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중국의 역사와 문화
1.1. 천안문 광장과 중국의 역사
천안문 광장은 중국 역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곳이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천안문 광장 2층 누각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이래, 천안문 광장은 중국 사회주의 정권의 상징이 되었다.
이 공간은 단순히 역사적 의미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1976년 주은래의 사망으로 인한 시위와 1989년 6월 4일 후야오방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촉발된 학생 시위대의 농성 등, 천안문 광장은 중국 민주화 운동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처럼 천안문 광장은 중국 정치사의 격변기를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천안문 광장은 단순한 역사적 의미를 넘어, 현대 중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010년 상해 엑스포 개최, 2011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스카이라인 3위 선정 등 근래 천안문 광장과 주변 지역이 거듭 각광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종합해보면, 천안문 광장은 중국의 역사와 현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상징적 공간이다. 이 공간의 변화와 역할은 중국 사회가 겪어온 변화와 격동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2. 북경의 역사와 발전
북경은 BC 1000년 燕나라 때부터 수도로 사용되었다. 이후 요나라(南京), 金나라(中都), 元나라(大都), 명나라(北京), 청나라(北京), 중화민국(北平), 중화인민공화국(北京)으로 이어지며 수도의 지위를 유지해왔다. 1421년 명나라 때 처음 북경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손문의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국민당은 남경을 수도로 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공산당과의 기나긴 투쟁에서 실패하면서 북경은 수도로서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에도 대만에서는 북경이 아닌 北平이라고 부르고 있다.
북경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정치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천안문 광장을 중심으로 중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이 전개되어 왔다. 1976년 주은래의 사망과 1989년 6월 4일 천안문 사태 등 중요한 민주화 운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북경의 위상은 단순히 수도로서의 지위를 넘어 중국 역사와 정치 발전의 주요 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1.3. 중국 대표 인물들
1.3.1. 노사
노사(老舍)는 서민적 정서에 가장 충실했던 작가이며 만주족의 후예이다. 1900년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공할 당시에 그의 부친은 자금성의 보위군으로써 전투를 벌이다가 사망했다. 부친의 사망으로 인해 그의 집안은 더욱 빈곤에 이른다. 노사는 제3중학을 중퇴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아 수업료와 기숙사비를 면제해주는 북경사범학원 1기생으로 입학한다. 거기서 5년간 수학한 후 졸업과 동시에 공립 소학교 교장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해 5.4운동이 발발했다. 직접 5.4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동시대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반제국,반봉건의 기치를 높이든 5.4운동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사는 "5.4 신문화운동이 없었다면 그저 성실하고 근면하게 소학교 선생 노릇이나 하면서 노모를 공손히 모시고 고지식하게 남들이 하는 대로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그냥 그렇게 평생 살았을 것이다. 절대로 문득 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채 20살도 안 된 젊은 나이에 소학교 교장이 되었던 그는 2년 후 북교근학원으로 승진하지만 곧 사퇴하고 만다. 청렴결백이 통하기 힘든 조직에서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와 소망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런던대학 동방학원의 중국어 담당 교수로 초빙을 받으면서였다. 영국생활을 통해 기존 중국소설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에 매료되면서 조자왈(趙子曰 ),이마(二马)등의 북경과 관련된 장편을 쓴다. 산동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창작활동에 활발히 종사하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날렸다. 그의 작품 중에 ≪낙타샹즈 駱駝祥子≫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는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노사는 평생 천 여권, 800만 자에 달하는 작품을 남긴 다산 작가이다. 그가 이처럼 뛰어난 작품을 숱하게 창작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소망과 의지 때문일 것이다. 그는 "원고 청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는다."라며 자신의 방침을 정했는데 그만큼 쓰고 싶은 것이 많기도 했을뿐더러 써야만 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안정된 산동대 교수직을 사퇴하고 전업작가로 돌아선다. 