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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사회와 문화]이종격투기, 과연 폭력적인가? 평가B괜찮아요
    들어가는말어린 시절 품었던 궁금증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로보트 태권브이와 마징가 제트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종합 격투기(또는 이종격투기라고 불리기도 하는)의 신선함은 이런 원초적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물론 일본에서는 60-70년대부터 종합격투기 붐이 일기 시작했다지만 우리나라는 1-2년 전에 케이블티비에서 일본의 한 격투기대회를 방송하면서부터 사람들이 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국내의 일부 매니아 층만이 즐기던 것에서 청소년들과 직장남성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그에 따라 국내에 큼직한 종합격투기 단체만 3-4개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상대를 쓰러뜨린다’는 오직 하나의 룰 아래 복싱, 태권도, 가라데, 유도, 유술, 레슬링, 무에타이, 합기도, 등 다양한 격투기 고수들의 한판 승부가 가능해진 것이다. 스포츠에서도 포스트모던한 혼성잡종이 이뤄진 셈이다. 각 영역을 세분화해서 규칙을 고도로 발전시켜온 것이 근대성의 한 특징이라면, 포스터모던은 이 벽을 넘어서려는 이종교배의 문화. 근대의 세분화된 장르가 점차 고루한 관습의 벽이 되어버린 탓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근래에 들어서 국내상황의 얘기이고 일본은 이미 종합격투기에 관한한 셰계적인 국가가 되었으며 선수들에 대한 사회적 지위나 인기 또는 경제적 수입까지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현재 일본 문화의 굵직한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격투기 문화를 살펴보기로 한다.일본종합격투기의 역사우선 일본 종합격투기의 역사를 말하자면 일본 프로레슬링 영웅인 역도산이 활동했던 시기부터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도산을 일본인 중에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라고 하는 경기의 일본수입, 그 링 위에서, 덮쳐 오는 외국인 레슬러를 통쾌하게 해치우는 모습은, 패전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일본인에게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선수들의 동작에 라고 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후에 역도산이 술집에서 야쿠자의 말단 조직원에게 칼에 찔렸다고 하는 보도가 일본을 강타하였다.래서 나온 말이 이다. 프로레슬링은 어떠한 경기, 스포츠보다도 뛰어난 것으로, 격투기로서도 모든 것들 보다 강하다! 라는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그 주장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세간은 납득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노키는 그것을 증명하려고 움직이는데, 그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이다. 가장 주목받았던 것은, 당시 프로복싱 세계 헤비급챔피온인 무하마드 알리와의 일전이다. 결과로는 15R 풀로 싸워 무승부가 된다. 이 경기는 아직까지도 가장 지루했던 경기라고 평가받기는 하지만 일본의 종합격투기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타이거 마스크로 유명했던 사야마 사토루가 타격, 굳히기, 메치기, 조르기등을 컨셉으로 하는 이라는 새로운 아마추어 단체를 만들었다. 이것은 당시 발리투도(무규칙 격투기)에 가장 가까운 형태였다고 할 수있다. 그리고 80년대에 마에다 아키라가 통솔하는 UWF는 이노키의 신일본프로레슬링의 제휴, 프로레슬러 vs 격투기선수의 시합들을 거치고 결국은 붕괴되면서 세개의 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 무렵이 종합격투기' 라는 말이 일반화 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세개의 파는 1. 마에다 아키라가 이끄는 링스 2. 타카다 히데히코가 이끄는 UWF INTERNATIONAL(약칭 U-INTER) 3. 후지와라, 스즈키, 후나키가 주축이 된 후지와라조(후에 판크라스가 됨) 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 3개의 단체는, 각각 컨셉을 갖고, 흥행을 벌이고 있었다. 링스는 '프로레슬링' 이 아닌 '종합격투기' 를 제창하며, '여기는 여러 장르의 격투기 선수가 시합을 할 수 있는 장' 이라는 컨셉 아래 흥행을 지향했다. U-인터는, 어디까지나 '프로페셔널 레슬링' 을 제창하여, '프로레슬링이야 말로 최강의 격투기' 를 모토로 흥행을 벌여간다. 후지와라조(組)에 대해서는, 이 시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후지와라조도 격투기 노선을 걷고 있었던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프로레슬링이 격투기와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한 것이하다는 다케다 노부히코 선수와 힉슨 그레이시 선수와의, 이른바 라고 할 수 있는 PRIDE-1 이라는 대회를 개최하였고 이것은 후에 흥행에 크게 성공해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대회중의 하나가 된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PRIDE-FC, K-1, 판크라스 등이 유명한 일본의 격투기대회가 되게된다.일본만큼 성과 폭력을 상업적으로 잘 이용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날마다 TV를 비롯한 매체들은 이것들을 상품으로 팔아먹기에 혈안이 돼있다. 현재 인기있는 만화나 오락게임들은 상당부분 폭력을 소재로 하고있다. 자극은 더욱 강한 자극을 원하는 법…이젠 만화나 게임속의 가상 케릭터가 아니라 실제 인물들이 피범벅이 되며 싸우는 경기가 등장한 것이다. 