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개설]원세개 평전
- 최초 등록일
- 2005.12.04
- 최종 저작일
-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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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최고의 기회주의자였던 원세개(위안 스카이)의 일생을 돌아본다. (표지와 제목 없음)
목차
없음
본문내용
위안스카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원세개(袁世凱, 1859~1916)는 유명한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우리에게 알려진 사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군벌의 지도자였으며, 중국 현대사에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중국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우리와도 꽤 인연이 깊다. 우리나라에 화교를 퍼트린 것이 그이며, 자장면의 토대가 실은 그가 이끌고 온 중국인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또 그는 한국인 첩을 셋이나 거느린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물론 중국 근․현대사에서 더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존재이다.
그가 살았던 당시의 중국은 안으로는 계속된 민란과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계속되는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상태였다. 그는 조선을 발판으로 정치의 중심부에 진입하여, 당시 최고의 권력자이던 서태후 자희(慈禧, 1835~1908)의 신임을 얻으면서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게 된다. 결국 독재체제의 성립과 황제로서의 직위에도 앉게 된다. 끝없는 아첨과 모략, 배신, 그리고 결탁으로 이루어진 그의 인생……. 그는 중국 현대사 최고의 기회주의자였다.
1859년 하남성 항성에서 출생한 원세개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싫어하고 놀기에만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건달들과 어울리며 ‘망나니’생활을 했던 그는, 과거에도 두 번이나 실패를 하여 뇌물을 주고 벼슬을 사려는 시도도 했으나 그마저 실패했다. 겨우 삼촌의 연줄을 통해, 당시의 최고 권력자였던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의 부하인 오장경(吳長慶)의 막하에 들어갔다. 1882년 오장경을 따라 조선에 건너오게 된 그는 ‘임오군란’의 평정에 참여하였다. 그가 부임한지 2년 후인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 때에는 정변을 진압하는 데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며 삼일천하를 끝내게 하고, 당시 중국 권력의 핵심세력이었던 이홍장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때부터 1894년 귀국할 때까지 그는 ‘조선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이라는 직위로 ‘속국’ 조선의 내정에 사사건건 간섭하며 사실상의 총독행세를 하게 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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