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례 >Ⅰ.序 論 ????????????????????????????????21. 연구 목적 및 문제 제기???????????????????????22. 연구사 검토 ????????????????????????????3Ⅱ.임제의 우언문학에 나타난 가전체와 몽유록의 서사 구조 분석 ???????41.가전체와 몽유록의 서사 구성 및 장르적 특징 ???????????……42.가전체 양식으로서 의 서사구조 분석 ???????????????73.몽유록 양식으로서 의 서사구조 분석 ????????????11Ⅲ.임제의 우언문학에 나타난 ‘욕망’와 ‘리얼리티’의 예술적 승화???????15Ⅳ.임제의 우언문학의 문학사적 위상 ????????????????????16Ⅴ.結 論 ????????????????????????????????17 ???????????????????????????????18Ⅰ.序 論1.연구 목적 및 문제 제기소설은 인생의 이면에 숨겨진 삶의 진리를 포착하여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감동을 주어, 독자로 하여금 정서의 순화와 삶의 지표와 방향을 일깨워주는 산문 양식의 대표적인 문학 형태이다. 시가 독자들에게인생의 진리를 은유, 직유 등의 비유법을 통해 몇 개의 함축적인 단어로 전달하고 있는데 반해, 소설은 오히려 하나의 플롯을 설정하고 서사기법을 통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서 좀 더 현실감있게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소설은 사회를 반영하고 그 속에서 독자들과 이야기하고 어떤 모티브를 제공할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시 보다 소설을 더욱 가까이 하는 것도 소설이 좀 더 쉽게 독자들과 호흡할 수 있기 때문이다.조선 중기 선조임금 시대는 안으로는 조선 사회의 온갖 갈등과 모순을 야기시킨 당쟁의 폐해와 밖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던 혼란기였다. 그러한 혼란속에서 오로지 문학 작품으로서 당시 사회구조의 불합리성을 폭로하려 했던 작가가 바로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887)이다. 그아간 형식으로 보인다. 우리문학사에서 고려후기에서 조선후기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시도되어온 우언양식은 처음에는 인간 내면세계에 대한 지적관심에서부터 출발하여, 점차 외부의 구체적인 사회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조선후기에 이르게 되면 해학과 풍자가 가미된 문학장르로서 그 폭을 넓히게 되며, 애국계몽기에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인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언문학은 우리의 전통 속에서 계승되어온 문학장르로서 우리 문학사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우언의 서사양식은 가전체와 몽유록이 그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두 장르 모두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수법에 따른 허구적인 서사구조를 지닌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가전체가 사물을 의인화해서 사람인 양 다루면서 그 일생을 전으로 서술한 글) 이라면, 몽유록은 꿈에 의탁하여 일상 현실에서 흔히 일어날 수 없는 환상적이고 기이한 꿈 속의 일을 다룬 글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들 장르는 기본적인 우언양식에 바탕을 두면서도 전체적인 서사구성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우선, 가전(假傳)이라는 용어는 중국 서사증(徐師曾)의『문체명변(文體明辯)』의 전기(傳記)에 대한 분류에서 나타난다. 즉 ‘전기의 종류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사전(史傳)으로 정체와 변체의 두 종류가 있고, 또 하나는 가전(家傳), 세번째는 탁전(托傳), 마지막으로 가전(假傳)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가전은 서사 문학의 대표적 양식의 하나인 傳의 문학적 변용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전체 양식은 고려시대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임춘의 을 그 효시로 삼고 있다. 의 서사구조를 분석해봄으로써 가전체양식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은 술을 의인화한 인물인 국순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세상에 도량이 크고 청렴결백하기로 소문난 ‘국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벼슬길에 오르면서 왕의 눈을 흐리고 점점 타락해 가다가 결국엔 하루 저녁에 죽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즉, 가전체의 가장 큰 특징은 사물을 의인화하고포되어 많은 사본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일찍부터 “가전체 소설의 집대성” 또는 “백미”로 평가되면서 그 소설가적 가치가 주목되어 왔다.) 의인의 방법을 이용한다는 측면에서는 가전체 양식으로 볼 수 있으나, 의인화된 사물의 일대기가 아닌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장르적 논란이 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가전은 입전 대상인 동식물이나 사물의 생태적 특성이나 일반적인 속성에 주목한다). 또한, 그 구성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인화된 입전 대상에 대하여 그와 관련된 고사나 속설을 섞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에 나타나는 절묘한 수식과 고사의 운용은 가전체의 일반적인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의 첫머리에 나오는 도왕조열왕의 가계를 기술한 내용인데, 이를 통해 에 나타난 일반적인 서사구조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6) 도왕조 열왕은 성은 매요, 이름은 엽, 자는 선춘이며 나부사람이었다. 그의 선조 중에 상나라를 도운 자가 있었는데, 고종의 재상이 되어 도땅에 봉해졌다. 그런 후 중세에 초나라의 대부 굴원이 쫓긴 바와 같이 되어 합로성으로 피하였는데, 이로 인해 자손이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다. 몇 대가 지나 고공사에 이르러서 무릉의 도씨 딸을 얻어 아들 셋을 낳았는데, 왕은 그 큰 아들이었다. 도씨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덕이 있어서, ‘그 여자가 시집가는 날이면 반드시 그 시가를 빛나게 할 것이로다’라고 어느 시인이 칭송한 바였다. 그 여자는 일찍이 꿈에 옥지에 가서 놀다가 왕모가 주는 붉은 열매를 하나를 받아 먹고는 임신하였는데, 왕을 낳을 때까지 이상한 향기가 풍기고 그 향기는 달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춘해아라고 불렀다.) (화사 中)우선, 매화라는 꽃을 의인화하여 그 집안의 내력을 기술한 내용은 가전체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꽃을 의인화하면서도 그 일대기를 서술하지 않고,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러한 임제 문학만의 특징은 뒤에서 다시 핵심이 되는 일은 홍백의 분당이다.(11)사신이 말하기를, 홍당,백당의 폐는 당나라의 우리와 송나라의 천락에 비하여 다름이 없다. 그러나 김대위가 성심을 다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했으니 그야말로 재상된 자가 거울로 삼아야 하지 아니하리오. 그리고 당나라 문종은 “언제나 하북의 도적을 쫓기는 쉬우나 조정 안의 붕당을 없도록 하기는 어렵다.”라고 하였는데 역사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탄식됨을 금할수 없게 하는 바다. 당화의 폐가 역란보다 크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고 하겠지만, 당파를 타파하는 것이 적을 제재하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것은 어찌 옳다고 하리요. 