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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실효지배의 증거로서 민관합동 학술과학조사 - 1947년 및 1952-53년 (과도)정부·한국산악회의 울릉도·독도조사를 중심으로 - (The Ullengdo-Dokdo Field Research Expeditions of 1947 & 1952-1953 Evidencing Korea's Effective Cont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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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3.28 최종저작일 20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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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실효지배의 증거로서 민관합동 학술과학조사 - 1947년 및 1952-53년 (과도)정부·한국산악회의 울릉도·독도조사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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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대한국제법학회
    · 수록지 정보 : 국제법학회논총 / 60권 / 3호 / 61 ~ 96페이지
    · 저자명 : 박현진

    초록

    광복 후 일본이 독도야심을 노골화하자 과도정부 안재홍 민정장관(民政長官)은 1947년 8월 독도 수색위원회를 조직하고 6명의 중앙․지방정부 관리로 구성된 공식 독도조사단을 결성․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또 ‘조선산악회’(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한국산악회’로 개칭) 송석하 회장에게 각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대규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구성, 과도정부의 독도조사단과 함께 독도에 대한 민관합동 학술과학조사를 실시하도록 지시․위촉하였다. 이에 따라 과도정부 조사단 6명과 한국산악회 독도조사대 소속 전문가 63명(이 가운데 12명은 공무원) 및 지원인력 등 총 80명으로 구성된 제1차 울릉도․독도학술조사대는 광복 후 처음으로 독도에 상륙, 측량(목측), 지질․광물․동식물 조사와 표목설치 등 평화적 국가(정부)기능의 행사를 통해 당시 무인도였던 독도에 대한 실효지배를 현시하였다.
    1947년 독도 학술과학조사에 참가했던 국사관장 신석호는 이듬해 한국․일본의 문헌․기록, 일제 강점시대 일본해군성이 발행한 『조선연안수로지』, 일본학자의 연구와 울릉도 주민의 증언 등 구체적 근거와 증거를 원용하여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입증하는 논문(“독도소속에 대하여”)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독도영유권에 관한 역사적․지리적 근거를 밝혀 독도영유권 연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고, 이후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 연구의 근거와 방향, 출발점을 제시하였다. 그는 또 울릉군청에서 1906년 울도군수 ‘심흥택 보고서’를 최초로 발견하여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입증하는 중요한 물증으로 제시하였다.
    신석호의 논문은 이후 이한기, 송병기, 신용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음이 이들의 저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또 지질․광물반의 옥승식은 독도에 대한 목측(目測)과 지질조사를 실시하고, 조사 이듬해인 1948년 3월 15쪽 분량의 지질․광물반 공식보고서 「울릉도, 독도 조사보문(調査報文)」을 제출하여 독도의 지질적 특성을 조사․평가하였다. 조사대는 또 독도에서 바다사자의 일종인 가제(海驢)를 포획․조사하고 약 50여종의 동식물 표본을 채집․정리하여 이들 표본이 울릉도에 서식하는 동식물과 같은 계통임을 확인하였다. 조사대는 또 독도의 동도에 과도정부와 조선산악회 공동명의로 2개의 표목을 설치하여 독도가 한국령임을 표시하였다.
    1947년 제1차 민관합동 독도조사대의 법적 성격․지위와 관련, 우선 한국산악회의 조사대 파견이 민정장관의 지시․위촉으로 이루어진 점, 과도정부의 공식 독도조사단이 파견된 점, 한국산악회 조사대원 가운데 12명의 전문가가 당시 공무원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조사대원들이 포항에서 조선해안경비대에서 제공한 ‘대전환’호에 승선, 울릉도 도동항을 거쳐 독도에 도착한 점 등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광복 후 최초의 독도조사는 정부의 공식 또는 민관합동 학술․과학조사로 간주된다.
    1952년 4월 28일 대일강화조약의 발효로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독도도발을 본격화하자 우리 정부는 1952년 및 1953년 2차례에 걸쳐 한국산악회에 추가적인 독도조사대를 결성․파견토록 지시․위촉하고 예산 등 범정부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1952년 9월 2차 독도조사대는 미 공군의 독도 폭격연습으로 인해 독도에 상륙하지 못하고 귀환하였다. 이어 1953년 10월 제3차 울릉도․독도조사대는 범정부적 지원 속에 1) 독도와 부근 수역의 과학조사(지질, 기상, 해양, 생물, 수산, 역사, 지리) 그리고 2) 독도 측지와 지도작성을 주된 파견 목적으로 명시하였다. 특히 박병주 등이 독도에 상륙, 최초로 독도 측량․측지에 성공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조사대는 또 독도에 1박하면서 일본이 동도와 서도에 각각 한 개씩 세운 표목을 제거하고, 동도에 한국 영토임을 표시한 목제 표지간과 화강암 표석을 설치하였다.
    광복 후 3차에 걸쳐 과도․대한민국 정부가 한국산악회에 지시․위촉 및 협력하여 실시한 민관합동 울릉도․독도 학술과학조사는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의 의사와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여 영토주권을 수호한 선구적인 국가적 학술과학조사활동이었다. 1947년 제1차 학술조사는 광복 후 일본의 독도침탈이 자행되는 가운데 미 군정청의 견제 속에서 과도정부 안재홍 민정장관의 선견지명과 결단, 한국산악회 송석하 회장의 지도력과 전 국민적 지지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이룩한 기념비적 성과였다고 평가된다. 특히 과도정부가 ‘독도 수색위원회’를 조직하고, 독도조사단을 결성․파견한 것은 실효적 지배의 직접․1차적 증거를 구성한다.
    또 1차조사 직후 미 공군의 독도폭격연습이 실시되고 있는 현실적 위험을 무릅쓰고 정부와 한국산악회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2차 공동조사에 나선 것은 영토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일관된 강력한 의지를 지속적․대외적으로 천명한 점에서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을 입증하는 국제법적 의미와 효과가 크다. 또 3차 조사대가 독도에 상륙, 측량․측지조사 및 지질․광물조사를 실시하고 영토표석을 설치한 것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의 현시를 입증하는 증거자료를 구성한다. 제1-3차 독도조사의 결과 수집․발표된 자료․기록․보고서와 논문은 이후 독도 연구․조사는 물론, 정책․학술적 대응의 기반과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선언(1952)과 변영태 외무장관의 특별성명(1954. 9. 25)에 독도영유권의 근거․물증을 제시하고, 또한 영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어초록

