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님은 진정한 민족주의자였을까?
- 최초 등록일
- 2006.11.07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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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범 김구 선생님 아시죠?? 그분은 우리 나라의 대표적 민족주의자이며, 지도자 인데요.. 일부
의 견해에 의하면, 김구 선생님께서 원래부터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에 대
한 고찰과 함께, 김구 선생님에 대한 진정한 평가를 재정립한 레포트입니다. 실제 교수님들의
논문과 여러 책들을 참고로 만들었기때문에, 자료의 신뢰성도 높을 뿐만, 아니라 일반 수준의
레포트보다 질적으로 뛰어나다고 자부합니다.
목차
1. 백범 김구 선생님을 선택한 동기
2. 백범 김구 선생님의 생애
3. 해방 직후의 한반도의 상황
4. 김구의 반탁운동과 그 의미
5. 결론 - 민족을 위해 살았던 김구
본문내용
우선 김구선생의 반탁운동을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김구 선생이 이승만과 함께 미국이 사실상 주장하던, 반탁운동에 동참했다는 것은 향후 김구의 활동과 자칫하면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김구 선생이 반탁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은 민족적 자주를 위해 외세의 간섭이 아닌, 통일된 한반도를 만들기 위헤 선택한 길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실제 그의 반탁운동에 관한 행적을 살펴보자.
반탁투쟁은 처음부터 김구와 임시 정부 세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김구는 즉시 독립을 열망하는 간절한 소망을 이유로 민족자주와 반탁을 일치시켜 반탁투쟁을 강하게 전개했다. 실상 김구는 해방되기 전인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한반도문제가 논의되었을 때부터 신탁통치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조선인은 즉시 독립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거듭 역설한 바 있었다. 12월 28일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내용이 전해지자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계는 탁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 결성을 주도했다. 그리고 다음 날 김구 명의로 4개국에 대하여 신탁통치 절대 반대의 전문이 발송되었다. 이어 비록 하루 만에 취소했지만 31일에는 경찰 및 전국행정기관을 임정의 지휘 하에 둔다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반탁운동을 고양시키기도 했다. 해를 넘겨 46년 1월 4일에는 김구가 과도정권을 수립할 비상정치회의를 수립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고, 이에 1월 20일 비상정치회의 주비회가 열렸다. 비상정치회의 준비회는 후에 비상국민회의로 개칭된 후 미군정의 하지중장에 의한 민주의원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참고 자료
- 범일지 (범우사 2000.06.05)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http://www.kimkoo.or.kr)
-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창작과 비평사 1999)
- 해방 전후사의 인식(2)(강만길, 한길사 1995)
- 미·소 군정의 대 한국정책(1945~48)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3 71-110p)
-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백범 김구 (백범과 민족 운동 연구3 167-196p)
- 열강의 한국남북분단 및 신탁통치 정책과 백범 김구의 노선(1943~45) (백범과 민족 운동 연구3 9-70p)
- 이승만과 김구의 대좌 (김제방, 한솜 2005)
- 조선신문기자회가 실시한 "임시정부 정체에 대한 가두 여론조사 결과"(오후 5~6시, 통행인 2,495명 대상, 서울 10개소, 1947.7.3) -출 : 네이버 오픈백과 : 반탁운동에 대해
- 한국현대사와 제3의 길-여운형, 김구, 조봉암의 노선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