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석조전 서관5) 정관헌6) 보루각 자격루7) 흥천사종3. 참고자료1.덕수궁의 역사① 근대 이전의 덕수궁중구 정동에 있는 궁궐 덕수궁은 선조 26년 이래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 ... 의 궁핍한 국가재정 상황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608년 2월 정릉동행궁 정전(석어당 추정)에서 승하하고 만다.선조의 뒤를 이어 이 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 ... 후손의 집을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 時御所: 임금이 임시로 머물던 궁전'로 머물게 되었으며, 이것이 훗날 덕수궁(경운궁)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왕가의 집이
으로 의주로 피신했던 선조가 임시거처 로 삼음 정릉동행궁 ( 貞陵洞行宮 ) 광해군이 창덕궁을 창건하고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 경운궁 ( 慶運宮 )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인조는 경운 ... 궁의 정문을 따라 자연스럽게 궁의 동쪽으로 도시의 중심지가 형성되었다 . 덕수궁 주변 정릉동천 물길 . 현 서울시립미술관 인근에서 발원된 정릉동천이 궁궐 안의 명당수 역할을 하 ... 였다 . 현재의 서울광장을 가로질러 청계천으로 합류되었다 . 현재는 모든 물길이 복개되어 사라졌다 . 청계천 정릉동 천 중심 시가지Deoksugung Site Analysis
들은 정릉동행궁(行宮) 으로 불렸다-「선조실록」권43 선조26년 10월 1일 신사조. 상이 경사(京師)로 돌아와서 정릉동(貞陵洞)에 있는 고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다. 경운궁 ... 선조와 왕실은 정릉동 일대에 남아 있는 왕족과 고위 관료들의 사가 몇 채를 빌려 쓰지 않을 수 없었다-본래 이곳은 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가 자리잡고 있던곳이다. 그러면서 그 집 ... 과 세에는 머름 위에 세 짝의 들어열개 솟을빗꽃살창호를, 상부 역시 빗살교창을 달았다. 좌우 동측면과 서측면 어간에는 머름없이 2단의 궁판이 있는 들어열개 솟을빗꽃살창호 세 짝을 달
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림군(桂林君:瑠)의 집을 행궁에 포함시키고 궁궐 내에 있어야 할 각 관청을 처음에는 궐문 밖에 인접 ... (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 ... 3)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하였고, 창덕궁에 약 2개월간 거처하다가 그해 12월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는 창덕궁
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림군(桂林君:瑠)의 집을 행궁 ... ,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왕이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왕이 거처하게 되었다. 1608년 2월에 선조 ... 는 행궁의 침전에서 돌아가시고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에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 행궁을 경운궁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