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에서의 개화사상과 개화파
- 최초 등록일
- 2014.11.11
- 최종 저작일
- 20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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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개화론의 대두
1. 개항
2. 초기 개화파와 개화사상
Ⅲ. 개화파의 분리
1. 온건 개화파
2. 급진 개화파
Ⅳ. 갑신정변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조선 후기에 들어 우리나라의 봉건적 사회구조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농촌에서 상품생산이 발전하고 도시에서 상공업이 성장하면서 양반은 지주, 평민은 소작농 또는 빈민이라는 공식이 적용되지 않을 만큼 부의 분배양상이 달라졌다. 이에 따라 양반과 평민을 철저히 구분하던 유교적 신분제도가 위태로워진 반면, 부를 축적한 평민층에 대한 지방관들의 각종 수탈도 극심해졌다. 인민들 사이에 부가 축적되고 지방관의 수탈에 대한 저항의식이 높아지면서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 1862년 농민항쟁 등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의 항쟁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876년의 개항 이후 가속화되었다. 개항을 계기로 조선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강제로 편입되었고, 이에 조선의 지배층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개화세력(開化勢力)과 이를 전면 거부하면서 기존의 가치질서를 고수하려는 척사세력(斥邪勢力)으로 양분되었다.
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이후 봉건적 사회체제의 와해를 두려워한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는 1882년 임오군란 일으켜 정권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정권을 잡은 개화세력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아냄과 동시에 그들의 선진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적 국가를 만들고자하였다.
Ⅱ. 개화론의 대두
1. 개항
1873년 서양과 통상을 완강히 반대하던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하게 되자, 왕비를 비롯한 민씨(閔氏) 일파가 정치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의 대외정책도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정안에서도 외국에 문을 열어 통상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조선보다 훨씬 앞서 개항을 하고, 1868년에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라고 불리는 천황 중심의 근대적 개혁을 단행한 일본은 조선으로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일본은 대원군이 물러난 것을 조선을 개국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고 군함 운요호를 조선 연안에 파견하였다. 운요호는 부산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해로를 측정하고 함포를 쏘면서 무력 행위를 벌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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