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를 뒤바꾼 계유정난, 세조는 승리했는가? ? ? ‘계유정난’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세상은 이긴 자의 것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특히 역사는 살아남고 승리한 자에 의해 쓰이게 되는 것이지 패하고 죽어버린 이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세조 입장에서야 당시의 사건을 나라의 어지러움과 위태로운 재난을 평정했다는 의미로 ‘정난’이라고 표현했지만 후대에서는 조신과 선비들이 반대파에 몰려 화를 입었다는 의미로 ‘사화’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은 ‘계유정난’이다. 세조, 수양대군은 자신의 친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기 위해 단종을 보좌하고 있던 당시 주요 관직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그 밖에 자신의 반대파에 있던 많은 이들을 죽여 정권을 장악한다. 이것과 대비되는 것이 바로 연산군이다. 연산군도 세조와 똑같이 사화를 일으키지만 후대에 받는 평가는 판이하게 다르다. 똑같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나 연산군은 훗날 폭군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고 국왕에게 부여되는 ‘조’나 ‘종’이 아닌 ‘군’이라는 묘호가 붙여지게 된다. 세조는 즉위한 뒤, 계속 자신의 권력을 이어갔으나 연산군은 도중에 폐위되고 만다. 역사라는 것이 꼭 진실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듯 하다. 누구에 의해, 누구의 입장에서, 당시의 시대가 어떠했나에 따라 똑같은 사실이라도 역사는 다르게 평가되고 다르게 쓰여질 수 있는 것 같다. ‘공주의 남자’라는 사극드라마가 반영된 적이 있었다. 이 드라마는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드라마로 수양대군 딸과 김종서의 아들이 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에는 이 드라마를 허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 드라마는 서유영이 저술한 야사 ‘금계필담’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것이었다. ‘금계필담’에는 한 130여 편의 설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공주의 남자’이야기도 그 중에 하나이다. ‘금계필담’에서는 수양대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 간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 설화는 진실일까. 당시 계유정난 때 김종서는 도반대역죄에 해당되어 그의 일가족이 살아남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김종서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과 차남은 계유정난 때 김종서와 함께 죽임을 당했고 나머지 식구들은 노비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그의 셋째아들인, 공주의 남자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인 김승유는 살아남았다고 족보는 전해고 있다. 때문에 김종서의 손자가 수양대군을 피해 도망 온 그의 딸과 만나 사랑을 나눴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들이 살았고 전해지는 속리산 지락의 굴 이름도 둘의 악연을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하여 ‘보덕굴’ 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 둘 사람의 이야기는 이 지역 대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솔직히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아직도 고민이 된다. 정말 있었던 일인지 아님 지어낸 이야기인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를 거짓인지 잘 모르겠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처럼 아무 근거도 없이 이런 소문이 나 돌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계필담의 저술자인 서유영도 자신이 주워들은 소문들을 정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소문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은 당시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다. 문서로서 정확하게 남아 있는 기록이 아니기에 모두 진실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완전히 없었던 일은 아닌 것 같다.