하의 왕이 한사람의 어진 보좌의 신을 가지고도 능히 일세를 조화시켜 화평을 이루었거늘, 하물며 밝은 임금이 세상에 군림하는 바에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서경에 무편무당이 왕도탕탕이라 하였고 또 군자의 덕은 풍이요 인의 덕은 초라 했으나, 군자의 덕이 더하는 바에야 어찌 소인들이 없어지니 아니할 것이요. (화사 中))위의 인용문은 하왕조의 홍백의 폐단에 대한 작가의 평가이다. 홍백의 분당에 따른 결과는 외적의 침략보다 국가 내부적인 피해가 더 심함을 지적하고 있다.) 즉, 간신들의 모함으로 인해 충신을 살해한 임금의 실수를 지적하면서 간신은 늘어가고 충신은 줄어드는 국가 내부적인 피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당나라와 송나라의 역사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의 역사에서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을 대거 숙청한 중종 대의 기묘사화의 모습을 떠 올리게 한다. 기묘사화는 왕의 신임을 받던 조광조가 현량과를 설치하여 신진사류를 대거 등용함으로써 훈구파의 불만이 커져갔고, 이로인해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김정?김식 등을 반역세력으로 몰아 모두 죽인 사건이다. 즉, 중종은 스스로 불러들인 인재를 당쟁의 폐해로 인해 내치고야 말았던 것이다. 특히,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김대위의 모습은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혁명가 조광조의 모습을 떠 올리게 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상국가 건설을 위해 가을 통해서 원한과 쓸쓸함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장사)의 강기슭인데, 장사는 悲感을 자아내는 곳이기 때문에 원자허가 지닌 정서와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몽유세계의 공간으로서 작자 임제가 설정한 것으로 짐작된다.이처럼, 주인공 원자허가 배회하고 있을 때 원자허에게 복건자 라는 인물이 다가와 서로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16) 읊기를 끝내고 주위를 서성이고 있을 무렵, 별안간 저 쪽 먼 곳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는 얼마 안 돼 갈 꽃 깊은 곳에서 아름다운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야복(野服)에 복건을 썼으며, 정신이 맑고 눈썹이 빼어나 옛날 수양의 모습을 지닌 듯하였다. 그는 자허의 앞에 나와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며, "어찌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전하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 (원생몽유록 中)이 만남은 의 허구성에 의 수용의식을 부여하려는 임제 나름의 독특한 구성방식 이라고 할 수 있다. 몽유세계의 인도자로서 남효온으로 추정되는 복건자를 설정함으로서 임제는 허구적 인물인 몽유자 원자허를 통해 작품의 서사적 성격을 강화시키고 있는 반면, 남효온으로 추정되는 복건자를 통해 단종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고자 하고 있다.원자허가 복건자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고 그곳에는 왕과 다섯 신하와 두 번째 만남을 이루게 되며, 곧 좌정(坐定)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17) 자허는 그 다섯 사람과 먼저 예를 행하지 않고 왕 앞에 나아가 알현한 후, 바삐 제 자리로 되돌아와서 모두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말석(末席)에 꿇어앉았다. 자허의 바로 윗자리에는 복건자가 있었고, 그 윗자리에는 다섯 사람이 차례로 앉았다. 자허는 능히 분간할 수가 없어서 심히 편치가 앉았다. 왕께서 말씀하셨다. “일찍이 난초 향기 같은 명망을 들어서 아름다운 풍모를 깊이 사모했었소. 오늘과 같은 좋은 밤에 해후하였으니, 의아하게 여기지 마시오.”) (원생몽유록 中)위의 인용문을 통해 좌정 순서를 살펴 보면, 왕이 앉고, 그 다음에 다섯 사람이 앉고 그리고 복건자가 앉.
{{{주 제: 동양불교사상의한국불교{{과 목 : 한국의 전통과 문화(야)학 과 : 국어국문학과학 번 : 031095이 름 : 신 칠 범제 출 일 : 2004년 10/13 (수)담당교수 : 김 남 일 교수님Ⅰ.서론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지배적인 정신문화로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유교문화를 꼽을 수 있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국가이념으로 자리잡은 유교는 나중에는 실천적인 방법론에 입각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유교는 근대화,일제식민지 시대,6·25전쟁,새마을 운동 등의 격변하는 한국사 속에서도 그 뿌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민과 유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바로 같은 종교이면서도불교가 왠지 우리의 정신문화와는 단절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불교는 한국인의 3대 신앙에 속할만큼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의해 믿어지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한국인의 정신이념은 유교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사실이다. 여기서 단지 불교와 유교를 서로 대립시켜 비교하자는 말이 아니다. 지난 한국사에서 조선의 건국 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역사는 불교와 함께 해왔다. 역사로 치자면 불교는 유교보다 훨씬 더 한국민들 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고대국가 시절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에 필요한 국가이념으로서 고려시대에는 귀족불교로서 말기에는 대중불교로서 불교는 우리 한국인들과 항상 함께 해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런 불교와의 단절은 바로 전통과의 단절의 문제로 연결시킬 수 있다. 즉, 조선의 건국 이후 오늘날 까지 유교가 한국사에 자리잡으면서 우리의 전통인 불교는 서서히 그 뜻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여기서는 한국불교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통해 한국사에서 잃어버린 불교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Ⅱ.본론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한국은, 삼국시대에는 강력한 중앙집권화에 필요한 이념으로서 불교가 제시되었으며,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당시 대승불교의 큰 문제였던 중관과 유식의 통합이라는 문제에 큰 관심을가졌고, 고려에 와서는 선종이 유행하면서 교·선의 통는 중국의 높은 사상과 문화와 융합되어 독자적인중국불교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일본 등으로 전파되어 동아시아 불교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즉, 중국불교의 이해 나아가 동아시아 불교권에 대한 이해가 곧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이해될 것이다.동아시아 불교권의 특징으로 한역대장경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과 대승불교를 중심으로 발전된 점을 들 수 있다. 