사람들은 경기를 보면서 폭력에 대한 대리만족을 얻는다. 청소년들은 이런 매체에 쉽게 노출되고 은연중에 이것을 모방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한다. 과연 자극의 끝은 어디일까…일본에서 격투기는 이미 소수가 즐기는 피튀기는 아닌 대중에게 인기종목으로 각인되어있는 스포츠이다. 복싱의 세계 타이틀매치나 K-1같은 격투기이벤트가 열린 다음 날이면 각종 스포츠신문들의 1면은 그 시합 관련기사들로 꽉꽉 메워진다. 일본의 한 격투기 선수에게 왜 그런 살벌한 격투기의 세셰에 뛰어들었냐고 묻자 웃으며 대답했다. "살벌한 생존경쟁의 사회나 격투기의 세계, 나에겐 중요하지 않다. 어디든 마찬가지이다. 나는 내가 잘하는 것을 하는 것뿐이다" 고 했다고 한다.격투기 경기는 도쿄돔같은 큰 경기장에서 열린다. 4만명 이상의 관중이 들고…제일 싼곳의 입장료가 우리돈 6만원에서 링 사이드는 100만원 까지…일본의 민간 방송들도 이 경기를 생중개하고 매니아 팬들은 선수 팬클럽 까지 만들어 활동 하는데…무엇이 일본인들을 이 피의 경기에 열광하게 만드는가. 사람들은 경기를 보면서 폭력에 대한 대리만족을 얻는다. "사람들은 강한것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 줄 영웅을 갈망하고 있죠. 링위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선수들을 그리고 깨끗하게 승복하는 자세, 이런 승부의 원초적 건강성을 경험하고 싶은 충동”이라고 해석했다. 예컨대 선거에서 지면 언제나 ‘~탓’으로 합리화하는 현대사회의 위선에대한 염증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폭력의 탈신화화, 리얼의 세계 그러나 현실은 냉혹한 법. 이런 맞짱, 고수들끼리의 맞대결은 상상처럼 멋진 것이 아니다. 차라리 처절한 몸싸움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이런 리얼한 싸움, 환상적인 날아차기가 아닌 ‘무식하게 치고 차고 자빠뜨리는’ 싸움이 오히려 이종격투기의 매력이란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프라이드 등 일본 이종격투기 대회의 한 뿌리가 프로레슬링에 대한 반발에서 나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쇼가 아니라 진짜 격투다.’폭력조차 복제되었기 때문일까. 환상과 신비를 제거하고 적나라한 현실을보고 싶어하는 이들의 갈구. 달리 말하면, 이는 고도 합리화 사회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이 영화 ‘매트릭스’처럼 가상의 복제된 삶에 갇혀 있다고느끼기 때문일지 모른다. 폭력성의 승화인가, 폭력의 일상성인가이런 저런 해석에도 불구하고 이종격투기에 ‘폭력성’이 자리잡고 있다는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것은 결국엔 ‘링 위의 피’이며 녹다운되는 모습이다. 이종격투기 옹호론자들은 이에 대해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원초적 폭력성을 링 위에서 승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한직장인은 “넥타이를 맨 나를 링 위의 선수와 동일시하면서, 잃어버린 야성을 찾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종 격투기 마니아에 의외로 고학력 지식인층이 많다는 것도 이런 ‘잃어버린 원시성’에 대한 갈구로 읽히게 한다. ‘링 밖의 폭력은 천박하지만, 링 위의 승부는 아름답고 순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론도 여전히 만만찮다. 사회적 폭력이 만연하고 우리의 내면 또한 폭력에 길들어진 상황에서, 이종격투기는 폭력적 사회를 폭력으로 해소하고, 이를 일상화하는 또 하나의 게임이라는 것이다. 이동연 문화사회연구소장은 “폭력을 쾌락화함으로써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심리를파고든, 스포츠 마케팅이 만하는 사람에게 다소 과격하게 보이는 것은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종격투(異種格鬪)시합은 말 그대로 서로 다른 종류의 격투기가 격돌하는 격투시합이고, 복싱처럼 상대를 타격하는 무술이나 유도처럼 바닥에서 구르면서 조르고, 꺾는 무술등의 시합규칙 등을 아우를 만큼 포용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기술적인 생소함이 사람들의 눈에 어색하고 폭력적으로 보였던 것 뿐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백여년전 복싱시합이 대중에게 처음 선 보였을때, 폭력적이며 저급하다고 매도되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이종격투에 출전하는 이종격투선수 들이 지나치게 위험해 보인다는 것도 이종격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라고 본다. 이종격투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얇은 오픈 핑거 글러브(상대방을 잡기 위해 손가락과 손바닥 부분이 드러난 격투용 글러브) 와 타이즈만 착용하고 시합하는 이종격투기가 치명적인 부상에 이를 만큼 선수들의 생명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전문가들은 이종격투시합이 복싱이나 킥복싱보다 더 안전하다고 말하며 실제로도 시합중에 선수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거나 사망한 경우는 PRIDE나 UFC같은 메이저 대회일 경우 전무에 가까울 정도이다. 특히 복싱이나 킥복싱 시합의 경험이 많은 이종격투 선수들은 이종격투 시합이 복싱이나 킥복싱보다 훨씬 안전하고 부상의 위험도 덜 하다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종격투기가 복싱에서 두꺼운 글러브를 끼고 시합하면서 선수의 뇌에 내상을 입히거나, 무에타이나 킥복싱 시합에서 상대방의 몸에 직접적인 타격을 장시간 입히는 것보다, 단시간에 얇고 단단한 글러브로 외상을 입히거나 그래플링(엉켜 싸우는 격투)에서 굳히기(조르기,관절기,누르기등)로 상대의 신체에 큰 부상을 입히지 않고 승부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얇은 글러브의 타격으로 인한 출혈이나 마운트 포지션에서의 공격이 과격하고 얼핏 보기에 폭력적으로 보이지만, 노련한 심판과 엄격한 규칙아래 이종격투에 익숙한 선수들이것이다.