30년간의 도둑 측량, 일제는 무엇을 노렸나? 이번 역사스페셜에서는 일제가 조선 모르게 한반도 지도를 제작하였고 이를 청일전쟁과 의병토벌에 활용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일본군 14연대의 전쟁 보고서인 ‘진중일지’로부터 시작한다. 진중일지는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의병을 학살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지도이다. 그 지도는 풍수적 성향이 짙은 조선 지도와는 달리 근대적 기법을 사용해 만든 지도였다. 당시 조선은 근대적 기법은커녕 1861년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 이후로는 이렇다 할 지도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지도는 조선의 지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이 불법 측량하여 비밀리에 제작한 군사지도였다. 일본국회도서관에 그 원본으로 추정되는 지도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하나 같이 그 측도년도가 누락돼 있었다. 이 지도는 대외적으로는 191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일본군 14연대는 1907년부터 이 지도를 이용해 의병을 학살하였는데 진중일지보다 늦은 1911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1911년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당시는 을사늑약과 한일강제병합이 되기 이전으로 주권국가를 허가 없이 측량하는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다. 때문에 일제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일부러 측도년도를 삭제해버린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처음 도둑측량을 해서 지도를 만든 것은 1870년대였다. 그들이 이러한 지도를 만들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제국주의팽창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해외로의 확장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과 조선을 상대로 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용 지도를 제작하게 된다. 1878년 전쟁을 준비하는 관청으로 일본 최고 권력기관인 육군참모본부가 창설되었는데, 바로 이때부터 밀정에 의한 도둑측량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간첩대를 주변국에 파견하여 지리를 측량하게 하여 지도를 작성하게 했다. 나아가 제국주의 침탈이 본격화된 1888년에는 육군참모본부 내에 육지측량부를 창설하여 비밀측량임무를 더욱 확대해 나갔다. 조선에는 1877년에 처음 파견하여 한일강제병합이 되기 전까지 30여 년 동안 불법적으로 불법 측량을 했었다. 처음에는 지도 만드는 일이 이렇게 주제로 잡을 만큼 크게 잘못된 일인가, 일본의 침탈과 과연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의문이었는데, 영상을 다보고 나니 전쟁에 대한 일본의 치밀함이 놀랍다 못해 혀를 내두르게 된다. 조선을 먹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의 전쟁에서 조선이 전장이 될 것임을 미리 예견하여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한반도의 지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해외로 나가려고 제국주의팽창 정책을 펼치는 그들의 행동에 치가 떨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이 마음대로 한반도를 측량하여 지도를 만드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조선 정부가 허술하고도 무능력하게 느껴진다. 30년이라는 그 긴 세월동안 왜 조선 정부는 과연 무엇을 했기에 일본 정보에 항의조차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근대적 지도를 조선 스스로가 아닌 일본에 손에 만들어지게 한 것일까. 또한 더불어 지도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도 새로 배운 기분이다. 지도가 누구에 손에 만들어지고 어떻게 이용되느냐에 따라 그 쓰임이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을 배운 것 같다.
묵서지편의 증언, 석가탑이 무너진 까닭은? 1966년 도굴범으로 인해 석가탑이 기울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탑의 훼손도가 심각해 전면적인 보수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정체모를 문서 꾸러미가 발견되었다. 그것이 바로 ‘묵서지편’이었다. 이 기록물은 천 년 전 고려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붕괴위기에 놓인 석가탑을 완전해체한 다음 다시 복원, 수리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로서 공납 물품과 행사 진행 사항을 기록한 중수문서이다. 석가탑이 수리하고 무너질 위험에 놓이게 된 이유로는 지동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한번이 아니라 연이어 발생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지동은 지진을 일컫는다. 1036년 1차적으로 발생하여 복구 과정에 있던 도중에 이년 뒤인 1038년 한차례 지진이 더 발생하여 석가탑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발견된 당시 묵서지편은 비단보자기에 쌓여져 있었는데, 천년이라는 세월동안 서로 엉켜 붙은 채로 심하게 훼손되어 손만 닿아도 부스러질 정도였다. 그런데 출토된 당시는 국내 보존과학 기술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떡처럼 굳어버린 것을 분리하기 어려웠고 전혀 그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30년이 지난 1997년에 들어서야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붙어 있던 낱장들을 하나한 분리하는 작업을 선행되었다. 하지만 종이 순서가 뒤죽박죽되어 있어서 이를 해독하는 데는 2005년에 가능해져 2009년에 모든 판독 작업이 완료되었다. 발굴하여 판독하기까지 무려 43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된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지진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지진이라는 재해가 크게 와 닿지는 않는다.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지진을 경험한 적이 없기에 우리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하지만 지진 관련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결코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같은 주장은 각종 역사 문헌에서도 확인 할 수 있는데, ‘고려사’에서는 190여건, ‘조선왕조실록’에는 무려 2천 건이 넘는 지진기록이 실려 있다. 