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개론 report유지기의 史通과 두우의 通典목차Ⅰ. 유지기1. 유지기의 생애2. 사통의 성립3. 사통의 공헌4. 유지기의 영향Ⅱ. 두우1. 두우의 생애2. 통전의 성립3. 통전의 구성4. 두우의 영향Ⅰ. 유지기1. 유지기의 생애유지기의 자는 자현이며 서주 팽성 사람으로 감찰어사 유장기의 아들이다. 형은 유지유로 공부상서, 태자빈객을 지냈다. 유지기는 12살 때 아버지로부터 『고문상서』를 배웠다. 학업이 진보가 없자 아버지는 그를 회초리로 다스렸다. 일찍이 아버지가 형들에게 『춘추좌씨전』을 해설하는 것을 듣고는 자주 자기의 책을 덮고 그 강해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탄식하며 이르기를 “만약 책이 모두 이러하다면 제가 다시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그 뜻을 기이하게 여겨 『좌전』을 가르쳐 주겠다고 허락하였다. 이듬해부터 드디어 여러 사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형 유지유와 함께 둘 다 문장을 잘 지어 이름을 날렸다.약관의 나이에 과거시험에 참가하여 진사에 급제하여 획가주부가 되었으며,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봉각사인이 되었다. 장안 2년에 저작좌랑 겸 수국사가 되었다. 중종 때 태자솔갱령에 발탁되었다. 강직하고 본분을 지켰으나 여러 해 동안 승진하지 못하였다. 천자가 서천함에 유지기는 자청하여 남아서 동도를 지켰다. 장안 3년에 유지기가 사관의 신분으로 사사로이 저술을 했다는 말이 있었다.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사서편찬을 관장하였으며 벼슬을 옮겨 비서소감이 되었다. 이 때 재상 위거원?기처눌?양재사?종초객?소지충이 모두 감수를 맡았다. 유지기는 윗사람이 너무 많아 의견이 통일되지 않는 폐단이 있음을 알고 이에 글을 올려 사직을 청했다.처음에 유지기가 『무후실록』을 편찬하면서 몇몇 착오를 수정하였으나 무삼사 등이 그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그는 비록 자신의 재능은 쓰임을 얻었으나 자신의 의지는 펼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이에 『사통』 내외 합계 49편을 저술했다. 때는 바로 경룡 4년 2월이었다. 후에 벼슬을 옮겨 태자좌서자 비서소감이 되었다. ??????일찌기 사초를 첨삭하던 중 틈이 나면 사서를 검토?비교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나의 의견을 꾸준히 적어, 상자와 고리짝이 그 원고들로 가득찼다. 이에 나는 그것을 분류, 주제별로 정리하여 한 책에 기록하였다.”이 경우의 ‘이에’는 그가 비서소감에 취임한 이후의 시기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때 그는 그 사이에 이미 상자와 고리짝을 가득 채운 역사에 관한 그 원고를 하나의 책으로 묶어 『사통』을 만든 것이다. 그가 비서소감에 임명된 정확한 연대는 유감스럽게도 단정할 수 없지만, 『사통』의 맨 마지막 편인 오시편에 의하면 - 이 편은 주로 그가 역사편찬총책임자에게 보낸 편지로 구성되었다 - 유지기는 중종이 서도 장안으로 귀환한 이후에도 3년 동안 동도 낙양에 남아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에 대한 모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전으로 전달된 명령에 의해 장안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오로지 역사저술에만 전념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 때 그는 서문에 기술된 것처럼 비서소감에 임명되었다. 황제가 장안으로 귀환한 것은 706년 10월이므로, 유지기가 3년 후 즉 709년경에 그 자리에 취임하였다고 추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서문을 따른다면 『사통』은 709년 이후에 이미 준비가 된 그 이전의 자료에서 자연스럽게 편집되어 만들어진 것이다.그러나 그의 자서를 보면 사정은 약간 다르다. “금상께서 즉위하셨을 때, 나는 다시 황제의 명을 받고 측천대성황후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그것을 저술할 때 나는 본래 의미를 계속 주장하였지만, 당시의 동료들과 감수귀신들은 항상 다른 의견이었으며, 이 견해의 차이를 조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아아, 나는 비록 나에게 합당한 자리에 있었으나 나의 아름다운 뜻을 세상이 받아주지 않으니 나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었다. 그로 인하여 나는 울적과 고독한 분만에 가득차게 되었으며 스스로 위안할 길도 없어, 항상 뒷전으로 물러나 더이상 의견도 표시하지 않고 저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죽은 후에『사기』와 『한서』는 모두 기전체이다.이로써 옛 사람[유지기]의 저서 역시 단지 늘 볼 수 있는 서적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면서 깊이 파고 들어가 탐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잇다. 깊이 파고 들어가 탐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르기를이상으로 육가에 대하여 고찰하였는데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자취를 검토하여 대개 사서이 변화와 종류를 모두 여기에서 다 이야기하였다. 현재 순박한 기풍이 모두 사라지고,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져 『상서』등 사가의 체례는 이미 오래 전에 폐기되었으며, 능히 본보기로 삼을 만한 것으로는 단지 『좌전』과 『춘추』 이가가 있을 뿐이다.