불교전래가 시작되면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경전의 한역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그 결과 세계의 번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한역대장경의 성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한문경전은 한국이나 일본에 전해져 이를 바탕으로 교학의 연구나 신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다른 특징으로, 동아시아 불교권은 대승불교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스리랑카·타이 등의 남아 시아가 소승불교를 중심으로 그 문화권을 형성한데 반해 동아시아는 대승불교를 중심으로 그 발전하여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이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대에 인도에서는 대승불교가 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 여 중국인들은 이러한 대승불교를 가지고 참뜻을 추구하여 교학을 성립시키고, 다시 그것을 실천화하면서 선 종과 같은 실천불교를 탄생시켰다.한국불교는 이와같은 중국의 독자적인 불교의 특징을 반영하는 한역경전의 전파와 대승불교를 바탕으로 그발전을 시작하였다. 그러한 한국불교는 중국의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한 모방적 단계에 머문 것은 아니였다. 한국불교는 대체적으로는 중국불교가 거치는 단계를 함께 거치고 있었지만, 때로는 중국불교보다 한발 앞서 당대의 불교사상사적인 기본 과제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그 예로 신라의 원효는 당시 동아시아 불교권 전체의 기본적 과제였던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사이의 대립, 즉 空과 有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종합불교로서독창적인 교학을 성립시켰다. 또한, 고려의 지눌은 역시 당시 불교계의 기본적 과제였던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교선일치의 철학을 수립함으로서 이론과 실천의 통합고구려가 처음 받아들인 불교가 바로 격의불교임을 말하는 것이다. 격의불교란 중국의 초기 불교학자들에서 행해진 일종의 사이비불교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그들은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데 노자의 無 字를 가지고 행하였다. 반야의 空은 인식론적으로 말한 것인데 반해노장의 無는 본체적으로 말한 것으로 양자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였다. 초기에 학자들은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이러한 격의불교가 나타났다는 것은 중국불교와 그 출발을 같이하였다는 의의를 가져다 준다고 할 수 있다.백제는 성왕 4년 겸익이 인도로부터 직수입한 계율종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상당한 국제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광은 중국 천태종을 수업하고 귀국하여 널리 전하였다. 삼국 가운데 가장 후진적이었던신라는 한역된 경전들이 속속 수입되어 오는 가운데 섬론종이 전래되어 유식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인도의 유식학파를 계승하여 모든 사물현상들은 오직 하나의 근본의식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섭론종은, 종전의 모든 사물현상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중관계통의 학풍과는 다른 것이었다.이처럼 삼국의 불교는 광범하게 중국불교계와 교류하면서 국제불교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중국불교계에서 유행하던 학파불교의 여러 조류들이 소개되고 있었고, 중국불교계에서 교학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의 유사하게 거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2)원측의 유식학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해서 중국의 당대 불교계에서는 현장에 의한 신역불교의 전래로 인하여 불교사조의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인도에 갔던 현장은 돌아와 새로 경전을 번역하고 그 결점을 지적하였고, 특히 인도의 유식학을 연구하여 성유식론를 역출하였다. 이는 신라와 일본 불교학자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서로간의 활발한 학적인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의 한 축이었던 서명학파에 있었던 원측은 자신만의 불교를 내세웠다. 그의 불교는 유식학의 입장에서면서도 일면에 중관학파의 견해에 따르는 등의 조화적인입장을 취하는 것이었다. 한국 등의 불교계가 떠맡게 되었다. 당시 유식학자 가운데에 이 문제에 남달리 인식하였던 사람이 바로 신라승 원측이었다. 그는 여러 곳에서 그 대립을 화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만족할 만한 해결의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고 말았다.(3)원효의 화쟁불교당시 동아시아 불교권의 어려운 숙제였던 중관·유식의 대립을 해결할 이론을 계발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 바로 원효이다. 그는 중관파들의 어떤 이론이나 사물현상을 분석 평가할 때에 덮어놓고 부정만하는 태도와 유식파들처럼 긍정의 한 면만 보는 것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원효는 긍정하면서도 스스로 부정하지 않음이 없고, 또한 부정하면서도 스스로 긍정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는 그만의 독특한 화쟁론을 제시하였다.원효에 의하면 두 극단을 버리고 양자를 종합하여야 한다는 화쟁의 논리에 의거해서 중관파의 세계는 모든 것은 다 空이다 라고 하는 부정론이나, 또는 유식파의 세계의 모든 현상은 다 식이다 라고 하는 긍정론을 다같이 비판하고, 세계는 오직 한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인도에서부터 오랫동안 대립하여 오던 중관과 유식이 원효의『대승기신론』에 이르러 한마음으로 종합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의 공통적인 문제였으므로 원효의 사상은 중국에 전래되어 중국 화엄종의 성립과 발전에 선구적 역활을 담당하였다.(4)법장의 화엄학과 의상의 화엄종당의 법장은 북쪽 지방에서 발달한 유식학 계통의 지론종의 학설을 받아들이고, 다시 당 초기에 현장이 새로 전해온 유식학을 집대성 하여 화엄학을 성립하였다. 이러한 법장의 화엄학은 인도불교에서의 중관과 유식의 대립관계와 양자의 삼시론의 차이를 지적한 다음 유식학파의 법상대승은 방편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이를 억누르고 있다. 또한, 유식학에서는 본체인 이법계와 현상계인 사법계는 일체의 양면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일 뿐만 아니라 개게의 사물현상들도 그들간에 서로 용납하여 상호 걸림이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론적 발전에 일정한 한계를 가져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적인 화엄은 뒷날 실천적인 불교인 선종을 성립시키는데 기반이 되었고, 유학에도 영향을 주어 성리학을 성립시키는데 기여하였다.3.교종· 선종의 통합과 한국불교(1)선종의 전래통일신라 전반기에는 법상종과 화엄종이 가장 융성하였는데, 이는 당의 불교계가 그러한 종파가 융성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 후기 실천적 불교인 선종이 전래되면서 불교계의 사정은 달라지게 되었다. 중국 불교사에 선종이 성립된 것은 5세기 초반이지만, 실제로는 6조 때의 남종선의 출현부터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종교단은 마조도일과 석두희천이 활약하는 8세기에 와서 교단으로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선종교단 가운데 신라에 본격적으로 전래되어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마조도일의 계통이었다. 초기 중국선종의 발전이나 신라에의 수입에 관계된 신라승려로서 법랑,지덕,신종,무상,본여 등이 있는데, 이 중 무상은 티벳트의 사자와도 만남을 가짐으로서 중국불교의 티벳트 전파에 큰 역할을 하였다.신라불교계에 선종이 본격적으로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헌덕왕 13년 도의가 귀국하면서부터였다. 이처럼 중국에 비해 선종의 대두가 늦게 된 이유는 신라의 불교계 상황과 사회적 조건의 문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불교계의 문제로서 원래 화엄교학이 공허한 이론에 치중하는 관념적인 성격이 강해지고, 실천적인 면이 약화되어 가는 것에 대한 비판에서 실천적인 불교로서 성립된 것이 바로 선종이었다. 그런데, 신라의 화엄은 중국의 그것에 비하여 실천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공허한 이론에 빠져 버리는 모순이 적음으로서 이러한 선종의 대두가 늦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조건으로서 화엄에서 선종으로의 교체를 가능케 한 직접적인 계기를 만든 것은 지배세력이었던 중앙귀족이 몰락하고, 지방호족이나 6두품 이하의 하급귀족 세력이 대두하는 사회적인 변동이었다. 선종은 지방호족세력의 후원을 받으면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그 근거지를 마련하고지방불교로서 발전
