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전의 <고공가>와 이원익의<고공답주인가>를 통해 본 임진왜란 이후 조선중기 정치모습
- 최초 등록일
- 2008.12.08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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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허전의 <고공가>와 이원익의<고공답주인가>를 통해 본 임진왜란 이후 조선중기 정치모습
목차
Ⅰ. 서론
- 허전의 고공가를 선택한 이유와 목표
Ⅱ. 본론
- 허전과 이원익
- 임진왜란 이후 조선 중기 모습
- 허전의 <고공가> 해석
- 허전의 <고공가>를 통해 본 임진왜란 이후 조선중기 정치모습
- 당시 정치했던 북인
- <고공가>의 화답한 가사 이원익의 <고공답주인가> 해석
Ⅲ. 결론
- 느낀 점
본문내용
Ⅰ. 서론
> 한국역사에 중요한 임진왜란이후 조선 중기 정치 모습이 궁금하였다.
평소 좋아하던 고전시가를 통해 보며 이런 모습을 알아보고 싶다.
Ⅱ. 본론
▶ 허전과 이원익
- 허전 [許傳, 1797~1886]
본관 양천(陽川). 자 이로(而老). 호 성재(性齋). 시호 문헌(文憲). 1828년(순조 28) 상시(庠試)에 합격하고 1835년(헌종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숭릉별검(崇陵別檢)이 되고, 전적(典籍) 지평(持平) 정언(正言) 이조좌랑을 거쳐 함평(咸平)현감으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나 안찰사(按察使)와의 불화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 이원익 [李元翼, 1547~1634]
본관 전주. 자 공려(公勵). 호 오리(梧里). 시호 문충(文忠).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저작(著作)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 등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성절사를 따라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좌랑(戶曹佐郞) ·정언(正言) ·예조정랑(禮曹正郞)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1582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거쳐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587년(선조 20) 안주목사(安州牧使)에 기용되어, 대사헌 ·호조 및 예조의 판서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이조판서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길에 호종하고, 이듬해 평양 탈환작전에 공을 세워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595년 우의정에 올라 진주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598년 영의정이 되었는데, 유성룡(柳成龍)을 변호하다 사직, 은퇴하였다.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 때의 공적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 영의정을 지내면서 수차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던 중, 1615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는데, 1619년(광해군 9) 풀려나왔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는 80세의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돌아와, 훈련도감 도제조(訓鍊都監都提調)를 마지막으로 퇴사, 낙향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