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은 피부에 세월에 흔적이 세겨 둥근 태를 만들고 머리는 빛을 받아 푸르게 빛난다. 손 끝에 걸린 하얀 달빛에 어둠을 참는다. 내가 바라보는 나무이다. 나무는 언제나 한 곳에 서있고 그곳에서 태어나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고대에서부터 사람들은 나무에 대한 생각을 아주 많이 하였나보다. 흔히 신화에서 나무는 생명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 나무는 인간에게 영생을 주는 생명의 상징이요, 수백년을 산다는 나무는 우리 무속신앙에서 장수와 영험의 상징이었다. 나도 어렸을 적 마을 어귀에 있는 당산나무 앞에 돌을 쌓아 소박한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있다. 나무는 언제나 넉넉하다. 그리고 포근하다. 그에게 다가 서면 세월의 냄새가 난다. 등에 핀 초록 이끼에서 그늘진 저녁의 외로움을 발견하기도 하고 푸른 잎사귀의 싱그러움에서 햇살 좋은 날의 즐거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변하는 그의 모습에서 결국 추억과 시간을 기억한다. 나무는 역시 우리에게 땔래야 땔 수 없는 기억의 저장소인 것 같다. 아직도 내 추억 속에는 학교 교정에 있던 커다란 포플러 나무의 짙은 그림자가 숨쉬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나무는 무엇이었을까?이에 앞서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다. 그는 1961년생이며 고향 뜰루즈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국립언론학교에서는 저널리즘을 전공하였다. 대학 졸업 후에는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을 하면서 과학 잡지에 개미에 관한 평론들을 발표한다. 별들의 전쟁 세대에 속하기도 하는 그는 고등학교 때에는 만화와 시나리오에 탐닉하면서 '만화신문'을 발행하기도 했으며 올더스 헉슬리와 H.G 웰즈를 사숙하면서 소설과 과학을 익혔다. 개미 같은 곤충이나 화학 분야의 신발명 등 자연과학에 파고들면서 '아프리카의 개미이야기'로 보도상을 받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는「개미」「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타나토노트」「아버지들의 아버지」「천사들의 제국」「뇌」등이 있다. 특히 개미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베스트 셀러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여기서 받았던 지적 충격과 새로움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한 관심과 호감을 갔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렇듯 과학소설에 관련된 긴 장편을 많이 쓰던 그가 최근에 나무라는 단편 소설집을 내놓았다. 일단은 호기심이 갔으며 그가 나에게 줄 새로움이 기대되어 이 책을 보게 되었다.일단 그 역시 나무를 역사로 본 것 같다. 그가 나무에서 쓴 18가지의 이야기는 모두 미래에 대한 상상이었다. 어쩔 수 없는 베르나르표의 발칙한 상상. 그는 마치 현재에 뿌리를 둔 미래 위에 18가지의 가지를 쳐 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은 형상으로 글을 써놓았다. 조금은 당황스러운 그러나 의미 심장한 그의 짧은 글들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아스팔트 인간들에 대한 연민과 경종을 보내고 있었다. 때론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소름키치기도 했고 그 눈빛이 너무 슬퍼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런 만큼 베르나르의 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그는 나무를 인간으로 보았다. 어쩌면 그는 이 책의 제목을 나무가 아닌 인간으로 짖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철저히 인간에 대해서 인간의 정신과 감정에 대해서 이 글들을 썼으며 그것은 18개의 작품 모두에게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는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이다. 그렇다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나무를 통해서 본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한발 나아가 보도록 하겠다.나무의 첫 번째 이야기 ‘내겐 너무 좋은 세상’은 처음부터 내게 너무 충격적인 세상을 보여주는 이야기 였다. 기계세상이 된 미래에 대한 이야기 였는데 마지막의 반전은 충격적이었다. 모든 물건들이 생각을 가진 기계가 된 세상에서 또 다른 기계로서 인간의 정체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그 글 속에서 과연 기술 발전이 미래의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런 물음에 생명 연장이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환혼의 반란’이라는 이야기에 베르나르 나름대로의 대답이 나와있다. 초고령화 사회에서 노인들은 경제활동도 하지 못한체 사회보장제도에 기대서 살아간다. 하지만 노인의 수가 늘면 늘수록 국가의 제정은 힘들어지고 결국 당국은 70세 이상의 노인에 대한 각종 혜택을 줄이고 결국 CDPD라는 기관에서 노인들을 안락사 시키기로 한다. 현재의 사회를 보았을 때 예측 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 역시 갈 수록 줄어드는 출생율과 늘어나는 수명으로 인해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고 있다. 또한 국민 연금의 제정은 수십년이 지나면 적자가 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수십년이 지나고 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노인들은 위해 젊은이들이 희생할 것인가 아니면 노인들이 희생당하여야 할 것인가, 사회의 강자는 젊은 사람들인데 결코 젊은이들이 희생한다는 윤리도덕적인 결과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 역시 ‘황혼의 반란’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시 ‘황혼의 반란’의 내용을 보면 프레드라는 노인이 CDPD에 갈 운명을 거부하고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정부에 대항하다가 결국 CDPD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단편인 만큼 내용은 간단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가 주는 느낌은 가히 충격적이다. 특히 프레드가 마지막에 잡혀가면서 젊은이에게 던진 말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게다” 나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된다. 결국 사람의 생은 순환적이고 반복된다. 혁명적인 변화가 있더라도 그것은 순환과 반복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뿐이다. 'revolution' 혁명의 어원이 순환하다의 ‘revolve'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미래에 대한 이러한 시각이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시각 또한 존재한다. 그것은 아주 직설적인 것과 은유적인 것이 공존하는데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는 인간에 대한 베르나르의 직접적인 생각이 들어있다. 거기에서 인간은 폭력적이며 이기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에 대한 전부는 아니다. ‘투명피부’에서 나오는 한국여인은 인간의 본질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결국 내면의 교류로 만나고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베르나르가 프랑스 작가인 만큼 철학적 세계는 깊고 심오하다, 마치 예전의 사르트르나 알베르트 카뮈가 보여줬던 실존에 대한 사고는 같은 프랑스 작가인 베르나르의 글씨위에도 선명하게 흐르고 있었다. ‘허깨비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물을 기호화된 수치로 보는 사람이 등장한다.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람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갔고 있지않다. 우선 교환가치로서 사물을 본다. 이것은 얼마짜리 저것은 얼마짜리, 사물을 이루는 원료조차 모르면서 그 사물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생활하며 심지어 인간에 대해서도 이러한 시각은 유지가 된다. 그곳에 인간은 없고 한개의 사물이 있을 뿐이다. ‘수의 신비’에 서는 인간의 진리에 대한 신격화와 맹종이 부르는 전체주의에 대해 가볍지만 무거운 필체로 그러한 세상을 그려나간다. 그 세상은 수가 권력이다. 어느 수 이상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사람 위에 설 수 있는 지위를 가진다. 하지만 그러한 수에 대한 숭상과 진리는 자유로운 사고와 더 큰 수의 세계로 향한 움직임을 금지시켰고 결국 세상에는 10조차도 제대로 모르는 바보들만이 살아갈 뿐이다. 우리 세상에도 이러한 일들은 얼마든지 있다. 앎은 자유로운 것이다. 언제나 열려있어야 하며 누구도 침범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소위 어떠한 법칙에 세상의 모든 것을 구속하고, 그것이 아니면 오류나 우연으로 치부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진실을 찾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