같은 만족 출신은 부인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그가 그나마 전업작가로 돌아서기는 쉽지 않았을 선택이었다. 전업작가로 돌아선 후 작심하고 쓴 첫 번째 작품이 【낙타상자】이다. 탈고한 그 해 연재하기 시작한 낙타상자는 북경 구어를 활용하여 하층민의 삶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그의 대표작이다. 항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 역시 시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또한 문화대혁명은 끝내 그의 미래를 과거,현재와 함께 완전히 삭제시키고 말았다. 북경에서 동료들과 함께 납치되어 수백 명의 홍위병들에게 욕설과 구타에 시달린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새벽 2시쯤에 귀가하였고, 그날 아침 외출한 후 실종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북경사범대학 옆에 있는 태평호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의 작품의 성격은 불합리한 사회구조로 인해 고통 받는 개인을 묘사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작품이입을 시켰고 유머러스하고 풍자적인 표현으로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1936년 봄에 쓰여진 【낙타상자】는 북경의 인력거꾼인 주인공이 하층 사회에서 겪는 인생의 역정을 내용으로 한 것으로 사회 최하층의 노동자가 비참한 운명 속에서 벗어나려 하는 몸부림에 대해 작가의 관심과 동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작품을 통해 작가의 선량함,착실한 인품이 잘 드러난다. 노사는 장편소설의 예술적인 면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모순,파금 등과 함께 '현대 장편소설의 세 거두'로 일컫어지고 있다. 노사의 소설은 파노라마 식으로 북경 시민들의 생활과 풍속을 그려내어 북경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1.3.2. 천카이거
천카이거는 1966년 베이징 4중학교 1학년을 마치자마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홍위병이 되었다. 그는 1975년까지 윈난성으로 가서 벌목과 군인 생활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3년 동안 필름노동자 생활을 하였고, 1978년 베이징영화학교 감독과에 들어가 4년 동안 장이머우 등과 함께 배웠다.
1982년 베이징 영화촬영소에 배속되었으나 관료적인 분위기가 싫어 2년 뒤 광시영화촬영소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장이머우가 촬영하고 자신이 감독한 첫 번째 작품 《황토지》를 만들어 국제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으며 중국영화 제5세대의 출현을 알렸다.
1988년 미국 뉴욕대학에서 중국영화를 강의하였는데 천안문사건을 맞아 1990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정부와의 심한 마찰 때문에 외국과 합작영화를 만들며 활동하고 있다. 그의 영화 전반에 흐르는 상징성, 은유와 우의성의 표현이 구체성을 잃게 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 간다는 강한 자신감을 독특한 회화적 구도와 색채 연출로 표현하였다.
《해자왕(孩子王)》은 교사의 눈을 통해 중국 사회주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했고, 《현위의 인생 邊走邊唱》은 돈 외에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현대 중국인들의 현실을 장님 예술인을 통해 은유적으로 조명한 작품이다. 특히 1993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패왕별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이유로 중국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1.3.3. 이연걸
이연걸은 랴오닝성 출신으로, 8살부터 중국 전통무술인 우슈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3년 후 그는 베이징 우슈단 소속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했으며,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전국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1974년에는 닉슨 대통령의 미국과 중국의 국교 정상화를 맞아 백악관에서 격투기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중국을 대표해 45개국 이상을 돌며 무술 시범을 선보였다.
17세의 나이에 최고의 기량에 오른 이연걸은 자신의 첫 번째 영화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중국의 영화 스타로 떠올랐다. 영어에도 능통하며 매일 불교철학 관련 서적을 읽을 정도로 독서에도 조예가 깊다고 한다.
이연걸은 1위안이라는 단체를 설립해 자선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특히 2008년 쓰촨 대지진 당시에는 1년 동안 영화 촬영을 금지하고 이재민 구호 활동에 전념했다. 당시 그는 "개런티로 계산하면 매년 1억 위안(약 150억원) 정도 수입이 줄겠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다. 되도록이면 많은 시간을 내서 이재민을 돕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연걸은 중국을 대표하는 영화스타이자 자선가로서 활약하며, 중국 문화와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인물이다.
1.3.4. 장쯔이
경제학자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쯔이는 베이징 무용학원을 다닌 후, 중국에서 가장 좋은 연기학교인 중앙연극학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데뷔 초에 '작은 공리'로 불려지면서 대 스타의 닮은꼴 배우로 시작했던 그녀가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 석자를 세계에 알렸다.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