[『사통』「육가」]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다음에 말할 이체이다.편년과 기전 두 차례로 말하자면 둘 다 유지기 이전에 가장 유행하던 사체였으므로 중국사학가의 깊고 철저한 주의를 끈 것은 당연한 일이다.실정에 근거하여 볼 때 유지기는 기전체 정사에 대하여 이것이 사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종류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전체 속의 각 부분에 대해 한 차례의 총괄적인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후대에 사가가 쓴 기전체 사서는 대체로 모두 『사통』의 지시를 따랐다.2) 사가유지기의 『사통』 곳곳에서 그 자신의 감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고금의 사가가 재?학?식 세 가지를 고루 갖추기란 어렵다고 생각하였다.우리는 유지기가 재?학?식 세 가지의 조건을 제시하여 고금의 모든 사가를 평가하고자 한 것은 중국사학사상에 있어서 하나의 중대한 발명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재는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는 종합적인 능력이고, 사학은 사료를 수집하는 능력으로 사료의 고증 역시 그 속에 포함되며, 사식은 역사적 사실을 비판하는 능력이다. 또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사재는 문학방면의 일이고, 사학은 역사편찬학 방면의 일이며, 사식은 역사철학방면의 일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사식이다. 이것은 사가는 독자적인 고명한 견해를 품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사가는 마땅히 세속에 구애됨이 없이 자기 신념대로 행동할면이 있었다.4. 영향『사통』이 완성되자 동시대 사람인 서견이 이를 보고 감탄하며 이르기를 “역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내용들이다.”라고 하였다. 『옥해』권 49에 『당회요』를 인용하여 “광화 3년에 유찬은 『사통』의 비평이 과도하다고 여기고 『사통석미』10권을 지었으며, 후에 손하는 또한 『박사통』 10여 편을 지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모두 전하지 않는다. 송대 초기에 이르러 송기가 이르기를 “유지기는 고인을 질책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자기를 성찰하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사고제요』에서는 이르기를 “내편에서 논한 내용은 모두 사가의 체례와 시비를 판별한 것이며, 외편은 역사서적의 원류를 서술하고 옛 사람의 장단점과 득실을 평론한 것이다. ??? 이 책은 고금을 관통하고 있으며 이로움과 폐단을 통찰하고 있으니 실로 후세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사통』의 간행본은 전하는 것이 매우 적었다. 명대에 이르러 비로소 여러 사람이 이를 교정하였으며, 왕유검은 『사통훈고』를 지었다. 육심은 『사통』을 교정 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 정요한 말만을 골라 『사통회요』 3권을 편찬하였다. 또한 호응린의 『소실산방필총』 권4에 역시 『사통』을 평한 글이 있는데 참고할 만하다. 『천경당서목』 권5의 사학류에는 『사통회요』 4권, 『사통훈고』 20권이 있으며, 또한 곽공정의 『사통훈석』 20권이 있다.청대에 이르러 먼저 황숙림이 『사통』에 주를 달아 책이름을 『사통훈고보』라고 하였다. 동시에 무석의 포기룡이 『사통통석』을 지었는데 가장 상세하고 정밀하다. 청대 중엽에 노문초는 또한 전준왕교본을 얻었는데 이것에 근거하여 세간에 전하는 『사통』을 교정함으로써 다시 수백 조목을 찾아내어 군서습보』에 수록하였다. 오늘날 사부총간본은 손육수가 교정하고 주를 단 것으로 각 판본의 차이와 장단점을 상세히 서술하였다. 기윤이 지은 『사통삭번』은 가장 무의미한 책이다. 근래 서안의 송자포는 「속사통」 내외편 20장을 지민족에서도 점차 여러가지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당시의 계급 모순과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이 더욱 첨예화하게 되었다. 일찌기 찬란한 한 시대를 경험했던 당제국이었지만 이미 위태위태한 것이 하루도 지탱할 수 없을 정도였다.이러한 상황에 대해 당시 통치계급 내의 지식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초조하게 고심하며 당제국의 통치가 비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구하려고 힘껏 노력하였다. 먼저 유안과 양염이 재정 부문에서 성공적으로 개혁을 진행시켰다. 이어서 왕숙문?유종원 등도 정치상의 혁신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부패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살아가는 두우 역시 경세치용의 학문 즉 “국가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히하는 정책”을 적극 추구하였다. 그는 일찌기 양염이 이끄는 양세법의 추진을 보좌하였었다. 뒤이어 진행된 왕숙문 등의 정치활동도 그가 수상의 지위에 있을 때 진행된 것으로 정치상의 포부와 주장 내용에서 두우와 분리하여 볼 수 없는데, 모두 어느 정도의 진보성을 갖고 있었다.두우는 지위가 비록 장상에 이르렀으나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예술이나 문장을 존중하지 않았다. 여러 경전들은 대체로 말을 기록한 것이 많지만 법제를 포함한 것은 드물다고 평가하고 나서 역대 제도문물의 연력과 효과를 고찰하고 역사상의 경험교훈을 모두 정리하여 시정의 모범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것이 그가 『통전』을 편찬한 동기였다. 권덕여는 “그가 전적을 널리 섭렵하고 고금의 변화를 자세히 살펴 『통전』을 저술했다. 정치의 법도를 궁리하여 상하 수천 년간의 논의를 정리하고 절충하였으니 왕을 보좌하는 일이 모두 여기에 실려 있다”고 말했다. 두우 자신은 「통전서」에서 “『통전』을 편찬한 것은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모아 사람들의 실제 일에서 증명하여 장차 정치에 시행토록 하기 위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통전표」를 올리면서 그는 또한 “정치에 시행함으로써 국가를 다스린다”는 말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저술 목적은 ‘렸다.
