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호러영화의 다양한 양상들 중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것 중의 하나로 한이 맺힐대로 맺힌 살인마의 느닷없는 등장 이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 살해당하는 줄거리가 큰 뼈대를 이루는 영화들이 있다. 그 중의 한 예가 텍사스 살인마이다. 이 영화는 아주 적은 제작비로 정말로 실감나는 특수분장으로 사실감을 더했고 그 사운드 또한 긴장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의 특징은 남자들로만 구성된 대가족은 샐리를 생포해 놓고도 강간을 한다거나 성과 관련된 장난이나 행동은 일체 없고, 오로지 그들의 욕망은 살인과 식인에만 집중되어 있다. 식사장면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의자에 묶인 채 벌벌 떨고 있는 샐리를 즐겁게 해 주라고 하는데 두 아들은 그녀를 고문하거나 겁을 줄 뿐이고, 그것을 보는 아버지는 낄낄거리면서 만족해한다. 이렇듯 여성과 섹스가 배제된 이들의 모습은 전통적인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가족형태는 결국 미래가 없고, 곧 대가 끊어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또한 그들은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직접 샐리를 도살할 기회를 주기도 하는데, 이런 식으로 그들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전통적인 가족제도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또한 끔찍한 것인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식인가족들의 끈끈한 유대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전반부에 드러나는, 남매가 포함된 젊은 남녀 여행객들끼리의 신경질적이고 부정적인 인간관계 또한 강조함으로써 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이 영화에서 더욱 특이한 점은 희생자들이 오히려 외지인들이라는 것이다. 즉, 억압하는 자가 정상인이고 억압당하는 자가 비정상인이라는 사회기준을 이 영화는 그 사례를 뒤바꿔 놓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상인이 비정상인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 예로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하얀 건물의 집은 겉보기엔 단란한 중산층 가정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선 살인과 식인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차피 괴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괜히 솟아오르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들은 우리 내부에서 온 것이고, 우리가 직접 키워낸 괴물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괴물이 될지, 혹은 이미 우리가 바로 그 괴물인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식인가족들은 맨손으로 소를 도살하고 처리하는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순진한 시골 농민들이었지만, 시대가 변하자 그들의 기술은 쓸모가 없어져 그들이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었던 것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이 되어 버렸고,. 이런 상실감과 분노감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쳐진 행위가 사람을 도살해 먹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들이 한 행위는 막연하게 솟아오르는 인간에 대한 분노감 해소와 그들의 자아실현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그들로서는 매우 이상적인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새로운 직업정신은 전기톱을 들고 마치 춤추듯이 스핀도 하고 멋진 모습으로 목표물을 쫓는 장면들에서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희생자들의 뒤를 쫑는 장면 그리고 희생자의 모습을 나뭇가지나 풀숲 사이에 두고 찍는 등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독득한 감정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영화 전반에 걸쳐 잔혹한 장면은 몇 번 등장하지 않고 불안한 나래티브로 복선과 음악으로 공포를 대치시킨다. 전기톱을 이용하는 살인마라든가 외따로 떨어진 농가에서 펼쳐지는 살육 게임, 그리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고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족이야기 등은 전형적인 호러영화의 한 양식이 되었다.위에서 말한 텍사스 살인마와 같이 화면 가득히 피가 난무하는 호러영화에서 느끼는 공포가 '보지 않았으면..' 하던 것을 끝내 확인하게 되는데서 오는 절망감과 황당하긴 하지만 다소 적나라하게 전개되는 인체해부에서 오는 잔인함에 있다면 오멘 같은 영화에서 시종일관 보여지는 집요한 악마와의 싸움은 양상이 다르다. 마치 보이지 않는 적과 아무런 소득 없는 싸움을 하는 것과 같은데, 여기서 더욱 상황을 절망스럽게 만드는 것은 주인공들과 싸우는 적들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악마'라는 설정, 심지어 어린이들의 영혼에도 악마가 들어가는 등의 만행이 서슴치 않고 자행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악마들의 존재는 때때로 십자가의 위력을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즉, 신체절단이나 흥건한 피의 잔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역사적인 현상을 초월한, 따라서, 종교조차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오멘에 등장하는 한 어린이의 그림자가 만드는 늑대의 형상, 갓 태어난 어린이의 머리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666이라는 숫자가 주는 섬뜩함은 영화가 끝이 나도 개운치 않은 결론만을 남겨준다. 또한, 단순하게 선이 승리하는 식이 아니라 실패함으로서, 관객에게 미완의 공포와 현실의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추상화되어 있는 악마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를 추종하는 사교집단을 평범한 사람들로 표현하여 새로운 악마주의 영화의 효시가 된 이 영화는 상류층 가족의 지속적인 붕괴를 통해 외부로부터 온 위험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경고적 메시지를 띄고 있다. 특히 시대적 분위기와 노골적으로 보수적인 시선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반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