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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피란민의 부산 정착과정과 정부정책 고찰 (A Study on the Process of Settling in Busan and Government Policy of Refugees during the 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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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5.05 최종저작일 20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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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피란민의 부산 정착과정과 정부정책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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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한국아시아학회
    · 수록지 정보 : 아시아연구 / 25권 / 1호 / 425 ~ 444페이지
    · 저자명 : 공미희

    초록

    본 연구는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란민들이 가장 먼저 유입된 시점부터 어떻게 해서 부산에 정착을 해나갔는지에 대한 과정을 정부정책과 연관 지어 전체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부산은 약 천일 동안 대한민국 정부의 피란수도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쇄도하자 정부는 부산으로의 인구집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避難民 分散에 關한 件」과 「피난민 소개 및 구호요강 송부의 건」이라는 정책을 공포했다. 그러나 정책공포 이후에도 피란민들의 부산집중 현상은 여전했고 1951년 당시 기준으로 부산의 인구는 전쟁 전보다 무려 37만여 명이 갑자기 증가한 85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
    이렇게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에게 정부는 1950년 8월 4일 「피난민수용에 관한 임시조치법」과 개정을 공포해 비상사태를 감안하여 임시로 피란민 수용구호를 추진하고 피란민 수용에 대한 공간적 범위가 귀속재산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주택, 여관, 요정 기타 건물에까지도 가능하도록 했다.
    부산시도 피란민을 수용할 여유가 있는 가옥에 대해서 사회부 장관의 이름으로 입주명령서를 발부시켜 피란민을 수용하도록 하였고 또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빈방 혹은 하다못해 마을 방앗간이나마 거처를 마련해 주도록 했다. 한편 부산에서는 이런 정부적인 정책만이 아닌 부산 원주민들의 개인적 차원에서도 자발적으로 피란민들을 위해 ‘방 하나 내어주기 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식량배급 면에 대해서도 부산시는 처음 피란민이 올 때는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으나 1주일이 지나면서부터는 1인당 하루 양곡 3홉과 부식비 50원씩의 식량배급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 구호금으로 구성된 유엔 한국 재건단(UNKRA)은 전쟁 시기 원조자금을 관리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피란민과 무주택자를 구호했고 유엔민사원조사령부(UNCACK)는 구호물자를 피란민에게 공급하였다. 그러나 주택은 물론이고 식량배급도 부족하여 수용소에 있었던 피란민들은 그나마 끼니가 다소 해결되었으나 대부분의 피란민들은 스스로 판잣집이나 움막 등을 짓고 생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국제시장이나 용두산 등에서는 판자촌들이 밀집해 있었고 또한 이 시기 부산에는 하루에 3~4건의 화재가 평균적으로 발생했다.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특히 판자촌은 하루아침에 다 무너졌다. 그러나 피란민들은 거기서 주저앉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다시 회생하기 위해 손에 피땀 흘린 노력과 열정 희생들이 지금의 부산의 경제를 살리는데 아주 중요한 일군으로서 한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초록

    This study examines the overall process of how refugees settled in Busan from the time when the refugees first flowed into Busan, the capital of refugees, after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in relation to government policy.
    Busan served as the government's refugee capital for about a thousand days, and as refugees rushed to Busan, the government sent 「An Introductory Guide to Refugees」 and 「A Guide to Refugees and Relief Guides」 in order to disperse the population concentration in Busan. The policy of ' However, even after the policy promulgation, the concentration of refugees in Busan remained, and as of 1951, Busan's population reached about 850,000, a whopping 370,000 more than before the war.
    To the refugees who rushed to Busan in this way, the government promulgated the 「Act on Temporary Measures for Refugee Accommodation」 and amendments on August 4, 1950, in consideration of the emergency, to temporarily promote refugee accommodation and relief, and the spatial scope of receiving refugees belongs to It was made possible not only for the property, but also for other houses, inns, fairies and other buildings.
    The city of Busan also issued an occupancy order in the name of the Minister of Social Affairs for houses that could afford to accommodate refugees to accommodate them, and asked the villagers to provide them with empty rooms or at least a village mill. On the other hand, it was found that in Busan, not only the government policy, but also the individual level of the indigenous people of Busan voluntarily carried out the 'Give up a room movement' for the refugees. Regarding the food distribution side, Busan City made rice balls when refugees first came, but after a week passed, food ration was provided for 3 hops of grain and 50 won for side dishes per person per day. After that, the UN Korea Reconstruction Agency (UNKRA), which consisted of relief funds, managed aid funds during the war and rescued refugees and homeless people through active activities, and the UN Civil Aid Investigation Command (UNCACK) provided relief materials to the refugees. However, the refugees who were in the camps for housing as well as food distribution were able to get some food, but most refugees had to build their own shacks or huts to make a living. As a result, shantytowns were concentrated in Kukje Market and Yongdusan Mountain, and an average of 3 to 4 fires a day occurred in Busan during this time. Whenever there was a fire, especially the shanty town, it was destroyed in one day. However, the refugees did not sit there or give up their lives, and it can be said that the hard work and sacrifice of passion and sacrifice played a very important role as a very important worker in revitalizing the current Busan economy.

    참고자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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