    사회과학| 2004.03.09| 4페이지| 1,500원| 조회(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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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사회와 문화] 태평양전쟁 평가C아쉬워요
    태평양 전쟁중국에서 아무 소득도 없이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에 싫증난 일본은 유럽의 상황을 이용하여 동아시아에 있는 유럽 식민지를 강탈하기로 결심했다. 네덜란드령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영국이 차지하고 있는 말레이 반도에는 일본의 산업 경제에 필요한 원료(주석·고무·석유)가 있었다. 일본이 이 지역을 빼앗아 일본 제국에 병합할 수 있다면 사실상 경제 자립을 이룩할 수 있고, 그리하여 태평양의 지배세력이 될 수 있었다. 1940년말까지 일본 전략가들은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도 일본이 상대할 적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1년이 되자, 영국·네덜란드·미국도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연합 함대 사령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를 주축으로 한 일본 전략가들은 대담한 전쟁 계획을 새로 세웠다. 일본은 태평양 확전(擴戰)의 주된 상대국으로 예측한 미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1년 12월 7~8일에 하와이 진주만과 필리핀에 있는 미국의 군사시설을 공격했다.야마모토의 계획에 따라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 타격대는 미국 정찰대에 포착되지 않은 채 하와이 북쪽 440km 지점에 이르렀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이 항공모함에서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雷擊機) 및 약간의 전투기로 이루어진 360여 대의 항공기가 새벽 공기를 뚫고 2패로 나뉘어 날아올랐다. 이 항공기들은 진주만에 있는 거대한 미국 해군 기지로 기수를 돌렸다. 당시 이 기지에는 미국 전투함 70척과 보조함정 24척 및 300여 대의 항공기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완전히 기습당했고, 정박중이던 전함 8척이 모두 공격받았다(그러나 이 가운데 6척은 수리되어 다시 해군에서 활약했음). 순양함 3척과 구축함 3척, 기뢰 부설함 1척을 비롯한 수많은 함정이 파손되었고, 180대가 넘는 항공기가 파괴되었으며 나머지도 손상되었다. 2,000명이 넘는 장병이 죽었고, 부상자도 1,000명이 넘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은 1가지 중요한 일 미국의회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반대한 의원은 단 1명뿐이었다.진주만을 공격한 바로 그날, 타이완臺灣에 기지를 둔 일본 폭격기들은 필리핀에 있는 클라크 군용비행장과 이바 군용 비행장을 공격했다(현지 시각으로는 12월 8일). 미국 극동군이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의 50% 이상이 파괴되었다. 2일 뒤, 일본은 다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전투기를 더 많이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역시 필리핀에 있는 카비테 해군기지도 파괴했다. 그러나 미국 아시아 함대의 일부는 11월에 이미 남쪽으로 내려갔고, 살아남은 주요함정과 폭격기는 보호해 줄 전투기가 없어서 공격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후 2주간 더 남쪽에 있는 안전한 기지로 철수했다. 필리핀에는 지상군 이외에 전투기 몇 대와 잠수함 30여 척, 그리고 몇 척의 소형 선박이 필리핀을 방어하기 위해 남았다.마닐라는 1942년 1월 2일 일본군에 함락되었지만, 그때 이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휘하의 미군과 필리핀군은 바타안 반도(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마닐라와 마주보고 있는 반도)와 코레히도르 섬(마닐라 만에 있는 섬)을 지킬 태세를 갖추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바타안 반도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했지만, 일본은 그후 8주간 계속 병력을 증강했다. 맥아더는 3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로 전속 명령을 받고 떠나면서, 바타안 방어를 조너선 M. 웨인라이트 중장에게 맡겼다. 웨인라이트 중장과 그의 부하들은 4월 9일에 항복했다. 코레히도르 섬은 5월 5~6일 밤에 함락되었다. 그리고 필리핀 남부는 3일 뒤에 항복했다.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양쪽의 전사자는 각각 5,000명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일본 폭격기들은 1941년 12월 8일에 이미 홍콩에 있는 영국 공군력을 파괴했고, 영국과 캐나다 수비대는 크리스마스에 광둥 반도廣東半島에서 건너온 일본 지상군의 공격을 받고 항복했다. 일본군은 남쪽의 말레이 반도로 진격하는 동안 측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12월 9일에 방콕을 점령했고 12월 16일갑부대의 지원을 얻어 싱가포르 섬을 제외한 말레이 반도 전체를 점령했다.일본은 순식간에 필리핀을 점령했고, 동남아시아와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의 많은 섬들을 점령했다. 1942년 2월 25일 일본군에 점령되지 않은 곳은 자바 섬뿐이었다. 연합군은 자바 섬을 침략하는 일본 함대를 차단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2월 27일 자바 해에서 벌어진 7시간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연합군은 전함 5척을 잃었고, 일본군은 구축함 1척만 약간의 손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3월 9일 자바 섬에 주둔해 있던 연합군 2만 명이 항복했다. 그 직후 태평양 지역에는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전략 지시를 받는 미국·영국 통합 참모부가 설치되었다. 