    After liberation, south Korea was reeling from and healing the wounds from the decades-long draconian colonial rule. As both south Korea and Japan were then ruled by the Allied Powers' occupation authorities, from 1947 onwards Japan attempted illegal landings on Dokdo, coaxing at the same time the Tokyo-based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 into misperceiving Dokdo as constituting Japanese territory. Japan is even suspected of having influenced SCAPIN 1778 & 2160 designating Dokdo as a target of practice bombing.
    In May 1947, just one year ahead of Korean independence, the U.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 proclaimed Ordinance 141 to commission the Transitional Government of South Korea(南朝鮮 過渡政府). De facto powers of administration, legislation and jurisdiction were delegated to the latter, the home straight leading up to independence. On Aug. 4, 1947, the new-born Transitional Government, headed by the Minister of Civilian Government(民政長官) Ahn Jae-hong(安在鴻), set up the Dokdo Investigation Committee and decided to dispatch an Ulleungdo-Dokdo field research expedition comprised of four central plus two provincial government officials. Such a move was intended to counter Japanese challenge to Korean title to Dokdo.
    Minister Ahn also instructed the Corean Alpine Club, the national network of mountaineers founded in 1945, to organize a fieldwork mission to conduct a joint Ulleungdo-Dokdo academic and scientific research in tandem with the official expedition. A total of 12 public officials were included in the mission's 63 men-strong team of experts, thus bringing to 18 the number of public servants participating in the joint field research. The Club's president and his entourage joined the governmental expedition to embark on the Dokdo field investigation from Aug. 16 to Aug. 28, 1947, the first of its kind after liberation.
    The government-led Ulleungdo-Dokdo field research, synchronized and amalgamated with the private one, therefore represents the mission's official status. The mixed research team landed on Dokdo in the morning of Aug. 20 to conduct, inter alia, botanical, zoological and biological surveys investigating Dokdo's flora and fauna and its surrounding marine environment. Three sea lion cubs were caught for research purposes. A geological and minerals survey was also carried out. The expedition set up two wooden frontier marks at a vantage point on the slope of East Islet to indicate Korean inherent territory.
    The outcome of the field research was reported in ensuing public lectures, seminars and exhibitions and published in press media and academic journals. One of the salient achievements of the 1947 field research was a paper published in 1948 by Shin Seok-ho, head of the Korean National History Compilation Office, who had participated in the expedition. In this celebrated paper, he invoked six counts of historical, geographical and map evidence to prove Korean title to Dokdo. His essay provided the starting point for and defined the tasks for subsequent legal as well as historico-geographical research on Korea's Dokdo dominium.
    The Club further launched 1952 and 1953 expeditions during the Korean War under directions and liberal logistical support and patronage from the government. Unfortunately, the 1952 expedition failed to land on Dokdo because of the ongoing practice bombing by the U.S. air force against it. Undaunted, the Club organized the third mission the next year to install a wooden and a granite marker on East Islet, while conducting geological and geomorphic as well as biological surveys.
    Of particular note and importance in the third expedition was the surveying of Dokdo conducted by Park Byeong-ju. Staying overnight on Dokdo, he was assisted by such an instrument as a transit compass to calculate the respective heights, sizes and perimeters of the two islets. In his field research memos, Park recorded that Dokdo was visible from Ulleungdo. Reporting a well producing fresh water in West Islet, Park also left behind a drawing of Dokdo.
    The dispatch of the three joint field research missions represents the display of Korea's effective control over Dokdo. It also bears out the unflinching will of the Korean government and people to defend Dokdo. By organizing the three academic/scientific research expeditions under instructions from and in collaboration with the government, the Corean Alpine Club made its indelible mark in the history of safeguarding Korea's sovereignty over Dokdo.
    From the vantage point of the present, the three field research expeditions have catered to the Korean government, people and research community alike. They may also have inspired the proclamation of the 1952 'Peace Line' by President Syngman Rhee and the 1954 special statement issued by Foreign Minister Byeon Young-t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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