또한 지금 현재도 매년 평균 43회의 지진이 발생하며 그 규모가 작아서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지 우리나라는 지진이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국가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경주에서 지진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옛날 신라시대 때에는 이런 잦은 지진에 대비하여 전통 건축건물을 지을 때는 내진설계를 했었다. 첨성대에서는 ‘그렝이 공법’을, ‘불국사’에서는 결구와 돌못을 사용하여 지진에 대비하였다. 묵서지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석가탑은 지어진 이래로 한 번도 보수된 적 없는 완벽한 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석가탑이 고려시대에 보수를 되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무너질 위기에 빠지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지진이라는 사실 또한 놀랍기 그지없다. 지진과 우리나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석가탑이 붕괴될 만큼 강도 높은 지진이, 이웃나라 일본에서만 있을법한 지진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고 하니, 다시금 우리나라가 정말 지진으로 안전한 지역인가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더불어 내가 그동안 지진에 대해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방관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하게 된다. 언젠가는 지진이 크게 한번 일어날 것 같다. 일본처럼 큰 지진이 잦은 것은 아닐 테지만 그대로 지난 우리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우리는 지진으로부터 안전지대는 아니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지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석가탑이 또 다시 붕괴되는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에 따른 대비를 지금부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국보 180호, 세한도에 숨은 비밀 ‘세한도’라는 그림은 알고 있었지만 추사 김정희가 그렸다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저 막연히 국보로 지정해 놓은 그림이니, 굉장히 귀한 그림이거나 미술적으로 뛰어난 그림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그림 안에는 우리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이번 역사스페셜에서는 바로 이 ‘세한도’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를 풀고 있는데, 이 그림을 그린 추사 김정희의 일대기와 더불어 그가 세한도를 그리게 된 계기와 의도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 최고의 정치가이자 대학자이었고 예술가였다. 그는 조선 후기 양반가를 대표하는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얼 출신이었던 박제가를 스승으로 두었고 태어나 스물네 살 되던 해에 부친 김노영이 동지부사로 중국에 정기적으로 보내지는 사절단으로 사행길에 오르자 자제군관 자격으로 함께 북경에 가게 된다. 그는 거기서 그곳에서 이름난 학자인 완원과 옹방강 등에게서 금석학과 실학에 배우고 돌아온다. 당시 사행은 중국과 서양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통로로써 김정희에게는 학문을 넓히는 좋은 기회였고 인생을 전환기라 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고 돌아온다. 그의 나이 34세에는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탁월한 학문과 빼어난 집안의 배경 속에서 승승장구했다. 순조는 1827년에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위임하게 되고 외척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정희가문 가까이에 두게 된다. 하지만 갑작스레 효명세자가 죽게 되고 헌종이 즉위하자 또 다시 외척세력들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김정희가문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김정희는 1840년, 무고한 일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리기 전까지 9년간 제주도에서 유배를 지내게 된다. 세한도는 바로 이 시기,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유배를 보내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김정희는 역관이었던 이상적을 제자로 두고 있었는데, 그가 유배를 지내게 되었을 때 제자 이상적은 자신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서책과 새로운 학문을 스승인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김정희는 이를 고맙게 여겨 이상적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세한도를 그려 이상적에게 보낸다. 겨울에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항상 푸름을 알 수 있음을 이상적의 이상적인 의리에 비유하여 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는 이 시기에 부인을 잃게 되고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위리안치에 처해져 가시울타리를 두른 집안에서만 생활해야만 했다. 또한 잦은 풍토병에 시달려야했고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으며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외롭고 쓸쓸하게 유배생활을 보내해야만 했다. 더욱이 당시 그의 나이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세한도, 그림 자체만으로도 쓸쓸함이 묻어나는데 당시 김정희가 처했던 상황들을 생각하니, 세한도가 더욱 간절하고 애절하게 느껴진다. 세한도 안에서 왜 그리 허전하고 고독함이 느껴졌던 것인지 이제는 알 것도 같다. 그는 9년이라는 생활을 과연 어떻게 버텼을까. 나라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한정된 곳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 그것도 외롭게 오로지 혼자서 지내야만 하는 생활. 그가 느꼈을 외로움과 고독함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가 홀로 외로이 집안에 갇혀 살았을 상상을 해보니 괜스레 그가 안쓰럽고 불쌍하게 느껴진다.