1. 흥선대원군의 생애-1820년 영조의 현손 남연군의 넷째 아들인 조선 왕족으로 태어남.-1831년 12살. 여흥 민씨와 결혼, 어머니가 돌아가심.-1836년 17세. 아버지가 돌아가심.-1840년 21세. 흥선정이 됨.-1843년 23세. 홍선군으로 봉해짐 도총관등 한직을 역임한 후에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밑 에서 일신의 보전을 위해 일부러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김씨 일가의 동정을 살피기시작.-1846년 27세. 능을 이장하는 부서의 감독관이 된 뒤 여러 가지 한가한 직책을 밭아 봄-1863년 44세. 그동안 세력다툼에 끼지 않기 위해 피폐하게 살다가 철종이 죽자,조 대비와 손을 잡고 둘째아들 명복을 왕위(고종)에 오르게 하고, 대원군이 되어 어린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함.-1865년 46세. 왕권을 드러내기 위해 경복궁 재건 공사 시작.-1866년 47세. 천주교 박해령 내림. 프랑스 신부 처형, 이때부터 6년 안 8000여명의 천주교도를 학살함-1868년 49세. 경복궁을 완성함-1871년 52세. 왕으로부터 인정받은 47개 서원만 남기고 전국의 서원을 모두 철폐함.강화도의 미국 군함을 물리침.-1873년 54세. 명성황후의 세력에 밀려 권력을 잃고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여 양주 내려감.-1882년 63세. 임오군란으로 민비가 도망가자 다시 실권을 쥠. 그러나 명성황후가 청나라 와 손을 잡아 대원군은 청나라군대에 납치되어 귀양살이를 함.-1885년 66세. 청나라에서 풀려나 위안스카이와 귀국함.-1887년 68세. 큰아들 재면을 내세워 다시 정권을 잡으려다 실패함.-1895년 76세.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을 정하여 유폐생활을 강요당함.-1898년 79세. 세상을 떠남.2. 흥선군의 집권시기의 대내외적 상황1. 안으로부터의 위기 (수탈과 반란)(1) 수탈적 조세정책1) 전정(田政)의 위기▶ 조선의 전정(田政)은 원래, 지방에서 생산량을 보고하고 중앙이 실사(實査)한 후 세 금액을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이 제도의 문제점은 관리들의 공정성을서 직접 복무하는 대신에 포(布)로 납부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임진왜란이후 직업군인제로 전환되면 서 군역은 군포로 조세화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군역의 가장 중요한 폐단은 양반이 수세 대상에서 제외되고, 오직 인반 양인만이 수세 부담을 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농민은 군역으로만 수입의 16%를 납부해야 했다. 이처럼 군포제의 폐단에는 조선 양반 층의 의무 없는 특권, 농민들의 권리 없는 의무와 무토지, 정부의 과중한 조세수취 정 책 등 당대 조선사회의 근본적 모순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군역은 또한 국가방위라는 본래의 군사적 의미에서 벗어나, 단순한 세수 증대책의 일환으로 변질되었다. 이에 양 반도 군포를 부담해야 한다는 이율곡의 양반호포론과 송시열(宋時烈)의 사족호포론(士 族戶布論)이 제기되었으나 반대론에 밀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환곡은 원래 춘궁기나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비상대책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환곡제는 강제적이고 고리대적인 국가 영리사업 혹은 단순한 세금으로 전 환되었다. 이에 대한 근본적 개선책은 환곡제의 본래 취지인 구호 기능을 회복하고 사 회제(社會制)로 환곡 운영을 백성들에게 맡겨 중간 관리들의 착취를 방지하는 것이었 으나 개혁책은 시행되지 않았다.(2) 양반의 무법한 향촌지배▶ 중앙정부의 허약성은 단지 관리들에 대한 통제력만이 아니고, 평민들에 대한 양반계 급의 무법적인 권력행사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지방의 재지 사족들은 서원과 향교를 중 심으로 향촌의 이데올로기와 지식, 통제력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세력은 지방관 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였다. 그들은 백성을 상대로 징세 및 노동력의 징발, 재판권까지 행사하고 있었다.(3) 정치적 지성의 소멸▶ 조선의 국가와 지배계급이 본래의 통치이념(仁政)과 달리 단순한 수탈자 집단으로 변모함에 따라 백성들에겐 민란(民亂)이 최종적인 해결책이자 유일한 해결책이 되었다.그러나 조선은 태조 이성계의 즉위 교서에서 표명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념상 백성의 안위와 복지를 구체적으로 실감되기 시작하였으나 그에 대한 인식 여부와 무관하게, 그 뒤 1세기에 걸쳐 한국이 겪게 될 대내외적 변동은 훨씬 전에, 그리고 훨씬 더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인식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시기적으로 매우 늦었으며, 민감성에 있어서도 매우 둔감한 것이었다.