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유교 사상
- 최초 등록일
- 2007.08.19
- 최종 저작일
- 2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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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 전기/후기의 유교사상에 대하여 적어봤습니다.
목차
1. 머릿말
2. 고려 전기의 유학
1) 고려 전기 유학의 개관
2) 고려 태조의 통치 이념과 유교
3) 최승로(崔承老)의 시무론(時務論)
2. 고려 후기의 유학
1) 고려말의 사회상과 학풍의 변천
2) 주자학의 전래와 안향(安珦)
3) 여말 유학자와 유불관(濡佛觀)
4) 여말 성리학파의 2대 조류
3.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한국 유학사에 있어서 고려 시대의 유학은 삼국 시대 유학이나 조선 시대 유학에 비하여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시대 구분을 유학 사상사에 있어서는 주자학 전개 이후와 그 이전으로 갈라서 고찰할 수 있다. 주자학의 수입 연대를 충렬왕(忠烈王:1275~1309) 때라고 한다면, 그 이전 고려 태조(太祖:918~943)로부터 원종(元宗:1260~1275)까지를 고려 전기의 유학이라고 하고, 충렬왕 이후 그 말기까지를 고려 후기의 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
2. 고려 전기의 유학
1) 고려 전기 유학의 개관
신라 말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하고 전제(田制)의 문란으로 민생이 어려웠고, 풍수·도참 사상의 성행으로 사상적으로도 매우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있어서 각 지방의 토호들은 자기의 세력을 부식하여 대립상을 나타내었으니, 북쪽 궁예(弓裔)는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자칭하였고, 남쪽의 견훤(甄萱)은 후백제(後百濟)라 일컬어서 후삼국의 분열과 갈등을 이루고 있었다.
궁예는 미륵 신앙을 혹신하고 자칭 미륵불(彌勒佛)의 출현이라 하여 혹세무민이 심하였으며, 민생을 돌보지 않고 궁실을 웅장하게 하여 사치를 극심히 하였다. 또한 처자를 살육하고 백성을 포학하게 부리어 민원(民怨)이 일어나게 되자, 궁예를 보필하던 왕건(王建)은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이른바 화가위국(化家爲國)인 것이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사상적으로 당시에 성행했던 불교·도교 및 재래의 신비적인 고신도(高神道) 내지 유교를 넓게 포섭하여 정치적 안정과 민심의 수습을 기하려 하였다. 유·불·도 3교와 재래의 고신도 사상이 교섭하고 융화되어 상호간에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던 점이 특징이다. 이 특징이 활용되는 측면은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현종(顯宗)때의 채충순(蔡忠順)의 현화사(玄化寺) 비문을 보면 불법은 마음을 경건하게 하여 복(福)과의 인연을 이루는데 있었고, 유교는 뜻을 간직하고 힘써 수행(修行)하여 정교(政敎)를 융성하게 하는데 있었다. 즉 불교는 종교적인 영역에서 평화 의식을 조장하였으며, 유교는 정치·윤리와 교육의 측면에서 그 질서와 원리를 제공하였다.
참고 자료
한국의 유교(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유승국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국사편찬위원회) / 국사편찬위원회
高麗後期 士大夫와 性理學 受容(一潮閣) / 고혜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