R e p o r t주 제 : 현대시에 나타난 고전시가의 자연관과 목한국 한문학 강독학 과국어국문학과학 번031095이 름신 칠 범제 출 일2007년 4월 11일 (수)담당교수정 대 림 교수님Ⅰ.서론예나 지금이나 자연에 대한 관심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벗어나서는 절대 생존할 수 없는 존재이고,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옛 선조들은 일찍부터 자연과 순응하고, 감흥하면서도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관심은 자연을 장엄하고 경이로운 외경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그 속에 동화(同化)되기도 하였다. 또한, 자연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현실세계를 한탄하기도 하였으며, 자연 속에서 도덕적 진리나 불교적인 성찰, 도교적인 삶을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자연에 대한 이러한 관심이 많이 퇴색된 느낌을 준다.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자연은 점점 파괴되어만 갔고, 그러한 자연의 아픔의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우리는 조금더 편리한 생활만을 추구하였다. 결국 자연의 진노가 시작되었고, 물의 부족, 더러운 공기를 마시 고 살자 그제서야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옛 선조들의자연친화적인 모습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전하는 많은 문학작품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특히고전시가에서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심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앞으로, 여기서는 고전시가에 나타난 자연관 을 관조(觀照), 동화(同化), 교감(交感), 대립(對立)의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러한 자연관이 한국현대시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문학적 가치는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Ⅱ.본론본론에서는 고전시가에 나타난 관조(觀照), 동화(同化), 교감(交感), 대립(對立)의 자연관을 현대시에서 찾아보고, 그것이 가지는 문학적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1. 관조(觀照)의 자연관- 관조란 자연을 주관적 요소를 가하지 않고, 냉정하고 평푸는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바람부는 소리와 솔바람소리 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더해져 대웅전의 야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③에서 범영루는 불국사 내에 있는 누각 이름이다. 달빛에 비친 범영루의 모습을 통해, 범영루의 신비로운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④에서는 ①의 시구가 반복되고 있는데, 이른 반복을 통하여 좀 더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불국사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좀 더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를 통해서 우리는 달빛 어린 불국사의 야경에 흠뻑 빠지게 된다. 동양화법 중에 선염법이라고 있는데, 이는 몽상적인 분위기를 내는데 주로 이용된다. 이러한 선염법으로 그린 수묵화 처럼 자연을 한편의 풍경화로 그린듯한 이 시에서, 우리는 관조(觀照)의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2. 동화(同化)의 자연관- 동화란 자연의 오묘한 진리를 마음으로 채득하여, 자연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자연에다 최고의 가치를 부 여하고 끝내는 일체가 되어버린 상태를 말한다.(1) 박목월의 시 ‘나그네’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①길은 외줄리 남도 삼백리 -②술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③☞ 우리에게 나그네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모든 인생의 괴로움을 않고 외로운 길을 떠나는 방랑자의 느낌이 강할 것이다. 하지만 나그네는 결코 외롭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가는 길에는 아름다운 자연이 등불을밝혀 주기 때문이다. 풀벌레 소리를 노래로 삼으며, 해와 달이 나의 벗이고, 산과 강이 나의 벗이다. 자연안에 순종하고 자연 속에 동화되어버린 나그네의 모습을 이 시에 찾아보도록 하자☞ ①에서 ‘강나루’와 ‘밀밭 길’은 매우 향토적인 정서를 나타낸다.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강나루를 건너서밑밭이 쭉 펼쳐진 길을 나그네가 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그러한 나그네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데 이는 유유자적한 나그네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②에서는 외로운 나그네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유유자적한 삶을 찾고자 떠을 표출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를 통해 자연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①에서는 이름도 모르는 어느 용사의 묘비에 나비가 날아드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묘비에 아주 중요한 의의를 두고 싶다. 왜 하필이면 묘비에 나비가 지친 날개를 접고 앉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가야할 마지막 정착지가 바로 자연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라는 말이 있다. 결국에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자연인 것이다. 그리고 ‘다친 날개’ 는 인간들의 세속에서 받은 고통, 즉 사랑의 아픔, 인간적인 고뇌 등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세속적인 번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은 바로 자연임을 말해주고 있다..☞ ②에서 향기가 없는 돌을 ‘아름다운 꽃’으로 비유하고, 돌향기가 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비록 보잘 것 없는 묘비에 불과하지만, 자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③에서 ‘나비가 돌에서 탄생했다’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 속에서 살아 가다가 결국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라는 진리를 말해주고 있는 구절이라 하겠다. 