독도 강치의 증언 - 1905년 일제의 독도 침탈 비사 백령도에 점박이물범이 산다는 것은 알았지만 독도에서도 바다사자인 강치가 살았다는 사실을 이번 영상을 보면서 처음 알았다. 독도에서 북서쪽으로 널찍한 바위가 있는데 이를 가재 바위라고 부른다. 가재는 강치의 옛말로 강치들이 이 바위에서 많이 서식한 것에 유래하여 가재 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이 바위는 천 평이 넘는 면적으로 수만 마리의 강치들이 사는 대규모 서식지였으나 지금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제의 무분별한 남획 때문에 20세기 중반 이후 강치는 완전히 멸종되어 사라지게 된다. 이번 영상에서는 궁극적으로 하고자하는 이야기는 독도와 관련된 이야기로 일제의 독도 침탈 야욕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 출발은 강치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강치는 일제의 독도침탈을 지켜본 목격자이자 희생자였다. 비록 강치들은 오늘날 사라졌지만 그 수난의 역사는 고스란히 남아 당시 일본의 독도 편입은 명백한 강탈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강치를 멸종에까지 이르게 한 장본인은 ‘나카이 요자부로’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다케시마라’는 어렵회사를 차려 일본정부의 허가를 받아 독도에서의 강치어업을 독점하였다. 강치의 가죽은 소가죽보다 질기고 튼튼하여 사치품을 만드는데 쓰였고 강치의 피하지방은 기름으로 살과 뼈는 비료로 이용했으며 어린 강치는 생포하여 서커스용으로 팔아 넘겼다. 그들은 1904년부터 독도로 들어가 매년 수천마리를 포획해갔으며 강치를 멸종에 이르게 한다. ‘나카이 요자부로’는 일본정부에 독도는 주인이 없는 섬임으로 독도에서 어업을 독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을 하면서 그 청원서에 독도를 아예 일본의 영토로 편입할 것을 요구한다. 일본 관리들은 ‘나카이 요자부로’를 이용해 명분을 만들어 러일전쟁을 틈타 은밀하게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킨다. 일본은 주인이 없던 섬, 독도에 들어가 일본어부들이 어업활동을 했기 때문에 일본의 실질적으로 독도를 지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주장의 근거가 바로 강치어업이다. 일본은 한국이 독도에 대한 존재조차 몰랐으며 어로행위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이 강치 잡이를 하기 전부터 독도에서부터 어업활동을 하고 있었다. 전라도 지방 사람들은 어업활동을 하기 위해 이미 포화상태에 있던 전라도에서 울릉도까지 올라갔고 울릉도에서 날이 좋으면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독도까지 가서 어업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여기서 ‘김윤삼’이라는 할아버지의 증언이 담긴 기사가 나오는데 이 부분을 볼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했다. 작은 뗏목을 만들어 이틀에 걸쳐 독도에 도착하여 미역과 점복을 따는 옛 조상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괜스레 마음이 짠해져 왔다. 일제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독도와 더불어 평화롭게 살고 있었고 강치들도 평화로웠다. 일제는 물질적인 것에 눈이 멀어 포획을 남발했지만 우리 조상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독도와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일본에게 독도는 소유의 대상이었다면 우리 조상들에게 독도는 삶의 터전이었다. 만약 일제의 침탈을 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불쌍한 강치들이 죄 없이 죽게 되거나 멸종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우리 조상들이 누렸을 평화로움도 오래도록 지속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