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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5
문서 내 토픽
  • 1.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체제상 특징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이며 동시에 가장 오래된 정사이다. 삼국사기는 신화, 신비주의, 과장 및 윤색을 지양하고 사실주의적인 관점에서 쓰였다.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가 그 어떤 사서보다 높은 권위를 갖고 있는 이유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때 김부식에 의해 쓰여졌다. 김부식과 실무자들이 여럿이 책을 편찬했는데, 이 책은 기부식의 사상에 따랐다. 그는 정통 유학자였다. 그래서 역사책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형식, 체제, 담아야 할 내용 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중국의 역대 역사서와 비슷한 형식과 체제에 기반해 책을 만들었다. 아울러 내용 중 지나치게 신비하거나 민망한 표현은 여과하여 서술하였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는 신라가 없어진 지 354년 만에 일연에 의해 출간되었다. 삼국유사에는 한반도의 역사, 종교, 문화, 지리, 삶, 신화, 설화 등이 다채롭게 실려 있다. 특히 지배자나 상류층이 아닌 민중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다듬어 서술한 일화가 숱하게 담겨 있는데, 그로 인해 민중의 심성, 세계관, 관점, 욕구 등이 박혀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삼국유사에는 승려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특징도 있다. 이런 체제는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것이다. 일연에게는 불교가 정착 및 번성하게 된 과정을 다양한 인간 활동을 통하여 서술코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삼국유사는 유학적 기준에 맞춘 역사를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체제와 형식을 선택했고, 그 결과 차원이 다른 귀한 역사책으로 남게 되었다.
  • 2. 일제강점기 감포 개항과 지역의 변천 과정
    1925년 1월 16일에 개항한 감포항은 2025년 개항 10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1995년에 국가어항으로 지정된 감포항이 겪은 100년은 그야말로 격동의 근대사였다고 볼 수 있다. 감포항은 개항 이후인 1937년에 제물포와 함께 읍으로 승격되었다. 그 만큼 국내 대표 어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어항 기능 약화와 인구 감소로 인하여 예전의 영화는 사라졌다. 감포 앞바다는 수심이 깊다. 그리고 도처에 작은 만이 있으며 해안 경사가 완만하다. 아울러 한류 난류가 교차하는 곳이기 때문에 근해와 연안 모두가 천혜의 어장을 형성한 곳이었다. 즉, 고등어, 삼치, 전갱이, 가자미, 방어, 대구, 미역, 상어, 정어리, 돌김, 전복 등과 같은 다양한 해산물이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감포 지역은 경주군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었다. 감포 어민들은 구룡포나 울산 쪽 바다로 나가서 조업을 하고 그 지역과 거래를 했다. 그 정도로 감포라는 지역은 경주읍에서 독립적이면서도 고립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행정중심지가 경주부였으므로 어민들은 어물과 건어물 등을 경주시장에 나가 팔면서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런 감포 바다는 일본어민들의 만찬장이었다고 전해진다. 대한제국이 유명무실해져 가는 사이에 '천혜의 어장'을 노렸던 일본 어민들은 1905년경부터 앞다퉈 감포로 이주를 해왔다. 당시 감포 어민들과 달리 일본 어민들에게는 동력선이 있었다. 그래서 끌어올리는 그물마다 만선을 이뤘다고 한다. 이에 가난했던 감포 어민들은 싼 품삯을 받으며 일본인 선주의 배를 타며 일을 했다. 이후 풍어가 들자 각종 업자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감포로 이주해왔다. 일본인 자본가들과 선주들의 돈주머니가 두둑해지면서 감포에는 요릿집이 차려지는 등 유흥 분위기가 생겨났다. 그들은 감포에서 귀족이었다. 또한 그들은 근대 문물과 문화를 들여와 흥청거리면서 즐겼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자본은 감포 거리를 일본식 건물로 채워 나갔고, 전망 좋은 곳에는 일본인의 대저택을 짓기도 했다. 그런던 1925년, 현대 항구 개설 사업의 일환으로서 감포축항(현 남방파제)이 준공되었다. 일제강점기 송대 끝 자연경관은 다양한 성씨의 고총들이 운집한 곳이었는데, 조선총독부 우정국에서는 기념 우표와 엽서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발전을 기반으로 1937년에 이르러 감포는 약 2만 명이 북적이는 항구가 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패망했고, 일제 패망 이후 감포 주민들은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일본인을 심사해 그들의 기선저인망 선박을 감포 주민들에게 귀속해 주는 조건으로 그들을 일본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일본인들이 떠났지만, 여전히 감포에는 적산가옥, 산당, 신사터, 수산물 창고, 공동 우물, 산신석, 송대말등대 및 오다수상 등이 남아 있다.
  • 3. 서울 노원구 태릉과 강릉 답사
    내가 답사한 곳은 서울 노원구 화랑로 681에 위치한 태릉과 강릉이다. 답사지를 선택한 이유는 집과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가을 산책이 가능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노원구는 고대부터 수락산과 불암산 자락과 한강 연안인 중랑천변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일찍부터 인류가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일대에서 고대 토기 등과 같은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고, 인근 양주 일대에서도 고인돌이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다. 노원구의 유적으로는 태릉과 강릉(사적, 1970년 지정), 초안산 분묘군(사적, 2002년 지정) 등이 있다. 먼저 둘러본 태릉은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이다. 태릉은 왕비의 단릉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느낌은 주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으로 본 문정왕후는 그야말로 기가 센 여인이었다. 그녀가 8년 동안이나 수렴청정을 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묘자리(남편의 옆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천릉을 진행한 것에서도 그를 느낄 수 있다. 아울러 아들의 극진한 어머니 사랑도 느낄 수 있었다. 명종은 생전 어머니의 뜻을 들어주기 위해, 즉 어머니가 아버지 곁에 묻힐 수 있게 노력한 효자였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어머니의 묘를 이처럼 웅장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런 효심이라면 문정왕후도 감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강릉에 도달했다. 강릉은 조선 13대 명종, 그리고 그의 부인인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강릉은 같은 언덕 위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하게 조성한 쌍릉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그를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명종의 능이고 오른쪽이 인순왕후의 능이다. 전체적인 능침은 태릉과 같은 형태이다. 하지만 기분 탓이었을까? 어머니의 능인 태릉보다는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달린 문제인데, 내 이미지 속 명종은 이미 효자이고 지고지순한 아들이다. 그렇다보니 능까지 그렇게 보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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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주제2: 일제강점기 감포 개항과 지역의 변천 과정
    일제강점기 감포 개항은 지역 경제와 사회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910년대 감포가 개항되면서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지역 내 일본인 인구가 증가하였습니다. 또한 감포항을 통한 수산물 수출이 활성화되면서 지역 경제가 발전하였지만, 동시에 일본인 자본가들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지역 주민들의 생활 방식과 경제 활동이 크게 변화하였고,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갈등도 발생하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감포는 수산업 중심의 지역 경제 구조를 유지하였지만, 점차 관광업 등 새로운 산업이 발달하면서 지역 경제와 사회 구조가 다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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