그리고 돌의 그리움움을 찾아서 날아다니는 나비의 모습처럼 우리 인간도 언제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다고 해석할 수있겠다.☞ ④에서 피곤함에 지친 나비가 날개를 접고 돌향기를 맡으며 그 속에서 침묵한다. 이백의 시 ‘산중답속인’에서 ‘笑而不答心自閑’ 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해석하면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아도 내 마음은 절 로 한가하여라” 라는 뜻이다. 이처럼 여기서 침묵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그 속에 동화되어 버린 시 적자아의 모습을 표현한 구절이라 할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이 시에서는 아름다운 자연의 시각적 이미지를 배제하고, 매우 보잘 것 없는 ‘돌’ 이라는 소 재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욱더 부각시키고, 결국 그 속에 동화되어 버린 시적 자아의 모습을 홀로 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또 인간인 것이다. 이 시를 통해 인간의 고독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①에서 인적이 끊긴 가을 도봉산의 쓸쓸함을 시각적, 청각적 묘사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가을날 가장 아름다워 할 도봉산에 산새도 찾지 않고, 구름도 보이지 않고, 사람의 발길마저 끊어져 버렸다. 이는도봉산에 올라 선 시적화자의 쓸쓸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라 하겠다.☞ ②에서는 ①의 가을 도봉산의 쓸쓸함이 시적화자에게 투영되어, ‘나’의 적막하고 쓸쓸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화자가 ‘호오이’ 라고 소리 질렀을 때, 그는 산에 있는 그 누군가(사랑하는 사람)가 대답해 줄것이라 소망했을 것이다. 기대하는 대답 대신 돌아오는 자신의 메아리를 들을 때의 심정은 ‘슬픔과 그리움 뿐인 것이다. 저녁 어스름은 점점 짙어지고, 해는 산을 넘어가는데, 이러한 시간적 경과와 함께 화자의 우울함 마음도 더해간다.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뿐’ 이라는 구절은 화자의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슬픔, 외로움, 쓸쓸함 등의 심정이 직접적으로 잘 표출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③에서 이제 화자는 긴긴밤을 혼자서 보내야만 한다. 하지만, 다가올 아침에 혹시라도 돌아올 사랑하는이에 대한 기다림과 기대가 나타난다. 즉, 이 밤은 외롭고,쓸쓸한 고독의 밤이지만 새아침을 맞이하는 기 대의 밤인 것이다.☞ 해질녘 가을 도봉산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다. 하지만, 그러한 도봉산에 응당 있어야 할 새도 없고, 산자락에 걸린 구름도 없으며, 그 산을 보러오는 사람조차 없는 모습은 쓸쓸함만 더할뿐이다. 즉, 시적화자 에게 있어 도봉산은 아름다운 자연의 공간이 아니라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에 구체화 되는 공간인 것이다시인은 매우 고독하면서 외로운 존재이다. 김영달의 시 ‘시인의 고독’에는 “자칫 혼자 넋두리로 만인들 앞에서 뭇매를 맞을 수도 있지만, 나는 시인의 고독을 물이 흘러 산으로 오르는 무모한 여정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라는 구절이 시각으로 이 시를 바라보고 싶다. 즉, 속세와 자연 그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내면적 갈등을 겪는 시적화자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향에 머물 수 없는 것은 그 곳은 이미 식민지가 되어버린 땅이고, 시인의 욕망을 더 이상은 표출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고향을 두고, 자연-여기서 자연은 현실도피처나 또다른 이상향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떠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십 오년 정분이 담긴 조국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시는 식민지 조국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도, 저항 할 수도 없는 작가의 내면적 갈등과 아픔이 나타난 작품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이 시는 교 감(交感)의 자연관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3) 정용진의 시 ‘이슬꽃’간 밤 창가에 서린 봄 달그 애잔한 모습이 마음에 걸려 잠 못 이루고 ①한 겨울 동면의 시간들을 인내로 견디다가아침이슬비로벗은 나무 가지마다 초롱초롱 열린 이슬꽃 ②여린 가슴마다 어린 칠 색 무지개 빛앳된 꿈이 영롱하구나 -③올해도 너와 나의 삶이거짓없이 투명한 한 해가 되거늘 -④☞ 가수 양희은의 노래 중에 ‘아침이슬’ 이라는 노래가 있다.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 내 마음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중략) ” 라는 노래 인데, 긴긴 밤 모진 고통을 이겨내고 풀잎에 맺혀있는 진주보다 더 맑고 투명한 아침이슬을 볼 때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고통이 사라지고, 미소만이 가득해 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모든 하루의 시작전에 아침이슬의 투명함을 가슴에 간직한다면, 오늘 하루 우리들의 마음도 좀 더 투명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①에서 시간적 배경은 초봄이며, 은은한 달빛의 모습에 취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을 표현 하고 있다. 여기서 ‘애잔한 모습’은 시적화자의 어떤 대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리고그러한 그리움 때문에 시적화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②에서는 흘
{{{주 제: 한국 성리학의특징과 위치{{과 목 : 한국의 전통과 문화(야)학 과 : 국어국문학과학 번 : 031095이 름 : 신 칠 범제 출 일 : 2004년 11/24 (수)담당교수 : 김 남 일 교수님Ⅰ.서론한국사에 있어 조선의 성립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주체세력의 귀족에서 사대부로의 전환, 새로운 왕조사의 개창 등의 의미를 갖는데 무엇보다도 성리학적 사고로의 전환이라는 큰 의미를 갖는다. 이는 당시 사고로 보았을 때 혁명적인 일이었다. 왕조 국가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상을 채택하여 여기에서 명분을 찾고,민중들을 지배해 나갈 수 있었다. 그 동안의 삼국,통일신라,고려에서 주로 불교를 지배이념으로 채택하였는데,조선은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체택하여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후 성리학은 조선 500년 역사 동안 꾸준히 탐구되어 하나의 국가체제를 형성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의 역사를 성리학이라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조선의 역사에 있어 성리학적 사고방식은 없어서는 안될 요소였으므로 이를 통해 조선 전체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사실 성리학은 중국의 유학의 한 계통으로서, 고려후기부터 도입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나라에 성리학적 사고가 자리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외래사상의 유입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을 탐구하고 우리의 것으로 새롭게 발전시키려는 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여기서는, 이러한 성리학의 재조명을 통해 조선사회를 바라보고, 그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Ⅱ.