맥아더는 남서태평양 지역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주요임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을 잇는 병참선을 지키고, 일본군을 태평양 안에 가두어놓고, 북아메리카 방위를 지원하고, 육해공군 합동 작전에 따른 대규모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당초 계획은 자바 섬 점령으로 실현되었지만, 미국 태평양 함대는 1942년 2월 1일에 마셜 제도를 공격했고 2월 23일에는 웨이크 제도를 공격했으며, 3월 1일에는 마커스 섬을 공격했다. 이와 함께 2월 23일에는 라바울을 폭격했고, 오스트레일리아에 기지를 세워 남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병참선을 확립했다. 그러자 일본은 계획을 확대하여,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이어진 연합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인들은 누벨칼레도니, 피지 제도 및 사모아 섬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고, 뉴기니 동부도 차지하여 포트모르즈비에 비행기지를 만들면 오스트레일리아를 위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은 북태평양의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고 알류샨 열도에 비행기지를 만들 계획도 세웠다.1942년 4월 18일에 미군 폭격기 16대가 도쿄東京를 공격했다. 이 공습은 일본정부의 위신을 떨어뜨렸을 뿐 진정한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연합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5월 7일 일본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들이했다.미드웨이 해전은 아마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싸움에 결말을 내기 위해 대형 항공모함 4척과 소형 항공모함 3척, 수상비행기를 탑재한 항공모함 2척, 전함 11척, 순양함 15척, 구축함 44척, 잠수함 15척, 그리고 잡다한 소형 함정들을 집결시켰다. 미국 태평양함대는 대형 항공모함 3척과 순양함 8척, 구축함 18척, 잠수함 19척만 갖고 있었지만, 함대를 지원해줄 항공기를 115대가량 보유하고 있었다. 6월 3일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기 위해 출발한 일본 전함들이 목표 지점에서 800km 떨어진 곳에 이르자, 미국 폭격기들이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본군은 6월 4일 새벽에 항공기를 보내어 미드웨이 섬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의 대형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침하고, 대형 순양함도 1척 침몰시켰다. 6월 4~5일 밤에 일본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이미 손상을 입었던 미국 항공모함 요크타운호는 6월 6일에 어뢰를 맞고 침몰했지만, 미드웨이 섬은 안전했다. 일본은 미드웨이에서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과 가장 우수한 해군 조종사를 거의 다 잃어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연합국이 미드웨이에서 거둔 승리의 중요한 측면이었다. 그후 일본과 연합국의 해군력은 사실상 대등해졌다. 일본은 전략의 주도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누벨칼레도니와 피지 제도 및 사모아 섬의 침략 계획을 취소했다.일본이 서방 연합국에 대항하여 전쟁에 참여한 것은 중국에 영향을 주었다. 1941년 12월 9일 장제스蔣介石 정부는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했을 뿐만 아니라(이는 오래 지체시킨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음), 독일과 이탈리아에게도 했다. 이것은 군사적 의도보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선전포고였다. 이어서 중국의 3개 야전군은 미얀마 국경으로 몰려갔다. 미얀마 공로(公路)는 서방 연합국이 중국에 보급품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육로였기 때문이다. 1942년 1월 3일 장제스는 중국 전투 지역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인정되었다. 루손섬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아시아 12개국에서 약탈한어마어마한 양의 금을 숨겨놓았다. 그 작업을 지시한 사람은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사촌인 다케다 쓰네요시였다. 아시아 약탈 계획인 작전명 ‘골드 릴리’에 따라 긁어 모은 금으로 미군의 해상봉쇄에 따라 일본으로 보내지 못한 금이었다.나중에 되찾을 생각에서 그들은 섬 전역의 동굴과 터널에 175개의 보물창고를 건설했다. 증거는 모두 인멸됐다. ‘터널_8’이라는 금괴로 가득한거대한 방을 만든 175명의 기술자들은 약 65㎙ 지하에서 송별회를 하던 중터널 입구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져 모두 생매장됐다. 야마시타 장군은 9월2일 미군에 항복했고, 이듬해 전범으로 사형 당하면서도 이 비밀을 지켰다.그러나 미군은 야마시타의 운전 장교를 통해 숨겨진 금의 위치를 파악했다. 맥아더 장군은 2㎙ 높이의 금괴 속을 거닐었고, 그것을 비밀정치자금으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냈다. ‘야마시타 골드’라고 이름 붙여진 이 금은 역대 미국 대통령의 비자금이 됐다. 조지 W 부시 현 미국 대통령도 사용하고 있다.이 소설 같은 이야기는 워싱턴 포스트 기자 출신인 스털링 시그레이브와그의 부인인 페기 시그레이브가 지난해 쓴 ‘야마시타 골드’(원제 Goldwarriors)에 있는 이야기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실화다. 저자는 수천시간에 걸친 관계자 인터뷰와 수천 건의 문서 조회를 거쳐 일본군의 아시아 약탈과 전후 일본과 미국 간의 금에 얽힌 검은 거래를 밝혀냈다.스털링 시그레이브는 중국과 미얀마의 국경 지대에서 성장한 아시아통이다. 국내에 번역돼 베스트셀러가 된 ‘송씨 왕조’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장제스(將介石) 대만 전 총통의 부인으로 최근 타계한 쑹메이링(宋美齡)과 그의 언니인 쑨원(孫文)의 아내 쑹칭링(宋慶齡) 등 송씨 3자매가 중국 현대사를 움직인 막후 실력자였음을 밝혀 화제가 됐다.‘야마시타 골드’는 세계 최대의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에서도 별 5개를받을 만큼 호평을 받았다. 여러 방송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됐다. 두 장의CD에 담이다.
