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당신이 이 소설을 읽고 흔들리길 바란다.”얼어붙은 사춘기, 끝내 맞이하는 성장과 치유『아몬드』 『유원』을 잇는 눈부신 성장소설성장하는 이들의 마음을 세밀히 살펴 온 이현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호수의 일』이 출간되었다. 열일곱 살 주인공 호정이 은기와 만나 경험하는 설렘과 사랑, 각자의 상처를...
책장을 넘기자마자 느껴진 첫 감정은 아주 조용한 물결이었다. 아무런 소음도 없이 천천히 스며드는 이야기,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종종 강렬한 서사를 기대하고, 빠른 전개에 익숙해진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붙잡았다. 소란스러운 사건 하나 없이도, 한 문장 한 문장이 차분하게 가슴을 눌러왔다. 마치 깊은 호숫가에 혼자 앉아 있는 것처럼, 조용하고 외로운데도 어쩐지 마음이 편안했다.
읽는 내내 마음은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빨리 읽고 넘어가고 싶은 마음보다, 한 문장을 오래 바라보고 싶은 충동이 더 컸다. 등장인물들의 움직임도, 대사의 리듬도 아주 느리게 흘렀지만, 그 속에는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직한 호흡이 담겨 있었다. 고요함은 때로 무거움과 맞닿아 있었고, 잔잔한 수면 아래에는 설명되지 않은 감정들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 감정들은 말로 다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말이 없기에 더 크게 다가왔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는 여러 번 내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내 마음의 구석에서 오래 묵혀둔 감정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쉽게 꺼내지 못한 말들, 스쳐 지나간 순간들에 대한 후회와 그리움이 고요한 이야기 속에서 파문처럼 번져 나왔다. 어떤 책은 삶을 향해 나아가게 만들고, 어떤 책은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이야기는 분명 후자였다. 그것도 아주 깊은 곳까지 내려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문장을 따라갈수록 나는 더 말이 없어졌다. 설명하고 싶지 않았고, 해석하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느끼고 싶었다.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두고, 그 안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렇게 한동안 나도 말 없는 독자가 되었고, 말 없는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는 여행자가 되었다. 때로는 이야기가 내 앞에 있는 듯 느껴졌고, 때로는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 있는 듯도 했다.
책을 고르는 일은 내게 늘 하나의 모험이다. 언제나처럼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베스트셀러 코너보다는 조용하고 깊은 문학섹션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표지가 유난히 고요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화려한 색채도 없고, 요란한 문구도 없었지만, 어딘가 낯설고도 친근한 제목에 마음이 끌렸다. '호수'라는 단어가 풍기는 정적인 분위기와 '일'이라는 평범하면서도 열린 단어의 조합은 오히려 더 많은 상상을 가능하게 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청소년문학이라는 분류가 무색할 만큼 문장의 밀도가 높고, 어른들이 놓치기 쉬운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담아낸다는 평을 접한 것도 읽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 단순히 성장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침묵이 품고 있는 무게, 그리고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파편들을 조용히 그려낸다는 점에서, 지금의 내 삶과도 닿아 있다고 느꼈다. 최근 들어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피로와 감정의 미세한 균열들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는데, 이 책이 그런 감정들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궁금했다.
주인공 호정은 집에서는 심드렁한 사춘기 소녀이다. 공부는 그럭저럭 하는 편이고 나래, 지후 등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겉보기에 무난한 고등학생이었다. 어느 날, 은기가 전학을 오고 어딘지 자신과 닮은 은기와 교감을 한다. 호정은 이십 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양육이라는 짐을 지게 된 부모에게 죄책감과 어쨌든 어린 자신을 온전히 돌보지 않고 할머니에게 맡겨버린 그들에게 섭섭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아홉 살 터울 동생 진주를 살갑게 대하는 부모를 보며 원망을, 해맑은 동생을 보며 질투를 느끼지만 드러내지 않는다. 은기의 사연은 더욱 어둡다.
사춘기를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말한다. 고요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폭풍이 불어 닥치기도 할 정도로 감정의 변화가 매우 변화무쌍한 시기이다. 우리나라에 4계절이 있는 것처럼 사춘기의 감정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이 계절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인해 할머니 댁에서 지내게 된 주인공 호정은 집안이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다니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 이런 집안의 분위기가 화목할 수 있을까? 어쩌면 호정은 외로움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부터 원망이라는 감정을 먼저 배웠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