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영산강 유역 고분 문화
- 최초 등록일
- 2006.12.20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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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산강 유역의 고분 문화를 옹관고분과 석실고분 둘로 나누어 그 사회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목차
Ⅰ. 序 言
Ⅱ. 甕棺古墳과 당시 社會
Ⅲ. 石室古墳과 당시 社會
Ⅴ. 結 言
본문내용
Ⅰ. 序 言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서남부지역에는 巨大古墳 築造段階 고분이 주로 밀집 분포하는 양상을 띠었다. 이곳은 광활한 평야와 저평한 구릉지대로 형성된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인류의 생활환경에 보다 유리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 고분의 內部構造는 한동안 屍身을 埋納하기 위한 특수한 형태의 대형 專用甕棺이 크게 유행한 점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같은 시기에 축조된 다른 지역의 고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옹관고분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백제 중앙세력의 墓制와는 뚜렷하게 구별된다는 점에서 先主의 土着集團인 馬韓勢力의 墓制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우세하다. 일정시기 동안 옹관이 크게 유행하다가 百濟系로 불리우는 橫穴式石室墳으로 中心墓制가 바뀌어 간다. 이 지방에 석실분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대체로 백제가 熊津으로 遷都할 무렵쯤으로 여기고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묘제의 변화에 따라 영산강 유역에 나타나는 사회의 양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아보고자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과 토착세력의 추이에 관한 내용을 중점으로 다뤘음을 밝히고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Ⅱ. 甕棺古墳과 당시 社會
옹관고분은 영산강유역이라는 비교적 한정된 공간속에서 매우 특이하게 발달한 묘제이다. 청동기시대로부터 시작되는 일반적인 옹관묘는 通時代的으로 槪觀할 때 다른 중심묘제에 부수되는 陪葬이거나 또는 幼少兒用으로 쓰였다. 그런데 원삼국시대에 접어들면 成人用으로 사용된 甕棺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영산강유역의 이른 시기 옹관들이 그것인데, 옹관묘가 成人用으로 그것도 土着支配勢力의 中心墓制로서 大形古墳으로까지 발전한 점에서 다른 지역의 대형고분과 큰 差別性을 가지고 있다. 成人의 주검을 안치하기 위하여 埋葬用의 대형 專用甕을 사용한 것이라든지, 하나의 墳丘속에 여럿의 옹관을 매장한 多葬의 공동묘적 성격, 墳丘중의 상층부에 매장시설을 위치시킨 지상식, 다양한 墳丘形態의 採擇, 墳丘 둘레에 周溝를 파돌린 점 등 다른 지역의 고분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 자료
성낙준, 「百濟의 地方統治와 全南地方 古墳의 相關性」, 『百濟의 中央과 地方』,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97.
國立光州博物館 編,『榮山江의 古代文化』, 國立光州博物館, 1998.
姜鳳龍,「3~5세기 영산강유역‘甕棺古墳社會’와 그 성격」역사교육연구회, 역사교육 제69집, 1999, pp. 63 ~ 101.
문안식ㆍ이대식 共著,「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과 토착세력의 추이」,『한국고대의 지방사회』, 도서출판 해안,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