    사회과학| 2004.03.09| 4페이지| 1,000원| 조회(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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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사회와 문화] 태평양전쟁 평가C아쉬워요
    태평양전쟁 (the War in the Pacific)학번 이름 쓸 곳~^^日의 진주만 기습공격목차배경 - 당시의 국제정세, 전쟁 발발 원인 전황의 추이 - 1~4 기 전후 생각해 봅시다배경1940년~1941년의 국제 정세 태평양전쟁의 발발 원인 →자원의 필요성1942년 당시 독· 일 ·이의 세력권전황의 추이제1기 (1941.12~1942.8) 개전~ 연합군의 과달카날 상륙 제2기 (1942. 8 ~1943.2) ~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철수 제3기 (1943. 2~1944.10) ~ 필리핀해전 제4기 (1944.10~1945.8) ~ 일본의 항복전후Solomon제도의 지리적 위치Solomon제도 Guadalcanal 에서의 미-일군 주요 진격로가미가제 특공대생각해 봅시다Ⅰ. 히로시마 원폭투하 Ⅱ. 태평양 전쟁에 의한 민간인 피해자 문제Ⅰ. 히로시마 원폭투하1. “ENOLA GAY” 전시회Ⅰ. 히로시마 원폭투하2. 원폭과 관련된 미국과 일본의 갈등Ⅰ. 히로시마 원폭투하3. 원폭으로 인한 조선인의 피해 4. 미국의 대한반도 핵정책Ⅱ. 태평양 전쟁에 의한 민간인 피해자 문제1. 피해자 현황 2. 한일 협정과 국적포기서 3. 지배계급의 전쟁논리The EndThanks for reading..{nameOfApplication=Show}
    사회과학| 2004.03.09| 16페이지| 1,000원| 조회(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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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남미문화사] 라틴아메리카의 안데스 원주민음악
    안데스 음악잉까(Inca)문화의 중심지였던 안데스 산악지방에서는 원주민 음악(잉카족이나 아이마라족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가 서반아음악과 조화를 이루면서 독특하고도 매혹적인 혼합음악이 생겨나게 되었다. 초기에는 3음계(do, fa, la)가 사용되는 께추아(Quechua)음악의 특성이 주조를 이루었으나 식민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인디오적인 영향은 점점 줄어들고 유럽음악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7음계가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주요악기로는 하프와 토착민의 피리인 께나(quena)와 갑옷쥐(armadillo)의 등껍질로 만든 차랑고(charango)라는 이름의 작은 기타 그리고 까하(caja)로 통하던 유럽식베이스 드럼이 있으며, 카리브해의 섬나라들과는 달리 바이올린 계통의 현악기는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1. 안데스 음악의 전승잉카가 대제국으로 존재했던 기간은 1세기 남짓한데 1430년대까지는 꾸스꼬(Cuzco)계곡을 통치하던 지방왕국에 불과했지만 계속된 정복사업으로 안데스 지역의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1532년 말 황금을 찾아서 스페인에서 온 정복자 프란시스코 삐사로에 의해 잉카제국의 마지막 왕인 아따우알빠 왕이 화형당함으로서 잉카제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잉카는 '께추아'어로 '태양의 아들'이란 뜻)1614년 뻬루의 수도 리마(Lima) 대교구 카톨릭 승정은 "악마의 장난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께나를 포함한 모든 인디오 악기들을 불태워버리라고 명했다. 그리고 이 악기를 만드는 자와 연주자 모두 처형했다. 이런 박해 속에서도 잉카의 후손들은 그들의 음악을 보존해왔다.식민지로 건설이후 200여 년이 흐른 1700년 중엽, 스페인 학정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다. 그 주모자는 인디오와 스페인 혼혈인 호세 가브리엘 꼰도르깐끼는 스스로를 "뚜빡 아마루 2세(Tupac Amaru II)"라 칭하며 잉카제국의 부활을 시도하다가 1781년 나이 39살에 스페인군에 사로 잡혀 총살당한 후 사지가 찢겨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가 죽어 콘돌(Condor)로 환생해 안데스 창공을 날으며 원주민 인디오들을 보호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이 전설은 인류학자이며 작곡가인 다니엘 알로미아 로브레스가 잉카의 오래된 민속음악을 채집·정리하면서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1897년 117살의 잉카 노인에게 옛 잉카인들이 연주했던 "Himno al sol" 즉 "태양에 바치는 노래"와 "엘 콘돌 빠사(El Condor Pasa)" 원곡을 채록한다.2. 안데스 음악의 종류안데스음악이라 함은 주로 안데스의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의 음악을 가리킨다.1 아웃쿠트나 안디나(Andina): 잉카 시대로부터 있는 전통 민속으로 께나와 북, 삼뽀냐와 북 등의 많은 악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아웃쿠트나에서 유명한 악기로 타르카와 모세이뇨가 있다.2 알토 안디나(Alto Andina): 4∼5명 정도로 행해지는 전문 민속으로 께나, 삼뽀냐, 차랑고, 본보, 기타, 리듬 악기를 사용한다. 가두 연주 그룹의 형태이다.3 네오 안디나(Neo Andina): 알토 안디나의 현대적 형태. 전자기타와 드럼 등의 다양한 악기를 사용한다. 볼리비아에서는 오케스트라로 편성되어 있다.3. 안데스 음악의 악기종류1) 케나(Quena)Andes를 대표하는 음색을 내는 피리. 잉카 이전의 옛날엔 인간의 대퇴골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현재는 대나무 등으로 6 개, 뒤에 1 개의 구멍에 단소와 닮은 형태로 반음을 포함해 3 옥타브 정도의 음계를 낸다. 저음역의 케나쵸, 고음의 케니쟈도 있다.2) 삼뽀냐 (스페인어, Zampo a), 시꾸 (아이마라어, Sicu)Andes의 팬풀룻 류트(영어). 