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
- 최초 등록일
- 2008.11.12
- 최종 저작일
-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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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표해서 에이뿔 받은 자료 입니다.^^ 잘쓰시구 좋은 성적 받으세요~
목차
▒ 청화백자란?
1. 중국 청화백자의 전래 유입 및 제작
2. 문양에 보이는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
3. 조선전기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
본문내용
▒ 청화백자란?
백자에 무늬를 나타낼 때 코발트 안료인 회청을 써서 그림을 그린 것을 청화백자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송 말~원대에 시작하여 명․청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靑花>라는 표기는 『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청화백자를 지칭하고 우리나라 청화백자는 <靑畵>로 표기하는 경향이 많다.
1. 중국 청화백자의 전래 ․ 유입 및 제작
조선 초에는 크게 명 황실과의 공식적 관계를 통한 전래와 사신들의 중국 왕래과정에서 이루어진 무역을 통한 유입이라는 두 가지 루트를 통해 중국 청화백자들이 전해 졌다. 명 황실을 통한 청화백자의 공식적 전래 상황은 世宗 10년(1428)부터 文宗元年(1450)에 걸친 『朝鮮王朝實錄』의 기사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朝鮮王朝實錄』에 나타난 중국 청화백자의 전래 관련 記事>
전체적 전래상황은 조선의 世宗年間과 명의 宣德年間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世宗 10년과 12년에는 宣德帝의 직접 사여도 이루어졌던 점에서 볼 때, 이 시기 형성되었던 양국간의 보다 긴밀한 관계 속에서 청화백자의 전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분명하다. 전래된 도자기의 경우 황제 宣德帝의 賜與品은 대형의 특수기명들이었던 것에 반해 사신들의 進上品은 주로 소형의 일반기명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특히, 1430년 宣德帝에게 하사받았던 3점의 <靑畵雲龍白磁酒海>가운데 하나로 추정되는 <白磁靑畵酒海>가 『世宗實錄』「五禮儀」에 그려진 사실로 볼 때, 황제의 사여품은 수량은 많지 않지만 상징성을 지닌 기명으로 하사되어 의례기와 같은 특수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황제의 賜與品은 2회에 반해, 주를 이룬 것은 사신들의 進上品이었다. 결국 조선 초 중국 청화백자의 전래는 명 사신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중심을 이루었다.
<백자청화주해>
『세종실록』「오례의」
그런데 이러한 중국 청화백자의 전래와 유입이 1450년 무렵부터는 원활히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우선 명 황실을 통한 청화백자의 공식적 전래에 관한 기록이 文宗元年을 마지막으로 이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어 1450년 이후 공식적 교류를 통한 중국 청화백자의 전래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世宗 30년(1448) 白磁貿易 금지조치의 결과 1448년 이후에는 무역에 의한 중국 청화백자의 유입도 엄격히 제한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결국 1450년 이후 중국을 통한 청화백자의 공급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조선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청화백자의 수량이 급감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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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원, 2003,『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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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대구박물관, 2004, 『우리 문화속의 중국 도자기』.
- 김영원, 2003, 『조선백자』, 대원사.
- 윤용이, 2007, 『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 돌베개
- 윤효정, 2006, 『미술사학연구 250․251』, 「朝鮮 15․16세기 靑畵白磁의 製作과 使用」, 한국 미술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