(2) 천주학 운동▶ 천주학 운동은 이미 정조때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하였는데, 1783년 이경이 북경에 가서 영세를 받은 후, 성균관 근처의 양촌(洋村)에서 천주학을 신봉하는 유생 중심의 양회(洋會)가 조직되었다. 이것은 지식인들뿐만이 아니라 특히 하층민들에게 큰 지지를 받아 “천하고 무식한 자와, 쉽게 유혹되는 부녀자와 아이들은 한 번 이 말을 듣기만 하면 목숨을 바쳐 뛰어 들어가, 이 세상의 사생을 버리고 만겁(萬劫)의 천당과 지옥을 마음에 달게 여기며, 한번 들어간 뒤에는 미혹됨을 풀길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천주학의 유입에 조선의 대표 사상이었던 성리학은 너무 오랜 세월동안 정통으로 군림한 결과, 그리고 병자호란이 남긴 상처에 대해 자기 방어적 논리로 고착된 결과, 그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3.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1. 대원군의 대내정책(1) 왕실의 강화▶ 대원군은 왕실의 강화를 위해 종친 세력을 급속히 증대시키고자 하여 집정 초부터 종친부를 정비하고 강화했다. 그는 향후 정치의 향방에 대해, “내가 천리를 지척으로 만들고, 태산을 깍아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한다”고 선언했는데, 그것은 종친을 높이고, 안동 김씨를 퇴진시키며, 남인을 등용하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종친의 정치참여 금지 규정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종친이 고위직에 진출하게 되었고 종친들의 관직 등용을 위한 특별과거로서 종친시(宗親試)가 시행되었다. 또한 왕가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이씨 왕가의 영원한 보전을 의미하는 집약적 상징물인 경복궁 중건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시대적 정황과 당시 조선의 제한된 자원을 고려해 볼 때 당대 조선의 낙후되고 시대착오적인 정치인식에 의해철저하게 무과출신의 무반들이 기용되었으며, 거의 전원이 종친이거나 친대원군계 인사로 충원되었다. 이것은 세도정치기에 중요한 무장직 전부를 문관이 독점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무관들이 기존에 문관들이 차지하고 있던 핵심 요직에도 진출했다.(3) 대원군의 조세정책1) 호포제▶ 호포제는 양반이 군역에서 제외되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조선 후기의 가장 중요한 정책대안이었다. 이는 평민에게만 받아 오던 군포를 동포(洞布) 또는 호포(戶布)로 바꾸어 양반에게서도 징수하였다. 이러한 호포법은 군사 재정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군자(軍資)를 쌓아둘 창고가 부족할 정도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정책은 영조대의 균역법(均役法)과 달리, 상민의 부담을 줄이는 것은 아니라 다만 세원을 확장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 개혁성이 낮게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대안조차 수 백년 동안 시행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원군의 과감성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2) 환곡정책▶ 대원군 집권 초기의 환곡정책은 환곡의 현실화였다. 당시 환곡의 본전은 거의 없어지고 장부상에만 남아 있어 백성들은 춘궁기에 곡식을 받은 적도 없으면서 가을에는 곡식과 이자를 바쳐야 했다. 대원군은 장부에만 있는 환곡을 모두 탕감하고, 남은 것으로 새로운 환곡을 만들었다. 이것을 각 지역에 균등 분배하여 그 이식을 취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본래 상태로 회복하려는 것이 목표였다. 즉 환곡의 폐지가 아니라 환곡의 현실화에 기초한 환곡 복구정책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 운영과정에서 아전 등 중간관리의 부정을 방지하고, 환곡 본래의 구호 기능을 복원하기 위해 운영을 민간에 맡기는 사회제를 실시하였다.3) 원납전▶ 부민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원납전이었다. 원래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대원군 집권기 내내 수세되었다.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은 오랫동안 황폐한 빈 터만 남은 경복궁의 중건계획을 세웠으나 그에 따른 막대한 경비를 국고만으로는 채울 수 없자, 재상 의 군비강화를 위한 것으로, 매결(每結)당 1두(斗)씩 추가한 것이다. 이 때문에 물가가 등귀하였고, 토목공사에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민원을 사는 등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4) 서원과 만동묘(萬東廟)의 철폐▶ 대원군은 지방 유림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과 대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정책이 서원과 만동묘의 철폐로 서원은 명목상 지방 양반세력의 교화 및 교육기관이었지만, 실은 평민들에 대한 실질적인 향촌지배 기관이었다. 서원의 폐단이 심각해진 것은 그것이 지나치게 많이 설립되었고 면세특권을 이용한 탈세의 도피처가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중앙정계와 연결된 유림의 정치적 결집장소로서, 붕당정치의 지방거점이 되었다는 점과 향민에 대한 초법적 지배기관으로 기능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원의 철폐는 권력과 잉여가치를 중앙정부가 집중?