앞과 뒤의 단이 지그재그로 나란히 되어 있어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두 사람이 전후를 나누어 불었으나 현재는 두개를 묶어 혼자서 부는 것이 많다. 고음부터 차례로 츄리, 마르타스, 산캬념, 트요스라고 한다.3) 차랑고(Charango)스페인에서 라틴아메리카로 가져온 기타를 모방해 갑옷쥐 (armadillo)의 등껍질을 반향판으로 이용해 만든 기타이다. 10개의 현 (두 쌍씩 5줄)으로 되어 있다.4) 봄보(Bombo)Andes의 북. 중저음이 특징으로 삼포냐를 불면서 북을 두드리거나 기타 등을 연주한다. 페루에서는 만돌린과 바이올린이 협주를 하고, 파라과이에서는 아르파 등과 같이 연주한다.5) 따르까 (Tarka)6개의 구멍이 나있는 목각의 피리로 께나와 다르고 리드가 붙어 있다. 세 종류가 한 조를 이뤄 연주한다.4. 민속음악(forklore)의 여러 가지 형태1) zamba(삼바) 가장 대표적인 민속음악으로 안데스에 면한 아르헨티나 북부지방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6/8박자의 아름답고 여유있는 음악이다. 후에 서정가곡으로 발전하여 퍼졌다.2) cueca(꾸에까) 라틴 아메리카 전반에 걸친 춤을 일컫는다. 원래 칠레무곡인데, 라틴 아메리카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3/4박자, 6/8박자의 쾌활하고 낙천적 무곡이다. 춤의 행동양식은 수탉과 암탉을 상징하는 남녀가 마주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준다.3) vidala(비달라) 아르헨티나 북서부에서 발생하였으며 안데스의 가장 핵심적인 음악이다. 도미솔 3음으로 이뤄진 인디오 노래에 4~5음계가 가미된 형태로 발전하였고 유럽 음계가 첨가되었다. 옛 잉카 서정가곡에서 발견되며 인생을 노래한다. 께나로 멜로디 연주하는 게 특징이다.4) bailecito(바일레시또)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의 6/8박자의 경쾌한 대표적 무곡이다. 5음계로 구성돼 있고 기타반주가 특징. 손수건을 어깨 높이로 올리며 추는 행동양식을 보여준다.
    인문/어학| 2004.03.09| 4페이지| 1,000원| 조회(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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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르투갈] 포르투칼문학운동-A NOVA POESIA PORTUGUESA
    A nova Poesia Portuguesa sociologicamente consideradaⅠ포르투갈 발생기의 독특하고 대표적인 문학은 문학운동을 이해하려하지 않는 대중들의 의견에 의해 만들어졌다. 모든 시에 거친 눈에 띄는 성장과 함께 시의 개인적 대표성을 나타내는 변화는 문학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이 30년 이상 대중의 한 부분이 적응하지 않은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이 운동의 문학운동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문학에 대응하여 성립되어진다. 왜냐하면 이러한 운동은 다른 부분, 또는 장황한 환경을 통한 교육적 동기나 인종의 감각적 지속적 정신의 부주의함이나 쓸모없는 열정, 이탈된 감정, 강렬하고 인색한 정치적인 삶 속에서의 흡수를 통해 산출되며 믿을 수 없는 영혼의 상태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Ⅱ처음으로 시대의 사회적 상태나 나라의 상태를 대표하는 유행을 가져오는 것을 문학의 흐름이라 한다. 왜냐하면 문학의 흐름이든 아니든 문학의 공통적인 특성을 통해서 피할 수 없는 개인적 특징, 세계나 삶의 일반적 사상을 나타내는 유행을 공통적으로 결정된 시기의 문학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그들이 가진 공통점 속에서 강한 뿌리를 가지고 그들이 살아가는 또는 성장하는 시대, 나라이다. 시대의 문학적 생각을 통해 아는 것이 오직 자손들을 위한 흥미성으로 나타내어진다.우리가 주목하는 점은 문학이 우리를 사회적인 지도자로 만들 수 있는가, 우리가 문학이 나타내는 시간을 가리키기 위한 지침서가 되게 할 수 있는가, 또는 명확하게 말하기 위해서, 우리가 시대나 나라에서 만날 삶의 풍부하고 생생한 상태를 우리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또 간단한 문학을 통한 무언가를 위해서 이런 문학이 실제하는 나라를 기다리는 결론을 짓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 상상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Ⅲ영국문학의 역사는 3시기로 나타난다.이자벨라시대는 1570년경부터 공화정 시대의 종말을 함께 했다. 후에 시작된 고대클래식 시대는 17세기 내내 번성하였고, 1780년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현대까지 현대시대가 발전하기 시작했다.첫 번째 시대는 당대의 뛰어난 시인들인 Spenser, Shakespeare, Milton과 같은 사람들로 인하여 다른 시대의 일반적인 시적 음조보다 더 뛰어났다.그러나 다른 두 시대에는 많은 유명한 이름들이 숨겨져 있다. 두 번째 시기는 전 시대보다 열악하였고, 세 번째 시대에는 Coleridge, Shelley, Browning 과 같은 대작가들이 있었다.이제 이 문학시대속에서의 정치적 시기를 살펴보고자 한다.이자벨라시대는 공화정에 의한 영국시대부터 크롬웰시대까지이다. 영국정치의 두 번째 시기는 공화정의 몰락에서부터 시작되어 1680년 왕권의 교체에 따라 1780년에 몰락했다. 1832년 정치개혁의 사실로 영국에게는 절대적으로 쓸모없는 시기라 할 수 있다. 3번째 시기에도 영국은 문명적인 성장을 하지 못했다.프랑스의 경우를 보면, 프랑스 역시 영국과 같은 3시기로 보여진다.첫 번째 시대는 루이 16세 시기부터 18세기까지인데 유럽문학적 음조가 등장했다. 두 번째 시대는 고대통치 몰락 후에 시작된 로망스시기이고, 세번째 시대에는 사실주의, 상징주의, 고대 로망스주의가 등장한다.정치적인 시대의 흐름을 보면, 첫 번째 시대는 고대통치로 인해 프랑스가 문명적으로 성장하지 않았던 시대이다. 두 번째 시대는 프랑스혁명시대로 1840- 1870년경의 프랑스는 문명과 정치적인 면이 성장했다. 현대시대의 원천인 영국의 크롬웰시대보다 더 많이 성장한 것이 확실하다.
