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 출자 그리고 발해 역사 귀속’ 문제 및 견해
- 최초 등록일
- 2011.09.02
- 최종 저작일
- 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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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조영 출자 그리고 발해 역사 귀속’ 문제 및 견해
목차
개요
1. 대조영의 출자(出自)와 발해사 귀속 문제
(1) 대조영의 출자에 대하여
(2) 발해는 누구의 역사인가
2. 결론(생각 및 견해)
본문내용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은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다. 신라로 귀화한 사람, 당으로 들어간 사람, 만주의 말갈족과 혼재하여 사는 사람 등 패망국의 한을 안고 살게 되었다. 당(唐)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000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뒤의 고왕)도 그의 아버지로 알려진 걸걸중상(乞乞仲象 또는 大仲象)과 함께 요서지방의 영주(營州;조양)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나라가 북동부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나라의 세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696년에 거란족 출신 이진충(李盡忠)이 요서지방에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통치하던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1년여 만에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당나라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돌궐의 힘을 비는 등 상당한 어려움에 처하였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고구려 출신인 대조영이 유민들을 규합하고 걸사비우(乞四比羽)가 이끄는 말갈 세력과 손을 잡아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당나라는 대조영 세력을 공격하였으나, 대조영은 공격해오는 이해고(李楷固)의 군대를 천문령(天門嶺) 싸움에서 격파하고 당나라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남만주 지역에 위치한 동모산[東牟山, 지금의 길림성 돈화성 부근에 있는 육정산(六頂山)]에 정착하여 성을 쌓았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개국하고, 국호를 발해,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 사서(史書)에 진국(震國)이라 칭하던 것을 `발해군` 왕으로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재평가되고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