통제함으로써 봉건권력을 강화시킬 것을 의도한 것으로 일반 민중들의 지지도 받았다.(5) 당백전(當百錢 )주조와 청전(淸錢)의 유통▶ 조선의 화폐정책은 전통적으로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실질가치 이상의 화폐를 발행하는 인플레 정책이었다. 당백전의 주조 시기는 고종 3년 병인양요 직후로, 경복궁 중건과 군비확장으로 인해 재정상황이 지극히 곤란했던 시기였다. 당백전의 실질가치는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常平通寶)의 5~6배였으나, 명목가치는 100배였으므로, 정부는 18~20배 정도의 이익을 취했던 것이다. 시장에서 유통이 거부된 것은 당연했으나 정부는 강제와 위협으로 이를 통용시키려 했다. 그러나 고종 5년에 이르러 마침내 사용이 중단되었다. 그 사이 화폐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거래가 마비되었다.청전은 당백전 사용이 공식적으로 금지되기 이전인 고종 4년부터 그 토용이 인정되었다. 청전의 실질가치는 상평통보의 절반에 불과한데, 명목가치는 동일하게 통용되었다. 정부가 그 때까지 청전을 통용할 수 없었던 이유는 명분론 때문이었으나 대원군은 재정확충을 위해 이를 무시했다.2. 대원군의 대외정책(1) 천주교 탄압▶ 천주교의 이념적 도전에
월령공주를 보고나서 느낀 자연의 소중함(영화감상문) 오늘 월령공주를 보았다. 보고 나서 많은 부분을 생각해보게되었다.월령공주는 아주 작은 그러나 평화로운 마을에 재앙신이 등장면서 시작된다. 그 증오와 원망이 가득찬 재앙신은 마을을 엉망으로 만들다가 아시타카의 손에 쓰러진다. 아시타카는 재앙신을 쓰러뜨리려다가 죽음의 저주를 받게 된다. 일본영화답게 일본의 옛 분위기가 그대로 담긴 영상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한 마을의 부족이라던가, 일본인스러운 머리스타일, 그리고 기모노를 입은 모습 등 이 영화는 일본 특유의 분위기가 잘 살아 있어서 좋았다.죽을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아시타카는 서쪽 마을로 떠난다. 그 곳에는 철을 만드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의 사람들은 철을 만들기 위해 자연을 파괴한다. 자연을 파괴하고 또 인간을 파괴하는 무기를 만드는 그 마을의 산에는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하고 개들을 엄마라고 부르는 모노노케 히메가 살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하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과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들을 이해할수 있을까?자연을 파괴하는 인간과, 그들에 대항하는 자연(모노노케 히메)의 싸움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요즘 제기되고 있는 문제를 잘 그린 작품이라고 해야할까. 인간은 항상 자연의 보존과 개발에 대해 갈등한다. 아니, 갈등한다기 보다는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들과 그 행태에 문제를 제기하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에 대한 자연의 분노. 우리는 여러 가지 자연 재해로써 그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직접 그 분노를 표출하고 인간을 공격하는 자연이 있는 것이다.애니메이션이지만 그 주제가 무거운 것을 담고 있기에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애니메이션이었다. 특히나 주제에 맞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또한 위트를 별로 섞지 않고 시종일관 무겁게 나간다.이 영화의 끝에는 결국에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담고 있다. 이것은 감독이 이상주의 입장에서 자연과 인간이 화해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낸것이다. 정말 그들이 화해할지는 미지수이다. 아마 인간이 계속해서 개발을 시도하는 한 그들의 화해는 없을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연은 점점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상주의는 인간은 선하기 때문에 대화로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수 있는 방안을 찾을것이라고 본다.이상주의 입장이란 인간성의 무한한 완성가능성을 믿고, 최고의 인격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도덕적 지향(志向), 현실 세계를 어떤 궁극적 가치나 초월적 이념과의 관계에서 의지할려는 사고방식·세계관을 가리킨다. 현실의 악이나 추(醜)에서 눈을 돌려, 실현 불가능한 환상만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자주 현실주의(現實主義)에 의해 비판된다.
