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독후감] [소송] - 유예의 미학과 선험적 죄책의 정치학

목차

1. 서론: ‘죄 없는 죄책’과 끝나지 않는 절차—『소송』이 던지는 독서의 과제

2. 본론
2.1 죄의 선험성: 기소보다 앞선 내면화된 죄책
2.2 법의 언어와 번역 불가능성: 말해지지 않는 ‘혐의’의 통치 방식
2.3 공간의 물질성: 다락방 법정과 미로형 관료제의 체감 구조
2.4 몸과 욕망: 레니, 뷔르스트너 양, 변호사 훌트—관계의 끈적한 공모
2.5 초상화와 문턱의 상징체계: 티토렐리의 그림, 문지기와 문의 은유
2.6 종교적 우화와 세속적 규율: 성당의 신부와 「법 앞에서」의 재배치
2.7 서술기법과 리듬: 냉정한 문장, 과잉 절차, 유예의 시간성
2.8 근대 합리성에 대한 역설적 비판: 자기감시, 서류화, ‘개’의 죽음

3. 결론: 유예로서의 삶—법과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독서의 가능성

본문내용

1. 서론: ‘죄 없는 죄책’과 끝나지 않는 절차—『소송』이 던지는 독서의 과제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은 첫 문장부터 독자를 불안의 한복판에 떨어뜨린다. 은행의 수석계장 요제프 K.는 어느 날 아침, 이유도 알려지지 않은 채 “체포”된 상태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체포는 신체의 구금이 아니라 규정의 포획,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체계에 걸려드는 사건이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의 핵심은 기소와 심판이 아니라, 이유가 결여된 혐의가 어떻게 주인공의 삶 전체를 점유하고 재조직하는가에 있다. 이 소설은 범죄와 형벌의 인과 구조를 선명하게 밝히는 법정극과는 정반대로, 원인·절차·판결의 구분을 끊임없이 흐린다. 그 흐림 속에서 독자는 기묘한 명료함을 경험한다. 정보가 늘어날수록 무지의 감각이 심해지고, 관계가 복잡해질수록 고립은 더 촘촘해진다. 『소송』의 공포는 바로 이 역설에서 발생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집요하게 따라붙는 감정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움직임’의 피로다. K.는 무언가를 해명하려 끊임없이 서류를 모으고 사람들을 만난다. 변호사 훌트와 상담하고, 화가 티토렐리를 찾아가고, 법정의 다락방과 뒤틀린 복도를 오르내린다. 그는 멈추지 않고 ‘진행’하지만, 그 진행은 언제나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원운동에 가깝다. 이 순환은 우연의 난맥상이 아니라 체계의 구조 그 자체다. 카프카는 근대 관료제의 이면에, 절차가 목적을 대체하는 순간의 뒤틀림을 놓치지 않는다. 절차는 원래 결론을 위한 수단이지만, 『소송』에서 절차는 결론의 무기한 유예를 통해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결과가 없는 진행, 원인 없는 기소, 판결 없는 형벌. 이 불가능한 삼항을 동시에 굴리는 엔진이 바로 ‘선험적 죄책’이다. 죄가 있어서 기소되는 게 아니라, 기소된 상태가 죄를 생성한다. 독서는 여기서 불편한 질문을 마주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유를 모른 채 어떤 규범의 피고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참고자료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