본론1.성리학의 의미와 특성성리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性命 義理의 學 의 준말로, 성명과 의리를 즐겨 캐고드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성리학은 유학 중의 하나로서, 유학을 선진본원 유학, 한당훈고 유학 등으로 세분할 경우에, 바로 송·명 시대의유학으로서 지칭되는 학문이다. 성리학은 대표적인 학자와 경향에 따라서 정주학,주자학,양명학,이학,도학,면학심학 등의 다양한 명칭을 갖까지 있음을 그들은 주목하였다. 이렇게 불교와 도교에 맞서 유학의 장점으로 강조되는 유학의 윤리와 경세사상이 함께담겨 있는 서적이 『주례』인데, 이러한 예를 중시하는 경향이 다른 어느 유학보다 성리학이 강하였다.그러나 성리학이 불교·도교에 자극받아 종래의 유학을 재구성 또는 변형시키는 시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성리학은 불교·도교 등의 영향을 받지않을 수 없었다. 성리학은 우주·자연 및 인성에 대한 본체론적 형이상학의 탐구와 심성 수양을 철저화하는 경향을 띠고 있는데, 이는 불교의 깊은 형이상학과 철저한 수행을 깨닫고,그러한 것이 유학에도 갖추어져 있음을 과시하고자 하던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불교와 대립하여불교의 철학이나 수양에 맞설 유학의 형이상적 이론과 수기의 이론을 『논어』『맹자』『중용』『대학』 이네 경전에서 찾고자 하였다.2.성리학의 전래와 초기수용성리학이 우라나라에 전하여지기 시작한 때는 확실한 증거의 불충분으로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어림짐작을가능케 하는 자료를 동원한다면, 대체로 성리학이 송에서 발흥할 무렵, 즉 고려 인종기 전후부터 알려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로서 당시 고려에서 송의 서적을 적극 수집했다는 사실과, 고려의 중국유학생이 많았다는 점, 최충의 구재학당에서 특히 중용의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점, 중신들의 경전강론의 분위기를 가리켜 삼강오상의 가르침과 성명도덕의 도리가 만당에 가득차 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성리학이 적어도 송학 내지 주자학으로 대성된 것은 주자의 학문적 공헌이 있은 뒤의 일이며, 또한한국에서 성리학이 크게 발전한 것도 주자학이다. 따라서, 한국사에 있어 주자학의 도입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주자학으로서 성리학의 도입은 충렬왕 때 안향을 통해서 이다. 안향은 호를 주자의 호와 비슷하게 지었는데 이는 그에 대한 존모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정몽주 길재, 등으로 이어지는 학자들이 출현 하면서 성리학의 이해가 피상적 섭취의 차원에서 전문적 연구의 수준에 오르게 되었다.그리도 철저히 불교를배척하였다. 그는 사원과 승려들의 폐해뿐 아니라 더 나아가 불교신앙의 허구·미신성 및 불교이론 자체의 부당성에 근거하여 척불에 적극성을 보였다. 정도전의 저서 『불씨잡변』『심기리편』을 통해서 그의 척불사상을 잘 알 수 있다. 정도전이 이처럼 불교를 배척한 이유는 고려사회의 폐단을 사회생활을 소홀히 함으로써 유교적인 윤리를 지키지 않고, 국가생활마저 배척한 불교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 조선의 새 통치원리는 좀 더 국가에 이로움이 되는 유학 그 중에서도 특히 성리학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이 같은 노력으로 해서 성리학은 양반 사대부 중심의 조선사회의 통치이념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권근은 『인학도설』『오경천견록』등의 저술을 통해서 정도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권근 또한 불교에 대한 대립의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대립보다는 경전의 연구를 통한 비교적 순수한 성리학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오경 전체를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그것들에 體用觀을 적용하여 이해하였으며, 오경 각권 또한 그 내용에 따라 체용을 갖춘 것으로 그는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리한 성리학적식견은 창의적 저술서인 『입학도설』을 통해서 잘 나타난다. 권근은 본서에서 많은 도설 중에 「천인심성합일지도」를 맨앞에 두고, 특히 人·心·性에 대한 설명에 치중하였따. 즉, 그는 천인합일이 유학의 이상임을 제시하고, 그 이상을 심성의 파악에 의하여 이룰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권근의 성리학에 대한 연구는 조선성리학의 철학적 탐구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뿐만아니라 왕도 왕도정치와 인에 의한 정치를 이상으로 제시하면서 군왕 및 지배층의 심성수양과 덕치의 가능근거를 밝혀주었다는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정도전과 권근 같은 개국공신들에 의해서 조선의 성리학적 통치이념이 자리잡게 되었다.4.義理 실천의 道學的 경향조선조가 기틀을 완전히 잡은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의 기간이야말로 성리학사 관점으로 볼 때 사림파 현량과의 설치, 언로의 활성화 등 구체적인 애민·위민·이민 정책으로나타났다. 또한, 조광조는 義와 公을 살리는 길을 선비에게서 찾았다. 선비란 멸사봉공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사람으로 생각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조선조의 선비정신과 사림정신이 형성되었다.성리학에 있어 의리구현 이라는 도학적 측면은 이후 조선조의 많은 애국 충절의 學士·義士·烈士를 속출시켰다.5.심성 위주의 이론 탐구16세기에 들어와서 성리학이 의리실천의 차원이 아닌, 그 이론적 탐구에 있어 독특한 한국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이러한 성리학의 이론 탐구의 대표학자로서 이황과 이이를 뽑을 수 있는데, 이들은 사단칠정론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심성연구에 큰 힘을 기울였다. 당시의 사단칠정론이란 정지운이 그의 『天命圖』에서 사단과 칠정에 대하여 각각 이에서 발하고, 기에서 발한 것 이라고 한 해석이 발단이 되었다. 이황은 기대승과의노변 끝에 사단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른 것 , 칠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탄 것 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이이는 이에 대하여 사단 칠정 모두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 이라 해석하였다. 이러한 사단칠정론을 둘러싼해석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는 8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마침내 학계는 이 문제 연구를 둘러싸고 퇴계학파·율곡학파 또는 주의파·주기파라는 학파까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수많은 학자들이 수백년의 기간에 걸쳐 이 사단칠정론이 다루어 진 것을 보면 이 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중국의 수준을 넘어선 한국성리학의 하나의 특색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심성에 대한 이론적 탐구의 의의는 선한 본성신뢰에 입각하여 당시의 오륜적체제의 근거를 밝히는 뜻이 담긴 탐구이며, 이는 체제 합리화에 의한 사회안정화가 사단칠정론의 이면에 깔려있었다고 할 수 있다.6.禮學的 변용과 그 구현16세기에 이르러 심성의 탐구가 학문적 관심을 끌고 있는 동시에 禮에 대한 의식이 매우 고조되었다. 이 때에는 예학시대라 할만큼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온갖 예를 성리학자들이 연구하면서, 그것을 실천할 것을았다. 