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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기 다중적 표상으로서의 평양기생 (The Images of Pyeongyang Gisaengs (Female entertai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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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7.03 최종저작일 20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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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기 다중적 표상으로서의 평양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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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 수록지 정보 : 동아시아문화연구 / 62호 / 13 ~ 51페이지
    · 저자명 : 박찬승

    초록

    평양의 옛 관기(官妓)들과 기생서재(妓生書齋)에서 교육을 받은 새로운 기생들은 1910년대 초에 당국(경찰)의 지시로 기생조합을 조직하였다. 기생조합은 1920년에 기성권번으로 개칭되었다. 1910년대 초 30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평양 기생은 1920년대 말에는 160여 명으로 늘어났고, 1930년대 중반에는 3백 명 가까이 되었으며, 1937년에는 4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1900년경부터 기생을 양성하고 있던 기생서재는 1914년에는 4개로 늘어났다. 이에 평양부와 경찰서는 1920년 이들을 모두 통합하여 기성권번에서 기생학교를 운영하도록 했다. 그 명칭은 기성권번 학예부, 평양기생양성소 등으로 바뀌었다. 학생수는 1920년에 이미 2백 명에 달했으며, 매년 70명 내지 80명이 졸업하였다. 이 가운데 평양에 남을 수 있는 졸업생은 2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나머지 졸업생들은 경성을 비롯하여 타지로 떠났다. 이로 인해 평양 기생학교는 전국에서 유일한 기생양성소로서 그 명성이 높아졌다. 평양 기생학교에서는 전통적인 노래, 춤, 악기, 서화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시대의 추세에 따라 일본어, 일본노래, 서양식 춤(댄스, 레뷰 등)까지도 가르쳤다. 일제 말기까지 평양 기생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약 2천5백 명 정도로 추산된다.
    평양기생은 관광문화의 표상, 예능인의 표상, 섹슈얼리티의 표상 등으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평양 기생이 이와 같이 다중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당시 평양 기생들이 놓여 있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당시 평양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평양기생학교 관람과 기생들과의 대동강에서의 뱃놀이는 빠뜨릴 수 없는 코스가 되었다. 그러나 평양 기생들은 그 수가 많아지면서 민족주의 계열의 언론과 청년회, 기독교계로부터 청년들을 유흥과 타락으로 이끄는 사회악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평양 기생들은 기생학교에서의 수업, 연주회, 대중가수로의 진출 등으로 인해 예능인으로서의 이미지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 특히 1930년대 대중가수 가운데 평양 기생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에 ‘평양기생은 예능인’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와 같이 평양기생은 그 수가 많았고, 다채로운 예능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 기생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다.

    영어초록

    The existing official Gisaengs and new Gisaengs trained in the Gisaeng schools in Pyeongyang formed the Gisaeng Johap (association) in the early 1910s. The name was changed to Gisaeng Gwonbeon (Female Entertainers’ Union) in 1920. The number of Gisaengs in Pyeongyang, about 30 in the early 1910s, increased to about 160 in the late 1920s, to about 300 in the mid-1930s and to around 400 in 1937.


    The number of Gisaeng schools, which had trained Gisaengs from 1900, rose to 4 in 1914. The administration of Pyeongyang-bu and the Pyeongyang police station let the schools combined and to be operated by the Gisaeng Gwonbeon in 1920. The name of the schools changed to Gisaeng Gwonbeon Hagyebu (the department of arts) or Pyeongyang Gisaeng Yangseongso (Gisaeng Training School). The number of the students already reached 200 in 1920. Every year, 70-80 students graduated from the school. Among them, only 20 graduates were able to stay in Pyeongyang and the rest of them left to other cities including Gyeongseong (Seoul). Pyeongyang Gisaeng School became famous as the only training center of Gisaeng nationwide. Pyeongyang Gisaeng School taught traditional songs, dances, musical instruments playing and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Moreover, given the trends of the time, the school taught Japanese language, songs and western dances (dance, revue, etc.). The number of the graduates from Pyeongyang Gisaeng School was estimated at about 2,500 until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ism.
    Pyeongyang Gisaengs had multiple images of a symbol of tourism, entertainers and prostitutes. Those images were closely related to the reality of Pyeongyang Gisaengs at that time. It was a must tour course for the tourists in Pyeongyang to look around Pyeongyang Gisaeng School and go boating with Gisaengs in the Daedonggang River. However some Pyeongang Gisaengs were clandestinely working as prostitutes. And with an increasing number of Gisaengs in Pyeongang, they were sharply criticized as a social evil that leads the young adults to pleasures and entertainment and corruption by nationalistic press, Youth Association and the Christian communities.


    However, Pyeongyang Gisaengs had the strong image as an entertainer as they were trained at Gisaeng School, held concerts and became pop singers. In particular, since many of the pop singers in the 1930s were former Pyeongyang Gisaengs, many people understood ‘Pyeongyang Gisaengs as entertainers.’ As Pyeongyang Gisaengs were large in number with diverse artistic talents, they became the byword for Gisaengs in Joseon.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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