    인문/어학| 2004.03.09| 3페이지| 1,000원| 조회(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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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을 읽고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을 읽고몇 달전 새벽까지 6시간 가까이 토론을 해 화제가 되어 ‘끝장토론’ ‘밤샘토론’ 등의 말을 들었던 ”MBC100분 토론“ 은 비판도 받고 있긴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주장을 토의 내지 토론하는 교육을 받지 못한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프로그램일 것이다. 타 방송사에서도 기존에 없었던 이러한 토론 프로그램들을 새롭게 방송중이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이 프로그램들을 즐겨보던 차에 비록 과제 탓이긴 했지만 이라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문제에 대해 여러 사람이 의견을 말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토론‘과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각각 자기의 설(說)을 주장하며 다투는 ’논쟁‘은 대동소이하다고 보았고 토론에 관심이 있었던 나에게는 좋은 기회였다.어느덧 20세기가 지나 21세기에 이르렀고, 한반도의 20세기 100년은 격변, 격동의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과 청, 러시아의 각축과 그로 인한 전쟁, 그리고 식민으로 이어진 36년의 세월, 외세에 의한 해방과 분단, 또 전쟁, 군사 쿠데타와 독재정권의 장기집권, 이러한 역사적 연표와 상처는 아직도 내면화된 채 완벽한 정리조차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월남전 파병 이후 우리 경제는 성장했고, 그 성장에는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렇듯 우리의 근대사는 매순간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 엇갈리던 격동의 시기였다. 봉건이데올로기, 식민이데올로기, 극우반공-분단이데올로기가 횡행했던 지난 세기는 합리성과 건전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순간에도 역사적 진실이 침묵했던 시기는 한순간도 없었다. 공공연한 저항이 있었고 다양한 모색이 시도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의 통권 50호 기념으로 나온 이 책.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 역사의 흐름에 크던 작던 영향을 끼쳤던 논쟁들을 다큐멘터리처럼 시기별로 엮었다. 특이할 만한 것은 서문에 나와있듯 논쟁은 이러한 실천과 검증의 과정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의 논쟁들에 대한 배려가 충분하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는다는 내용이 서문에 나타나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결점에도 이 책의 성과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난 논쟁들을 정리하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논쟁과 관련된 글들을 모은 것이거나, 특정 시기의 특정 논쟁만을 정리한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따진다면 이 책은 20세기 논쟁들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인 정리라 할 수 있고, 우리가 지나친 많은 논쟁들을 재정리했다는 점이다.목차를 보면 시기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정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일제식민지 시기, 해방~1960년대, 1970년대 이후로 구분되어 있다. 일제식민지 시기는 개화파 사상과 근대국가 건설론으로 시작해 신사참배와 우상숭배로 끝을 맺고 있고, 해방이후의 시기는 우익의 반탁 주장과 좌익의 ‘모스크바삼상회의결정’ 지지에서 고속도로와 지역불균등 발전, 1970년대 이후의 시기는 ‘한국적 민주주의’와 유신체제에서 마지막 논쟁인 박정희 신드롬까지 총 56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을사조약 ‘불성립‘론, 임시정부 창조론?개조론, 베트남 파병, 김일성 가짜설... 등과 같이 자세히 몰랐던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새로이 알게 되었던 기회였고, 갖가지 방법으로 논쟁을 벌인 경우도 볼 수 있었다.여러 논쟁들 중에 인상 깊었던 논쟁중의 하나는 "을사조약 '불성립론'"이다. 중-고등학교 국사 수업 시간에 을사조약을 배웠을 때에는 단지,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보호국화를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을 강요했고 대한제국의 외교사무, 외국에서 한국의 이익과 신민의 보호업무, 한국과 외국의 조약체결 및 실행 등의 임무를 일본정부가 맡고, 서울에 통감을 두었다 등등의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음으로써 한국에 대한 보호국화, 부분적인 직접통치를 구상한 것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내용을 보고 배우지 못했던 꽤 많은 사실들을 알게되었다.먼저 국제법에서의 합법성나 후일 고종이 강제로 쫓겨날 때 일본은 고종에게 “1905년 11월 17일 체결한 한?일신조약에 옥새를 찍어 이를 추인”하면 왕위를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적어도 1907년 7월까지 을사조약은 비준되지 않았고, 일본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을사조약 비준 거부와 외교권 회복투쟁이 고종 퇴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조약을 강요받은 날부터 쫓겨나는 날까지 2년 동안 고종은 여러 차례 조약을 부정하고 외교권 회복을 시도했고, 일본은 고종을 제거함으로써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감추려 했던 것을 보아 을사조약은 불법이고, 우리측 외부대신이 도장을 찍지 않고 일본인이 그 직인을 훔쳐내어 찍은 것이므로 을사조약은 조인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점들은 자세히 알지 못했던 나에겐 중요한 사실들이었다. 어쨌든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주장이 국제법학계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미국의 국제법학회가 무효로 인정하고 또 1963년 유엔 국제법위원회가 무효라고 선언했었던 사실들은 지금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실정이다. 어찌되었건 을사조약은 무효였으며, 조인조차 되지 않고 양국의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들은 새로웠다.