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의 갑신정변, 최선이었나
- 최초 등록일
- 2021.07.23
- 최종 저작일
-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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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쟁점한국사 소논문 : A+
목차
I. 문제의 제기
II. 개혁의 방향: 위로부터의 급진개혁
III. 정변의 전개: 준비되지 않은 혁명
IV. 정변의 여파: 놓쳐버린 근대화의 골든타임
V. 맺음말
본문내용
오랜 기간 쇄국 정책을 유지하던 조선은 19세기 중반 구미 열강의 압력 아래 개항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근대화의 방향과 속도를 둘러싸고 여러 세력이 대립하였으며, 주변국의 간섭도 이어졌다. 같은 동아시아 국가인 일본의 경우 개항의 시기가 빨랐을 뿐만 아니라 기존 막부 체제를 타도하고 신질서 수립에 성공함으로써 급진적인 근대화를 성취한 반면, 조선의 경우 문호 개방의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었으며 1910년 일본에 강제 병합될 때까지 체제 변혁을 수반하는 급진 개혁은 끝내 단행되지 못하였다.
조선과 일본 양국에는 모두 급진적 개혁을 원하는 세력이 자국에서의 체제 변혁을 동반한 근대화 혁명을 꾀하였다. 일본의 경우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하급 무사들이 메이지 유신을 추진, 집권 세력을 성공적으로 교체하여 급진적 개혁을 성취한 것은 물론 구미와 같은 제국주의 열강으로까지 부상하였다. 조선에서는 김옥균을 위시한 급진 개화파가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주목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끝났다. 둘 다 열강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발호하는 현실을 인식하여 근대화의 조속한 달성을 추구한 반면, 그 결과와 영향은 판이하게 나타난 것이다. 특히 갑신정변의 주도자인 김옥균은 정변 실패로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하였으나 2000년대 후반 들어 뉴라이트 성향의 단체에서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김옥균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평가는 곧 갑신 정변의 시도가 당시 상황에서 시의적절한 혁명이었는가에 대한 평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양국의 근대화 성패가 갈린 까닭에는 여러 요인을 들 수 있겠으나, 근대화 주도 세력의 역량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김옥균으로 대표되는 급진 개화파의 정변이 과연 조선의 근대화 달성에 있어 적절한 시도였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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