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어중문]문화대혁명과 해서파관
- 최초 등록일
- 2006.06.28
- 최종 저작일
- 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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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대혁명과 해서파관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해서파관』의 내용
Ⅲ.『해서파관』의 탄생에서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까지
Ⅳ.『해서파관』과 모택동
Ⅳ. 문예비판의 확대
Ⅴ. 문화대혁명의 도화선
Ⅵ. 문화대혁명 그 후
Ⅶ.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문화대혁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게 되면서『해서파관』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서파관』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공산주의와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화대혁명이라는 큰 사건의 서두를 장식하는 불씨의 역할을 한 작품이다. 국문학을 전공으로 하면서 우리나라의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을 보았는데, 문화대혁명을 알아보면서 『해서파관』이라는 것에 대해 자연히 관심이 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해서파관』이라는 작품의 내용, 문화대혁명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Ⅱ.『해서파관』의 내용
『해서파관』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명대 말기 가정황제가 포악하고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호부의 주사였던 해서가 인민의 고통을 고려하여 정사를 잘 보살펴 달라고 가정제에게 직접 상소문을 올렸다.
글 속에는 지주들이 수탈한 토지는 반드시 일반백성에게 돌려주어야 하고 군주의 전제주의적 독재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가정황제는 노하여 해서를 감옥에 가두고 사형시키려 하였는데 황제가 갑자기 죽게 되자 화를 면하게 되었다. 이후 융경황제가 등극하자 민심에 따라 해서를 사면해 주었다.
Ⅲ.『해서파관』의 탄생에서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까지
1966년 5월 중국사회와 공산당을 혁명적으로 재편성하려고 한 모택동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운동은 마침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면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어떻게 준비되었는가? 이야기는 요문원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문원은 당시 해방일보의 편집위원 겸 문예부 주임이었다. 문혁 발동 후, 강청 등과 더불어 극좌 4인방으로 악명이 놓았던 사람이다. 그가 쓴 논문은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일간지『문회보』에 게재되었고,『해방일보』에는 이틀 뒤에 실렸다. 이것이 그 후 10년간 중국대륙을 휩쓴 문화대혁명의 봉화였다.
『해서파관』은 북경의 부시장이자 명대 역사의 전문가인 오함이 1960년에 쓴 경극 가본의 제목이다. 황제가 백성을 돌보지 않는 것을 직언했기 때문에 노여움을 사서 파면, 투옥된 명나라 가정제(1507~1566)시대의 고관, 해서에 대해 쓴 글이다. 오함이 ‘해서’에 대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이러하다.
참고 자료
김학관, 「현대중국학입문」, 청목출판사, 2002
김재선, 「현대중국개혁사」, 민족문화사, 2000
변성규, 「중국문화의 이해」, 학문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