이는 예송문제로 확대되는데 어느 대비의 복상이 기년·삼년이어야 한다든지 또는 대공·기년이어야 한다는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집권 세력의 판도를 좌우하는 것이었다.이처럼 이시기의 성리학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관학으로 불려지는 통치 원리로서 예학이 제시되면서, 그 원리에 기초한 어떤 규범, 이른바 예로서의 규범은 자연히 구체적 정책의 도구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7.人性·物性의 同異論18세기에 이르러 성리학계에서는 人物性 同異論 의 문제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이게 된다. 이것은 원래 권상하의 문인들 중 특히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논변화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인성과 물성이 같은가다른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간은 서로 같다고 주장한 반면 한원진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性은 본성을 의미한다. 이간에 의하면 본성은 五常으로 애기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우주의 근원인 태극으로서 理이므로,모든 사물이 다 태극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상, 인성과 물성은 같다는 것이다. 반면, 한원진은 인의예지와 같이 본성은 다 기질로 해서 있게 된 것, 즉 차별적인 기 그것도 마음의 기를 성이라 하는데 이는 인간에게만 있을 뿐 사물에게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형이상학(이기론)의 폭이 한층 더 확대된 경우라 할 수 있다. 17세기의 예학적 사회풍토로 사칠론 등의 인성론만으로 뒷받침하기에 부족함을 느낀 나머지 우주론의 차원으로 이론을 확대 심화시켜 생각해 본 것이다. 즉, 이는 성리학의 이론적으로 더욱 발달했음을 나타내준다. 아무튼 중국에서 기초적인 수준에 그친 이 문제가, 조선조 말까지 약 200년 동안이나 성리학계를 석권한 과제였다는 점은 이것이 사칠론과 함께 한국 성리학의 또하나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8.理氣論의 경화와 斥邪운동일찍이 15세기 말엽부터 왕양명의 심학이 한국에 전파되기 시작하였지만, 그것은 곧 퇴계를 비롯한 정주계 학자들의 강한 배척에 묻혀 수용조차 제대로 될 수 없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인 정제두에 의해서미략하나마 심학의도 하였
{{{주 제: 토마스 쿤의「과학 혁명의 구조」{{과 목 : 한국의 전통과 문화(야)학 과 : 국어국문학과학 번 : 031095이 름 : 신 칠 범제 출 일 : 2004년 11/10 (수)담당교수 : 김 남 일 교수님Ⅰ.서론우리가 배우는 모든 학문은 일종의 혁명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혁명이란 사전적 의미로서사물의 상태나 사회 활동 따위에 급격한 변혁이 일어나는 일을 의미한다. 처음의 어떤 체계가 있을 것이고,그러한 체계에 대한 반증사례들이 제시 되었을 때, 학문에 있어 그것을 뒤엎는 곧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혁명을 통한 과학의 발전과 진보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 바로 토마스 쿤이다. 그는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저서를 통하여 과학사의 발전에 따른 과학혁명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줌과 동시에 패러다임 이라는 용어의 정의와 특징 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쿤의 이러한 패러다임론은 전통적 과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과학관이 실제로 수행되는 과학의 방식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일깨워 주었으며, 과학 관련 뿐만 아니라 사회학,경제학,언어학 등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패러다임은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체계를 자리 잡았다.그렇다면 쿤의 패러다임이란 무엇인가? 쿤이 강조하는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의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이론, 법칙,지식 및 사회적 믿음이나 관습 등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으로서 그는 이 패러다임이 한 시대의 세계관과 과학적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분명 이러한 패러다임은 하나의 이론이 나타났을 때 그것 이 한 시대를 지배하는 주로 과학 분야에 맞는 체계라 여길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역사학 과는 다분히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에 소개되겠지만 패러다임은 과학사를 바탕으 로 만들어진 이론체계이다. 따라서, 다분이 역사학에 도 이러한 패러다임이 적용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특히 역사서술에 있어 서구의 시대구분에 얽매여 있던 히 이를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s)이라 부른다. 과학 혁명의 과정에서 새로운 이론의 동화는 재구축과 기존사실의 재평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쿤은 이처럼 모든 과학은 패러다임을 통한 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혁명에 있어서의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중요시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단선적이고, 누적적이라는 기존의 과학관을 뒤집는 패러다임이론을 창조할 수 있었다. 쿤에게 있어 과학사 즉, 역사학이란 이론의 확장과 과학발전의 설명에 관한 모든 해답을 제시해 주는 근원이었다. 특히 과학사 속에서 작동하는 방법론적인 프로그램의 측면인 발견의 맥락과 새로운 방법론의 타당함을 보여주는 측면인 정당화의 맥락 을 구분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방법론이라는 것이 정당화의 맥락 이 아니라 사실은 발견의 맥락 이며, 그 발견을 통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론화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쿤에 있어서 역사학이란 이후 소개할 패러다임과 정상과학 그리고그 위기와 혁명에 의한 새로운 이론을 탄생시키는데 하나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2.정상과학의 성격과 퍼즐풀이로서의 의미자연과학이 성숙하지 못한 시절에는 여러 학파들이 서로 경쟁하며 난립하던 그런 시기였다. 이 시기를 pre-paradigm이라 한다. 그러다가 하나의 학파가 승리하게 됨으로서 이전 패러다임 시기 가 종결되고, 정상과학의 단계가 시작된다. 정상과학이란 과거의 하나 이상의 과학적 성취에 확고히 기반을 둔 연구활동을 의미한다과학발달의 초창기에는 제작기 다른 방식으로 현상들을 해석하지만. 이러한 분리현상이 점차 사리지고, 결국에는 완전히 없어지게 된다. 어떻게 보면 한 패러다임과 그에 반향되는 패러다임은 과학적 아노미 상태를 가져올지 모르겠지만, 확립된 기존 이론에 의해서 지시됨이 거의 없이 단순한 수집된 사실들을 통하여 첫 패러다임의 탄생을 허용하게 된다. 즉,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 분야의 새롭고 좀더 확고한 정의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상니게 된다. 정상과학의 정규적인 연구활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연구들이 개념적이든 현상적이든 주요한 새로움을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상과학은 기존의 퍼즐을 하나씩 풀어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쿤은 이미 그 퍼즐의 정답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정상과학이란 예측된 결과를 새로운 방법으로 이끌어 내는 하나의 퍼즐과도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복잡한 기기적 장치, 고차원적인 개념적인 설명 등을 통하여 수학적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이 정상과학의 목표라 여기고 있다. 