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탕평책에 관한 소 논문
- 최초 등록일
- 2006.12.12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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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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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1. 영조 후반기의 정치운영
2. 영조 후반기 탕평정국과 붕당들의 동향
1) 노론 청론의 분화
2) 소론․남인계의 동향
맺음말
본문내용
머리말
영조(英祖)는 격화된 붕당 사이의 대립을 완화하기 위해 조제보합(調劑保合)에 기반한 완론탕평(緩論蕩平)에 주력하였다. 영조는 치세 전반(前半)에 격화된 붕당 사이의 대립을 완화하기 위해 각 붕당의 온건한 인사를 적절히 배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제’란 탕평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념이라기보다 운영의 묘미를 떠올리게 하는 기술적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기조가 영조 치세 52년간에 모두 적용될 수 있을까?
그동안의 연구된 논문들은 주로 영조 치세(治世) 초․중반에 집중하였다. 본고는 신유대훈(辛酉大訓)이후로 주 초점을 맞추었다. 왜냐하면 1740년(영조16)의 경신처분(庚申處分)과 이듬해의 신유대훈반포이후 영조는 자신을 억누르던 정치적 부담에서 자유로워지고 자신의 구상을 적극적으로 구현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본고에서는 신유대훈이후 달라진 영조의 탕평책에 따라 각 붕당들의 변화를 다룰 것이다.
맺음말
신유대훈 이후 영조 후반기 치세에는 여러변화가 있었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영조의 탕평책이 안정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또한 영조가 주도적으로 노론과 소론 남인들을 등용하면서 권력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영조는 위상이 높아갈수록 탕평의 기술적 측면[조제]는 사라지고 국왕 중심의 정치 운영이 전개하였다. 왕권이 공고화 되었다는 뜻이다. 노론과 소론의 기존 붕당들이 분열을 거듭하는 가운데 남인이 영조후대부터 입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은 정조때 주요붕당으로 올라가는 배경이 된다. 이를 통해 영조는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함으로써 후대에 정조의 새로운 탕평책을 펼치는 근간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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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린,「영조대 후반 소론․남인계 동향과 탕평론의 추이」『역사와 현실 제53권』, 한국역사연구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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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규, 「1740(영조 16)이후 영조의 정치 운영」『역사와 현실 53』, 한국역사연구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