세계화와NGO들에 대한 나의 생각세계화란 국가와 국가, 사회와 사회 사이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정치,사회,문화,경제의 상호연계성의 급속한 심화로 사람들의 삶의 조건과 양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계사회의 증대된 상호의존성의 심화를 말한다. 이는 전지국적 규모의 상호연계성의 강화와 그에 따른 국민국가를 기본단위로 하는 세계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세계화의 징후들로는 1. 냉전적 국제질서의 붕괴와 민주주의의 범세계적 확산, 2. 자본주의의 공간적 세계화 완결, 3. 기술,지식,정보의 국제적 상호의존성 증대 및 초국가적 혹은 범세계적 문제의 확산(핵,환경,마약 등) 및 이에 따른 초국가적 제도,기구의 확산 및 역할의 강화, 4. 초국가적 경제행위자의 영향력 확대 및 경제요소의 범세계적 자유이동 확대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1995년에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는 자유무역과 세계시장의 통합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으로 이는 자본의 이동의 자유로워짐을 의미하며, 그만큼 근대 국민국가의기반이 되는 국경의 퇴색을 가져온다. 나아가, 정보와 문화, 인적 교류, 커뮤니케이션의 증대는 국민국가의 경계통제를 약화시키고 민족적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UN, GATT, IMF, WTO와 같은 정부간 조직 이외에 Amnest International, Green Peace 등과 같은 비정부조직(NGO) 등 초국적 조직 및 제도의 등장은 개별 국민국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초국적 자본과 함께 주권을 제약하고 있다. 이런 세계화를 두고 세계는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대립양상을 드러내고 있다.먼저 찬성론자들의 입장을 살펴보면 세계화는 globalization이라는 말 그대로 ‘지구촌이 하나의 생활단위가 되어간다’는 의미다. 경쟁과 협력이 지구촌화되어 가고 모든 부문에서 표준화가 이뤄진다. 한국은 1990년대 중반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이후 농산물 시장 개방과 쌀 시장 개방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세계화의 찬성론자들은 “세다. 찬성론자들은 “세계화 물결에 적극적으로 올라탄 국가는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빈곤과 실업 문제를 빠른 속도로 해결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례로 등장하는 나라가 중국과 인도다. 찬성론자들은 “세계 빈곤인구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가 세계화 물결에 합류하여 경제성장을 지속하면서 빈곤인구가 줄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빈곤인구는 1980년 세계인구의 31.8%였던 것이 1998년에는 20.3%로 줄어들었다. 찬성론자들은 또 “선진국과 세계화에 합류한 개발도상국의 차이를 점점 줄여가고 있는 반면 고립된 나라들은 오히려 빈곤과 실업이 악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화 물결에 비켜선 채 고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가 북한과 미얀마다. 또한 세계화가 확산되면 궁극적으로 정치ㆍ사회ㆍ문화적 상호의존이 심화되면서 평화공존 의식이 널리 퍼져 전쟁이나 무력갈등이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낙관하기도 한다. “세계화는 궁극적으로 민중의 권리를 앗아간다”는 반대론자의 주장에 찬성론자들은 “세계화에 합류하면 세계 인권단체들의 감시와 압력이 가중되기 때문에 폐쇄적인 나라보다 인권을 자의적으로 탄압하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해진다”고 말한다. 그들은 중국을 예로 든다. 개방을 선언한 1979년 이전의 중국에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가 더 많이 주어졌는가, 아니면 개방 이후에 더 많은 권리가 주어졌느냐고 묻는다. “세계화에 합류한 중국이나 인도 민중의 권한은 점차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반면 고립되어 내전에 휩싸인 수단이나 북한 민중의 경우 생존권도 제대로 보장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찬성론자들은 ‘세계화의 물결은 인위적으로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논리를 편다. 인터넷을 비롯한 최첨단 정보통신의 발달로 사실상 종래의 거리 개념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세계화는 불가피한 시대적 대세라는 주장이다.이번엔 반대하는자들의 주장을 살펴보자. 반대하는 입장을 살펴보면 반세계화 단체들은 세계화는 ‘뿔 달린 괴물’이라고 성토한다. “미국 중심의 초국적(超國籍) 자본에 의한 세계화서 세계화는 제국주의화다.” 반세계화 단체들의 세계화 반대논리의 핵심이다. ‘세계가 하나의 단일시장이 되어간다’는 이면에는 초국적 자본에 의한 힘의 지배가 숨어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론자들은 “시장이든 자본이든 그것의 완전 자유화는 정글의 논리, 즉 힘 없고 열등한 종(種)이 강하고 우월한 종의 먹이사슬에 잡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진행되는 세계화나 WTO체제는 초국적 자본권력의 ‘사다리 걷어차기 작업’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반대론자들은 “모두 한때 철저한 보호무역을 통해 자국산업을 성장시킨 그들은 후진국들이 그들과 같은 과정을 밟아 자국산업을 보호 육성하는 것을 규탄하고 방해한다. 이것은 저들이 먼저 올라간 다음에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대론자들은 또 선진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후진국의 경제적 종속화를 부채질하여 후진국의 빈곤과 아동노동, 빈부격차를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한국의 현안으로 떠오른 쌀 시장개방과 농산물 시장개방 문제는 모두 WTO 속에서 한 묶음으로 움직이는 것들이다. 반대론자들은 경쟁력이 떨어지는 한국의 농업 문제를 제기한다. 