즉, 패러다임이 성립된 이후의 정상과학에서는 풀이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문제들의 목록을 만들 수 있고, 이후 과학자 그룹의 주요한 연구활동은 그 제한된 범위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과정으로 인식할 수 있겠다.3.패러다임의 우선성규칙 , '패러다임 , '정상과학 중에서 쿤은 패러다임이 가장 우선한다고 보았다. 보다쉬운 설명을 위해 그는 NoSmokian들이 도입한 진화를 통한 패러다임의 개념을 인용하고 있다. 진화는 생명과학자의 그룹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므로 하나의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그룹은 NoSmokin이라는 단백질이 진화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진화와 관련된 매우 어려운 내용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학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그들은 이야기 하고 있다. 즉, 어떠한 규칙보다 패러다임이 우선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이 안정화되었을 때 정상과학은 규칙이 없이도 진행될 수 있다.따라서, 패러다임은 가장 우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패러다임이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첫째, 특정한 정상과학이 전통을 주도해온 규칙을 찾아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고, 둘째, 패러다임은 개념화된 규칙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직접 하나의 모형이 됨으로서 연구의 지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패러다임이 위태롭게 여겨지면 그때까지 무심하게 여겨왔던 규칙들은 다시 중요해지게 된다. 이는 실 제 역사적 패러다임의 불완정성과 불충분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변칙성이 증가할수록 정상과학의 규칙은 점점 모호해 지며 기존의 패러다임은 유지는 되지만 사람들은 전적으로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게 된다. 이처럼 변칙성에 의해 기존의 패러다임은 위기 상황을 맞게 된다.변칙성에 의한 위기상황으로부터 정상과학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과학자들에 새롭고 의외적인 것들이 밝혀지고, 새로운 이론들이 또 다시 창안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상과학의 발견은 이상현상에 대한 사전의 인지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관찰적 및 이론적 인식의 점진적 및 동시적 출현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저항에 따른 새로운 패러다임의 범주와 과정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처럼 과학에서의 신기한 새로움은 예측되었던 바에 거스르는 저항에 의해서 발생하는 난관을 뚫고서야 비로서 출현하게 된다. 이러한 괴정을 거치면서 이상하던 것이 예측되는 것으로 바뀌게 되면 그 발견은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정상과학의 위기와 새로운 발견을 잘 나타내주는 예가 바로 천동설과 지동설에 관한 논쟁이다.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저서 천구의 회전운동에 관하여 에서 지구와 행성들은 완전한 구형이며, 태양을 중심으로 원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지동설(태양 중심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과학이론이 출현했음을의미했을 뿐이지, 그의 단순한 주장이 곧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과학혁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였다.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이 세운 전제 아래 실제 관측과 태양이 지구 공전궤도의 중심이 아니라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하도록 하는 도구적 장치를 이용하였다. 이후 갈릴레오에 의해 이러한 지동설은 심오하게 연구되면서 천동설과 지동설간의 논쟁이 불붙게 되었다. 처음에는 지동설이 시대적 상황에 의해 힘을 잃었으나, 오늘날 과학교과서에는 명백히 지동설이 하나의 천체이론으로 적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수 있드시 기존의 패러다임이 위기를 맞이했을 때, 정상과학은 끊임없는 문제풀이 활동과 실패를 맛 본 후에야 비로서 새로운 해서 그들을 위기로 몰고간 패러다임을 폐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과학자들이 이상현상을 반증사례로 여기지 않는데에 있다. 만약 한 과학자 가 이상현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기존의 패러다임을 파괴한다고 한다면 그는 매우 창의적인 과학자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뒤죽박죽된 과학세계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즉, 패러다임 없이 시작하는 연구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기존의 패러다임의 폐기란 과학자로서의 직업을 버리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기존의 패러다임이 흔들린다는 것은 정상과학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므로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으며, 반드시 그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의 근원부터 해결해야 할 것인데, 그 위기의 근원인 이상현상에 대하여 풀리지 않는 문제풀이가 지속됨에 따라 여러 패러다임이 제시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패러다임은 명료화 된다고 할 수 있으며, 기존의 패러다임의 위기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6.과학혁명의 본질과 필요성어떤 분야든 간에 기존의 질서가 무너졌을 때 혁명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과학도 예외는 아닌데, 기존의 패러다임이 위기를 맞이했을 때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쿤은 과학혁명을 정치혁명과 비교함으로서 명확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정치적 혁명이란 기존의 제도가 주위 상황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제 더 이상 해결 할 수 없다는 의식이 흔히 정치적 사회의 집단에 편재되어 팽배하면서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과학혁명도 의미상 비슷한데, 기존의 패러다임이 자연 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전에는 그 방법을 주도했으나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과학자 사회의 좁은 분야에 국한되어 점차로 증가되면서 시작되게 된다. 이 두가지 혁명의 유사성이란 혁명의 조건에 있어 위기로 몰고간 기능적 결함을 깨닫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과학혁명의 과정에서 경쟁하는 패러다임의 선택에 있어서 과학자들의 각 진영은 자신들의 패러다임을 이용해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한다. 이는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