또한 요즈음 한국의 이라크 파병을 놓고 사회적 이슈가 되는 상황에서 비슷한 성격의 논쟁이 있었는데 바로 “:베트남 파병“ 에 대한 논쟁이다.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논의는 1950년대 이승만 정부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프랑스 군대를 원조하기 위해 전투사단을 파병할 것을 제의했지만 정작 프랑스 정부의 반대에 막혀 이승만의 베트남 파병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베트남 파병이 다시 거론된 것은 1961년 박정희와 케네디의 회담에서였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하여 정통성이 결여되어있던 박정희정부는 미국의 지지 여부에 정권의 존폐가 달려있었기에 미국은 최소한의 선거를 요구했고 박정희는 베트남 참전 가능성을 포함하여 한국의 지원을 제의했다. 당시 박정희정권을 위협하는 요소는 합법적인 민간정부를 전복하고 새로 파병부터 전투부대가 파병되면서 비로소 반대의 목소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최대 사회적 현안은 한?일 국교정상화 등 한일문제였다. 파병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는 했지만 파병문제에는 힘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파병반대가 이루어진 것은 4차 파병에 이르러서였다. 윤보선 당시 신한당 대표는 기자회견까지 하며 한국군의 베트남 증파에 대한 명백한 반대입장을 표시했다. 또한 신한당, 민중당 등 야당의 적극적인 반대운동도 일어났다. 그러나 곧이어 시작된 유신체제로 인해 더 이상의 논쟁이 일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베트남전은 종결되었다. 또 유럽에서도 반전운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여 여러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자유와 이성의 새로운 장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된 베트남전쟁이 한국에서는 정반대 상황을 촉발시켰다. 베트남 전쟁으로 정권의 초석을 다진 박정희의 긴 폭압정치가 시작된 것이었다. 3선개헌과 유신헌법을 통한 폭압정치의 물적 토대는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다라고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베트남 파병문제와 오늘날 이라크 파병문제가 물론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도 없지만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고 참고적으로 논의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베트남 파병이 긍정적인 측면도 여러 가지 있었기에, 이번에 이라크 파병이 꼭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보다 신중하게 결정되었으면 한다.그리고 70년대 이후의 논쟁 중에서 사형제도 존폐 논쟁도 꽤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사형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나 존재해왔었던 오래된 형벌이지만 근대에 들어서서 인간 중심의 이성이 주창되고 계몽주의가 득세함에 따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즉, 사형폐지론이 등장하게 되었지만 실제로 20세기 초까지 사형이 폐지된 나라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사형폐지론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논쟁이 진행되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집단적 살해, 나치의 잔혹한 현실을 경험한 여러 국가들은 공권력에 의한 인간생명의 단절이 정당한 바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선 사형존치론과 사형폐지론의 논쟁이 있었는데, 사형존치론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주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형은 잔인한 범죄, 예컨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범죄에 대하여 극히 예외적으로 가해지는 극형으로서, 생명권이나 비례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사형은 범죄인의 생명을 박탈하는 최고도의 형벌로서 일반인의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사회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위하여 개선 불가능한 극악무도의 범죄인을 영구히 제거함으로써 사회방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민의 법감정에 의할 때도 사형은 정당한 형벌이며, 이를 폐지하는 것은 최소한 시기상조라는 주장이 있다. 이상의 사형존치론에 대하여 폐지론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첫째, 사형이 극악한 범죄에 대한 정당한 형벌이라는 점에 대해서, 근대국가의 형벌제도는 더 이상 개개인의 복수심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둘째, 사형의 일반예방 효과는 생각처럼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 효과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셋째, 사회방위의 관점에서 개선 불가능한 범죄인을 영구히 무해화(無害化)해버리는 제도로서의 사형에도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넷째, 국민의 법감정이 지금 사형제도를 옹호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감각일 수 있으며, 국가의 정책이 언제나 국민 다수의 견해를 좇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사형폐지론은 존치론의 견해를 반박했고 이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근거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사형의 오판 가능성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드물지 않게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 다른 하나는 범죄에 대한 법적 평가의 변화 가능성 또는 사형의 정치적 남용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법적 문제와 상관없이 사형은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기 위해 또는 강력한 사회통제를 위해 집행되기도 했다. 끝으로 사형은 그 집행자들에게 다.
    사회과학| 2003.11.19| 6페이지| 1,000원| 조회(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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