쌀 시장과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면 ‘값이 더 싸고 더 맛있다’는 이유로 한국인의 식탁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쌀, 브라질의 콩, 이스라엘의 토마토, 중국의 배추가 올라오게 된다. 반대론자들은 “WTO는 한국인이 그들의 땅에서 재배된 먹거리를 먹을 자유를 무슨 권리로 박탈하느냐”고 반문한다. 최근 영화인들이 거리로 나서 스크린쿼터(자국영화 상영시간 할당제) 축소 방침에 반대하고 있는 것도 좋은 예다.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방침은 한·미 FTA를 체결하면서 미국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세계화는 경제적 종속 외에도 사회적ㆍ문화적 종속이 불가피해진다”고 말한다. 반대론자들은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나 다국적 기업의 상품 같은 해외 주류문화의 대량 유입은 각국의 특수성을 약화시키고 강대국의 문화와 사회에 종속되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목정을 위해 조직한 NGO는 다양한 서비스 와 인도주의적 기능을 수행한다. 정부정책을 감시하고 정보제공을 통해 시민의 정치 참여를 장려하며 인권, 환경, 보건, 성차별 등의 특정이슈를 추구하기도 한다. 유엔 기구와는 조직의 목적에 따라 다양한 관계에 있다. 96년 현재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NGO는 3만8000여개. 그러나 각국의 공식-비공식 기구 를 합치면 100만개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이런 NGO들이 세계화를 반대하는 이유는 세계화의 폐혜가 더 많기 때문이다.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격차 확대, 선진국 및 후진국 내 불평등 심화,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사회 (Winner-take-all society),부익부 빈익빈 현상 심화 (20%가 돈, 노동, 소비매출 차지) ,경제의 불안정 심화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세계화 과정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무역과 금융의 개방이다. 미국은 이러한 개방이 개도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을 준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신자유주의 논리하에 미국 중심의 거대 자본주의 국가가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어 힘없는 나라에서 이득을 취하고자하는 전략의 하나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되어서 모든 국가의 시장이 개방되고 국가와 국가간 경제적 경계가 사라진다면 누가 그 넓은 시장을 독차지 하겠는가? 이미 거대한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국가들과 다국적 기업들이다. 그래서 많은 NGO단체들이 반세계화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즉 세계화를 반대한다는 것이다.이렇게 세계화에 반대하는 입장과 찬성하는 입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뉘어져 찬반논란을 하고 있다.나의 생각은 일단 세계화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일단 지금은 세계화가 되기에는 너무 시기 상조인거 같다. 지금 만약 세계화가 된다면, 그것은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자들은 더욱 가난해지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더욱 심화 될거 같다. 모든나라들이 모두 같은 자원과 기술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한 지금 세계화가 된다면 소수의 강대국들에게 다른 나라들이 를 빼앗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농민들은 경제력이 없는 쌀농사를 안짓게 될것이고, 나중에는 우리나라 주식을 외국에 의존하는 사태가 벌어질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예로 든것은 너무 극단적이다. 찬성론자들은 우리 나라 쌀도 품질을 개량하고 더욱 노력하면 외국 쌀들과 경쟁할수 있을것이라고 애기하겠지만, 솔직한 나의 생각으로는 그건 불가능할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나라들은 재배부터 경작까지 모두 기계화되서 노동력이 별로 안들뿐아니라, 농지부터 우리 나라와는 비교가 안되게 넓은 곳에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우리 나라쌀에 비해 가격이 훨씬 저렴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쌀을 고급화한다고 해도 그건 일부이고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는 계기가 될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것은 일부분이고 만약 세계화가 된다면 쌀뿐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자리를 잃을수 밖에 없다. 찬성론자들은 그기술을 배워 나중엔 우리가 더욱 앞지를수 있다고 애기하겠지만, 일단 우수한 기술력으로 돈을 벌고 그돈으로 다시 기술연구에 투자한다면, 우리나라가 발전해 앞지를수 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수 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개발 도상국들도 마찬가지이다. 