는 수많은 미장센과 의미들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근친상간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주제를 들고 나온 이 영화는 동명의 만화1가 원작이며, 원작을 뛰어넘은 역작이라는 평과 원작을 넘지 못했다는 평으로 갈린다. 다만 영화 올드보이가 원작 만화의 설정만 빌려오고 그 외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각색한만큼, 비교할 대상 자체가 애초에 아니지 않나 싶다.하지만 이야기적인 면 외의 미장센이 너무나도 훌륭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대표적인 보라색과 격자무늬 미장센, 그리고 후에 소개할 물, 이렇게 크게 3가지로 나타난 미장센은 영화 로 벌칸상을 수상한 류성희 미술감독의 작품 중 하나이다.색깔에 대한 미장센에 관심이 많은만큼 나 또한 이러한 시각적 미장센을 다룰 수도 있었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해 쓰게 된 것은 여태껏 몰랐던 사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또한 시각적 미장센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이 주제를 다루기로 결심하였다.2.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무엇인가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리스 신화인 오이디푸스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오이디푸스는 장성해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태어나 아버지인 왕에게 버려진다. 죽일 것을 명 받은 양치기는 차마 죽이지 못하고 발을 묶어 나무에 매달아놓는데, 이를 지주 부부가 데려와 오이디푸스, 즉 부은 발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여준다. 후에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죽인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왕이 되어 선왕비인 어머니와 결혼한다. 오랜시간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두 눈을 찔러 실명시킨다.보통 남근기인 2세에서 6세 사이의 아동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 이 기간동안 아동은 이성인 부모와 성적으로 결합하려고 애쓰며 동성인 부모가 죽거나 사라지길 바란다.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내재한 영화는 생각보다 많이 있으며 유명한 영화로 테이큰, 아저씨 등이 있다.1) 츠치야 가론 글, 미네기시 노부아키 그림. 『Old boy』, 김소연 역, 아선미디어(2003)3.올드보이 속 오이디푸스 콤플렉스3.1.오대수의 이름오대수는 자신의 이름을 두고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는 의미라고 말하곤 한다. 사실 오대수의 이름은 ‘오이디푸스’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미 주인공의 이름에서부터 이 영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프레임을 쓰고 있음을 알려준다.3.2.오이디푸스와 올드보이의 공통점 - 사건기본적으로 근친상간의 코드와 스스로 신체를 훼손한다는 코드가 같다.2 자신과 성관계를 가진 미도가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오대수는 스스로 혀를 잘라버린다. 오이디푸스 또한 자신의 아내가 곧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스스로 눈을 찔러 실명을 시킨다.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근친애와 더불어 따라오는 것이 동성 부모 살인인데, 자신의 친아버지를 살해한 오이디푸스와 같이 오대수는 실제로 아내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아내를 죽이는 것으로 딸인 미도를 차지하려 한 상황으로 빠진다.3.3.오이디푸스와 올드보이의 공통점 - 인물오대수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름부터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다. 미도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 이오카스테격이다. 주요인물들 외에도 오이디푸스의 ‘부은 발’을 연상시키는 인물들 또한 등장한다. 오대수의 말을 온 동네에 퍼뜨린 노주환은 절름발이로 나오며, 박철웅의 부하들은 오대수와의 장도리 격투를 벌인 후 목발을 하고 나타난다.3 그 외에, 오대수의 채팅 아이디가 ‘몬스터’인 것은 오이디푸스에게 수수께끼를 내었던 스핑크스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43.4.미장센에서 나타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첫번째로 물이다. 오대수가 납치되던 밤의 장대비5, 이 양수이자 이우진의 누나인 이수아가 떨어진 댐을 연상6시킨다. 즉 삶과 죽음이 함께 결합되어 있으며 누나를 사랑한 이우진이 누나의 죽음을 잊지 않으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동일한 의미로 보라색을 들 수 있는데, 이수아가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옷,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건내는 상자, 가족앨범, 이우진의 셔츠 등이 그러하다.7 보라색은 붉지2) 조미영(2010), “박찬욱의 작품에 나타난 오이디푸스 신화-[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를 중심으로”, 문학과 영상 11권 3호, 816p3) 김경애(2004), “[올드보이]에 나타난 여섯 개의 이미지”, 문학과 영상 5권 1호 (봄), 19p4) 위의 논문, 19p5) 위의 논문, 9p6) 위의 논문, 10p7) 위의 논문, 10p도 푸르지도 않은 그 경계에 있는 애매한 색8이다. 이 색은 곧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타내며이수아의 마지막 옷 색깔이라는 점에서 물과 동일하게 이우진이 누나를 잊지 않으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두 번째로 격자무늬이다. 올드보이에서 가장 유명한 미장센이 아닐까 싶은데, 벽지와 상자, 우산무늬 뿐만 아니라 이우진의 옷장이 열리는 모양에서도 그를 연상할 수 있다. 