한창 발전해 나가는 나라들이 세계화때문에 몇몇 우수한 자본력과 기술력을 가진 나라들과 다국적기업들에게 종속되는 상황이 벌어질수도 있는것이다. 이것은 열강들과 다국적기업의 제국화와 아직 개발중인 나라들의 종속화가 되는 형국이 될것이다. 예로 유명한 기업인 스타벅스커피를 들어보겠다 .한 잔의 커피가 소비자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커피는 여러 과정을 거친다. 커피콩 생산업자에서 중간거래상들에게로, 그리고 다시 수출업자, 수입업자, 커피콩 가공회사와 소매업자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소비자에게 닿게 된다. 커피 노동자들이 ‘코요테’라고 부르는 중간거래업자들은 가난한 농부들에게서 시장 가격의 반도 안되는, 때로는 생산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커피콩을 사간다. 이 과정에서 먼저 중개업자들이 상당한 이윤을 얻게 된다. 하지만 가장.
박정희의 변신과 생존‘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박정희의 레드컴플렉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박정희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일본 군장교로 또한 한때는 남로당의 군 총책임자를 역임하는 등 많은 변신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박정희의 변신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는데 많은 장애가 되기도 하는데, 특히 남로당에서의 활동은 박정희를 감옥에 갇혀 무기징역을 받게 만들었다. 이 난관을 박정희는 남로당의 조직체계를 정부에 넘겨 주고 풀려나게 된다. 이렇듯 박정희는 정권을 잡기 까지 많은 어려움을 격었고, 그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많은 변신을 했으며 때로는 자신의 동지들을 팔아넘길 수도 있는 냉혈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는 정권의 정당성을 입증받기 위해, 특히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명분으로 삼았던 ‘장면정부’의 무기력한 반공주의 타파를 위해서도 박정희는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1963년 12월 14일 북에서 내려왔던 황태성이 전격적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황태성을 둘러싼 논란은 민정당의 윤보선대통령 후보가 유세 과정에서, 공화당이 간첩 황태성의 자금으로 사전 조직되었고 공화당 요원들이 황태성에 의해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과거 여수· 순천 사건에 관련이 있었다는 '사상논쟁'이 이미 윤보선에 의해 제기된 마당에, 황태성을 둘러싼 이러한 논란은 또다시 박정희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잠시 황태성과 박정희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황태성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경북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같이 했던 인물로서 황태성은 주로 김천에서, 박상희는 주로 구미에서 활동 했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황태성이 박상희의 중매를 섰을 정도로 가까웠다. 황태성이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던 시절, 박정희는 형의 친구인 황태성에게 자신의 진로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가 일제의 만주 육사로 가기로 결정함으로써 황태성과 박정희의 관계는 이후 단절되었다. 그후 해방이 된 이듬해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인민항쟁이 발생하자 그 와중에서 박상희는 경찰에 의해 피살당했고 황태성은 항쟁의 주모자로 몰려 피신했다가 월북하게 되었다. 북으로 올라간 황태성은 북에서 부무역상까지 올라갔다. 이러한 경력은 가진 황태성이 박정희를 만나기 위해 밀사로 내려오니 박정희로서는 많이 곤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특히 윤보선대통령 후보는 박정희를 공산주의로 몰아붙여 큰 위기에 빠트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에 박정희는 황태성과의 관계를 인정하는 한편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야당을 낡은 메카시즘의 잔재로 자신은 사상논쟁때문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진보주의자로 내세우며 정면 대응한다.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사상논쟁의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 또한 박정희를 의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밀사로 파견된 황태성은 박정희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이 되어 죽게 된다. 쿠데타를 통해 등장한 군부세력이 황태성을 죽인 것은 이후 1960년대 내내 남북 관계를 격화시키는 전조가 되었다. 북한은 이 사건을 통해 박 정권의 민족주의적 성향에 대한 믿음을 버렸고 박정희 역시 이 사건을 통해 미국에게 자신이 철저한 반공주의자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상적 어려움을 헤치고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공산주의라면 치를 떨게 되는 레드컴플렉스를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