격자무늬는 억압, 심리상태를 말함과 동시에 인간의 운명이 짜여진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9 운명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쳐 오히려 짜여진 운명대로 흘러가게 된 오이디푸스처럼, 이우진과 오대수는 서로가 마주보는 거울이자 짝패10로서 어느 한쪽이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둘 다 짜여진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세 번째로는 오대수가 목격한 이우진과 이수아의 근친애 장면이다. 이우진이 이수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장면에서 마치 모유수유를 연상시키게 해 본격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시작됨을 알린다.4.한국 고소설에 나타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한국과 같은 대가족 속에서 남녀유별이 이루어지는 사회는 서양과 같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주장11도 있다. 그러나 심청전과 콩쥐팥쥐전, 장화홍련전, 변강쇠가와있다.12심청전에서 심청의 어머니는 산후후유증으로 일찍 사망한다. 아버지인 심학규는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데, 이에 심청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을 가로막는 존재임과 동시에 심청이 극복해야할 난관이다. 동성의 부모를 극복하고 이성의 부모를 차지한다는 오이디푸스 일화로 볼 때 심청전 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적용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13콩쥐팥쥐전을 비롯한 계모설화는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야기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성부모를 두고 동성부모와 경쟁을 벌이는 것인데 이는 어느 문화권에서건 바람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타당한 배경이 필요했고, 계모설화는 이에 부합하는 배경설정인 것이다. 이미 친모살해는 이루어진 상황이므로 악한 계모와의 경쟁은 더더욱 정당성을 확보한다.148) 위의 논문, 11p9) 김경애(2004), “[올드보이]에 나타난 여섯 개의 이미지”, 문학과 영상 5권 1호 (봄), 11~12p10) 네이버 블로그, “올드보이 오이디푸스”, http://blog.naver.com/jimmy1201/50043619702, 16.11.1711) 류인균, 『한국 고소설에 나타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서울대학교 출판부(2004), 15p12) 위의 책, 16p13) 해당 부분은 위의 책 19~54p를 참고하여 작성함.14) 해당 부분은 위의 책 55~75p를 참고하여 작성함.5.개인적 감상영화학도의 일원으로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영화 분석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 중에서도 올드보이는 풍부한 미장센과 곳곳에 숨어든 설정들이 분석하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한 내용은 잘 알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여태껏 우리들은 미술적인 요소들만 분석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친구가 던져준 한마디에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고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생각보다 올드보이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함께 다룬 자료가 많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그 내용들이 알차 작성하는 데에 무리는 없었다. 그게 풀어보고자 한다.올드보이 백과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올드보이 book』15이 있다. 박찬욱 감독과 최민식, 강혜정을 비롯한 배우들의 질의응답 그리고 비평가들의 비평문 등이 실려 있는 책이었다. 그곳에서 흥미로운 비평문을 발견했는데, 남성의 포르노적 판타지가 올드보이에 녹아있다는 내용이었다. 누나 대 남동생, 딸 대 아버지라는 근친상간 구조에서 여성들은 이유 모를 희생을 담당하며, 전형적이고 진부한 남성들의 포르노적 판타지를 반영하는 인물이라는 내용이다.16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비평문을 본 후 해당 비평가를 검색해보았더니 씨네 21에 게재한, 올드보이 book에서 다룬 내용보다 훨씬 더 과격한 문장으로 이 ‘남성의 포르노적 판타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이 검색되었다.위 비평문에서 그는 “내가 불편하고 짜증나는 것은, 성별에 따라 완벽하게 상반되는 반응에는 무감한 사람들과, 뻔한 남성적 욕망이 마치 예술가적 소양인 것처럼 추앙되는 것에 대한 역겨움 때문이다.”, “너무나 전형적인 남성적 욕망. 그 대상이 근친이라는 점에서 제도권에 수용되지 못한 채 음지로 숨어든, 포르노에서나 번창하는 그런 욕망들. 이미 육체적으로 성숙했으나 늙지는 않은 누나와 이제 막 다 자라 성인이 된 딸이라는 ‘사회적 대상’에 대한 남성적 욕망들. 관계·시선·성관계가 진행되는 순서, 태도, 사용되는 도구, 게다가 왜 자살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자기희생적으로 신비화된 여성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단 한 가지도 다르지 않은 진부한 포르노적 욕망.”17 이라고 표현했다.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동적 여성 캐릭터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내가 아는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에서 완전한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진실로부터 배제되는 유일한 캐릭터가 바로 여성(미도, 강혜정) 캐릭터란 걸 깨닫고 굉장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깨달음이 '친절한 금자씨'를 만들게 했고 그 영화 이후 나는 강한 여성 캐릭터를 만들기 시작했다"18 라고 말하며 실제로 그 이후로도 페미니즘적인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